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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원문보기 글쓴이: 일어나 함께 가자
세속사회 속에서 성경의 원리에 가까운 정치체제는 무엇인가?
인간은 함께 살도록 지음을 받은 인격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만들게 되고, 사회가 있으므로 해서 정치가 발생한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맹자는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과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죽인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고 대답하자, 맹자는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를 잘 못해 백성을 죽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재차 묻는다. 양혜왕은 “그것 또한 다를 바 없다”고 답한다.(‘맹자’ 양혜왕)
정치의 원형은 하나님의 통치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는 권한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과연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가장 부합되는 정치체제는 무엇일까? 최선의 정치체제는 간단히 결정될 수 없다. 정치체제에 비인간성이나 비윤리성이 없는 한 어떤 정치체제든 가능하며, 각 나라의 형편에 따라서 적절한 형태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 나라의 수준에서 “어떤 정치제도가 하나님의 뜻을 인간생활에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어떤 정치체제가 성경의 원리에 부합되는지 혹은 부합되지 않는지 하는 기본적인 원리를 제시할 의무가 있다.
ㆍ교회는 전체주의 체제를 배격한다.
ㆍ교회는 무정부주의를 동의할 수 없다.
ㆍ교회는 자유민주주의 정치형태를 상당 부분 동의한다.
ㆍ교회는 공동체적 자유주의를 지향한다.
1. 교회는 전체주의 체제를 배격한다.
ㆍ전체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
ㆍ전체주의는 개인의 도덕성 혹은 존엄성을 묵살한다.
ㆍ전체주의는 일종의 종교이다.
ㆍ전체주의는 선동과 포퓰리즘(인민주의)을 이용한다.
ㆍ전체주의는 역사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1) 전체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통제한다.
① 자율 대신 타율이 절대화된다.
ⅰ. 이탈리아의 독재자였던 무솔리니는 1920년대 초반 이탈리아의 파시즘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전체주의는 주로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이념으로 사용되며 독재와 그 개념이 유사하다.
ⅱ. 전체주의(공동체주의)는 공동체 밖의 개인은 존재할 수 없으며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인간 형성과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개인의 선택에 앞서 공익ㆍ공생ㆍ공동선을 최상의 이념적 가치로 간주한다.
ⅲ. 전체주의(totalitarianism : 국가통제주의, 일당독재주의) 사회는 불가피하게 강제적 간섭과 규제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공산주의국가나 사회주의국가에서는 평등사회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모든 면에서 통제와 억압을 사용한다. 이기적 인간들을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강제가 필요하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만큼 분배 받는다”라는 강령의 실현을 위해서는 독재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권력의 힘으로 이기적인 자본가를 없앨 수는 있지만 그 빈자리에 이기적인 권력자가 대신 앉을 수밖에 없는 모순이 발생한다. 평등은 실현될지 모르지만 그 대가로 개인의 자유는 빼앗기고 만다.
ⅳ. 북한은 공산주의국가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정부가 주민생활을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6ㆍ25전쟁 때 인공(人共) 치하를 살아본 세대들은 말한다. “아침에 눈만 뜨면 새벽부터 ‘민주 선전실’에 가서 교양을 받고, 폭격이 뜸한 밤에는 거리에 나가 ‘약소민족의 위대한 은인이시며…’로 시작되는 길고 긴 수식어가 붙은 스탈린 대원수와 김일성 장군 만세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구호를 소리소리 지르며 거리를 행진하고 그러다 녹초가 돼 쓰러져 자고 나면 다음날 새벽 다시 ‘민주 선전실’의 교양….”
② 자유와 평등은 사람의 다리처럼 늘 한 몸으로 가야 하는 기본가치이다.
ⅰ. 자유와 평등은 인간 사회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앞서 가는 상대가치가 아니라 선택불가의 양립적 절대가치다. 존 롤스의 ‘정의론’(1971)에 따르면 아무리 바람직한 주의ㆍ주장도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정한 공론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정당화될 수 없다.
