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참 스승, 나의 아버지
이탈리아에 사는 나이 많은 홀아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는 16세 리사 게라르디니와 결혼한 후 비단 거상이 된다. 둘째 아들의 탄생과 새집 구입을 기념하기 위하여 24세의 아내 리사의 초상화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그리도록 부탁한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화가인 그는 1503년부터 1517년까지 가로 53cm, 세로 77cm 크기의 모나리자(Mona Lisa 리자 부인)그림을 완성한다. 모나리자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측은 어떤 그림과도 바꿀수 없을 정도로 모나리자를 소중히 여긴다. 연간 1천만명이 방문하는데 대부분은 모나리자의 진가를 감상하러 찾아온다고 한다. 나는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없고 실제 그림을 감상한 적도 없다. 다만 액자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의 해맑은 미소 띤 얼굴을 보았고 이마가 환하고 눈썹이 없는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자태를 보았을 뿐이다. 나에게는 모나리자에 비견할 정도의 훌륭한 분이 계셨다. 나의 참 스승이셨고,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 나의 아버지이셨다.
40세 되신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출산을 앞두고 있었지만 징용으로 끌려간 사촌 형이 논산훈련소에서 이질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셨다. 내가 태어난 뒤 이레가 되는 날에 아버지는 오셨다.
아버지는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다. 체구는 왜소한 편이었다. 얼굴 빛이 곱고 선비형 미남이었다. 얼굴 땀구멍에 비지가 많아 내 두 엄지손가락으로 비자를 짜 드리면 작은 구멍에서 국수같은 비지가 쭉 빠져 나왔다. 아버지는 무척 시원하다고 기뻐하셨다. 아버지는 성긴 머리카락을 항상 가지런히 빗었다. 아버지는 사자소학과 천자문을 다 떼시고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셨다. 아버지는 월반을 하여 3년 6개월만에 보통학교 졸업장을 받으신 수재이셨다. 보통학교가 아버지의 최종학력이지만 꾸준히 책을 읽고 쓰는 습관을 견지하셔서 고등교육을 받는 분 못지 않았다. 아버지는 됫글로 배워 말글로 풀어 사셨던 분이셨다.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샤를 드 몽테스키외는 세상을 살면서 부모교육, 학교교육, 세상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중에서 세상교육을 철저히 받은 분이셨다. 아버지는 삶을 멋지고 아름답게 사셨다. 아버지는 일본사람이 운영하는 과자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셨다. 일본인도 감탄하시고 가게 운영 전권을 아버지께 맡기셨다. 아버지는 외국어인 일어를 유창하게 하셨다. 일본 건설 현장에서 십장(什長)으로 일하신 아버지는 논 6마지기(3,960㎡)를 사셨다. 그 논은 우리 집의 경제기반이 되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지금은 주민자치센터) 9급공무원(당시 5급 면서기)으로 임용되어 공무원으로 봉직하셨다. 매우 성실히 근무하셨다. 3년 터울의 우리 형제들의 출생신고도 만 1년이 지난 생일 출생신고도 하셨다. 북한 공산당의 훼방으로 아버지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실직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주저앉지 앉지 않으시고 사회봉사로 사셨다. 아버지는 월급도 나오지 않는 동네 구장(지금의 리장)으로서 10년 넘도록 봉사도 하셨다. 동네 분들의 관공서 대서사무(代書士 역할)도 도맡아 처리해주셨다.
