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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8. 묵상글 (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 하느님도 이기는 방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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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8. 연중 제14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7.08 04:06
- 하느님도 이기는 방법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야곱의 얘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야곱은 이제 오랜 타향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형 에사우와의 두려운 만남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만남을 앞두고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가족과 종들을 모두 보내고
하느님과 독대하고는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합니다.
그런데 어찌나 끈질기게 덤비는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뤄 이겼다는 말과 함께 그는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항복도 얻어내고 복도 얻어내고야 맙니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도 얻게 되는데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이 이름에서 비롯되고,
그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그의 어두운 면을 얘기하자면 그는 욕심이 많고 야비하며
약점도 무척 많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목적을 이뤄내는 사람인데,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싸움도 끈질기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형 에사우도 이기고
형에게서 도망쳐 찾아갔던 외숙 라반에게 내내 핍박을 당했지만
라반의 딸들을 아내로 얻고 그들에게서 난 아들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함께 돌아감으로써 마침내 사반도 이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하느님도 이겼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무슨 뜻이고 어떻게 이겼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원하던 것을 끝내 얻어냈다는 뜻이고,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으로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형 에사우와 만나기에 앞서 하느님의 강복이 꼭 필요했습니다.
형의 적개심을 풀고 오히려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가 인간으로 해야 할 것은
다했고 그래서 이제 하느님의 강복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는 이렇게 청합니다.
“저에게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도 이래야 합니다.
원수와 맞서기 전에 이래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이래야 하고,
원수였던 자와 화해하기 위해 이래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복을 주실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제풀에 지치거나 기가 꺾이지 말고 들어주실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과부가 올바로 판결해달라고 재판관에게 청할 때 끈질기게 청하면
그가 비록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들어줄 것이고
귀찮아서라도 들어줄 것이라고 이 비유에서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불의하지 않고 정의로우시고,
귀찮아하지도 않고 기꺼이 들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철석같이 믿는 것,
그렇게 믿기에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도 이기는 방법인데 이것을 야곱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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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8. 연중 제14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전투, 영적승리
“주님의 전사, 주님의 일꾼”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17,8)
요셉수도원에 정주하기 만37년 동안, 수도원 앞 들판에 거대한 별내신도시가 들어섰지만 그린벨트 지역에 해당하는 수도원 주변의 자연은 그대로입니다. 37년 동안 늘 정주하면서 아침마다 산책할 때 마다 대하는 자연은 늘 그대로 이지만 늘 새롭고 좋습니다. 아주 예전 <아침>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아침의 자연은 늘 새롭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밤의 침묵과 휴식 때문이다
“아침을 먹었느냐?”
가 아닌,
“아침을 보았느냐?”
“아침을 들었느냐?”
인사 할 수는 없을까!
똑같은
사람, 환경, 말과 글도
살아 있으면
침묵의 밤이 있으면
늘 새로운 아침일 수 있다’<1997.8.16.>
28년 전 글이니 여기 수도원에서 47세때 쓴 시입니다. 그때의 자연은 지금도 계속됩니다만 늘 새롭고 좋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탐욕에 바탕한 개발로 자연을 훼손하는 외적변화가 아니라 끊임없는 내적변화임을, 진정한 발전은 자연과 공존과 균형, 조화의 발전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때쯤의 담쟁이를 보면 참 많이도 인용했던 <담쟁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영적전투하면 떠오르는 시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루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지금도 거기 그 자리 곳곳에 끊임없이 하늘 향해 타오르고 있는 담쟁이들은 영적전투의 빛나는 상징입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저를 매료시켰던 주제가 영적전투요 앞으로도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될 주제입니다. 평생 영적전투에 평생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가 우리 정주 수도승의 신원입니다.
물론 혼자이면서 영적전우들과의 더불어의 영적전투이기도 합니다. 싸우다 전사해야 주님의 전사요 객사나 사고사나 병사가 아니길 바라는 소망도 때로 피력하곤 했습니다. 싸움의 전투는 인간현실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젊을 때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기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기에는 병마와 싸운다고 합니다. 잡초들이 기승을 부리는 이때의 밭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영적전투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야곱입니다. 주님의 꿈쟁이이며 주님의 전사 야곱입니다. 어제 에사우를 피해 도주했던 야곱이 장인 라반의 집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둔후 식솔들을 이끌고 금의귀환하는 모습이나 에사우의 보복이 두렵고 무서워 일행들을 먼저 떠나 보낸후 하느님과 마지막 일전을 치루는 절체절명의 기도 장면입니다.
바로 밤새 하느님과 결전을 치루는 장면은 옛 교부들이 기도는 물론 영적전투의 빛나는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얼마나 치열한 하느님과의 싸움의 기도인지요! 에사우 형과의 만남이 그토록 두려웠던 것이며 주님과의 대결로 내적힘을 키우기 위한 영적전투의 기도시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다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마침내 야곱의 영적승리입니다. 하느님께 이기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이김으로 두려움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야곱의 고백과 하느님과의 치열한 밤샘기도의 영적전투에 승리한 후 떠나는 장면이 참 아름답습니다.
‘야곱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프니엘(하느님의 얼굴)’이라 하였다.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
마치 태양이 하느님께 대한 야곱의 영적승리를 축하하는 분위기입니다. 태양빛 가득 받으며 절뚝거리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걷는 하느님의 꿈쟁이요 불세출의 하느님의 싸움꾼, 주님의 전사 야곱입니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을 극찬하던 50년전 제가 27세쯤 개신교 신학강좌시 감리교 신학대 구약학 교수였던, 지금은 타계한 <민영진 목사>의 강의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따르는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꿈쟁이이자 불세출의 하느님의 전사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온갖 영적전투를 마다하지 않은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들려 말못하는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신 주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다음 착한목자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전사가 지녀야 할 마음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이 목자 없이, 길과 꿈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눈앞의 것을 좇느라 원대한 계획을 잊어버린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과 꾸준함이다.”<다산>
“서두르지 말고 작은 이익을 도모하지 마라. 서두르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좇으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논어>
착한목자 주님을 따르는 제대로의 방향에 우보천리의 자세가 절실합니다. 이어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착한 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충만케 하시어, 당신의 일꾼이자 당신의 전사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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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8. 연중 제14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8~9장 나오는 10개의 기적 이야기 중 마지막 이야기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의 치유 이야기’와 ‘추수할 일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한 이를 치유하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그냥 둘 수 없으시는 마음, 꺼져가는 불씨를 보고 마음이 상해 못 견디시는 마음입니다. 가만 두고는 차마 못 배겨나는 사랑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나신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만나는 길은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에게서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그를 못 본 척 하지 않고, 모른 척 하지 않고, 무관심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함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달리는 이들”, 그들은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고통과 슬픔, 질병과 가난, 근심과 절망으로 시달리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기가 꺾여있는 이들”, 그들은 인정해주지 않아서, 고용해주지 않아서, 거리에서 집에도 못 들어가는 기 꺾인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살아가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마태 9,38)
어쩌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꾼이 적어서가 아니라, 일꾼들이 ‘제 할 일을 안 하는 데’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가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어 우리 안에 이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굶주린 소녀,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는 이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우리가 일꾼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 가운데 바람막이로 보내셨습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에 제 마음을 심으소서.
제 마음이 그들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고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기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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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8. 연중 제14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살다 보면 누구나 문제를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를 피하고, 어떤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재미있는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마주했을 때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두 가지 결과가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거나. 그런데 또 다른 선택이 있습니다. 아예 문제를 해결하지 않기로 하는 겁니다. 그럴 경우는 결과가 하나입니다.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생 인류도 선택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초원에만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막을 건너기로 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동물들은 사막이라는 장벽 앞에서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도전을 선택했습니다. 타조알을 비워 그 안에 물을 담고, 그것을 사막에 묻으며 조금씩 전진했습니다. 그렇게 인류는 사막을 건넜고, 새로운 세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유다 지방을 넘어서 이방의 세계로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군가가 그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신처럼 될 수 있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인도까지 진군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길을 따라 로마가 길을 닦았고, 그 길을 따라 교회는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 본당도 3년 전 중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교우는 많은데 보좌 신부가 없었습니다. 영어 미사는 손님 신부님께 부탁했지만, 장기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대교구와 달라스 교구가 협의해 보좌 신부님을 파견하게 되었고, 지금 우리 본당에는 부주임 신부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이후로 영어 미사는 물론이고, 주일학교와 청년 모임도 활발해졌습니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했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곱은 하느님과 씨름합니다. 밤새워 씨름합니다. 야곱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씨름했던 사람에게 하느님은 새로운 이름, 새로운 정체성을 주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말도 전해집니다.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면 부처라도 버려야 한다.” 그것은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에게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문제가 어렵다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청하고, 함께 움직이면 하느님께서 길을 여십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명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역사이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그대로 남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문제가 사라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문제를 회피하지도 마십시오. 문제와 씨름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맡기면,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마주한 사막 앞에서 타조알 하나라도 들고 한 발짝 내딛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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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8. 연중 제14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은 적이 있나요?