ⅱ. 이에 대해 전체주의는 만인(평등)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다는 이름 아래 개인적인 자유를 말살한다. 전체주의는 일체의 비판의 소리에 재갈을 물린다. 따라서 전체주의 아래에서는 설사 둑이 터진다 해도 일반 백성들은 그 위험을 전혀 모른 채 지낸다. 결국 물길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린 뒤의 참담한 상황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 되고 만다.
(2) 전체주의는 개인의 도덕성 혹은 존엄성을 묵살한다.
① 전체주의 국가에선 개인적으로 지켜야 할 절대적 도덕이 존재할 수 없다.
ⅰ. 전체주의에서는 특정사회에 이익이 되는 행동들만이 도덕적이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모두 비도덕적이다. 따라서 전체주의 사회엔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반역자가 되고, 오늘의 충성스러운 행동이 내일의 배신적 활동이 될 수 있다.
ⅱ. 역사적으로 중국 공산당 모택동은 혁명이란 이름으로 7700만 명의 중국인들을 학살했고, 소련 공산당 스탈린은 6000만 명을 학살했고, 캄보디아 폴포트 공산정권은 250만 명을 학살해 아름다운 땅 캄보디아를 킬링필드로 만들었다.
② 전체주의 국가에서 생존하려면 국민들은 스스로 비인격적 인간으로 변신해야 한다.
ⅰ. 오타 시크는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생존 법칙 10계명을 제시했다. 그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 일컫던 체크슬로바키아 개혁 공산주의 운동의 주역 두브체크와 함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던 경제학자이다. 그러나 그 해 여름 소련의 전차부대가 침공해 프라하의 개혁운동을 짓밟아 버리자 스위스로 망명해 대학 강단에 섰던 인물이다.
ⅱ. 그의 10계명은 “1. 바보가 되라. 2. 그게 안 되면 생각하지 마라. 3. 생각은 해도 말하지 마라. 4. 말은 해도 글은 쓰지 마라. 5. 글은 써도 서명은 하지 마라. 6. 서명은 해도 내 것은 아니라고 잡아떼라. 7. 그게 안 되면 미쳐버려라. 8. 그러지도 못하면 자살을 하라. 9. 그것도 못하면 서방으로 탈출하라. 10. 그러지 못하면 당에 입당해 버려라”이다.
ⅲ. 만약 북한의 6ㆍ25 남침 전쟁으로 대한민국이 통일이 됐더라면, 남쪽의 우리도 그로부터 40-50년 동안 오티 시크와 그의 동포처럼 미쳐버리거나 자살하거나 혹은 탈출을 시도하거나 당원이 되어버려야 하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불행을 맛보지 않게 된 것은 우리들의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 오직 38선 이남에서 우연히 삶을 얻는 행운(하나님의 은혜)이요, 또한 해방 후 이 땅에 대한민국 건설을 주도한 선조들과 이를 도와준 미국을 비롯한 우방의 덕택이라 하겠다.
ⅳ. 북한의 집단체조 ‘아리랑’(김일성 ‘태양’ 민족과 선군정치의 체제선전용 작품)은 출연 인원이 10만 명에 이르는 초대형 공연으로 전체주의 집단예술의 총화이다. 무용가 국수호씨는 평양에서 ‘아리랑’을 본 소감을 “세계에서 북한만이 할 수 있는 집체 의식”이라고 말한다. 공연이 아니라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는 “출연진이 보여준 참여도, 완성도가 거의 종교적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규모와 그런 분위기의 공연은 동원체제가 아닌 자유세계에서는 할 수가 없다. 1만 명 이상의 한국 사람들이 이미 ‘아리랑’을 보고 “대단하다!”는 감탄을 터뜨렸다지만 그 감탄에 놀라움과 혐오감, 연민,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저런 거 안 해도 되니 다행이라는) 안도감마저 섞여 있다는 것을 북한은 알고 있을까.
