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68
3월20일[사순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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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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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wio4xtII7g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이영준 모이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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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돈은 돈다고 해서 돈입니다!>
부(富)는 사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적인 품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궁핍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 그리고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물은 주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재물로 인생을 즐기는 것도 참 좋은 것입니다. 내가 매일 땀 흘려 모든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돈이면 다, 돈이 최고라며 돈에 모든 것을 거는 그릇된 신조입니다. 재물을 주님이나 신앙보다 더 위쪽에 두는 황금만능주의를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없는 사람 업신여기는 부자들, 가까운 동료 인간들이 저리도 경제적 어려움 앞에 저리도 힘겨워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강력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 25-26)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을 갈라놓은 구렁 그 위에 다리는 하나 놓은 일입니다. 사랑의 다리, 관심의 다리, 나눔의 다리, 측은지심의 다리...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겼는데 천국에서 주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는 라자로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부자는 지옥 불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영원불변의 진리를 떠올립니다.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식과 인간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듣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선이라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부를 축척하고 계신 분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탄받고 저승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을 부자는 조금도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부자였습니다. 지척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갑질과 횡포, 고성과 폭력이 일상인 분들, 지금이라도 지난 부끄러운 삶을 성찰하고 회심하며, 새 삶을 시작할 때, 늦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도 축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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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tvfilNyM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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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삶의 방식과 두 상반된 결과: 십자가와 부활, 부활과 십자가>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는 천국에 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해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다음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의 줄거리입니다. 미국 미주리주 미시시피 강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세인트피터즈버그에 톰 소여라는 개구쟁이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톰은 일찍 부모를 잃고 고모인 폴리 아줌마 밑에서 자랐는데, 공부는 싫어하고 장난과 모험을 좋아해 언제나 골칫덩어리였습니다. 그는 학교 수업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온갖 말썽을 부리며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토요일, 폴리 아줌마는 말썽을 피운 톰에게 벌을 주기 위해 마당 울타리를 페인트칠하라고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칠하던 톰이었지만, 곧 묘안을 떠올려 친구들에게 울타리 칠하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라고 속여 오히려 친구들로부터 사과, 구슬 등의 물건까지 받으며 일을 시키고 자기는 편히 쉬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톰은 자신의 재치와 영리함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삶을 가볍게 여기고 책임감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톰에게 변화의 시작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밤, 톰은 마을에서 방랑아 취급받던 친구 허클베리 핀과 함께 공동묘지로 가게 됩니다. 허클베리 핀은 늘 자유롭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아 톰이 매우 부러워하던 친구였습니다.
두 소년은 공동묘지에서 죽은 고양이로 사마귀를 치료하려는 미신적인 의식을 하려고 갔다가 우연히 끔찍한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마을의 의사 로빈슨이 인디언 조라는 악명 높은 사람과 머프 포터와 다투는 모습을 숨죽이며 보던 톰과 허클베리는, 인디언 조가 의사 로빈슨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그 죄를 머프 포터에게 뒤집어씌우는 장면까지 전부 보게 되었습니다. 두 소년은 살인을 목격한 충격에 사로잡혀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하지만, 톰은 이후 계속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톰은 그 죄책감을 잊으려 다시 모험과 놀이에 몰두합니다. 친구 조 하퍼와 허클베리 핀과 함께 해적으로 가장하여 섬으로 도망쳐 며칠을 보내며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폴리 아줌마와 마을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톰은 자신이 무책임하게 행동한 것을 깨닫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톰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머프 포터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톰은 자신이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으면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처형당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톰은 내면의 두려움을 이기고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서, 인디언 조가 진짜 살인자라는 것을 밝히게 됩니다. 법정에서 용기 있게 진실을 밝힌 톰은 마을 사람들에게 영웅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인디언 조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얼마 후 톰과 허클베리는 보물을 찾는 또 다른 모험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을 근처의 낡은 폐가를 탐험하다가 우연히 인디언 조와 그의 공범이 숨겨둔 보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톰은 허클베리와 함께 이 보물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오히려 인디언 조가 자신들을 발견하고 위험에 처할 뻔합니다. 이 과정에서 톰은 점점 자신의 용기와 책임감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제 톰에게 있어 모험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아이들과 함께 동굴로 소풍을 떠난 톰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 베키와 동굴 안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어둠과 공포 속에서 톰은 베키를 위로하고 책임지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그 과정에서 톰은 우연히 인디언 조가 동굴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톰은 가까스로 동굴에서 탈출한 후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인디언 조는 동굴 속에 갇혀 굶어 죽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톰과 허클베리는 동굴에서 인디언 조가 숨긴 보물을 찾아내어 큰돈을 얻게 됩니다. 뜻밖의 부자가 된 톰과 허클베리는 이 보물을 나누어 갖기로 합니다. 하지만 톰은 돈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부유함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반면, 허클베리는 갑자기 얻게 된 부와 규칙적인 삶이 부담스러워 다시 방랑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톰은 그런 허클베리를 이해하며, 함께 자유롭게 살기를 제안합니다.
