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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과 7일 백두대간 5회차를 마친 지 거의 4주 만에 6회차를 떠난다. 4월 1일 오전 7시 40분 서울 남부터미널을 출발, 설천버스정류장에서 택시를 이용해 전북 무주군 무풍면과 경남 거창군을 잇는 덕산재에서 산행을 시작해 부항령에 이르고 삼도봉 아래 해인산장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다음날 삼도봉 올라 밀목재와 석교산 화주봉을 거쳐 우두령에 내려설 계획이었다. 물론 날씨가 도와준다면 황악산 넘어 추풍령까지 사흘째 일정을 이어갈 각오도 돼 있었다.
설천정류장에 내리니 오전 10시 40분이었다. 옥산휴게소에서 밥을 들지 않고 설천읍 몽고반점에 들르기로 했다. 볶음밥이 맛있다고 소문난 곳이다. 10시 30분 문을 여는데 주인장은 왁을 달구고 있었다. 윤 대통령이 의사 증원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만우절이다. 볶음밥은 먹을 만했다.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농협 ATM기 찾아 현금을 찾았다. 시골이라며 현금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서다.
성림택시(063-324-8000~2)는 정류소 바로 앞에 있다. 젊은 기사는 설천에 들어온 지 한 달 밖에 안 됐다며 덕산재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구천동 아래 라제통문 지나가요, 했더니 아, 김천에서 한 번 이쪽으로 넘어온 적이 있다고 했다. 지난번 산행에서 내려섰던 부평마을을 지나쳐 조금 달리니 덕산재가 나온다. 택시비는 2만원을 냈다.
11시 46분 덕산재를 출발했다. 부항령까지 5200m, 삼도봉까지 12600m라고 푯말이 가리킨다. 5.2km, 금방이네 생각했다. 아니었다. 시작은 부드러웠다. 833m 봉우리에 올라 내려가자 많은 대간꾼들이 뜬금없다고 한 전망대가 나타났다. 산그리메가 보이긴 하지만 어디를 보라고 만든 전망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조금 더 걸으니 길이 갈라진다. 마치 누군가 막은 듯이 나무가 넘어져 있고 길을 막았다. 두어 차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아래 지도의 붉은 선으로 칠한 산자락을 타고 말았다. 제대로 탔다면 853m 봉우리를 올라가야 하는데 나는 내리막길로만 가고 있었다. 사실 갈라지는 곳에서 배낭 속 지도를 꺼내 살펴봤어야 하는데 귀찮아 하지 않은 탓이었다. 멀리 보니 민가가 많이 보여 저곳이겠거니 생각한 잘못이었다.
표식기가 눈에 안 띄면 일단 의심하고 봐야 하는데, 한 달 전 눈이나 상고대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도 이제 눈도 상고대도 없는 산에서 또 길을 잃고 말았다. 또 나를 홀리게 한 것 중에 하나가 약초 재배하는 이들이 설치해놓은 흰색 테이프였다. 등산객 출입을 막기 위해 둘러친 것을 보고 아 이곳이 맞겠구나 여긴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참사였다. 산판 길을 내려오는데 놀란 고라니가 내 기척에 놀라 기괴한 울음을 토하며 달아난다. 길을 잘못 들었음을 절감한다. 인과 관계는 아니지만 등식 관계는 분명하다.
부항령까지 원래 2시간 정도인데 내가 월곡리에 이른 것이 4시가 다 돼서였다. 월곡리를 보고 내려가다 오른쪽 붉은 선으로 표시된 곳을 따라 올라갔다. 민가들은 있는데 길을 물어 볼 이도 없었다. 결국 맨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개들의 짖음에 쫓겨 내려와 부항초교 앞까지 걸어나왔다. 핸드폰 배터리도 떨어졌다. 이 시간에 부항령을 찾아가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에게 삼도봉 가는 길을 물으니 903번 지방도로의 반대편 해인리 쪽을 알려준다. 사실 나는 부항령으로 가야 하는데 이 할머니는 부항령이란 말도 처음 듣는 듯했다. 배낭 주머니에 넣어둔 충전기가 낙엽에 뒹구는 과정에서 사라진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됐다. 도저히 이 상태로는 산행을 이어갈 형편이 안 됐다. 가게 아주머니는 20분 뒤 지례읍 가는 버스가 온다고 했다. 거긴 편의점이 있다고 알려준다.
