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이세돌이 라이벌 구리를 꺾고 삼성화재배를 차지했습니다.
전남 신안의 비금도 출신 이세돌은 희대의 바둑천재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보다 30년 앞선 천재성으로 따지면 이세돌을
능가한다고 말하는 조훈현 9단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전남 영암출신인 조훈현9단은 아시다시피 지금도 깨지지않고 있는 만9세의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 보유자입니다.
지금은 어릴적부터 바둑영재교육을 실시하면서 입단나이가 점점 어려져서 십대초반의 나이에 입단을 하는 기사들이 적지않지요.
이창호,이세돌,최철한을 비롯 요즘 각광을 받고있는 박정환9단도 모두 10대초반의 나이에 입단을 해서 대성한 기사들입니다.
하지만 조훈현9단이 입단을 하던 1960년대 초반만해도 어린나이에 입단을 한다는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시정잡대들의 놀음으로 여겼던 바둑에 대한 세간평도 그렇고 제대로된 교육시스템도 없는 시기였으니까요.
그런데 10살도 안된 아이가 그 어렵다는 입단대회 관문을 떡하니 통과했으니..
(당시 입단동기는 구수한 해설로 유명했던 고 김수영사범입니다).
한마디로 바둑계가 난리가 난거죠.희대의 바둑천재가 나타낫다고..
당시 한국 바둑계는 기재가 있는 기사는 나이를 불문하고 예외없이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났었죠.
현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9단을 비롯,김인9단,윤기현9단,하찬석9단...그리고 조치훈9단
이들의 공통점은 일본에 남은 조치훈9단을 빼고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예외없이 모두 당시 최고권위를 자랑하던
국수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일본의 바둑은 한국과는 비교할수조차 없는 강한 실력이었죠.
당연히 조훈현도 일본유학을 가게되었는데..
여기서 그의 바둑인생의 운명이 바뀌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만해도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가게되면 의례 기타니 도장으로 가는게 당연시 되던시기였습니다.
위에 언급한 유학파기사들 모두 예외없이 기타니 도장 출신이죠.
당시 기타니 도장은 한국의 유학파 기사뿐만아니라 일본 자국에서도 기재가 조금만 보이면 모조리 들어갈만큼 바둑 사관학교
역활을 하던 일본 최고의 바둑 도장입니다.
도장 동문들의 총단위수가 500단을 넘을뿐만 아니라 오오다께 히데오,린하이펑,고바야시고이치등 일본 현대바둑을 주름잡던
대 기사들은 거의 대부분 기타니 도장 출신입니다.
조훈현도 기타니 문하로 들어가기로 하고 일본에 도착했는데..일행중 한명의 권유로 기타니 도장으로 가는 도중
세고에 켄사쿠9단에게 인사차 들리게 됩니다.
세고에 겐사쿠9단..
기타니 미노루9단보다 20년 연상의 노기사로 현대 일본기원 최초의 9단이 된 기사입니다.
나이도 그렇고 그는 평생 오직 단 두명의 제자만을 두었는데 그 두명의 기사의 질량이 워낙 크다보니 일본기단에서는
기타니9단보다 더 권위를 높게 쳐주던 기사였죠.
그 두명의 기사가 바로 살아있는기성으로 불리우는 오청원9단과 관서기원의 창시자 하시모토 우타로 9단 입니다.
한명은 중국의 천재기사 한명은 일본의 천재기사..
오청원9단은 많이들 알고 계시지만 하시모토 우타로 9단은 잘 모르시는 분이 많은데 50년대 일본기원과 대립으로 인해
관서기원을 만들면서 일본기원에서 배척을 당해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천재성으로만 따지면 일본 최고로 여겨지는 기사입니다.
본인방,십단위를 차지했을뿐만아니라 면돗날로 불리우며 조치훈이 기록을 깨기까지 일본 최다인 타이틀획득수 64회를 기록했던
사까다9단이 10년세월을 그에게 막혀서 타이틀을 따지 못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죠.
이후..오청원9단은 루이나이웨이라는 정상급 남자기사들도 무서워하던 여제를 제자로 키웠고, 조훈현은 이창호라는 지존을
제자로 키워냈으니 세고에9단에서 시작된 바둑뿌리가 남녀를 불문하고 세계 최정상 바둑 지존들이 되었군요.
어쨌든 어린천재 조훈현을 본 세고에9단에게 3점으로 지도바둑을 두게됩니다.판이 짜이질 않았죠.일방적으로 조훈현 불계승..