하느님의 숨
2025.07.07. 18:13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7월 7일 월요일 - 스물여덟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요나와 하느님의 괴이한 자비(Jonah and God's Scandalous Mercy)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여러분만의 요나 이야기를 가지고 계십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2018년 CAC의 컨스파이어(CONSPIRE - '함께 숨을 쉰다(con-spire)'는 의미) 학술 발표회에서 바바라 홈스 박사(Dr. Barbara Holmes: 1943-2024)는 자기 개인의 "요나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자 할 때, 우리는 불순종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이 경우에 저는 요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시리아인들을 미워했고, 또 그러한 것이 이해할 만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사실 그들은 약탈을 일삼고 토지를 수탈하는 나라였고, 이스라엘에게는 현실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요나는 국가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멸망하는 꼴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그는 스페인 쪽으로 2,500마일 정도나 도망갔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멀리 도망갈 수 없을 만큼 간 것입니다. 그는 왜 도망쳤을까요? 그는 4장 끄트머리에서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자애가 크신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도망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원수들에게 재앙이 내려지는 것을 보기를 바란다면 자비로우시고 자애가 크신 하느님보다 더 기분 나쁜 상황은 없을 겁니다. 요나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 상황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바다 괴물의 배속에 갇히는 꼴이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만의 '요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저는 열 살 때부터 이십대까지 제 삶을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꿈 속에서도, 깨어있는 동안의 어떤 비전을 통해서도, 그리고 신성하신 하느님과 놀라울 정도로 조우하고 있는 순간에도,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열 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사목을 하는 여성을 본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도 그렇고, 저는 어떤 영적 자질을 지니고 영성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여성을 본 적도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무엇을 해야 했겠습니까?
어쨌든 저는 그저 계속해서 제 삶을 살았습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 낳았는데, 그 후 십년이 지난 어느 때에 다시 더 강력하게 그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하느님께서 사신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습니다. "실례하지만, 어르신," 저는 저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거든요. "이혼에 대해서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이가 둘이나 있어서 그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목사들은 돈도 못 벌잖아요! 그러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는 법학 전문 대학원에 들어갈 겁니다." [1]
시간이 좀 걸렸지만 홈스는 마침내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말씀 드렸습니다. 2021년 컨스파이어 학회에서 그는 청중들에게 봉사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마음을 열고 충실하게 응답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법학 대학원 졸업식에 때에 저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건 아니잖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학위를 받기 위해 제 옆 줄에 서 있던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나 지금 '이건 아니잖아.' 하는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 친구는 웃기 시작하면서 말하더군요. "그러게... 넌 참 많은 시간을 허비했어"... 그렇게 제 귀에 속삭이는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도 저는 제가 하던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제 삶에 이미 씨앗으로 뿌려진 새로움의 벼랑 끝으로 저를 이끌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 신뢰심을 두시고, 모든 진리로 여러분을 이끌어가시는 성령께 신뢰심을 두십시오. 부르심을 받은 대로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십시오. 이런 지향을 하느님께 아뢰시고 성령께서 여러분을 이끌어가셔서 여러분 성소를 성취시켜 주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무언가가 공기 중에 있습니다. 기후가 변하고 있습니다. 폭풍이 더 거세졌지만 하늘은 더 아름답습니다. 나무는 시들고 있는데, 제가 본 적이 없는 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이 변한 걸까요? 아니면 제 눈이 변한 걸까요? 물 한 잔조차 아름답게 보입니다. 제 친구들인 이 자연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의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말할 뿐입니다.
—Cindy G.
References
[1] Adapted from Barbara Holmes, “Crisis Contemplation,” CONSPIRE 2018,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conference talk. Unavailable.
[2] Adapted from Barbara Holmes, “Friday Q and R with Kirsten Oates,” CONSPIRE 2021,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conference talk.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ong Marshes, untitled (detail), 2017,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물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당황하여 발버둥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물 위로 끌어올려 주시는 하느님 자비의 부드러운 햇볕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우리 마음이 완고해진 것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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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의해 사랑으로 변모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숨
2025.07.08. 05:52
어제 [요나 이야기]에 관한 CAC 매일 묵상에서 제 마음 깊이 울린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이 부분에 잠깐 머물렀던 적이 있었지만 잊어버렸다가 어제 CAC 매일 묵상을 통해 이 내용이 다시 한번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요나가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쳤던 이유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고 자애가 크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서 4장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까요?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 혹은 더 심하게 표현해서 우리의 적들이 축복을 받는 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나쁘다고 규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대개 하느님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이 완전한 선이요 사랑이길 바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고 말씀하시는 대로 이토록 무한한 선이신 하느님을 원하면서도 우리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까지 축복이 내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 모순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선과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원론적 정신 구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분명한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사랑을 정말 자유롭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 사랑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햇볕을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기는 하시더라도 그것을 받고 안 받고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억지로 그 사랑을 받게끔 하여 그 사람이 사랑이 되게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지요?! 강요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우스운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 꾸며낸 이야기이겠지만요....
어느 자그만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에는 술집도 하나도 없었고 사람들도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업가들이 그 마을에 매력적인 술집 하나를 세우기로 하였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개발이 마을에 문제를 가져올 것이라고 걱정하며, 어느 날 하느님의 중재를 청하는 밤샘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술집 건축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개장을 일 주일 앞에 두고 있을 때 그 술집에 벼락이 쳐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답니다.
사업가들은 화가 잔뜩 나서 그 기도 모임을 상대로 법정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건물이 전소하게 된 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 사람들이 궁극적으로는 건물을 무너뜨린 범인들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직접적으로 그랬든, 간접적인 다른 수단을 써서 그랬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는 일단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이 술집 주인들은 기도의 힘을 정말로 믿는데, 저 기도 모임 사람들은 기도의 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것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우리 삶의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대개 '미워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참으로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어 우리가 미워하지 않게 해 주시고 참으로 사랑하게 해 주실 때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요!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거든요. '미워할 만한 이유', '참으로 사랑하지 못할 만한 이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아무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시선을 미움에서 사랑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느님께 이런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힘에 의해 변화 혹은 변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의해 사랑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감수하고 내려놓아야 할 손해가 크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데, 그 반응이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그 놀라운 힘에 경탄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즉 예수님께서 '마귀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바리사이들)입니다.
