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청와대 국고 강탈사건' 내막
- 중앙일보 보도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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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집무실엔 비밀금고 2개, 9억 5천만원의 돈 다발 발견
10.26 다음날인 27일 오전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큰딸 근혜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사를 위해 본관 2층 비서실장실을 수색해야겠습니다." 몇시간후인 오후 1시쯤 합수부 수사2국장 우경윤 대령과 수사간부인 중령 한사람이 청와대 본관 2층에 나타났다. 우 대령은 12.12때 정승화 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 총을 맞고 하반신 불구가 된 사람이다. 이날 김계원 비서실장은 낮 12시30분쯤 자택으로 돌아가 사실상 가택연금상태에 있었다. 수색작업의 초점은 비서실장 보좌관실에 있던 높이 1m 20cm, 폭 1m 크기의 철제 금고였다. 1층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소형 <금고1> 과 함께 박대통령의 통치 비자금이 보관되던 곳이었다.
우대령은 권 비서실장 보좌관에게 "금고를 열어달라"고 했고 그의 입회하에 내용물을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자기앞 수표 1천만원짜리 수십장, 5백만원짜리 수십장등 비자금 총액은 9억5천여만원. 이밖에 안보기밀문서 몇장과 방위성금 기부자 명단, 그리고 박 대통령이 세자녀 앞으로 만들어 놓은 적금통장 3개가 금고속에 있었다. 우대령과 권보좌관은 확인서에 도장을 찍은 후 한장씩 나눠가졌다. 금고는 도장찍은 테이프로 굳게 봉인됐다.
박정희 비자금중 6억원, 박근혜에게 전달
며칠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령 수사관을 다시 청와대로 보냈다. 이번에는 금고 내용물의 정리작업이었다. 중령은 "본부장께서 6억원은 유족 생계비로 근혜양에게 드리고 나머지는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고 했다. 권보좌관은 유족 대표로 입회한 박대통령 장조카 박재홍씨(당시 동양철관사장)와 중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샘소나이트 가방에 현금 수표 6억원을 차곡차곡 채워 근혜양에게 전달했다. 그다음 문제는 비자금 장부 처리였다.합수부측은 수사를 의식해서였는지 "우리에게 넘겨줄 수 없느냐"고 했지만 권보좌관은 "이것은 대통령 기밀사안이어서 누구도 볼 수 없고 남겨둘 수도 없다. 태워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버텼다. 근혜양도 이에 동의했고 합수부 중령은 아쉬운(?) 표정으로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비자금 문서는 권보좌관,박재홍씨,합수부 중령 3인의 눈길속에서 청와대 본관 보일러실 화로 속으로 들어갔다. <금고2>의 행방에 얽힌 사연은 대충 그러했다. 세인이 계속 궁금해하던 3억5천만원에 대해 전두환은 89년 12월 31일 국회 증언에서 "계엄사령관의 허가를 받아 1억원은 합수부 수사비로 쓰고, 2억원은 육군참모총장에게, 5천만원은 국방부장관에게 전달했다" 고 털어놓았다. 전두환씨의 독불장군식 전횡을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스토리인 셈이다.
※ ATAI의 증언 : 1979년도 울산 동구 미포복지회관 부근의 땅값이 - 정몽준 의원 사무실 부근 - 평당 8,500원 선이었는데 지금은 평당 최소 1,500만원에서 2,000만원이 된다. 만약에 그 당시 6억원을 전액 그 땅에 투자했다면, 2006년 말 시세로 환산할 경우 대략 1천60억원 ~ 1천4백12억원이라는 금액에 해당된다. 박근혜가 집어 삼킨 1천60억원 ~ 1천4백12억원은 마땅히 국고에 환수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바로 밑의 <금고1>의 내용도 주목하라.
또 하나의 비밀금고 행방
그렇다면 또다른 비밀금고인 <금고1>의 행방은 어찌됐을까. 10.26밤 숨진 박대통령 양복주머니에서 집무실 금고 열쇠는 근혜양에게 전달됐으며 근혜양은 <금고1>의 내용물을 챙겼다한다. 근혜씨는 그부분에 대해 여지껏 확실한 언급을 않고 있어 돈의 액수가 얼마나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박대통령이 <금고1>에서 돈을 꺼내 <금고2>에 넣곤 했다는 증언에 비추어볼때 적지않은 비자금이 남아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청와대 1층과 2층에 있던 두개의 금고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자금에 관한 비밀스런 사연이 수표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던 곳이다.
박대통령과 돈
<박대통령과 돈> 그 사이의 비선을 추적하는 작업은 결코 간단치 않은 것 같다. 비자금은 수면하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흘렀고 그 일에 몸담았던 이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하지만 몇몇대목에선 그 흐름이 공개적인 모양을 갖추었고 수입과 달리 씀씀이는 흔적도 남기는 법이어서 대충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가능한 일일게다. 통치 18년중 박정권의 비자금은 크게 두갈래 대목으로 나누어지는 모양이다.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후 72년 10월 유신까지가 그 하나고 나머지가 10.26까지 부분이다. 세인의 눈을 피해가며 공화당을 만들기 위해 김종필 그룹이 저질렀던 4대의혹 사건은 (증권파동,워커힐 호텔,새나라 자동차,빠찡고) 제쳐 놓더라도 유신전까지 박정권이 만들어냈던 권력형 정치자금에는 의혹과 부정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각각 세차례씩의 대선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과 격렬한 전투를 치러내기 위해 박정권은 자금을 긁어모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자금은 통치의 불가피한 비용" 이라는 철학을 세웠던 박정희 대통령은 효과적인 조달 방법으로 <4인협의회> 라는 것을 운영했다. 이후락 비서실장,김형욱 정보부장,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장기영 부총리등 막강 4인이 호텔 밀실에 모여앉아 기업을 상대로 정부 이권(利權) 장사를 요리했다는 것이다. 돈에 목말라했던 기업에 달러 차관이나 은행 대출을 주면서 적게는 3%, 많게는 10%까지 리베이트 (일종의 사례금)를 뗐고, 정부 발주공사에서도 일정 비율을 거두는 식이었다. 국내자본이 빈약했던 시절이라 돈이 급하기도 했거니와 달러 차관은 국내금리보다 엄청나게 싸 기업들은 어떡해서든지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으려고 4인협의회(이후락,김형욱,김성곤,장기영)의 눈치보기에 바빴다. (중략)
박정희 정치자금에 대한 Q씨의 증언
『정기적인 모금은 추석과 연말 두 차례 있지요. 대재벌 등 A급 기업은 연간 5억∼6억원 정도 낸 걸로 알아요. 유신초기엔 2억∼3억원 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플레도 있고 해서 차츰차츰 늘어난 거죠. 작은 곳은 2천만∼5천만원도 내고요. 그래서 합쳐보면 연간 총액이 초기엔 20억원, 나중엔 50억∼60억원 정도 였어요. 같은 기업이라도 액수를 못박아둔게 아니고 실적 좋으면 조금 많이 냈다가 형편이 안 좋으면 좀 줄이고, 뭐 그런 식이었죠. 그런데도 기업한테는 액수가 스트레스였는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느 그룹의 총수가 그때 경영실적이 별로 안 좋았는데도 회사규모가 크다고 무리해서 상당액을 총수 개인의 당좌수표로 냈어요. 그런데 구좌에 잔금이 모자라 은행지급이 안되더라고요. 부도에 몰릴 판이었죠. 그래서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께 말씀드렸더니 웃으면서 「돌려주라」고 하더라고요.』(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