ⅴ. 오늘날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매스게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학부모들의 항의로 전국제전에서 학생 동원 매스게임이 사라진지도 오래되었다. 전국제전 등의 개ㆍ폐회식은 전문업체가 맡아 전문 출연진과 예체능 전공 학생으로 꾸미고 있다. ‘아리랑’은 온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인 개개인을 체제선전용 도구로 전락시켜버리는 전체주의의 비인격성ㆍ폭력성의 표본이다. 그 같은 집체의식을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한국의 힘이다.(박선이/조선)
(3) 전체주의는 일종의 종교이다.
① ‘사회주의’와 ‘유물변증법’
ⅰ. 전체주의는 십계명의 제 1계명인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못 한다”는 성경의 교훈을 근본적으로 거스르고 있다.
ⅱ. 공산주의 이론은 철학적으로 ‘사회주의’와 ‘유물변증법’이다. 유물은 물질이란 말이요 변증법이란 움직이고 변한다는 뜻이다. 곧, 세상은 오직 물질(경제)에 의해 움직이고 변화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당신 앞에는 영생을 얻는 영광이 넘치는 싸움이 있다. 이 생명은 기도나 신비적인 예수에 대한 찬양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손과 노동 그리고 재능에 따라 획득되는 생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비판한다(러시아 선교회의 ‘공산주의자와의 대화’ 중에서).
② 북한의 전체주의의 특이성.
a. 북한의 수령제는 ‘주체사상’의 신격화와 ‘개인’의 신격화를 결합한 이중(二重)의 신격화 체제이다.
ⅰ. 북한의 주체사상은 북한 주민들에게 “내가 너희 신이다. 너희는 나를 숭배해야 한다. 오로지 나만을 받들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면 도덕, 종교, 인간의 관습, 예의범절 등 그 밖의 무엇이든 너희는 철저히 거부하고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너희의 완전한 충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강요한다.
ⅱ. 1974년 김정일이 만든 ‘유일사상 체계 확립 10대 원칙’ 가운데 제 1조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해야 한다”이며, 2조는 “수령님을 높이 우러러 모시는 여기에 우리 조국의 끝없는 영예와 우리 인민의 영원한 행복이 있다”이며, 8조는 “수령님께서 안겨주신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는 육체적 생명을 초개와 같이 바칠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ⅲ. 실로 북한에서 수령은 ‘주체사상’이라는 종교적 기반 위에 세워진 신격화된 존재이다. 국가를 이끌기 위해 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인민은 그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바쳐야 한다.
b. ‘수령’은 정교분리가 이루어지던 봉건시대 군주의 지위와 권능을 훨씬 능가하는 절대적 존재이다.
ⅰ. 절대왕정의 절대 권력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짐이 국가”라며 프랑스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하지만 북한의 ‘수령’은 그 이상의 존재이다.
ⅱ. 수령제 아래 국민은 어떠한 존재인가. 2007년 수해(水害) 때의 일이다. 물에 빠진 농장원 차향미씨는 구조자의 손에 김일성ㆍ김정일의 초상화부터 넘겨주다가 목숨을 잃었다. 노동자 강형권씨는 5살 난 딸이 물에 빠지자 딸을 버리고 초상화를 지켜냈다. 박종렬씨는 아내와 자녀를 산사태에 잃으면서 초상화부터 건져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런 사실들을 선전하며 “오늘 자기 존재도, 값 높은 존엄과 행복도 ‘수령 결사 옹위의 길’에서 찾는 것이 조선인민의 인생관”이라고 자랑했다.
ⅲ. 이상우 전 한림대 총장은 “주체사상은 유일신적 종교와 맥을 같이 하며 북한은 엄격한 신정체제”라고 말한다. 김일성의 생일(4.15일)은 ‘태양절’로 지키며, 금수산 기념궁전이라는 ‘성전’이 있다. 김일성은 영생하고 있으며, 주체사상은 영원한 ‘김일성 민족’의 넋이다(‘조선문학’ 99년 7호). 김일성ㆍ김정일의 동상이 북한 곳곳에 세워져 신격화되고 있다.