중년 부부, 한 아주머니랑 이렇게 네 사람이 20분 동안 좌불안석으로 끊어질 듯 말듯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례 편의점에서 충전기를 구입했다. 그러고 보니 여관이 보이지 않는다. 편의점 아가씨는 여관 같은 거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김천 나가야 하나 하고 낙담하고 걷다 한 가게에 들어가 잠잘 만한 곳이 없느냐 여쭈니 감천 건너 비타민 무인텔을 알려준다. 5만원이면 하루 묵을 수 있다고 한다. 터덜터덜 걸어가 방 얻어 샤워하고 6시 조금 안돼 밥 먹으러 나왔다.
원조 삼거리 불고기. 척 봐도 오래된 맛집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역민 두 팀 정도에 데이트여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남녀 두 쌍, 노모와 함께 찾은 내 나이 또래 부부 등이 손님이었다. 지례는 원래 흑돼지 고기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양념불고기를 주문했더니 일인분으로 큼지막하게 양념에 재운 일곱 점이 나왔다. 쫀득쫀득한 고기 맛을 만끽했다.
8시 반쯤부터 잠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눈 떠보니 1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별 짓을 다한다. 객실에 컴퓨터가 있어서 켜보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책을 읽었다. 마지막 기명 칼럼 '늑대가 돌아다니는데도'에 소개했던 리투아니아 작가 알바디스 슐레피카스의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2011년, 양철북)를 다시 찬찬히 읽었다. 지도를 읽으며 어제의 치명적인 실수가 빚어진 원인을 돌아봤다. 명연주 명음반에서 흘러 나오는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 귀기울이다 길을 잃었는데 이제 재방송으로 또 즐기고 있었다. 이제는 조금만 의심이 들어도 걸음을 멈추고 지도를 꺼내 확인하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오전 5시 방송사 애국가 연주를 들었다. 오랜만이었다. 화면에 등장하는 내용들이 현재의 일들로 많이 교체돼 있었다. 5시 30분쯤부터 모텔 주위 산새들 지저귐이 대단하다. 네 종류의 산새들이 무슨 사연을 제각각 풀어놓고 있었다. 녹차를 한 잔 끓여 먹고 짐을 챙겨 나섰다. 오늘 여정이 만만찮고 비도 올 것 같아 서두르기로 했다. 어차피 아침을 파는 곳도 없으니 가져온 베이글에 커피 끓여 먹자고 생각했다.
정류소에 나와 버스 첫 차를 살펴 보니 오전 7시는 넘어야 될 것 같았다. 지례콜밴(010-3542-4717) 사무실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오전 6시 10분,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결례를 무릅썼다. 잠이 덜 깬 목소리의 기사님이 응대한다. 사무실 앞이라고 했더니 놀라워했다. 곧바로 잠 기운을 떨치지 못한 기사님이 나와 가래침을 탁 뱉는다. 으레 하루를 그렇게 시작하는 모양이다.
전날 월곡리 부항초교 앞을 지나쳐 왼편, 내가 탈출했던 도로로 올라 탄다. 그리고 생각보다 먼 거리를 올라간다. 가목마을 지나쳤는데도 한참을 더 올랐다. 버스는 가목마을까지만 오니 버스를 탔더라면 시간 손실이 상당했을 일이었다. 기사님이 우두령에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와 황간 쪽으로 내뺄까 생각한다고 했더니 그러지 말고 다시 지례로 나와 버스를 타고 김천 가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했다. 오후에 다시 연락하자고 얘기했다.
그렇게 삼도봉터널 앞에서 부항령으로 올라선다. 삼도봉까지 8km라고 안내돼 있다. 산객들이 벼랑으로 오르내려 많이 허물어진 모양으로 큰길을 내고 있다. 포크레인이 떡하니 앉아 있다. 600m쯤 오르니 덕산재 쪽과 삼도봉 쪽으로 갈라지는 곳이 나온다. 7시 10분쯤 벤치가 있길래 아침을 먹었다. 베이글과 약과에 커피를 끓여 먹었다. 물을 끓이며 뚜껑에 베이글을 올려 데웠더니 먹을 만했다.