바리사이란 말은, 다 아시다시피, "분리된 자", 즉 다른 이들과는 "다른 자"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결정적으로 '이원론적 정신 구조'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즉 이들의 하느님은 잘못한 이들을 벌 주시고 잘한 이들에게는 상을 주시는 하느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햇볕을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예수님의 하느님"과는 다른 하느님을 그들은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은, 큰 세상이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그만 세상이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당신 사랑을 받아 사랑으로 변모해가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둠에서 벗어나도록 당신 빛을 내려 주시고, 당신 안에서 자라나도록 비를 촉촉히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사랑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든 불의하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가끔 기도하면서 제 시선을 하느님 사랑의 시선으로 바꾸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에고의 지배 아래 사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뭔가 모순이 있는데....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정 안에서 주님께서는 제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서서히 차근차근 제 시선을 변화시켜 주신다 사실을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이 진리를 확신 있게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당신 성령으로 이끌어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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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8. 연중 제14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마태 9,32)
말못하는 이의 혀가 풀리다
그리스어로 ‘코포스’kophos는 벙어리보다는 귀머거리를 가리키는 말로 더 지주 사용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벙어리와 귀머거리를 구별하지 않고 다 ‘코포스’라고 표현합니다. 영적으로 풀이하면, 눈먼 사람들이 빛을 받듯이, 말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한때 그가 거부했던 분께 영광을 바칠 수 있도록 혀가 풀립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열매 맺음에 대해 말하는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영의 열매라는 개념을 가지고 놀이를 한다. 그가 말하는 영의 열매는 기쁨, 젊음, 영원, 그리고 단순성이다. 그는 요한 복음에 약속되어 있는 기쁨, 곧 신적인 기쁨을 약속한다. 이 기쁨은 자신 안에 있을 때만큼이나 모든 기쁨과 모든 영예 속에서 푸릇푸릇하고 꽃을 활짝 피우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로 오는 기쁨이다.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다: 이토록 기쁨과 환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며,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러하기에 그 기쁨에 대해서는 누구도 충분히 말할 수 없다. 이 기쁨은 고통을 이긴다. 그 사람의 기쁨은 너무나 커서, 모든 고통과 가난도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부정의 길의 절정은 기쁨이다. 쉬르만은 엑카르트가 제시하는 길을 일컬어 “돌아다니는 기쁨”의 길. 방랑하는 기쁨의 길이라고 부른다. 그 기쁨은 땅에서 시작된 하늘의 기쁨, 실현된 종말론의 기쁨. 이미 시작된 메시아 시대의 기쁨이다. 그러한 사람은 “기쁨 속에서 살게 마련이다.”(420)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VI.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의 이미지
두 번째 묵상: 광선, 불꽃, 가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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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8. 연중 제14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 성당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종종 아이들이 편지를 건네줍니다. 맞춤법도 엉망이고 글씨도 삐뚤삐뚤입니다. 내용도 별것 없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보면 저절로 아빠 미소가 생깁니다. 또 제게 다가와서 크고 작은 일을 일러바치듯 이야기하는 아이도 많습니다. 그만큼 저를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구나!’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이들이 더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어른들이 종종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이 미사 때 너무 떠들지 않냐고, 너무 버릇없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아이답게 열심히 미사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되고, 아이들 수준에 맞게 예의 바르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실수해야 아이다운 것 같고, 그 실수를 보면 괜히 미소가 나오게 됩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 그것도 순수하고 맑은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이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나를 낮춰야만 사랑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옛날 약장수들이 말하곤 했던 “애들은 가라.”라면서 거리를 뒀다면 절대로 사랑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랑을 전해야 나 역시 사랑받을 확률이 올라갑니다. 특히 이 사랑은 전염성이 강하기에 자기가 받은 사랑을 남에게 전달했을 때 그 파급효과는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활동을 복음에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복음에서 말 못 한다는 것은 의학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업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을 쫓아내는 크신 권능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참조). 이 표현을 희랍어 원문에서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를 쓰는데, 이는 내장이 끊어질 듯한 극진한 자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으로 악의 세력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신 것입니다.
악의 세력을 쫓아내는 경우를 본 적 없는 군중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 9,34)라고 말하면서 비난합니다. 누구는 깜짝 놀라지만, 똑같은 결과를 보고서 비난합니다. 군중은 구원 활동을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 것이고, 바리사이는 질투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바리사이는 그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계속 주어지는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불평불만으로 그 사랑을 왜곡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랑 없는 삶은 결국 행복하지 못한 삶을 만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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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존 러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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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8. 연중 제14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추수할 일꾼의 역할은 행복 전도사
박윤식 [big-llight] 250707. 19:44 ㅣNo.183301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치셨다.
군중을 보시고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기가 꺾여 있었기에.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가서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최근 들어 신앙생활을 멀리하는 교우가 많아졌단다.
신앙이 짐스럽고 또 귀찮게 느껴지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때로는 있을 게다.
‘저 이는 진짜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는구나.
저 가정에는 정말 하느님의 보호가 있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게 많아져야 한다.
그들이 진정한 이 시대의 ‘주님의 일꾼’이니까.
누가 뭐래도 믿음의 본질은 기쁨이다.
우리는 참 행복을 얻으려 주님께로 나아간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전혀 기쁨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건 문제이다.
사실 신앙이란 하느님을 무엇보다 밝고 기쁜 마음으로 찾고 가까이하는 거다.
그렇게 그분은 삶의 행복을 알리시려고 우리를 가까이 부르셨다.
그러므로 그분 은총에서 보람 찾는 신앙인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늘 힘 있는 선교도 일상에서의 삶에서 기꺼이 기쁨을 찾을 수 있을 게다.
보면서도 믿으려하지 않기에, 하느님과 이웃과도 소통할 줄 모르는 기쁨을 잃은 이들이다.
예수님께서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단다.
가엾은 마음은 상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며 공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출발점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소통하시고 공감하시려고 오셨다.
그리고 더 많은 이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우리 모두에게 ‘추수할 일꾼’이 되라신다.
정말 일할 곳은 많은데 추수할 이가 부족하다는 예수님의 아쉬움을 듣는다.
그 일꾼은 그분 사랑을 널리 알려야 할 게다.
어쩜 두 가지 상반된 시각 중 올바른 것을 가려내는 건 참으로 어려울 게다.
예수님께서 말 못하는 이의 마귀를 쫓아내시자, 그가 말을 하였다.
말문이 터져 이제는 생각과 느낌을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단다.
이건 분명 기적이었고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일에 경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를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린 일이라고 모함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신다.
그러면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음을 보신다.
마치 야뽁 건널목을 건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야곱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격려하고 보살필 일꾼들을 보내 달라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그게 쉬운 것 같지만 결코 간단치 않으리라.
일생 단 한명만이라도 주님께 인도해도 대단한 일이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기쁘게 살기를 바라신다.
현세에서 기쁘게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기 힘들 것이란다.
기쁘게 살면서 다른 이도 그렇게 살게 하는 게 정녕 주님 일꾼의 역할이다.
그렇지만 방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끔 신심 깊은 이가 엉뚱하게 휘말려 교회를 멀리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예수님시대의 지도자들은 율법으로 그 백성을 묶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율법만이 믿음의 족쇄가 아니라신다.
우리는 강요가 아닌 자유 의지로 그분의 참 일꾼이 되었다.
우리들 삶에서의 기쁨으로 행복 나누는 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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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8. 연중 제14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영성심리를 공부하신 수녀님과 나눈 소중한 영적 자산 나눔 1편
강만연 [fisherpeter] 250707. 15:10 ㅣNo.183299
조금 전에 어렵게 부탁드려서 한 수녀님을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오전 9시에 만나 세 시간 가량 찻집에서 대화를 나눈 후에 식사하고 헤어졌습니다. 사실 외국에 계셨고 메일로만 최근까지 연락을 주고 받았습니다. 실제 한국에 입국하신 건 한 달 전이었습니다. 오늘 만난 분은 제가 여러 차례 언급해드렸던 수녀님이신데 입국해 부산에 계신 어떤 수녀님을 만나셔야 되는데 이왕 왔으니 마산이 부산과 가까운 거리라 저에게 소식을 주셨던 것입니다. 한 번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아서 제가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까지 수녀님을 만나게 되면 어떤 걸 여쭤봐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 세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지만 이 세 시간을 위해 소중한 영적 자산을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메모를 하며 질문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준비를 치밀하게 해서 그랬는지 일단 질문 7개를 다 소화했습니다. 수녀님도 사전에 제가 어떤 질문을 할지는 구체제인 상황은 추측할 수 없었지만 그간 주고받은 메일에서 대충 어느 정도 제 성향을 파악하셨는지 오늘 제가 드린 질문에 특별히 준비를 하시지 않아도 나름 어느 정도는 답변을 해 주실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 질문만은 50프로 답변만 해 주셨고 로마에 가셔서 다른 연구원들과 좀 더 함께 고민을 해보신 후에 나중에 메일로 답변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수녀님께서도 사실 시간이 촉박하신데 저를 만나보고 싶었던 이유가 실제 어떤 느낌의 형제인지도 사실 무척 궁금하기도 했고 또 무엇보다도 사실 제가 그동안 수녀님께 드린 영성심리에 관한 질문 때문에 수녀님께서도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만 생각했던 문제를 현실에서 어떻게 이걸 적용해야 할지를 고민해본 게 수녀님께도 실제 영적으로 유익했다고 저에게 일부분은 감사한 부분도 있다고 하셔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질문은 7개였지만 그 내용 자체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겠습니다. 수녀님께서도 제가 굿뉴스에 글을 올리는 걸 아시기 때문에 사전에 약간 주의를 주셨습니다. 오늘 만나서 형제님이 나눈 이야기를 혹여 굿뉴스에 오픈하더라도 너무 생생하게는 전달하지 말고 약간 포괄적으로 전해줬으면 한다고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분명히 수녀님께서 제가 수녀님과 만난 후에 이런 내용을 분명히 올릴 거라고 확신을 하시더군요. 이와 관련해서 수녀님께서 저의 심리적인 성향을 이미 어느 정도는 다 파악하고 계셨던 것 같아 한편으로는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느낀 게 있습니다. 일반 심리학만 공부하신 분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느꼈고 또 한 가지는 확실히 학문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셔서 그런지 설명 자체가 마치 수학 공식처럼 논리 전개가 분명해서 이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몇 차례 나누어서 수녀님과 나눈 이야기에 대한 답변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제일 먼저 신앙생활하면서 인간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단순히 몇 시간 잠시 이야기해서 나올 수 있는 답변은 아니지만 제가 오늘 드린 질문은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구체적으로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 질문드렸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최대한 간결하게 선명하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수녀님께서 이 질문에 먼저 어떤 전제를 하나 하시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신앙은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사람이라고 하면 보통 성직자, 수도자, 일반 평신도든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마치 교과서적인 답변입니다. 마치 우수한 성적으로 수석한 사람이 인터뷰 때 교과서 위주로 철저히 공부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식상한 프레임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신앙은 하느님과 나와 일대일 관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실제 맞는 부분도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고 또 이 말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반은 맞다고 했을 때 그 반에 대한 부분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은 어느 경우에나 맞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자신의 존재를 하느님과 묶어서 어떤 외부적인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게 하려는 하나의 자기 방어와 보호막으로 작용하게 하기 위한 심리적인 방어기제로서 역할을 할 때는 맞는 말이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만약 이런 의식으로만 갖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자신은 모르지만 자신의 영혼에 마치 좀벌레가 뭔가를 갉아먹는 것처럼 영혼이 피폐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면 그런 사람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일단 그런 의식이 지배하게 되면 인간 본연 속에 있는 본능이 먼저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좀 더 쉽게 이런 예로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쉽고 명백한 사례라고 하셨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함께 고립이 된 것입니다.