ⅳ. 북한의 수령제는 1945년 이전의 일본의 천황제(인간신)와 공통점이 있다. ‘최고 존엄’으로 호칭되고 있으며, 대를 이어 충성하는 세습제도 역시 동일하다. 일제 식민통치의 거대한 유산이 북한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 공산당기관지 ‘뤼마니테’(2000.5.17)는 “북한 체제를 공산주의와 동류로 취급하는 것을 참을 수 없으며, 또한 북한 스스로 감히 공산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좌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신지호. 서강대겸임교수)
(4) 전체주의는 선동과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이용한다.
① 전체주의는 대체로 ‘대중독재’의 형식을 취한다.
a. 전체주의 국가의 출현에는 국민들의 책임도 있다.
ⅰ. 근대 독재 체제의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그 독재에 열광한 대중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론을 ‘대중독재’라고 한다.
ⅱ.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집단 학살했던 독일의 나치스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패전 후 전쟁 책임을 깨끗이 인정하고 반성했던 독일의 바로 그 국민이 1932.7 나치스를 제 1당으로 만들고 히틀러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한편으로 전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론 전쟁에 열광했다.
ㆍ‘히틀러 유겐트’는 나치스의 청소년조직으로, 1939년 독일 청소년 887만 명 중 98%에 이르는 870만 명이 가입한, 국가적인 대규모 조직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순전히 나치스의 강압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ㆍ사실 당시 그들의 눈앞에 닥친 전쟁이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스스로 희생할 전사가 될 기회”이자 또한 “번쩍거리는 군복을 입은 장교가 되고 장군이 되어 훈장과 아름다운 처녀들의 시선을 받는 미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ㆍ이와 같이 나치스가 강요하는 독재란 단순히 ‘외부로부터의 억압’만 가지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 감정을 자극하는 선전을 통해서든, 자발적인 동의와 참가의 형태로든 ‘대중의 동조’가 존재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ⅲ.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즘(fascism : 독재적 국가사회주의) 정권이나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나치스와는 달리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수 십 년 동안 정권을 지지하고 대외침략을 뒷받침한 것은 역시 국민이었다.
ⅳ. 또한 피비린내 나는 정치테러와 강제수용소로 특징짓는 러시아의 스탈린 체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던 일본의 군부 전시체제, 심지어 나치스 독일의 괴뢰정권이었던 프랑스의 비시 정부까지 광범위한 국민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ⅳ. 반인간적이고 반민족적인 수령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도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칭하고 있다.
b. 전체주의 국가들의 국민들은 ‘독재의 희생자’이면서 체제의 공범인 측면도 있다.
ⅰ. 국가의 폭력과 강제는 표면에 드러나는 현상일 뿐 그 아래에는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고 자발적 동원을 만들어내는 정교한 장치들이 있었다. 예컨대 독재자들은 대중에게 꿈을 불어넣음으로써 체제의 지지자로 만들었으며, 한편 대중은 독재자에게 열광했던 것이다.
ⅱ.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 체제 때에도 당시 지식인들은 ‘민족번영’ ‘국가발전’이라는 근대화 담론에 압도당했고, 노동자ㆍ농민 등 대중은 물질적 성취와 평등주의에 적극 호응했던 것이 사실이다(물론 박정희는 과보다 공이 훨씬 많은 독재로 평가되지만).
