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핫한 드라마인 도깨비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939년 동안 살아 온 도깨비에게 이제 그만 살고 죽으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
대사는 "무로 돌아가라"라고 나옵니다.
무로 돌아가라.
과연 이 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
뭐 이런 글을 쓰는 저는 그럼 과연 이해하고 쓰는 것일까요?
솔직히 아는 것이 전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관련하여 글을 쓰냐고 할 수 있겠네요.
그것은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 부분 즉 아는 것이 전무한 바로 그 부분에 대해
알고 싶은 심리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 아이러니하다 생각합니다.
관련하여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이름하여 제논의 역설이라는 것입니다.
제논의 역설
어느날 지구상에서 가장 발이 빠른 아킬레스는 거북이와 달리기 경주를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킬레스는 거북이보다 달리기 속도가 10 배 빠르므로 거북이를 10 분 먼저 출발하게 했습니다. 10 분 후 출발한 아킬레스는 과연 거북이를 이길 수 있을까????
이것이 제논이 세상 사람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제논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북이가 먼저 출발해서 간 거리를 100 m라고 하면. 아킬레스는 우선 거북이를 앞서기 위해서 거북이가 있는 100 m지점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거북이는 그 시간동안 10 m를 앞으로 갑니다.
다시 아킬레스는 10 m를 뛰어 거북이를 좇아 가지만, 거북이는 같은 시간동안 1 m를 더 나아갑니다.
아킬레스는 또 다시 1 m를 뛰어가지만 거북이는 같은 시간동안 10 cm만큼 더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결코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고 하는데,
아킬레스가 도중에 잠을 자서 거북이에게 경주에서 지게 되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은 뭔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마치 궤변처럼 들립니다.
그런에 이 궤변이 또 그럴 듯 했나 봅니다. 서양에서 이것을 가지고 많은 철학자들이 씨름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무로 돌아가라는 의미는
우리는 일상에서 거의 죽음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합니다만
실상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에 이는 동어 반복 비슷한 설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간 것을 보고 있기에
죽음에 대해서 그래도 뭔가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실상 한번도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에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죽음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죽습니다.
저는 저 제논의 역설이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고 하면
전생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내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지만
일단 전 지금 여기 이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생,현생, 내생을 인식으로 생각해 보면 모름과 앎 모름의 범위 안에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인식만 놓고 볼때 앎과 모름이 함께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 직전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제가 죽음직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
맞다면 전 죽음을 경험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경험한 것이 아니게 되어 전 살아서 죽음에 대해서 영원히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죽습니다.
즉 이것은 인식으로 생각하는 것과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별개라는 것입니다.
즉 무는 유의 모습을 띨 때 유는 그 무를 이해할 수 있지만 무 그 자체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는 무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결국 무로 돌아가게 됩니다.
논리적으론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겠지만 현실에서는 늘 따라잡듯이
그렇게 우리는 이 현실을 살아갑니다.
숭산선사님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흐흐흐
우리는 과연 이 삶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첫댓글 삭제 합니다.
글을 자삭하라는 의미인가요?
@달리다굼 제 의도를 아셨으리라
본다는 의미이며
님을 자극하는 댓글이므로
그리고 님은 이미 보셨으므로
댓글을 삭제 했다는 뜻입니다.
@처음처럼 정말 못봤는데요.
@달리다굼 핫 한 이라는 , 영어를
왜 섞어 쓰는지에 대해
기분 나쁘게 올린 댓글...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쓸 수 밖에 없으면 모를까
굳이 왜 영어를 섞어 쓰느냐
뭐 그런 댓글 ... 그리고 욕설
비슷한,,,
핫 한 이라는 문장?을
보고 미친년 화장하듯
하다는 느낌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
@처음처럼 잘 봤습니다.
제논의 학설.. 은 사기고..
모두 죽는다.. 는 현실이고 과학이죠.
모두 죽는다.. 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명제이기에..
반론할 필요도 없을겁니다.
그러나 제논의 학설?은..