이건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똑같은 상황은 아닙니다. 고립이 됐는데 생존할 수 있는 선택권이 하나만 있는 경우입니다. 이 말은 둘 다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한 명만 살 수 있는 경우라는 것입니다. 이때 만약 두 사람이 다 신앙인이라는 전제를 했을 때, 만약 평소에 신앙은 하느님과 나와 일대일이라는 의식이 지배적인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모습을 취할지 이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는 이성적인 사고를 배제하고서도 신앙인이라는 정체성도 실제 발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생각해야 되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두 사람 모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는 별로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는 인간은 먼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 싶은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선택을 한다고 해도 비난을 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예에서 믿는 사람이라는 신앙의 기준에서 한번 보겠습니다.
무신앙인은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원래 정상적인 신앙인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자기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인이라면 일단 위기에서 같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게 기본적인 자세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근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인데 서두에 언급한 사람처럼 신앙은 나와 하느님과 일대일인 신앙이 중요하다고 하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는 마음이 나올 확률이 거의 없다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근데 평소 신앙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일차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주변과의 관계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실제 자기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인식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먼저 자기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전자의 경우처럼 일단 자기 생명이 먼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자기의 생명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명확한 답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이런 장구한 설명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질문에서처럼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흔들지지 않으려고 그런 일대일에 중점을 두지만 넓은 시각에서 보면 신앙과 믿음의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게 신앙을 가지고는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보다도 더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는 사람도 세상에 있기 때문에 이런 기준에서 이 사안을 바라본다면 과연 하느님께서는 만약 구원과는 별론으로 하고 과연 어떤 사람에게 더 좋은 평가를 하시겠는가를 한번 생각해보면 이 질문 전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일단 수녀님께서 제시하신 모범 답안입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비신앙인의 삶을 더 훌륭하게 평가를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만약 하게 된다면 엄청난 성경 지식과 신학을 설명해야 되기 때문에 그건 생략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한다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했을 때 신앙인은 단순히 하느님을 믿는다는 그 외형만큼 그 모습에 부응하지 않으면 단순히 세례만 받았다고 해서 신앙인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평가를 한다면 그게 과연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라는 역질문으로 답을 주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올려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신앙에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긴 글 읽으신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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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개인적인 묵상 정리
강만연 [fisherpeter] 250707. 17:47 ㅣNo.183300
참으로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주제입니다. 오늘 글에서는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주변과의 인간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 게 있는데 이것도 완벽하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통용되는 사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대상이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긴 두는데 그 거리를 잘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1미터의 간격을 유지하면 크게 문제가 없을 텐데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 1미터가 최적의 거리라면 그 거리 안으로 만약 어떤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어떤 경우는 쉽게 말해 신앙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인 인간관계로 인해 신앙을 접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신앙이 식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원론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약간은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자신에게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긴 맺더라도 다른 건 몰라도 그 관계 때문에 힘든 상황도 일어날 수 있는 경우가 많이 일어날 수 있다면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의도적이라고 하더라도 상대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선 안에서 어느 일정 거리 이상 관계를 가까이 하지 않고도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게 거리를 두면서 기본적인 관계만 유지하는 게 신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제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이런 점 때문에 힘들었던 게 있다면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혹여라도 나쁜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고 쉽게 표현해 최대한 상대방이 요구하는 걸 다 수용하려다보니 그 속에서 힘든 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녀님께서도 우리는 이럴 때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분량만큼 소화를 해야지 그저 신앙인은 어떤 경우에도 마치 그것도 하나의 십자가로 퉁치면서 그걸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게 설사 자신이 받아들인다고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견딘다고 해도 어느 임계점을 넘어가면 그땐 자칫 신앙을 포기하는 것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등질 위험도 있다고 하기 때문에 이럴 때 우리는 무조건 그런 유사한 상황을 그냥 십자가로 인식하거나 또는 십자가라고 누가 인식을 하게끔 한다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냉정하게 자기의 능력만큼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잘 발휘해야 위기가 와도 슬기롭게 잘 대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럴 때 이런 걸 슬기롭게 해결하려고 누군가에게 신앙 상담이나 아니면 영적으로 지도해 줄 수 있는 분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중요한데 그보다도 먼저 자신이 평소 항상 영적으로 잘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하면서 생활하려고 노력해야 그런 것도 잘 식별할 수 있는 거지 단순히 상담으로만 해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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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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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툭.툭.툭 -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서하 [nansimba] 2025-07-07 ㅣNo.183304
연중 제14 주간 화요일
“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마태 9,35)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은 가만히 머물러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루 다니시며 치유와 기적을 행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 당시에도 종교 지도자들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찾으시는 '일꾼'은 단순히 종교적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는 데만 몰두했고,
상처 받은 이들을 외면하고, 체면과 율법만을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진짜 일꾼,
상처 입은 존재를 다시 살리고,
억눌린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꾼을 찾으십니다.
존재의 현장을 찾아가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존재가 상처받고, 외면당하며, 숨죽이고 살아가는 그 자리로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병이란, 단순히 육체의 아픔을 넘어
그 사람의 존재 전체가 왜곡되고 상처 입은 상태를 보여줍니다.
말못하는 이, 중풍병자, 나병환자, 눈먼 이들...
이 모두는 사회로부터 분리되고,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표현하거나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의 '말못하는 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들은 말못하고 억눌린 마음을
방구석에 틀어 앉아 PC 게임으로 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는 청소년,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현장에 찾아가,
이들의 존재를 원래 자리로, 원래의 관계로,
원래의 자기됨으로 돌려놓을 일꾼이 필요합니다.
오늘 내 주변이 '말 못하는 이', 상처 입은 존재를 발견하고 있습니까?
그저 안부를 묻는 작은 관심, 말 걸어주는 용기,
그것이 하늘 나라를 여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치유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
나는 '왜 예수님은 그렇게 치유를 많이 하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좋은 일'을 하러 다닌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즉 온전한 존재의 회복, 평화, 관계의 회복을
이 땅에서 실현하느라 여기저기 두루 다니셨던 것입니다.
병이 나았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이고,
소외된 이들이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이며,
침묵당한 이가 다시 말을 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나라의 징표이기에,
예수님은 멈추지 않고 계속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우리 곁에서, 우리를 통해 치유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일꾼을 청하라고 간곡히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존재가 존중받고, 상처가 고백되고, 관계가 회복되는 그 순간,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진짜 일꾼은 상처 입은 존재를 다시 일으키는 사람
존재영성의 눈으로 보면,
참된 일꾼은 단순히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존재를 다시 살아나게 하고,
말을 잃은 이들이 다시 말하게 하고,
지친 이들이 제 존재의 빛을 회복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런 일꾼을 주님은 오늘도 부르십니다.