톰 소여의 진짜 모험은 재미를 찾는 데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모험으로 바뀝니다. 위 이야기에서 톰 소여는 마냥 놀기 좋아하는 무책임한 소년에서 벗어나 점점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즐거움만 추구하던 부자 같은 모습에서, 양심의 가책과 어려움 속에서 고통받는 라자로의 모습을 거쳐, 결국 진정한 의미의 삶의 가치를 깨닫고 천국 같은 내면의 평화를 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부자와 라자로를 연결하기 위해 오늘 복음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좀 단어의 뜻을 살펴보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ἀναπαύεται”(anapaúetai)입니다. 뜻은 “쉬다, 위로를 받다”란 뜻입니다. 라자로가 죽음 뒤에 받는 것이고, 부자는 이것을 받지 못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샤밧’, 곧 ‘안식’, ‘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날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나에게 와서 안식을 얻으라.”(마태 11,28)고 하신 말씀에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안식은 십자가에서 오고, 안식을 찾는 이들에겐 십자가를 준다는 시스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쉼과 안식을 찾았고, 라자로는 십자가의 길을 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안식을 찾은 부자는 영원한 십자가가 준비되고,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산 라자로에게는 영원한 쉼과 안식이 마련된다는 뜻입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버리고 안식을 누리려다 결국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안식은 십자가 뒤에 옵니다. 그러나 사막 여유와의 관계를 통해 안식을 포기하는 법을 배웁니다. 관계를 위해 십자가 지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부자에서 라자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사랑을 알게 된 그는 장미꽃에게로 돌아갑니다. 비록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더라도. 그런 죽음은 부활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안식을 누리며 위로를 받으려 하면 타인을 착취하게 되고 게으르게 되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안식을 포기하면 다른 이를 편안하게 하고 위로를 주고 휴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는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숫자 40이 상징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 것인지, 벌써 위로와 안식을 살아서 십자가만 남게 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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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사제로 지내면서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음식을 직접 만드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지만, 교우들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음식 담은 그릇을 깨끗하게 설거지해서 드리는 걸로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가끔 주류를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미사 때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면 생강차를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세탁소 하시는 분은 언제든지 옷을 가져오면 드라이클리닝을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어쩌면 제게 딱 맞는 노래 같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과분한 사랑입니다. 사제를 위하는 마음은 한국 공동체가 각별한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는 박해의 시간을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견디어냈습니다. 교우들은 사제들을 모시고 공소로 다녔고, 공소에서는 사제들을 위해서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사제가 다른 공소로 이동할 때면, 교우들이 모두 문밖으로 나와서 눈물로 이별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교우를 위해서 기꺼이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던 사제들이 뿌린 씨앗이 열매 맺고 있습니다.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습니다. 교황님은 관절이 나빠지셔서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폐렴이 있어서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5분의 교황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했던 요한 23세 교황님. 이스라엘을 방문하였고 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무리했던 바오로 6세 교황님. 한국을 2번이나 방문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전통과 교리를 지키려고 하셨던 베네딕토 16세 교황님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4분의 교황님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로 천상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해서 저는 3가지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방명록입니다. 2014년 교황님은 124위 복자 시복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교황님은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는데 아주 작은 글씨로 구석에다 적었습니다. 교황님의 겸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방입니다. 교황님의 가방은 30년은 넘어 보였습니다. 낡은 가방에서 교황님의 검소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입니다. 교황님은 본인이 타실 자동차를 ‘쏘울’로 정했습니다. 소형차를 선택하신 교황님에게서 소박함을 보았습니다. 교황님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푸른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잘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것을 따르고,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신앙인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필요한 요소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형제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함께 할 때,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을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다 채우는 것입니다.