ⅲ. 이처럼 대개의 독재는 ‘대중독재’ ‘합의독재’ ‘아래로부터의 독재’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강압적이든 자발적이든 간에), 그것이 초래한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국민들도 다소간에 책임을 공유한다.(임지헌ㆍ김용우의 ‘대중독재’ 참조)
ⅳ.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1Q84’에서 일본의 대중(大衆) 전체주의를 비판한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진정한 주체들은 천황(天皇)이라는 빅 브라더가 아니라 이름 없고 얼굴 없는 무수한 일본 국민들, 곧 리틀 피플이라는 것이다. “리틀 피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분명하게 우리 발밑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다.” 리틀 피플의 정체는 일본 국가주의에 묵묵히 복종해 온 대중이다.
② ‘대중독재’는 ‘포퓰리즘’적이다.
a. ‘대중독재’의 이면에는 ‘포퓰리즘(populism)’이 있다.
ⅰ. ‘포퓰리즘(populism)’은 인민을 뜻하는 ‘포퓰루스(populus)’에서 유래한 말이다. 포퓰리즘은 권력을 ‘순수한 인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면서 민주주의를 팔아먹지만, 실상 권력은 소수 선동 정치인이 장악하기 때문에 비민주적이다.
ⅱ. 포퓰리즘의 두 축은 ‘인민주권 회복론’과 ‘감성 자극적 단순 장치’이다. 포퓰리스트들은 인민을 미화하고 엘리트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한다. 포퓰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법치주의와 자유주의를 위협한다는 점이다. 정치 경험이 오래지 않은 신생국가에서 포퓰리즘은 재앙이다.
ⅲ.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은 ‘평등’을 내세우며 분열과 대립(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기업가와 근로자, 수도와 지방 등)의 정치학을 구사하고, 대통령답지 않은 말투로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 분류된다.(서병훈의 ‘포퓰리즘’)
ⅳ. 토크빌(1805-1859)은 그의 책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자유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의 하나로 ‘평등’에 대한 열정을 들고 있다. 민주사회를 특징짓는 지배적인 열정은 평등에 대한 열정이며, 이를 얻기 위해서라면 인간은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고 전제정치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자유인으로서의 평등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달성할 수 없으면 차라리 노예로서의 평등을 원한다.” 이처럼 ‘평등’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은 국가권력의 집중과 전제화(專制化)를 허용함으로서 궁극적으로 민주적 전제(專制)를 초래한다.
b.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
ⅰ. 1949년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쓴 역(逆)유토피아 소설 ‘1984년’의 작품 속 전체주의 사회는 ‘당(국가)’이 ‘전체 인민의 행복과 평화’를 내세워 모든 개인의 삶과 자유를 박탈한다.
ⅱ. 인민은 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사는 물론 말이나 생각, 심지어 머릿속 기억까지 끊임없는 통제와 감시를 받는다. 그리고 종국엔 권력의 숨은 얼굴인 ‘대형(大兄ㆍ빅브라더)’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기까지 세뇌되고 순치된다. ‘빅브라더’는 완전무결ㆍ전지전능하며, 모든 성공과 발전, 지혜와 행복은 그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ⅲ.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의 정신이 완전히 길들여져 “당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를 표시했을 때, ‘대형’은 마침내 이렇게 본색을 드러낸다. “당은 오직 권력 그 자체를 위해 권력을 추구한다. 우리는 타인의 행복에는 흥미 없고 권력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권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다.” 자유를 내세우든 평등과 평화를 내세우든 그것은 겉 명분일 뿐, ‘당’과 ‘권력’의 관심은 인민의 행복과는 무관하며, 오직 자기 지배력의 증식과 강화에 있을 뿐이라는 고백이다.
ⅳ. 이 책은 전 인민의 행복과 평화라는 구호 아래 모든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획일적 전체주의가 어떤 반인간적 비극과 파국으로 가는지를 보여 준다.(이청준ㆍ조선)
(5) 전체주의는 역사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칼 포퍼(1902-1994)는 그의 책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전체주의의 ‘역사주의’의 허구성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ⅰ. 전체주의는 역사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역사주의란 인류 역사의 전 과정이 냉혹한 역사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전개되어 간다는 역사 결정론이다. 현대의 가장 중요한 역사주의는 파시즘의 역사주의(애국주의, 배타적인 국가중심주의, 독재적 국가사회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역사주의(변증법적인 역사 진행 곧 계급투쟁에 의한 공산사회 완성)이다. 그러나 이들 역사주의가 주장하는 역사의 법칙은 참다운 법칙일 수 없다.