먼저, 내가 그 치유를 받아야,
비로소 다른 이를 살릴 수 있기에 오늘 나의 상처를 마주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먼저 내 존재를 일으켜 세워봅니다.
주님,
저를 먼저 치유해 주소서.
주님 앞에 서면,
나도 어느새 말을 잃고,
존재가 위축된 채 살아온 날들이 떠오릅니다.
나도 '말 못하던 사람'처럼,
진짜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세상의 눈치와 두려움에 침묵하며 살아온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셨던 것처럼
내 안의 닫힌 존재, 상처 입은 부분, 억눌린 자아를
주님 앞에 드리고 싶습니다.
나도 치유받아,
다시 말하고, 다시 살아 숨 쉬며,
다른 이의 존재를 일으키는 일꾼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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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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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9,32-3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우리는 하루 중에 알게 모르게 대략 30번 내외의 불평 불만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고 합니다.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그런 말을 내뱉는만큼 부정적인 상황을 바꿔보려고 자신부터 노력하면 참 좋겠는데, 대부분의 경우 불평 불만을 내뱉는 모습에는 지금 상황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남 탓, 상황 탓을 하며 자신은 뒷짐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된 데에는 분명 내 탓도 어느 정도 있을텐데, 그렇게 만든 자기 행동을 반성하지도 않고 그 행동이 초래한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 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려면 불평 말고 ‘반성’을 해야 합니다. 남 탓 말고 자기가 먼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마귀에 사로잡혀 고생하던 형제가 그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와 평화를 얻었다면, 그와 함께 기뻐해야, 그에게 그런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라는 낙인을 찍어 모함하고 비난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귀에 들려 고생하던 형제를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신은 마귀의 힘 같은 건 빌리지 않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심판하고 단죄할 명분까지 얻게 되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무나도 비분강개한 상황임에도 그들에게 굳이 맞대응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 중요한 것은 본인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는’ 군중들을 돌보고 보살피려면 일 분 일 초의 시간도 허투루 쓰실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고된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게 하려면 하셔야 할 일이 많은데, 그런 주님의 사명을 자기 일처럼 여기며 그 ‘책임’도 함께 지려는 참된 ‘일꾼’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평 불만을 늘어놓을 시간에, 남을 비난하고 탓할 시간에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은 일꾼이 될 자신이 없다면, 최소한 일꾼을 보내달라고 하느님께 청하기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일꾼이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뒷담화하지 말고 그가 자기 소명을 다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가득차 있으면 상대방의 고통이 보이고, 내 마음에 욕심이 가득차 있으면 상대방의 잘못과 허물이 보이는 법입니다. 지금 내 눈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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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78
7월8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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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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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예수회 김동일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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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착한 목자 한 분의 선한 영향력으로 인해...>
감사하게도 아직도 이곳 저곳 초대해주시는 곳이 있어 특강을 자주 다니는 편입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앞에서 한 말씀 한다는 것, 큰 부담이지만, 좋은 체험도 많이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행복한 체험은 자나 깨나 양들 생각으로 가득한 착한 목자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고통과 시련으로 상처받고 기가 꺾인 교우들을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목자, 그분 한 분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양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자주 확인하며, 흐뭇해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가까이 내려가서 자세히 바라보면 얼마나 서글프고 끔찍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때로 피부로 와 닿는 현실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그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끝도 없는 방황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심연의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 있고 예의 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착한 목자, 그래서 결국 양들을 위해 자신을 하루하루 소멸시키는 착한 목자가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양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들을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이제 막 수도생활을 시작한 지원자, 청원자, 수련자 수녀님들의 집중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러 수녀회를 합쳤는데도, 겨우 스무 명입니다. 70년, 80년대 수도 성소의 황금기 시절, 큰 수녀회 같은 경우 한 해 입회자만 서른 명, 마흔 명이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참으로 초라한 숫자입니다.
그래도 스무 명이라도 있는 게 어딥니까? 애기 수녀님들 한명 한명이 너무나 소중하고 대견스러워 보입니다. 뭐라도 한 마디 더해주려고 하다 보니 말이 길어집니다. 이런저런 당부 사항도 늘어납니다.
목전에 다가온 우리 한국 교회의 사제 수도자 성소 급감 현상 앞에서 걱정도 많지만, 지나치게 우울감에 빠져들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언제 어떻게 불어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때로 한쪽 문을 닫으시지만, 인내롭게 기다리면 슬그머니 다른 문 하나를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걱정과 근심보다는 인내 속에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를 위해 일할 좋은 일꾼들을 많이 보내주시도록 기도하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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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언젠가 주님께서 우리의 굳어진 혀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유학 초기 때의 일이었습니다. 서너 달이나 되는 긴 첫번째 여름방학 기간을 맞이했습니다. 사목 체험도 할 겸, 제대로 된 현지 언어도 배울 겸, 야심차게 한 시골 본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본당 신자들의 배려로 참 행복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유치원 수준의 언어로 겨우 미사 집전 정도만 하는 저를 측은히 여긴 신자들께서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다만 크게 괴로웠던 일 한 가지는, 밤이면 밤마다 거듭된 저녁식사 초대였습니다. 뭐 대단한 만찬이 준비된 초대는 아니었습니다. 소박한 스파게티 한 접시나 피자 한판 두고,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정담을 나누는 소박한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이런저런 긴 대화는 정말 괴로웠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남한에서 왔냐? 북한에서 왔냐?” “요즘 북한 상황은 어떠냐?” 등등,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관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다 더 이상 깊은 대화가 안된다는 것을 파악하고 난 후부터는, 그저 꿔다논 보리 자루가 되고 맙니다. 뭔지도 모르는 길고 긴 말잔치 앞에 저는 그저 희미한 미소만 짓고 앉아 있었습니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노랫가사가 딱 제 처지였습니다.
당시 제가 느꼈던 소외감은 참으로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이지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언어가 되야 서로의 진심을 들여다볼 수 있고, 언어가 되야 상대방의 철학과 인생관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와 소통이 안되는 그는 그저 머나먼 존재,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게 되더군요.
따지고 보니 언어라는 것,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정말이지 대단한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언어는 한 인간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희로애락을 나누고 사랑과 우정을 쌓아갑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언어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 잊지 못할 추억담들을 나누며, 웃고 우는데, 나만 거기 끼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오랜 고독과 소외감 속에 살아온 말못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각별했던 예수님 눈에 그 가련한 존재는 즉시 가장 특별한 존재, VIP, 우선적 선택의 대상으로 다가왔습니다.
은혜롭게도 말못하던 사람은 뜨거운 주님 사랑에 힘입어 즉각적인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설마했었는데,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내 삶이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고 배척된 영원한 이방인이요 왕따로 살다 끝나려니..’ 했었는데, 자비하신 주님의 자상한 손길에 힘입어 새 살, 새 인생을 찾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말 못하는 이처럼 살아갑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눌러참아야만 합니다. 목구멍까지 어떤 단어가 올라오지만, 애써 도로 내려보내야만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 다들 내 등뒤에서 수근거립니다. 앞에서는 환한 미소 짓지만 돌아서서 낄낄대며 인정사정없이 깎아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가련한 우리들 인생에 밀착동반하시니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의 굳어진 혀를 풀어주시고, 용기와 지혜를 더해주시어, 진정으로 해야할 말을 편안히 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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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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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힘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군중은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일이 일찍이 나타난 적이 없다.”라며 경탄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저자는 마귀들의 우두머리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비난합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사탄은 능력을 가질 수 없다.”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까지 유혹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사탄의 힘을 빌려 예언이나 주술적 능력을 발휘하는 무당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능력이 아닌가?’라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파괴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세상은 파괴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지고 늙고 병들고 죽게 만듭니다. 반대로 세우는 게 능력입니다. 새롭게 짓고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것이 능력입니다.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모기가 피를 빠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기는 했지만, 모기에게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의 비판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고장난 부분을 고쳐주거나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말 못하는 이를 말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질문이 우리에게 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처럼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1980년 5월, 서울의 택시기사 김만섭(영화 속 이름, 실존인물 김사복)은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밀린 월세를 내고 어린 딸을 잘 키우는 것이었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거창한 신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광주행을 결심한 것도, 통금 전에 돌아오면 10만 원이라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보면 ‘공부나 할 것이지’ 혀를 차던,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었습니다.