자유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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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저승에 간 부자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생각 거리를 전합니다. 저승에서 고통을 받던 부자는 처음에는 자기 처지에만 집중하고,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며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고초를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자기 형제들이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관심의 대상이 자신에서 형제들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는 형제들에게 죽은 사람이 살아서 가지 않으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부자가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동안, 그의 대문 앞에 가난한 라자로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심지어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바랐습니다. 만일 부자가 가난하고 병든 라자로에게 마음을 썼더라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라자로가 자기 주위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6,24 참조). 부자는 자신의 재물로 위로를 받는 데 만족하였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것으로 위로받고, 더는 주위를 둘러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겪는 고초는 하느님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는 뉘우침의 다른 표현입니다. 살아 있는 형제들이 늦기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는 부자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전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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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9-31: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자주색 옷을 입은 부자의 잘못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로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지만 가엾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식상에서 내버리는 빵부스러기라도 그 거지에게 주었어야 했다. 아무 동정도 받지 못한 라자로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 했다. 게다가 불치의 병이 그를 괴롭혔다. 개들조차 그의 종기를 핥으며, 그를 해치지 않고 돌보고 있다. 그런데 부자는 개들보다 잔인했다. 라자로를 가엾이 여겨주지도 않았고 무자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에서의 삶과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에 관한 결과이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25-26절) 라고 하신다. 이 구렁은 서로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 데 대한 심판이다.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선택하면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구렁을 파고 만다. 주님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는 살아있을 때 라자로와 그 같은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그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고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부자는 고통을 겪으며 마지막으로 라자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가 또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 했을 때, 죽었던 사람이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요한 5,46) 모세와 예언자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예언하였다. 아브라함의 말뜻은 바로 이것이다. 부자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데 있었다면 오늘의 나 자신은 어떤지 반성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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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자들과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19-26)
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부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그렇게 살지 마라. 회개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저승에서 정반대의 처지로 떨어질 것이다.”라는 경고. <지금은 부자가 아니더라도,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모두를 향한, 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락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모두를 향한 경고입니다.> 바로 앞의 13절에,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에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는 말이 있고, 15절에는 예수님께서 그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4-15)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바로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 ‘돈을 좋아하는’이라는 말과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이라는 말은, 그들이 ‘위선자들’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들은 세속의 부유함을 ‘하느님의 복’이라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부유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죄의식도 없었고,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잘난 체 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게 사는 것은 의인이 아니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복을 안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지독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사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부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한 위선자들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순전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고, 가난한 사람들 자신들도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에 중요한 상들을 많이 받은 유명한 영화에서, “부자인데도 착한 것이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것이다.”라는 대사가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3)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히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지도 않고, 또 나쁜 사람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라자로가 누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며가며 먹을 것을 던져 주었습니다(21절). 아마도 그 부자는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있다고, 자기는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1절의 말을 다시 잘 보면, 부자는 라자로에게 먹을 것을 그냥 준 것이 아니라 개들에게 주듯이 던져 주었습니다. <듣기 거북한 말이지만, 라자로를 ‘개 취급’ 한 것입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라는 말은, 부자가 라자로에게 무엇인가를 조금씩 던져 주긴 했지만, 그것은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라는 말은, 표현으로는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말인데, 뜻으로는 라자로가 먹는 것을 개들이 가로챘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개들’이라는 말이 우상숭배자들을 뜻할 때가 많기 때문에(마태 7,6), 여기서도 ‘개들’을 우상숭배자로 생각할 수 있고, 그렇다면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말은, 부자의 초대를 받고 온 이방인들이(우상숭배자들이) 라자로를 모욕하고 조롱한 것을 나타낸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전부 다 부자의 죄입니다.
4) 부자가 저승에서 한 방울의 물을 아쉬워하고 애원하게 된 것은 ‘인과응보’입니다.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 것인데, 그것은 이승에서 그 부자가 라자로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제대로’ 주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 부자가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습을(28절)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러나 전체 내용을 보면, 그는 저승에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채로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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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이 바라는 때에 벗에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벗이 바라는 때에 벗에게>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19ㄱ.20)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루카 16,23)
나
몸소
벗에게
나
아쉬운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내
눈길
벗에게
나
건네고픈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내
발길
벗에게
나
가고픈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내
손길
벗에게
나
내밀고픈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나
몸소
벗에게
나
아쉬운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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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같은 것을 보지 않습니다.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며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자신의 관심사에 집중하느라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하며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어떤 가치로,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집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서 언제나 먹을 것을 구걸하며 너무나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라자로를 보았지만, 그런 라자로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뿐입니다.