ⅱ. 역사주의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이비 법칙을 인간의 역사에 덮어씌움으로써 인간을 운명의 노예로 만들면서 ‘전체주의 억압사회’를 정당화한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에 대한 반역이다. 유토피아주의도 완벽한 청사진을 기초 삼아 사회 전체를 한꺼번에 변혁시키고자 한다. 사회 전체에 대한 강조에서 유토피아주의는 전체주의와 동맹관계에 있다.(이한구ㆍ성대교수)
2. 교회는 무정부주의를 동의할 수 없다.
(1)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ⅰ.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발전하던 19세기는 빈부의 격차, 국가의 개인에 대한 지배 등 부정적인 측면 또한 나타나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사회체제를 구상하는 사상운동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사회주의와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이다.
ⅱ. 사회주의가 국가 권력의 장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과 ‘평등’을 꾀했다면, 아나키즘은 국가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하려고 했다. 20세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판 대결이었으며, 아나키즘은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패배한 후 아나키즘은 유일한 대안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ⅲ. 아나키즘은 인간의 자아성취를 위한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의 보장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탈(脫)집단화와 자유지상주의를 주장한다. 그리고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데는 법이 필요 없다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ⅳ. 그러나 아나키즘은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부패성을 부인하는 잘못된 인간론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그 결과는 유토피아가 아닌 무질서만을 낳을 뿐이다. 성경은 정부를 부인하지 않는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
(2)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ⅰ. 인간은 공동체 내에서 비로소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ⅱ. 공동체의 방해물은 인간 사회의 ‘대립과 갈등’이며, ‘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개인주의와 사유재산제에 있으므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사회혁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ⅲ. 박홍규는 그의 책 ‘아나키즘 이야기’에서 아나키즘은 ‘국가ㆍ사유재산ㆍ종교가 없이 자유롭게 사는 사회’를 추구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흔히 무정부ㆍ무질서ㆍ무법ㆍ파괴ㆍ폭력 등으로 특징짓는 아나키즘이 실은 ‘자유ㆍ자치ㆍ자연’을 지향점으로 하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사상임을 강조한다.
ⅳ. 결과적으로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주의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김은석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참조)
3. 교회는 자유민주(공화)주의를 상당 부분 동의한다.
ⅰ. 일부 기독교인들은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제체제가 자본주의인지 돌이켜 고민해야 한다. 내가 남을 짓밟아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체제,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뒤처지는 체제가 성경의 여러 ‘말씀’들과 맞아 떨어지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ⅱ.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상응하는 국가의 통치는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왔다. ‘현대사회학과 한국 사회학의 위기’의 저자인 민문홍 교수는 “기독교 세계관에 제일 가까운 것이 자유민주주의가 신봉하는 것들이다. 마르크시즘, 네오마르크시즘은 기독교의 인간관과 신앙관을 부정한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전체주의적 사고를 전제하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사고와 양립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는 미국식 모델(신자유주의)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말씀처럼 기독교인들은 변화하는 세계의 환경을 잘 봐야 한다. 유럽은 자신들에게 적합한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도 우리에게 맞는 자본주의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추구한다.
개인의 자유를 추구한다.
공화(共和)를 추구한다.
인간의 오류와 부패성을 전제로 하는 제도이다.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최선의 제도는 아니다.
(1)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추구한다.
① 개인과 공동체 중에 개인이 우선한다.
ⅰ. 우리나라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는 수령 1인을 제일로 하는 인민민주주의라든가 노동자ㆍ농민 등 특정 계층만을 대변하는 민중민주주의(사회주의 민주주의)와는 구별된다.