"허허..석점으로는 판이 짜이질 않는군..두점으로 한번 더 해볼까나.."
세고에9단이 이말을 꺼내는 순간 주위에서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하죠.1년에 한두판 둘까말까하던 세고에9단이었는데..
2점으로도 조훈현9단의 일방적인 불계승..
세고에9단은 말합니다.
"내 비록 연로하여 언제까지 살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는 죽을때까지 거두고싶네.."
세고에의 그 한마디에 조훈현은 세고에9단의 세번째 제자가 됩니다.
또한 결국 세계바둑최강3국의 최고 천재들을 한명씩 제자로 두게되는 결과를 낳게되죠.
이소식을 들은 기타니9단은 기가막힐노릇이었지만 세고에9단의 권위가 워낙 높다보니 어찌할수없었죠.
이 사건으로 세고에9단과 기타니9단의 관계가 많이 소원해졌으며,후에 일본기원에서 입단한 조훈현이 뛰어난 성적으로 화제를
몰고다니는 모습을 보고 많이 속상해 하며 아쉬운 입맛을 다시곤 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입단후 일본기원 신인상까지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조훈현은 1972년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기위해 10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게됩니다.
그리고 같은해..노년에 마지막으로 애지중지 아끼던 마지막 제자를 떠나보낸 스승 세고에는 두마디의 유언을 남기고 83세의 나이에 천장에 목을매 자살을 합니다.
"노구의 몸으로 가족들에게 짐이되고싶지않아서 먼저간다",
"한국에 가있는 조훈현을 다시 데려와서 부디 최고의 기사로 만들어다오"
원래 조훈현9단도 처음에는 병역을 마치면 일본으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고 합니다.하지만 공군복무중에 최고위 타이틀을 떡하고
따내는 바람에 무산되고말죠. 타이틀을 버리고 일본으로 되돌아 갈수는 없었으니까요.
조훈현이 한국으로 돌아오자 한국바둑계는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또다른 일본유학파이자 동향출신의 김인9단이 국수위에 올라 1인자였고,권토중래를 노리는 조남철9단,윤기현,하찬석9등의
유학파와 13살에 바둑을 처음배우고 18살에 입단, 약관 20살, 2단 신분으로 천하의 조남철을 물리치고 명인을 차지한 서봉수까지
그야말로 군웅할거의 시대였죠.
그러한 한국기단에 일본에서도 차세대 정상급기사로 손꼽던 기재인 조훈현이 돌아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죠.
하지만 조훈현은 입대전까지 1,2년간 그의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올리지 못합니다.조국이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낮선환경,
한국말을 다 잊어버린 그에게 조국은 오히려 타국과 같이 느껴졌겠죠.
선배기사들이 장난으로 알려주는 바람에 조남철 국수에게 "야..반갑다"라고 반말로 인사했다는 에피소드도 그때 탄생한거죠.
하지만 적응기를 마친 조훈현은 부산일보 주최 최고위전을 시작으로 무서운 기세로 한국바둑계를 점령해갑니다.가끔씩 돌부리
역활을 하던 서봉수 이외에는 거칠것이없었죠.
마침내 1980년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바둑타이틀을 모조리 차지하는 파천왕의 대 업적을 수립합니다.
이후로도 1982년,1986년등 모두 세차례나 전관왕을 차지하게됩니다.실로 무시무시한 성적이죠.
하지만 이렇듯 한국바둑의 독보적인 1인자가 된 조훈현이지만, 바둑후진국 한국의 전관왕이라고 해봤자 세계바둑계에서는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우물안 개구리의 모습이라는거죠.
마침 일본에 남아있던 조치훈이 일본 명인위를 차지하면서 바둑동네의 모든 관심이 그에게로 쏠리게 됩니다.
일본유학시절 조치훈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내던 조훈현은 속으로 울분을 토하게 되죠.
"내가 일본에 남아있었다면 저 스포트라이트는 내차지였을텐데.."
하지만 얼마있지않아 조훈현에게 드디어 갈고닦은 보검을 휘두를 시기가 찾아옵니다.
바둑올림픽 응씨배세계바둑대회가 창설된거죠.
그러나..한국에게 배당된 출전권은 단....1장....유럽대표,미주대표과 똑같이 주어진 출전권 단 한장..
2인자 서봉수조차 초청장을 받지 못하는 수모. 그것이 당시까지 한국바둑을 바라보는 세계바둑계의 시선이었습니다.