아버지는 민주적이셨다. 가족의 의견을 묻고 잘 들으셨다.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가 경험위주의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면 나로 하여금 경험하면서 즐기게 하셨다. 부담없이 따를 수 있는 사제동행도 실천하셨다. 농기구를 사용하는 방법, 거름을 뿌리는 요령, 농약을 살포하는 것 등 하나하나 세심하게 가르쳐주면서 일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짚단을 쌓으면서도 대충 쌓지 않았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해서 쌓는 요령을 설명하면서 쌓았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내 삶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찍이 신문학을 접한 아버지는 한학에 박식하셨다. 아버지는 이야기를 재미있고 구수하게 하셨다. 중국 고사를 스토리텔링으로 들려주실 때는 너무 재미있었다. 공자뿐만 아니라 노자, 맹자의 가르침도 나에게 해 주셨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봉우사이 지켜야 할 세 가지 핵심 윤리와 다섯가지 실천덕목인 삼강오륜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고 군자에게는 세 가지의 즐거움이 있는데 그것이 군자삼락이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항상 즐겁게 살라고 나에게 당부하셨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든지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 어렵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도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신중히 하라면서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도 내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아버지는 병치레를 자주 하셨다. 아버지는 타고난 기질이 약했다. 아버지 뒷머리 바로 아래 목 부위에 난 부스럼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고름을 짜냈으나 고름의 뿌리 격인 누르스름한 근(根:부스럼속에 곪아 단단하여진 망울)이 오랫동안 제거되지 않았다. 짜고 째기를 반복했다. 당시 유명한 이명래고약을 사용했지만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상처가 얼마나 심했는지 커다랗게 남은 흉터를 지니고 사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오른쪽으로 무슨 소리가 들린다면서 갑자기 앉은 자리에서 옆으로 쓰러지셨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뒤집혀졌고 입에서는 거품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울면서 황급히 면 소재지 의원으로 달려갔다. 당시엔 전화도 없었고 응급차가 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나도 모르는 혐오 음식까지 드셨다. 그 후 아버지의 병세는 호전되었고 건강해지셨다. 아버지는 연세가 50세쯤 되셨을 때 입과 눈이 한쪽으로 비틀어지는 구안와사(口眼喎斜)를 겪으셨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다행히 지인이 특효 풀잎을 알려 주어 그 풀잎으로 완치를 했다. 그 신기한 풀잎을 꼭 알아 두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무척 아쉽다. 방법은 간단했다. 풀잎을 뜯어다가 절구에 찧는다. 소주 병마개에 그 찧은 풀잎을 담아 팔 안쪽에 싸맨다. 일주일쯤 후에 푼다. 병 뚜껑 부위에 물집이 생긴다. 물집을 터뜨리지 않고 물집이 아물 때까지 기다린다. 물집이 아물면서 서서히 입과 눈이 원상태로 돌아온다. 참 신기했다. 그 뒤 아버지는 같은 증상을 보인 분들에게 그 신기한 풀잎을 알려주어 아버지의 은덕을 입은 분들이 많았다. 건강 문제로 많이 고생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서 나는 건강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떻게 하는 것이 섭생(攝生)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내 망팔(望八)인데도 건강한 편이다. 아버지는 담배를 하루에 1갑 정도 피셨다. 술은 하루에 한 두잔 정도로 애주하신 분이셨다. 도박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매주 수요일 KBS 아침마당 꿈의 도전에 나오는 출연진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남편이나 아버지의 술과 도박으로 때로는 바람 피워 가정이 파탄 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때마다 나는 지각있고 가정적인 아버지를 닮은 아들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분이셨다. 저녁에 식구들이 모이면 시조창을 들려 주셨다. 그리고 하루 동안 지냈던 이야기도 재미나게 들려주셨다. 화술이 좋으신 아버지는 친화력이 무척 좋았다. 동네 부자로 알려진 분도 저녁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자주 오셨다. 아버지는 외롭고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지 않으시고 이웃에게 나누고 베풀면서 사셨다. 고집세고 이기적인 노인으로서 삶이 아닌 나누고 베푸는 어르신으로서 존경을 받으며 사셨다. 경로당 원장으로도 수고하셨다. 동네 분들은 아이를 출생하면 아버지께 작명을 부탁하셨다. 우리 형제들의 이름 또한 모두 아버지께서 작명하셨다. 내 이름 으뜸 원(元)과 길할 길(吉)이라는 이름이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나는 이름 값을 하면서 살려고 했다. 아버지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며 무척 흐뭇해 하시면서 나를 칭찬하셨지만 여전히 나는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다. 족탈불급(足脫不及)이었고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아버지께서 향년 71세로 소천하셨을 때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장례를 치르는 만 3일 동안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잠도 잘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음식을 먹으려 해도 들어가지 않았고 아무리 자려고 해도 잠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나의 롤모델이었다. 나의 참 스승, 나의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