7시 54분쯤 태양이 뒤에서 비춘다. 돌아보니 대덕산과 초점산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전 8시 18분쯤 백수리산(1034m) 정상에 이르렀다. 처음으로 제법 시원한 조망을 즐겼다. 주변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고 소나무 한 그루만 남겨놓았는데 산행 내내 그 정상만 보고 백수리산 정상임을 알 수 있었다.
9시 44분 전망대에 이르렀다. 조망감이 360도로 확 터졌다. 얼마 뒤 박석산(1170m)가 나오는데 조망감은 그 아래 전망대만 못했다. 10시 10분 내리막길에 데크 길이 나타난다. 철쭉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였다. 철쭉 필 때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세석에 비길 만한 평전이다. 3분 뒤 웬 오프로드 차량이 올라와 멈추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에서 마주친 뒤 대간 길에 처음으로 사람이 눈에 띈 것이었다. 그들도 혼자 조용히 움직이는 내가 신기한 듯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뭐 손짓을 하며 아는 척할 일은 또 아니어서, 내 갈 길을 갔다.
박석산에서 2.1km 떨어진 곳에서 해인마을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오전 11시였다. 탈출할 때 긴요한 곳이다. 해인마을까지 1km 걸리니 내려가 하룻밤 청하고 다음날 이 길로 되짚어 올라와 대간을 계속하는 것이다. 전날 이곳까지 오려 생각했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 포기했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됐다. 그렇게 해서 해인마을 내려갔더라면 저녁 7시가 훨씬 넘었을 것이었다.
10분 뒤 산삼약수터 보이길래 잘 됐다 싶었다. 물맛이 끝내줬다. 라면과 누룽지를 먹고 에티오피아 커피까지 타 마셨다. 쉬는 김에 양말까지 벗고 약숫물로 발을 씻으며 피로를 벗겨냈다. 중년 남성이 내려와 눈치가 보였는데 그는 고맙게도 식사 잘 하시라고, 투박한 사투리를 건넨다. 데크가 깔려 있어 조금 내려가 봤다. 아래쪽에서 남녀 커플이 올라오길래 자리를 피해줬다.
삼도봉(1172m)까지 900m를 올랐다. 조망하는 맛이 일품이다.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금릉군), 전북 무주의 삼도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데크가 꽤 넓어 삼도에서 100명씩 올려 보내도 너끈히 자리를 채울 수 있겠다 싶었다. 멀리 덕유와 초점산, 대덕산 등 지나온 길과 1.4km 떨어진 석기봉(1200m)에서 민주지산(1242m), 각호산(1176m)으로 이어지는 각호지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으로는 산 중의 으뜸인 가야산이 압권으로 다가온다. 우두령까지 10,3km란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온다.
내려서면 삼막골재가 나온다. 오른쪽은 해인리에서 오르는 길이고, 왼쪽은 황룡사에 이르는 물한계곡이다. 한 대간꾼의 남행 백두대간에 어느 여자분들이 물한계곡 쪽에서 응원객으로 올라와 삼막골재에서 만나 석기봉에서 점심을 함께 나누고 한 여성은 석기봉 거쳐 민주지산으로 하산해 차를 몰아 부항령까지 태우러 달려왔다는 얘기를 읽으며 부러워한 일이 있다. 나는 그럴 사람 없고.
아무튼 1시 30분 감투봉(1123.6m)이 나온다. 밀목봉이라고도 부른다. 예전에는 나무가 워낙 빼곡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현재는 상당히 실망스럽다. 20분 뒤 밀목재에 이르렀다. 실망스러운 모습은 마찬가지다. 2시 40분 물소리샘 안내판이 나온다. 지금까지 대간 길에 본 표지판 중 가장 세련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와 달리 이 순간 하늘이 가장 푸른 빛을 띠었다. 김천시가 의욕적으로 조성한 물소리생태숲을 알리려는 취지인 것 같다. 마침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귄다. 길은 넋을 놓아도 좋을 만큼 편안하다. 다만 밀목재를 지나며 조심할 일은 하나 있다. 폐광 지역이므로 혹시 모를 사고를 예방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달라고 주문한다.