모두가 인정하진 못하지만..
마땅한 반박논리를 찾지 못해서..
반론을 하지 못하는 것 뿐이죠.
ㅡ^^ㅡ
제가 제논에 학설을 사기라고 했는데요.
제논의 학설은 시간으로 사기를 친 케이스죠.
도달.. 과. 추월..
제논의 학설은..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는..
그 도달 시간 까지를 무한 분해 합니다.
그리고 그이후 출월 시간을 무시 해버리죠.
그래놓고..
그 학설에 "영원히" 라는..
시간개념을 떡 하니 붙여넣기 해버리죠.
상대성 이론도 마찮가지..^^.
그렇게 미끼를 던진다고 봅니다.
미끼를 물게하고 그것이 미끼인지 영원히 알 수 없게 하는 미끼 말입니다.
@달리다굼 제논의 학설로 수학이 과학이 현실인식의범위가 넓어 진것은 좋은것같습니다
제논의 설보다
여러분들의 생각으로 또다른 세상을 봅니다
@조국통일염원 아마도 각사람 만큼의 세상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말입니다.
그래서...,
공리의 정의...
공리에 가설을 더하면 ...
유클리드 공리 중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것은 평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최근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자명한 공리로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ㅜㅜㅜ
누구도 벗어날수없는 영원한 의문 에대한 문제제기가 주목됩니다, 오래전 "죽음 그 마지막성장" 이라는 책을 보았는데요, 대만의
대학교수가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되고, 자신이알던 주변의 암환자들이 항암제를 맞으며 투병하다가 혼미한정신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보아온 자신은 항암치료를하지않고, 고통을견뎌가면서 ,철학적,비교종교학적,명상적 사색과정을 일기쓰듯 쓴책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변해갑니다,두렵다 내가 이고통을 견뎌낼수 있을까> 고통을 견뎌내는 내가놀랍다,>여전히 고통스럽지만 내정신만은 점점 명징해짐을 느낀다>고통이 올때마다 내가 살면서 말,눈빛,글.표정,어떤
일로라도 타인에게 고통을 준적은 없는지 되돌아본다,마음깊은곳에서 참회와 용서, 화해,기쁨의 눈물이 흐른다 >>죽음이 가까이오고있음을느낀다, 허나 내정신은 명료하고 내영혼은 만개하려 하고 있음을 알고 기쁨에 떨고있다> 아!~~알았다 ! 인생의 비밀이 이것이었음을~,죽어가는 과정이 영혼의꽃이 만개하는과정이고, 비약적인 영적성장의 마지막 출구이자 새로운 여행의 입구라는것을~ 애벌래가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는것을~~
캬아~
@처음처럼 여성들은 첫 경험을 중요시하고 남성들은 처음을 근거로 그 다음 경험을 비교분석하길 좋아한다고 하죠.
처음처럼은 아마도 두번째 경험이 없으면 영원히 처음 경험이 어떤 경험인지 구별되지 않을 것입니다.
경험한 느낌은 있겠지만 말입니다.
애벌레는 나비의 일을 알 수 없고 나비는 애벌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문과댓글 좋군요^^
통으로 보시는 군요.
죽음이라는 명제가 통찰의 개념이 필요한 지점이겠군요. 우리가 죽음에 대한 인식을 3차원적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구운몽같은 소설이 그러한 한계를 벗어난 인식의 비유가 아닐까요?
통찰은 자신이 아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음을 아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것이 더 많을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인데 이게 글로 읽을 때는 고개가 끄덕이게 되지만
막상 의견이 상충될 때는 언제 고개를 끄덕였냐 하게 되기도 하지요.
거시세계에서는 뉴튼역학이 잘 맞아 들어가지만 미시세계에서는 거의 맞지 않게 되는데
미시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듯 모른다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생각합니다.
단 모름을 인정하면 메이비 할 수 있게되지 싶습니다.
그럼 상상을 펼쳐 소설을 쓸 수도 있고 즐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