2025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화) 복음 묵상 (마르 7,1-13) (이근상 신부)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7,1-2)
'더러운 손'이 불러일으킨 바리사이들의 혐오를 모른다면 복음의 이 대목은 이해하기 힘들다. 더러운 손을 가진 이들과 함께하는 예수, 함께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편을 드는 예수에게 '바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분노를 알 수도 없다.
더러운 손은 위생이야기가 물론 아니다. 더러운 손은 끔찍한 상태를 의미한다. 더러운 손의 대표적 예가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같은 대접에 손을 담근 자가 배반하리라 경고하였다.(마태26,23) 손이 배반의 밤에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손으로 은전 30냥을 받았고, 다시 그 손으로 그 돈을 내동댕이쳤지만, 결국 자신의 손을 씻지 못하고 죽었다. 손이 말하는 바는 삶이었다. 손이 더러운 자는 삶이 더러운 자를 뜻하였다. 빌라도는 죄없노라 선언하며 손을 씻었다.(마태27,24) 더러운 손은 더럽혀진 관계를 뜻하고 있었다. 손을 씻는다는 표현이 어찌 그들만의 전유물이겠는가 우리말에도 고스란히 그 뜻이 담겨있다.
해서 손을 씻는 행위는 거기서나 여기서나 죄스러운 관계에 대한 거절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그건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기도이고, 감사의 표현이며, 순종의 행위였다. 손을 씻지 않는 이들이 생략한 행위는 생략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건 더러운 관계를 용인하는 사태를 의미했다.
이 사태에 대해서 예수는 제자들이 손이 아니라 마음을 씻었다고 강변하지 않는다. 그는 제자들의 더러운 손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더러운 손을 손가락질하는 이들의 손을 질타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처럼 그 자신도 손을 씻지 않았다.(루카11,37-38)
문제가 더러운 손이 아니라 더러운 삶이라는 사실은 예수만이 아니라 모든이들이 다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더러운 손을 씻는 것으로 더러운 삶을 씻을 수 없다는 사실도 모두에게 자명한 일이었지만, 손을 씻을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이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손을 씻는 행위가 삶을 씻는 행위보다 훨씬 수월하였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세상과 자신을 구별하기 좋은 방법. 성전제례 관련한 정결례를 지킨 사두가이파와 구전율법(미슈나)에 따라 일상에서 정결례를 지키던 바리사이들은 이 손씻기가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가장 귀한 명찰이었을 뿐이다. 일반민중들은 이 규정들을 도무지 지키기가 몹시 힘든 환경이었으니("율법을 모르는 이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7,49) 그들만은 의로움으로 손을 그렇게 씻어댔다.
따지고보면 우리 역시 손씻기를 무진장하고 있는 셈이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손씻기로 퉁치는 일이란 얼마나 많은가. 멀리갈 것도 없다. 선한 행위를 기도로 퉁치는 습관, 딱 예수가 거부한 손씻기. 그때나 지금이나 가짜 기도를 멈추어야 진짜 기도에 배가 고플터인데...
출처: https://www.facebook.com/share/p/1E16ZyicQ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