광주에 들어선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은 처음엔 그저 ‘혼란’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손님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약속한 돈을 받아 서울로 돌아가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 그의 마음에, 광주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도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와 그에게 주먹밥을 건네던 시민들, 부상당한 친구를 업고 절규하던 대학생,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 택시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아픔은 곧 그의 아픔이 되었고, 그들의 절규는 그의 절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연민의 마음’이 싹튼 순간, 돈 10만 원이 세상의 전부였던 소시민 김만섭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이 진실을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한 인간이 서 있었습니다. 그 연민은 이전에는 결코 가져본 적 없는 ‘용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군인들의 총구가 자신을 겨누는 상황에서도 그는 기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길을 피해 돌아갈 ‘지혜’가 생겼고, 자신의 생계 수단인 택시가 부서지는 것을 감수할 ‘희생정신’이 생겨났습니다. 그의 택시는 더 이상 돈벌이 수단이 아닌, 진실을 싣고 역사를 가로지르는 ‘기적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김사복 씨의 이야기는 증명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인 ‘연민’이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 우리 역시 상상도 못 했던 용기와 지혜를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소위 ‘돈쭐’과 연결됩니다. 돈으로 혼내준다는 뜻입니다. 이런 가게 대부분은 자비를 베푼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능력이 전달되고 그 능력으로 다른 이들을 더 돕습니다. 이런 일이 선순환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들을 두려움으로 죄짓고 파괴하려는 사탄의 유혹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탄을 이기는 힘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버려진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연민의 마음,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사랑의 마음이 하느님 능력의 원천입니다. 능력은 마음 다음에 옵니다. 마음이 능력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마음, 이 연민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자라날 수 있을까요? 꽃을 키워본 사람은 모든 꽃을 사랑합니다. 자녀를 키워본 어머니는 다른 자녀들에 대한 연민도 가지게 됩니다. 연민은 바로 내가 작은 목자가 되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새로 탄생시키는 일을 할 때 길러집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먼저 농사의 일을 해 보아야 곡식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거둬들이지 않아 말라가고 썩어가는 곡식으로 보일 때 연민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처음 이집트에서 동족의 고통에 반응했을 때, 그의 손에는 기적의 지팡이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집트 왕자로서의 혈기와 분노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보고 의분에 차 주먹을 날렸지만, 그 결과는 동족의 외면과 미디안 광야로의 도피였습니다. 그 후 40년, 광야에서의 세월은 모세에게 ‘연민의 마음’을 훈련시키는 하느님의 시간이었습니다. 양들이 쉴 만한 풀밭과 마실 물을 찾아 광야를 헤맸고, 맹수들로부터 양들을 지키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렇게 그의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당신 스스로를 “내 백성의 고통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출애굽 3,7)라고 소개하시며, 당신의 ‘목자 된 마음’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과 같은 마음을 품게 된 모세에게, 비로소 세상을 구원할 ‘힘’, 곧 기적의 지팡이를 맡기셨습니다.
사탄이 능력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해본 적이 없기에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고, 마음이 능력을 담는 그릇이기에 능력이 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능력이 없다고 먼저 말하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종종 ‘힘이 없어서, 가진 게 없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과 두 예화는 우리에게 순서가 틀렸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능력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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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살다 보면 누구나 문제를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를 피하고, 어떤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재미있는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마주했을 때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두 가지 결과가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거나. 그런데 또 다른 선택이 있습니다. 아예 문제를 해결하지 않기로 하는 겁니다. 그럴 경우는 결과가 하나입니다.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생 인류도 선택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초원에만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막을 건너기로 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동물들은 사막이라는 장벽 앞에서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도전을 선택했습니다. 타조알을 비워 그 안에 물을 담고, 그것을 사막에 묻으며 조금씩 전진했습니다. 그렇게 인류는 사막을 건넜고, 새로운 세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유다 지방을 넘어서 이방의 세계로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군가가 그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신처럼 될 수 있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인도까지 진군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길을 따라 로마가 길을 닦았고, 그 길을 따라 교회는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 본당도 3년 전 중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교우는 많은데 보좌 신부가 없었습니다. 영어 미사는 손님 신부님께 부탁했지만, 장기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대교구와 달라스 교구가 협의해 보좌 신부님을 파견하게 되었고, 지금 우리 본당에는 부주임 신부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이후로 영어 미사는 물론이고, 주일학교와 청년 모임도 활발해졌습니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했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곱은 하느님과 씨름합니다. 밤새워 씨름합니다. 야곱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씨름했던 사람에게 하느님은 새로운 이름, 새로운 정체성을 주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말도 전해집니다.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면 부처라도 버려야 한다.” 그것은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에게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문제가 어렵다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청하고, 함께 움직이면 하느님께서 길을 여십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명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역사이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그대로 남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문제가 사라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문제를 회피하지도 마십시오. 문제와 씨름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맡기면,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마주한 사막 앞에서 타조알 하나라도 들고 한 발짝 내딛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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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를 8장과 9장에 모아 두었는데, 그 끝자락에 자리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치유 활동을 요약하고 수확할 밭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10장의 파견 설교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사람들은 놀라워하고 경탄하기도 하고, 이제까지 백성들에게 존경받던 바리사이들은 질투로 중상과 비난과 적대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나요? 보통 나를 반기는 사람들과는 같이 있고 싶어 하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더 인기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피하고 싶고 똑같이 비난으로 대응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나요? 그분께서는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곧 당신을 반기고 환호하는 곳이라 해도 계속 머무시지 않았고, 당신을 거부하는 곳에도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무엇이 다를까요?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9,37).
연민은 나를 떠나 상대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매이시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신에게서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명, 곧 영혼들의 구원, 아버지의 일이라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늘 자신을 뛰어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사명이라는 목적의식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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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32-3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사람들은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는 말을 못 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장애를 해결해 주셨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 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33절)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33절) 군중이 이렇게 놀라워하니까,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3절) 비방한다. 그들은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며 예수님을 헐뜯는다. 이 말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헐뜯는 자들을 꾸짖지도 않으시고,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다. 하늘나라의 복음과 병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하고 그들을 직접 찾아다니셨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작은 마을도 지나치지 않으시고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왜?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어서 가엾이 여기셨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을 거둘 일꾼들이 필요하였다. 영의 선물은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37-38절)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을 쏟아부어 주신다. 풍성한 수확은 모든 믿는 이를 의미하고, 적은 일꾼은 수확을 위해 파견된 사도들과 그들을 본받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준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이 청원도, 기도도 하기 전에 제자들을 사도로 지명하시며, 타작마당을 키질하여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버리는 분에 관한 요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그분 자신이 농부이며, 수확할 밭의 주인님임이 드러난다. 그분이 그들을 수확할 일꾼으로 파견하셨다면 수확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꾼으로 사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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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너에게>
마태오 9,32-38 (말 못하는 이를 고치시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나 너에게>
나
나를
너에게
내
맘길
너에게
내
눈길
너에게
내
손길
너에게
내
발길
너에게
내
살길
너에게
나
나를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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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참 목자’이십니다.>
“그들이 나간 뒤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2-3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참 목자’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내용의 순서를,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래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로 바꾸면 좀 더 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의 상황을 모르신 채로 세상에 오셨다가 사람들을 직접 보신 다음에야 비로소 가엾게 여기신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기서 ‘목자 없는 양들처럼’은, “목자가 있는데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목자가 없었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
‘목자이신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는데도 어쩌다가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되었을까? 죄를 지어서 목자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세속 일만 신경 쓰면서 살다가 목자를 잊어버린 사람도 있었을 텐데, 이스라엘의 전체 상황을 보면, 종교 지도자들 탓이 가장 큽니다.
2)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이 꾸중에는 사제들도 포함됩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주 임무는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일인데, 그들은 탐욕과 위선에 빠져서 그 임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40) 그것은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려서 들어가려는 이들을 못 들어가게 막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일도 아주 ‘큰 죄’인 ‘남을 죄짓게 하는 죄’입니다.>
사람들을 제대로 인도하지 않아서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 생긴다면, 못 들어간 사람의 경우에는 정상참작이 되겠지만, 제대로 인도하지 않은 사람은 엄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또는 예수님을 알려 주는 사람이 없어서 예수님을 못 믿은 사람이라면 정상참작이 되지만, 복음 선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려 주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은 엄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설교하신 일, 그리고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들은 전부 다 목자로서 양들을 보살펴 주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떠났습니다.