한국기원에서는 보이코트 할 움직임을 보입니다. 유럽이나 미주같은 바둑불모지와 같은 취급을 받을수는 없다는거였죠.
하지만 우여곡절끝에 조훈현은 필마단기로 대회에 참가하게 되고 8강전에서 일본대표 고바야시고이치9단에게 믿기힘든
대 역전극을 펼치는등 기세를 타면서 결국 결승에 오르고..
중일 국가대항전에서 일본의 최강자들을 모조리 꺾으며 11연승을 올려 응씨배가 창설되는데 지대한 역활을 했던
네이웨이핑9단에게 3:2로 역전우승을 하며 한국바둑의 위대함을 세계만방에 알립니다.
그날 한국의 모든 신문방송매체들은 조훈현의 우승을 1면톱으로 다루었고,김포공항에서 여의도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지는등
대단했었죠.저도 생방송으로 보며 김수영9단이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면 울먹일때 같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납니다.
이때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이 지금의 한국바둑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바둑열기가 들불처럼 번져났을뿐만 아니라
변방취급을 받던 한국바둑을 일약 세계의 바둑 주류에 편입되게 만들었고 이후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세계바둑대회를 한국이
거의 독식하게되죠.응씨배도 조훈현이후로 서봉수,유창혁,이창호등 한국바둑의 4인방이 차례로 연속우승을 하게됩니다.
세월이 흘러 이창호에게 권좌를 물려주고나서도 여전히 바둑계의 최정상으로 군림하며 이창호와의 번기승부를 펼쳤고.상왕의
신분으로 틈틈히 세계대회를 섭렵하며 녹슬지 않는 바둑천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조훈현은 신예킬러로 유명했는데 최명훈,윤성현,윤현석같은 이창호와 동년배의 날고기는 신예들은 이창호를 알현하기도
전에 조훈현에게 먼저 꺾이는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이창호의 라이벌로 불렸던 중국의 창하오 조차도 조훈현에게 세계대회 결승에서 힘한번 못쓰고 물러나곤 했죠.
물론 나이를 먹다보니 덜컥수,착각수가 많이 나오면서 예전의 모습은 찾기 힘들지만 30세만 넘으면 승부의 세계에서 뒷전으로
물러난다는 요즘 바둑계에서,올해 61세 환갑의 나이에 반백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여전히 한국바둑리거로 활약하며 잘나가는
신예들에게 이따금씩 매운맛을 보여주곤 합니다.
재작년 비씨카드배 세계대회에서 구리와의 4강전에서 아깝게 반집으로 패해 물러났지만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구요.
이세돌의 나이가 올해30살이니까 앞으로 30년세월이 더 지나야 조훈현9단의 나이가 됩니다.
과연 30년후에도 조훈현9단같은 활약을 하고 있을지..야만없처럼 바만없지만..
어쨋든 이렇게 한국바둑이 지금처럼 세계최강의 하나로 인정받게 된건 조훈현9단의 역활이 절대적이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첫댓글 지금은 중단되어 아쉽지만, 조훈현 님을 주제로한 웹툰도 있던거로 기억합니다. 바둑 천하 제일이라 불리는데 부족함이 없던 이창호9단의 스승이 아니겠습니다.
바둑 삼국지 말씀이시죠? 정말 재밌게 보고 있었던 웹툰인데 연중되서 아쉬웠습니다.
조훈현이 한국바둑을 알렸다면 이창호는 한국바둑을 정상으로 올렸죠. 정말 대단한 스승과 제자입니다.
스승은 戰神.
제자는 돌부처.
참으로 오묘한 사제관계였죠.
잘 읽었습니다. 역시 대단하신 분 같네요 ㅎㅎ
천재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기사가 아닌가 합니다.
친구 아버님이신데.. 참 푸근한분이십니다. 다만 친구가 이창호씨의 그늘을 신경쓰는게 안타깝지만요.
근데 확실히 조훈현, 이세돌9단을 보면 우와 진짜 잘두네... 우와 어떻게 저런수를... 이런생각이 드는데 반면 이창호9단 플레이를 보면 어?왜저기에두지? 어라?저건또뭐지? 엥?왜삽질하지? 지겠는데? 이런식으로 가다가 항상 결국 작은차이로 이기는... 바둑이 화려하지않은 종목이라 그렇지 (극도로 얌전하죠 ㅋㅋ) 스타로 치면 홍진호폭풍저그급 캐릭터라고 생각됩니다. 아직도 신기하구요
불의 스승에게서 얼음의 제자가 나왔습니다. ㅇ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