ⅱ. 자유민주주의는 일부 계층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을 대변하며, 개인을 공동체보다 앞세운다.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개인의 자유ㆍ자율ㆍ자결 등을 옹호하며, 개인의 권리를 최고의 이념적 가치로 추구한다. 특히 ‘자결(자기결정)’은 인간이 도덕적 존재로 존중받고 있다는 징표가 된다.
ⅲ. 자유민주주의의 특징은 되도록 개인적 선택의 몫을 늘리고 지켜주는 데 있다. 곧, 국민의 권리 보장을 위해 국가 권력을 가능한 한 제한한다. 우리 헌법 제2장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중략)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선언한다. 정부의 통치 목적은 모든 국민의 천부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데 둔다.
ⅳ. 자유민주주의가 보다 훌륭한 제도인 것은 인간의 인권과 존엄성을 인정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후꾸야마는 그의 책 ‘역사의 끝과 최후의 인간’에서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 동기, 곧 ‘경제적 동기’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고 말한다. 인정받고자 하는 동기에 대해 그는 ‘인류의 인정 투쟁’이라는 표현을 쓴다. 공산주의가 20세기 초에 온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으나 20세기 후반에 와서 몰락하게 된 이유는 사유재산 등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본성상 인정을 받을 때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②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한다.
ⅰ.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한다. 국민 주권의 구현은 국가의 근본법인 헌법 제정을 비롯하여 간접민주제(국민대표제) 및 직접민주제(국민표결제)에 의해 구현된다.
ⅱ. 자유민주사회는 국민의 손으로 국민의 대표를 직접 선거하여 선출하고, 이들 대표들도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의사를 결정한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민주주의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없다면 권력을 쥔 쪽은 반드시 교만하게 되어 있다. 국정을 잘못하면 다음 선거에서 권력을 놓치게 된다는 사실이 권력자를 겸손하게 만든다. 이런 압박이 권력자로 하여금 좋은 정치를 하도록 촉진시킨다. 이래서 민주정치는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다.
ⅲ. 이처럼 자유민주사회의 국민들은 직접 투표에 의해 정권을 심판하며 원하는 정권을 선택한다. 국민의 동의 없이는 아무도 그들을 다스릴 수 없으며, 그 대신 선택에 대한 책임도 국민에게 분배된다. 이 같은 ‘다수결의 원칙’과 ‘대표성의 원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요체다. 다수결의 원칙이 현재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의사결정 방식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미국 헌법 서문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지도자를 뽑을 수 있는 권리를 주셨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2) 개인의 자유를 추구한다.
ⅰ. ‘자유민주주의’는 ‘민주화’와 ‘자유화’, 두 가지 목표를 지향한다. ‘민주화’란 국민이 투표를 통하여 대통령을 뽑고 정부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화’란 민주적으로 뽑힌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 생명과 재산을 하늘처럼 받드는 것을 의미한다.
ⅱ. 민주화가 되었다고 해도 뽑은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을 하늘처럼 섬기지 않으면 ‘자유 없는 민주주의’ 혹은 ‘유사 민주주의’가 된다. 자유민주주의의 성공을 위해서는 ‘민주화 이후’가 더 어렵고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독재자와 싸워 ‘민주화’를 쟁취하고 나서도 ‘자유화’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박세일)
① 자유는 인간의 본성이며 권리이다.
ⅰ.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문의 주제 중 하나는 ‘자유의 선언’이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범한 존재로 태어났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 권리 중에서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ⅱ. 이 자유의 선언이 있은 몇 년 뒤 프랑스혁명이 일어났고, 프랑스혁명은 유럽 여러 나라의 시민혁명으로 이어졌으며, 이 자유의 선언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1789년 프랑스 국민회의는 ‘인간과 시민의 선언’ 제1조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한다”고 말했다.