부자는 죽어서도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마름과 고통,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의 집 앞을 지나가셨다면 무엇을 보셨을까요? 당연히 라자로를 보시며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주셨거나, 그것도 아니면 함께 이야기라도 나누셨을 것입니다. 당장 무엇을 하실 수는 없으셨더라도 그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려면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것만을 채우고자 하는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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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복음서에서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사람 전부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복음서가 언급하는 이름은 그 이름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비유는 흔히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로 불립니다. 라자로는 엘아자르의 축약형으로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을 지닙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라자로와 ‘어떤 부자’입니다. 비유에서 아브라함과 어떤 부자가 직접 대화하지만 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라자로만이 언급됩니다. 이미 ‘라자로’라는 이름에서부터 비유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드러납니다.
비유 안에서 화려한 차림의 부자와 온몸이 종기투성이인 라자로에 대한 묘사는 현세에서 드러나는 부와 가난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상황은 다릅니다. 라자로는 복된 모습이지만 부자는 고통을 겪는 듯합니다. 비유가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현세의 상황과 반대로 된다는 것을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라자로는 오직 이 한 가지 희망을 가졌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자의 잘못은 라자로로 대표되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처럼 보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아니라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바른길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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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9년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5년마다 발표되기에 올해 2024년 생활시간조사가 발표될 것입니다)를 보면 수면과 노동시간을 제외하고 1인 가구 청년(19~34세)의 경우 하루에 3.9시간을 혼자 있지만, 노년(65세 이상)이 되면 7.6시간을 혼자 보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장년을 거쳐 노년으로 갈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의 경제적 빈곤 못지 않게 관계 빈곤이 이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된다고 말합니다.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관계의 부재로 외톨이가 되는 것은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게 합니다. 실제로 우울증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할 수도 있지만, 길게 바라보면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이 잘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의 이 말이 와닿습니다.
“나는 이 세계에 소속되어 있어요. 필요한 만큼, 그리고 분리돼 있어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김희경, ‘에이징솔로’ 중에서)
‘홀로’와 ‘함께’. 모두 각자에게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홀로 하느님과의 만남도 중요하고, 또 함께 하느님과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상처받았다고, 바쁘다고 ‘홀로’ 그 자체에 머물면서 스스로 힘든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함께’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인생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으로 가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부자의 모습입니다.
부자가 악인 같습니까? 죄와 엄청나게 친한 사람이었고, 착한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생전에 잔치를 많이 벌인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 거지인 라자로를 냄새나고 더럽다고 쫓아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승에 가서도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악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저승에서 고통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외되는 ‘함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과의 ‘함께’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소외되는 ‘라자로’를 개들이 종기를 핥고 있을 정도로 무시하는 데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함께’를 다시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함께’가 될 수 있도록 더 신경 써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위한 ‘홀로’는 절대 안 됩니다. 모두와 사랑을 나누는 ‘함께’를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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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자는 자신의 삶을 즐겼습니다. 성경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부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부자는 자신이 가진 부를 누렸습니다. 복음에서는 부자의 반대 모습으로 라자로를 등장시킵니다. 부자에게는 부자라는 말만 있을 뿐이고 가난하고 또 가난한 라자로에게는 라자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왜 성경은 부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 라자로의 이름만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부자의 잘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왜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았을까요? 많은 사람이 부자가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할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그것도 틀린 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라자로가 아닌 다른 누가 와도 부자는 저승의 고통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아브라함의 이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부자가 생각했던 부유함이 자신이 이룬 것이든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부유함을 소유했던지 간에 부유함 자체가 하늘에서 내려 준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부자는 자신의 부유함과 하늘의 자비를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누구에게도 자비롭지 못했던 것이지요. 부자의 첫 번째 잘못은 부유함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그대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늘 감사하고 자비롭기를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옛날 개그….
1.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바람을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그대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대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2. 기도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초보적인 단계를 거쳐 기도에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뵙길 청할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전남 영광입니다.