병을 고치기를 원해서 온 사람들은 치유된 것에만 만족하고서 떠나버렸고,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한 사람들도 마귀에게서 벗어난 다음에는 그것으로 만족하고서 떠나버렸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했던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으니까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고. 청하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이 갈라지게 됩니다.ㅡ 바로 그런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이 말씀은, “나는 세상에 ‘참 평화’를 주려고 왔는데, ‘참 평화’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마치 내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온 것처럼 되어버렸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고 비방하는 말을 한 자들은 평화 대신에 칼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사탄 편에 서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기를 바라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반대하고 비방하는 것은, 사탄이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사탄 편에 서는 것이 됩니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한 일이라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비방하는 말을 한 자들도 사탄 편에 선 자들입니다. 우리 교회를 사탄이라고 비방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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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엾이 여기는 마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라는 곳간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영의 비추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사업이 완성되는데 한 몫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측은지심,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희망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엾은 마음!', 다시 말하면 애간장이 녹아나는 아픔으로 함께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면 바로 그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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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재구 시몬 신부님]
<인간의 마음 자세는 자기 스스로가 다스려 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씨가 맑아도 기분이 나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날씨가 흐려도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날씨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마음에 따라 그날 기분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저는 그날 인간의 마음에 따라 날씨의 색깔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날씨 속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기분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갑자기 날씨 이야기를 하느냐구요? 왜냐하면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한번 묵상해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신기해하면서 경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독기에 찬 눈으로 증오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의 행동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중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순수하고 단순했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축복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환호와 찬미를 아낌없이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하고, 가장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의 왜곡된 생활을 비판하고 꾸짖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삐뚤어진 마음의 자세는 예수님의 올바른 행동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날씨가 찌푸려져 있어도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이나 멸시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어두움으로 쌓여 있다면 아무리 날씨가 쾌청해도 짜증과 불만투성이의 얼굴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며, 이웃의 선행에도 인정할 줄 모르고 비웃음과 증오감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만나도 바리사이파와 같이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일꾼들을 원하십니다. 그 일꾼들은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세상이 그분을 미워하더라도, 그분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참 일꾼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마음 자세는 자기 스스로가 다스려 가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마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기쁨으로 충만 된 삶을 살아가겠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걱정과 불안으로 뒤덮인 암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출발하셨고, 지금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나를 보살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안고 기쁘게 출발하면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매일매일 건강한 날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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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구노 구노 신부님]
<우리가 그분의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농부가 한 해 동안 고생해서 농사를 짓고 나면 한해의 결실을 맺는 추수 때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런데 만약 추수 때가 되었는데도 일손이 없다면 농부의 걱정은 이만 저만 아닐 것입니다. 애가 탈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나라는 추수 때가 되면 서로서로 도와서 한꺼번에 추수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부상조 품앗이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품앗이조차 할 일꾼들이 없어, 한 해 동안 잘 지은 농사를 추수하지 못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농작물들이 말라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게 농작물이 말라죽는 것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추수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바로 하늘나라에 살게 될 새 백성들입니다. 지쳐하고 힘들어하며, 당신만을 기다려왔던, 당신을 믿고 따르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애타는 농부의 마음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렇게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은데, 결정적으로 당신을 도울 일꾼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예수님을 도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당신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만 예수님을 도울 일꾼이 필요할까요? 예수님 시대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 경제, 교육, 여러 가지 것들로 힘들어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기적, 그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 그리스도인은 전 세계인구의 절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금방 깨닫습니다.
한쪽에선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인데 한쪽에선 배가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한쪽에서는 전쟁으로 서로가 피흘리며 살아가는데 한쪽에서는 무슨 일이 있냐며 호화롭게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이 예수님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해도 예수님의 마음은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전히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은 적습니다. 일꾼은 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자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추수할 일꾼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추수할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실 나 자신도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그 요청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꾼이 없으니 너희가 일꾼이 되어 복음의 열매를 맺어주겠니”
많이도 말고 매년 딱 한사람씩만 주님께로 이끌고 주님을 맛들이게 한다면 더 이상 추수할 일꾼이 없어 죽어가는 영혼들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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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복음 선포에 필요한 일꾼이 되어야>
오늘 복음으로써 마태오가 집성한 예수님의 10가지 기적사화에 관한 보도(8-9장)는 일단 막을 내리고 12제자의 선발과 파견설교(10장)가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기적사화 집성문의 마지막 사건으로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를 보도한다. 기적사화 집성문의 마지막 열 번째 기적이다.
그러나 복음에서 보다시피 벙어리 치유에 관한 내용(33a절)은 단 한 줄에 담겨있고, 나머지는 치유사화에 대한 군중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상이한 반응(33b-34절)을 소개하고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한 전반적인 복음선포 활약상(35-36절)을 요약하고 있다.
끝으로 예수님의 복음선포에 제자들의 협조가 필요함을 암시함으로써(37-38절) 제자선발과 파견설교를 예고한다.
마태오가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를 이토록 간단하게 보도하고, 오히려 그 반응을 상세히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간단하다보니 좀 성급한 느낌도 든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돋우는 일이 있다.
마태오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벙어리 치유와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오늘 복음의 대목은 나중에 중복하여 보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22-24 참조) 뿐만 아니라 어제 복음(9,18-26)과 오늘 복음(9,32-38) 사이에 빠진 부분(9,27-31)도 다시 반복됨을 발견할 것이다.(20,29-34 참조)
비교적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마태오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범했을까? 물론 자세히 살펴 하나씩 비교해 보면 서로 다르게 보이기도 할 것이나 근본적으로는 같다.
서로 다른 점은 두 가지의 기적사화가 9장에서는 대략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12장과 20장에는 약간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의문점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마태 11,2-6)에서 풀린다. 특히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5절)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메시아의 도래로 인한 하느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적이 증언되기 전에 소경과 벙어리 치유가 선재(先在)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마태오가 예수님의 기적사화들을 논리적으로 한데 모아 집성하려는(8-9장) 과정에 따른 무리수(無理數)로 지적된다.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제 복음과의 사이에 빠진 부분을 살펴보아야 한다. 빠진 부분은 예수께서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려주시고 그의 집을 떠나 길을 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소경의 치유기적사화이다.
이 대목의 원전(原典)은 바로 마르코가 보도하는 예리고의 소경 치유사건(10,46-52)이다. 물론 마태오는 원전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개작(改作)한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7절로 이루어진 대목을 5절로 축약하면서 1명의 소경을 2명으로 바꾸었고, 지명(예리고), 소경의 이름(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 그리고 소경의 간절한 부르짖음과 사람들의 나무람 등을 삭제해버렸다.
이로써 예수님의 권능이 뚜렷이 부각되며, 그것도 소경 1명을 2명으로 바꾸었으니 마르코에서보다 2배로 강하게 드러난 셈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치유된 두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함구령(緘口令)을 내리신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들은 곧장 그 길로 달려가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린다.(30-31절)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신다. 당신에게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이유를 오늘 복음과 연결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록 마태오가 단 한 줄로 보도하고 있는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분명 앞서간 소경치유 끝에 내려진 함구령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정체를 똑바로 알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벙어리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을 보고 군중이 “이스라엘에서는 처음 보는 일이다”(33절)라고 웅성거리며 놀란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 편에 서서 같이 놀라거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34절) 하며 빈정거린다고 해서 이들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기에 감탄했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기적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 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고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36절)일 뿐이며,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진정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고, 예수님께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도와 세상의 추수(秋收)에 필요한 일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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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성당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종종 아이들이 편지를 건네줍니다. 맞춤법도 엉망이고 글씨도 삐뚤삐뚤입니다. 내용도 별것 없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보면 저절로 아빠 미소가 생깁니다. 또 제게 다가와서 크고 작은 일을 일러바치듯 이야기하는 아이도 많습니다. 그만큼 저를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구나!’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이들이 더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어른들이 종종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이 미사 때 너무 떠들지 않냐고, 너무 버릇없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아이답게 열심히 미사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되고, 아이들 수준에 맞게 예의 바르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실수해야 아이다운 것 같고, 그 실수를 보면 괜히 미소가 나오게 됩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 그것도 순수하고 맑은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이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나를 낮춰야만 사랑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옛날 약장수들이 말하곤 했던 “애들은 가라.”라면서 거리를 뒀다면 절대로 사랑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랑을 전해야 나 역시 사랑받을 확률이 올라갑니다. 특히 이 사랑은 전염성이 강하기에 자기가 받은 사랑을 남에게 전달했을 때 그 파급효과는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활동을 복음에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복음에서 말 못 한다는 것은 의학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업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을 쫓아내는 크신 권능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참조). 이 표현을 희랍어 원문에서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를 쓰는데, 이는 내장이 끊어질 듯한 극진한 자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으로 악의 세력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신 것입니다.