1089m 봉우리를 지나 푯대봉(1175m)에 도착해 아침의 기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후 3시 22분이었다. 배터리가 다 돼가 어찌될 지 모르겠다며 미리 언질을 했다. 5시 15분, 늦어도 5시 30분까지 우두령에 닿을테니 와주시라고 말씀드렸다. 사실 생각보다 진행이 원활해 황악산 추풍령에 도전할까도 생각했는데 다음날 비 양이 상당하다고 예보된 상황이라산행을 하기 위해 24시간 이상 기다리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니 석교산 화주봉(1207m) 내려가는 길이 만만찮겠지만 화주봉까지만 가면 그 뒤 1162m 봉우리 거려 815m 봉우리와 우두령 내려가는 일이 만만해 보였다. 지도에도 거리가 표시돼 있지 않아 그렇게 긴줄 몰랐다.
푯대봉 내려가는 길은 벼랑이라 로프가 설치돼 있었다. 위에서 보면 오씩해질 만한데 조금의 산행 경험만 있으면 침착하게 내려올 수 있는 길이었다. 약간 무섭긴 했다. 금방 끝났다.
4시 18분 화주봉 바로 아래 활공장과 비슷한 곳이 나온다. 이곳에서 돌아본 풍광이 장난 아니었다. 내가 땀을 쏟은 곳, 발품을 푼 곳이라 그런지 애정까지 묻어난다.
하지만 화주봉부터 우두령까지 3.7km나 되는 줄 정말 몰랐다. 1162m 봉우리를 지나면서는 금방이라도 우두령이 나올 것 같았지만 다가가면 또다른 고비와 오르막이 나왔다.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된 것 같았는데 한참 뒤에 보니 화면이 어둡게 돼 있었다. 1162m 봉우리에 도달했을 때만 해도 한 시간 앞당겨 우두령에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계속 길이 이어졌다. 가만 보니 오른쪽에서 길게 올라오는 도로가 보인다. 그런데 이 도로의 끝과 내가 걷는 길이 만나려면 한참 더 가야 할 것 같다.
전화를 배낭 속에 넣었는데 5시 10분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두 차례 받지 못했다. 28분쯤 전화기 명암을 밝게 만들어 통화했다. 와 계신다고 했다. 5분 뒤면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뛰었다. 아뿔싸 계단에서 미끄러졌다. 왼팔 뒤꿈치 쪽에서 피가 흐른다. 택시에 도착하니 5시 32분, 내가 말한 시간에서 2분이 늦어 있었다.
기사님에게 서울행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지례에 갔다 김천으로 이동, 시외버스를 타고 갈아 타고 하면 시간 손실이 상당하다며 은근히 김천 KTX역이 최적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곰곰이 생각하니 일리가 있다. 이렇게 해서 6시 28분 KTX 열차에 올라 8시 서울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기사님의 아들 얘기 등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처음에 4만 5000원 얘기했는데 내 지갑에 든 4만 3000원까지 해주겠다고 하셔서 도착한 뒤 내밀었더니 올라가면서 박카스 사먹으라며 1000원을 돌려주셨다. 감사히 받았다. 아울러 다음에 KTX 타고 내려와 시내버스로 김천 터미널로 이동한 뒤 지례로 와 택시를 부르면 우두령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굉장히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역에서 열차표 예매한 뒤 캔맥주 둘 사들고 들어가 만석에 가까운 열차 내 자리를 찾아 앉으니 모든 것이 꿈결 같았다. 20km 가까운 구간을 11시간 걸었다. 움직이는 데 9시간 30분, 아침과 점심에 1시간 30분을 썼다. 다른 산행기를 보니 덕산재에서 우두령까지 11시간 걸린 이들도 있었다. 짐이 나보다 가벼운 것 같았다. 이제 날이 풀렸다. 4월과 5월은 도시락을 싸들고 짐을 최소화해 주행 거리를 더 늘려야겠다. 덕산재~부항령 구간은 별 재미가 없고, 부항령~우두령 구간은 조망미가 대단했다. 신록이 물결치는 5월 초에 이곳을 다녀온 이들의 산행기 사진들을 보면 시샘 날 정도였다. 그 계절에 리마인드 산행을 계획해봄 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