작은 미소 짓는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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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5-26)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 다를 뿐입니다. 돈, 권력, 명예, 지식이나 지혜, 육체성, 감성, 이성, 사회성, 영성 등 조금이라도 우월적으로 가진 고유한 선물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가진 것은 제각기 다릅니다. 모든 것을 완전하게 가지거나, 전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가진 것이 있고 가지지 못한 것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우리는 개인 뿐만 아니라 국가나 공동체 모두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운명공동체 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지게 된 것은 이웃들과 나누기 위한 것이며, 가지지 못한 것은 이웃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봉사하는 인류 유기적인 생명 공동체이기에 인류는 서로 도우며 살아가도록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장점을 가진 부자요, 다른 것들이 조금 모자라는 라자로입니다. 서로서로 나누는 만큼 서로를 가로막고 있는 ‘큰 구렁이’를 이어주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깨달아 나누는 만큼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국제관계나 한 개의 국가나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것이나 힘을 가진 사람이나 국가는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부자나 부유한 국가는 덜 가진 사람이나 국가와 나누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지배적인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은 나눔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나눔의 정신이 부족한 개인이나 국가 지도자는 더 가지려 하기에 온 세계와 국가,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오늘날 전세계가 군사 재무장을 운운하고, 강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인식과 더불어 불안이 팽배해지는 것은, 가난한 라자로에게 더 나누려는 선한 마음보다, 더 가지려는 부자 지도자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강한 국가 지도자가 보이는 어리석은 욕심은 아브라함 앞에 선 부자처럼 스스로 빠질 "큰 구렁이"를 점점 더 깊게 파고 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17.5-7) 예언자는 외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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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임을 말해줍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덧붙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사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듣지 못했거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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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주님!
당신을 믿지 못함은
보지 못해서 아니라,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기적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신비를 체험하고도 체험하지 못함은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완고함과 제 자신을 내려놓게 하소서!
자애심을 내려놓고, 당신이 주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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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사람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과연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후반부 말씀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사람이, 내가 문제입니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뿐 문제아問題兒요 살아 있는 생물生物의 나는 나도 모릅니다. 정치 역시 생물이라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결국 하느님 중심의 삶에로 귀결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끊임없는 기도의 삶이,회개의 삶이 답입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요, 역시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가 좋은 깨달음을 줍니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면 설사 세상이 나를 돕지 않아도 하늘이 나를 돕는다.”<다산>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임했으니 두 마음을 품지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시경>
정말 이런 믿음으로 사는 자가 하느님 중심의 올곧은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갈림없는 순수한 한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두 삶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과연 나는 어느쪽입니까? 하느님을 떠난 무지한 나 중심의 삶을 사는 자에 대한 묘사요, 이사야를 통해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 떠나 있다.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이런 내면의 삶이라면 아무리 좋은 외적 환경이라도 내면은 지옥일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삶을 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하느님을 내내 잊거나 잃은, 생각이 없는, 영혼이 없는, 의식이 없는 순전히 무지한 자기 중심의 욕망 추구의 육적 삶을 사는 이들이 그러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가 그러합니다. 부자의 내면이 이러할 것입니다만 그는 이것도 모를 것입니다. 모르는 이는 알려줘도 모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의 지혜에 이르기는 참 가깝고도 한없이 먼 길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내적공허는 외적 화려함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적공허는 여전할 것입니다. 그림같은 선명한 대조가 우리의 생각을 묻습니다. 어떤 부자는 익명인데 가난한 거지는 라자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라자로 이름 뜻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를 뜻하며 ‘가난한 이’에게는 잘 들어맞습니다. 정말 어떤 부자가 사람이었다면 그에게 구원의 표징과도 같은 라자로와 나눴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상실한 괴물같은 어떤 부자에게 라자로는 그냥 하나의 사물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이런 가난한 이웃들과 무관한 익명의 괴물같은 내면이 황폐된 부자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하느님 중심의 구원의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사람이 진짜 행복하고 자유로운, 내적 부요의 살아 있는 참 사람입니다. 이런 뿌리없이, 중심없이 표류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세상입니다. 삶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이런 믿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어떤 부자가 이러했을 것이며, 반면 외관상 가난했던 문앞의 라자로는 역설적으로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린 가난한 부자요, 내적 자유와 평화를 누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사후 이들의 처지는 완전히 바뀝니다. 불길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어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호소합니다. 아브라함 곁에는 라자로가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요 회개요 사랑의 실천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으니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형성된 단절과 불통의 구렁입니다.