악의 세력을 쫓아내는 경우를 본 적 없는 군중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 9,34)라고 말하면서 비난합니다. 누구는 깜짝 놀라지만, 똑같은 결과를 보고서 비난합니다. 군중은 구원 활동을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 것이고, 바리사이는 질투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바리사이는 그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계속 주어지는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불평불만으로 그 사랑을 왜곡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랑 없는 삶은 결국 행복하지 못한 삶을 만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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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전투, 영적승리>
-“주님의 전사, 주님의 일꾼”-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 17,8)
요셉수도원에 정주하기 만37년 동안, 수도원 앞 들판에 거대한 별내신도시가 들어섰지만 그린벨트 지역에 해당하는 수도원 주변의 자연은 그대로입니다.
37년 동안 늘 정주하면서 아침마다 산책할 때 마다 대하는 자연은 늘 그대로 이지만 늘 새롭고 좋습니다. 아주 예전 <아침>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아침의 자연은 늘 새롭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밤의 침묵과 휴식 때문이다
“아침을 먹었느냐?”
가 아닌,
“아침을 보았느냐?”
“아침을 들었느냐?”
인사 할 수는 없을까!
똑같은
사람, 환경, 말과 글도
살아 있으면
침묵의 밤이 있으면
늘 새로운 아침일 수 있다’<1997.8.16.>
28년 전 글이니 여기 수도원에서 47세때 쓴 시입니다. 그때의 자연은 지금도 계속됩니다만 늘 새롭고 좋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탐욕에 바탕한 개발로 자연을 훼손하는 외적변화가 아니라 끊임없는 내적변화임을, 진정한 발전은 자연과 공존과 균형, 조화의 발전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때쯤의 담쟁이를 보면 참 많이도 인용했던 <담쟁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영적전투하면 떠오르는 시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루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지금도 거기 그 자리 곳곳에 끊임없이 하늘 향해 타오르고 있는 담쟁이들은 영적전투의 빛나는 상징입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저를 매료시켰던 주제가 영적전투요 앞으로도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될 주제입니다. 평생 영적전투에 평생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가 우리 정주 수도승의 신원입니다.
물론 혼자이면서 영적전우들과의 더불어의 영적전투이기도 합니다. 싸우다 전사해야 주님의 전사요 객사나 사고사나 병사가 아니길 바라는 소망도 때로 피력하곤 했습니다. 싸움의 전투는 인간현실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젊을 때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기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기에는 병마와 싸운다고 합니다. 잡초들이 기승을 부리는 이때의 밭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영적전투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야곱입니다. 주님의 꿈쟁이이며 주님의 전사 야곱입니다. 어제 에사우를 피해 도주했던 야곱이 장인 라반의 집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둔후 식솔들을 이끌고 금의귀환하는 모습이나 에사우의 보복이 두렵고 무서워 일행들을 먼저 떠나 보낸후 하느님과 마지막 일전을 치루는 절체절명의 기도 장면입니다.
바로 밤새 하느님과 결전을 치루는 장면은 옛 교부들이 기도는 물론 영적전투의 빛나는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얼마나 치열한 하느님과의 싸움의 기도인지요!
에사우 형과의 만남이 그토록 두려웠던 것이며 주님과의 대결로 내적힘을 키우기 위한 영적전투의 기도시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다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마침내 야곱의 영적승리입니다. 하느님께 이기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이김으로 두려움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야곱의 고백과 하느님과의 치열한 밤샘기도의 영적전투에 승리한 후 떠나는 장면이 참 아름답습니다.
‘야곱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프니엘(하느님의 얼굴)’이라 하였다.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
마치 태양이 하느님께 대한 야곱의 영적승리를 축하하는 분위기입니다. 태양빛 가득 받으며 절뚝거리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걷는 하느님의 꿈쟁이요 불세출의 하느님의 싸움꾼, 주님의 전사 야곱입니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을 극찬하던 50년전 제가 27세쯤 개신교 신학강좌시 감리교 신학대 구약학 교수였던, 지금은 타계한 <민영진 목사>의 강의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따르는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꿈쟁이이자 불세출의 하느님의 전사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온갖 영적전투를 마다하지 않은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들려 말못하는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신 주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다음 착한목자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전사가 지녀야 할 마음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이 목자 없이, 길과 꿈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눈앞의 것을 좇느라 원대한 계획을 잊어버린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과 꾸준함이다.”<다산>
“서두르지 말고 작은 이익을 도모하지 마라. 서두르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좇으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논어>
착한목자 주님을 따르는 제대로의 방향에 우보천리의 자세가 절실합니다. 이어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착한 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충만케 하시어, 당신의 일꾼이자 당신의 전사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오리다.”(시편 17,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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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도 이기는 방법>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야곱의 얘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야곱은 이제 오랜 타향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형 에사우와의 두려운 만남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만남을 앞두고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가족과 종들을 모두 보내고 하느님과 독대하고는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합니다.
그런데 어찌나 끈질기게 덤비는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뤄 이겼다는 말과 함께 그는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항복도 얻어내고 복도 얻어내고야 맙니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도 얻게 되는데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이 이름에서 비롯되고, 그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그의 어두운 면을 얘기하자면 그는 욕심이 많고 야비하며 약점도 무척 많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목적을 이뤄내는 사람인데,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싸움도 끈질기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형 에사우도 이기고 형에게서 도망쳐 찾아갔던 외숙 라반에게 내내 핍박을 당했지만 라반의 딸들을 아내로 얻고 그들에게서 난 아들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함께 돌아감으로써 마침내 사반도 이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하느님도 이겼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무슨 뜻이고 어떻게 이겼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원하던 것을 끝내 얻어냈다는 뜻이고,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으로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형 에사우와 만나기에 앞서 하느님의 강복이 꼭 필요했습니다. 형의 적개심을 풀고 오히려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가 인간으로 해야 할 것은 다했고 그래서 이제 하느님의 강복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는 이렇게 청합니다.
“저에게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도 이래야 합니다. 원수와 맞서기 전에 이래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이래야 하고, 원수였던 자와 화해하기 위해 이래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복을 주실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제풀에 지치거나 기가 꺾이지 말고 들어주실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과부가 올바로 판결해달라고 재판관에게 청할 때 끈질기게 청하면 그가 비록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들어줄 것이고 귀찮아서라도 들어줄 것이라고 이 비유에서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불의하지 않고 정의로우시고, 귀찮아하지도 않고 기꺼이 들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철석같이 믿는 것,
그렇게 믿기에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도 이기는 방법인데 이것을 야곱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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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화요일🕯(7.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9,37)
'참일꾼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9,32-38)은 '예수님께서 말못하는 이를 고치시는 말씀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성(하느님)과 인성(사람)을 두루 갖추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9,35)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꺽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7)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서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믿음의 현주소를 바라봅니다.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 전 세계 천주교 신자의 수가 14억 명에 이르고,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 수는 거의 6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숫자가 많다고 마냥 기뻐할 수 없음을 보게 됩니다. 냉담 교우들도 많고, 열정이 식어 있는 신자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수확할 밭의 일꾼이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의미 있게, 그리고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성령 안에서 열정으로 살아가는 참된 신자들이 많아지게 해 달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열정적으로 사목하는 사제들이 많아지게 해 달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14항 중에서)
함께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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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이
바로
긴박하고 절박한
수확의 대상입니다.
수확의 주인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일꾼입니다.
기도는 일꾼이
되겠다는
우리 결단의
시작입니다.
일꾼은
스스로 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은총에 감사하는
이들입니다.
일꾼은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일꾼은
결과보다
성실함과
충실함으로
하느님의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참된
일꾼입니다.
일꾼의 성장은
은총이고
수확은
그 믿음의
열매입니다.
수확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교만입니다.
수확은
끝이 아니라
사랑의
새 시작입니다.
수확은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함께하는
축제입니다.
그래서
수확의 기쁨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은총입니다.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이
수확하는
일꾼의
사랑이며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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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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