어떤 부자는 다급하게 라자로를 자신 집에 보내어 다섯 형제가 고통스러운 이곳으로 오지 않도록 경고하게 해 달라고, 그리하여 그들이 회개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지극히 냉철합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회개가 어려운 무지로 굳어진 완고한 마음들인지 오늘날 불신의 사람들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연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 나는 누구인지 거듭 묻게 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와 배움을 통한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줍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 5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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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천국에는 이름이 없는>
오늘 복음의 얘기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건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천국에서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천국에 무조건 갈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진복 팔단의 가르침대로 살아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천국에서도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끝부분을 보면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한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말하지요. 자기처럼 자기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하는데 죽은 라자로가 가야 회개할 거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이 회개할 죄는 아니지요. 회개는 죄에서 회개하는 것이지 행복에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지요. 회개해야 할 죄는 이 세상 행복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도 갈망하지도 않은 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지도 갈망하지도 않은 이유는 오늘 예레미야의 말처럼 하느님보다 사람에게 의지하고 자기 힘과 돈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지옥에 있을 때처럼 이 세상에서 천국의 물 한 방울을 갈망했다면 지옥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사는 동안은 천국의 물을 갈망하지 않았고 천국의 물을 갈망하지 않은 이유는 이 세상사는 동안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며 만족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점이 회개해야 할 행복이고 죄스러운 행복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회개해야 할 그의 죄라면 다음으로 부자가 회개해야 할 죄는 라자로와의 관계입니다.
갈망하지 않은 죄가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 단절의 죄라면 사랑하지 않은 죄는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 단절의 죄입니다.
복음의 부자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부자 이기주의의 전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모두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만 부자들의 이기주의는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 아는 뻔뻔스러운 이기주의입니다.
그가 지상에서 살 때는 라자로와는 전혀 아는체하지 않았고 그의 고통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완전한 단절의 삶을 살았습니다.
드나들 때마다 봤지만 보고도 못 본 체했을 것입니다. 보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못 본 체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아예 마음 밖으로 라자로를 밀어냈을 겁니다.
그런 그가 지옥에 있을 때는 너무도 뻔뻔스럽게 라자로를 끌어들입니다. 그를 시켜 물 한 방울이라도 축이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애원합니다.
그리고 라자로의 고통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눈이 여전히 사랑치 않은 자기 죄는 보지 못하고 자기 고통만 보고 봅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의도적으로 라자로에겐 이름을 붙여주고 부자에게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고 그저 부자라고만 합니다.
천국 명부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는 뜻일 텐데 나 김찬선이는 천국 명부에 이름이 있을 건가?! 나 김찬선은 오늘 복음의 그 부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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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루카 16,25ㄱ)
<누가 더 황당할까?>
오늘 복음(루카16,19-31)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벌이 있는 저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단순하게 가진 것이 많은 부자는 벌을 받고,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거지 라자로가 상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본질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얼마나 저 세상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을 잘 준비했는가?'입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저 세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즐거움이자 기쁨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저 세상이 있다고 믿은 사람입니다.
그는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이 세상에 있을 때에 특별하게 살았습니다. 곧 너를 위해 가진 것을 나누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큰 기쁨이자 즐거움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저 세상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죽은 후에 보니 저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세상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는데, 죽어 가보니 저 세상이 없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황당할까요?'
'저 세상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 온 사람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저 너머의 삶, 곧 영원한 생명을 굳게 믿고 희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 가르침 대로 기쁘게 더 나누고, 더 희생하고, 더 봉사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잘 준비합시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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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 26)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천년만년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변화가 있기에
우리가
가야할 길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죽음은
그 누구의
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라자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위로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명을
다시금
묵상하게 되는
사순시기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이어지는
삶도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삶이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죽음이며
사랑의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죽음입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향해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만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안아주십니다.
십자가가
지나가는
시간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우리 삶을
어루만져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라자로의 고통을
라자로의 슬픔을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다시 돌아갈 곳이
하느님뿐임을
알고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구원하시는
위로하시는
하느님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을
함께 봉헌하는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서로의 노고와
고초를 위로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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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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