ⅲ.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대세로 굳어진 오늘날 ‘자유’는 인간의 본성이자 천부(天賦)인권으로 간주된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한다. 인간은 자유로울 때 비로소 삶의 주인이 되며 행복을 경험한다. 인류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 이래, 자유는 빵이나 돈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ⅳ. 로마제국시대에 노예해방을 주동했던 스파르타카스는 탈출한 노예들을 향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주인을 위해 싸웠지만, 내일 스스로를 위해 죽을 것이다. 그런 게 자유란 것이다”라고 말하며 철벽같은 로마군대를 향하여 돌진해갔다. 그들은 자유의 대가로 모두 전사하거나 처형당했다.(영화ㆍ스파르타카스)
ⅴ. 탈북자(脫北者)들은 자유를 찾아 사선(死線)을 넘는다. 민주국가를 보통 지칭하는 용어인 ‘자유진영’ ‘자유사회’란 관념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상에서 온 것이다. 자유는 민주국가의 한 표어처럼 되었다.
② 자유의 역사는 짧다.
ⅰ. 오늘날 당연한 듯 여겨지고 있는 ‘권리로서의 자유’의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래지 않다. 개인의 자유에 오늘날과 같은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 것은 근대 자유주의 등장과 함께였다.
ⅱ. 존 로크는 봉건적 신분질서와 생사여탈의 권력을 행사하는 왕이 엄연히 존재하던 17세기 영국 현실에서 ‘개인’의 자유를 말하기 위해 ‘자연 상태’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사회적 신분에 따른 일체의 제한들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곧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 대한 가정에 입각하여 로크는 국가의 기원과 목적을 새로운 관점에서 설명한다.
ⅲ. 국가는 인간이 자신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더욱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계약의 산물이다. 따라서 국가의 시작은 인민의 동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곧 국가의 통치권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지배자이기보다 계약의 구속을 받으며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일종의 ‘청지기’이다. 따라서 국민의 동의에 의거하지 않은 정부 혹은 신탁의 목적에 위배되는 권력 행사는 부당할 뿐 아니라 거부되어 마땅하다.
ⅳ. ‘왕권신수설’에 따라 왕의 권력에 대한 도전을 신성모독죄로 간주하던 시대에 로크는 백성의 저항을 ‘권리’로서 정당화했다.(‘통치론’) 로크의 사상은 서양 근대혁명의 축인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미국 독립혁명의 발발과 성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19-20세기 전체주의 및 독재국가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추동하고 정당화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ⅴ. 미국의 루주벨트 대통령은 자유민주국가의 자유 개념에 대해서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공포에서의 자유, 궁핍에서의 자유’의 4대 자유를 강조하였다. 현재 각 국의 헌법에서 열거하고 있는 자유는 사상ㆍ표현 등에 대한 ‘정신적’ 자유, 직업선택ㆍ재산권 등에 대한 ‘경제적’ 자유, 체포ㆍ구금ㆍ수색ㆍ압수에 대한 적법한 절차의 보장과 고문 금지 등에 대한 ‘신체’의 자유, 생존ㆍ노동ㆍ교육 등에 대한 ‘생존’의 자유, 그리고 참정(參政)ㆍ청원ㆍ재판 등에 대한 자유가 있다. 우리 헌법도 2장 제12조 이하에서 신체, 거주ㆍ이전, 직업선택, 주거, 사생활, 통신, 양심, 종교, 언론ㆍ출판, 집회ㆍ결사, 학문과 예술, 선거의 자유 등을 명시하여 보장하고 있다.
ⅵ. 밀은 특히 언론 자유에 대해 ‘자유론(On Liberty)’이라는 책에서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그 의견이 틀렸다고 해서 침묵을 강요하면,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비교해 볼 기회를 잃게 된다”고 말했다.
③ 자유에는 허용 범위가 있다.
a. 자유주의가 자유지상주의나 자유방임주의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ⅰ. 자유주의는 가급적 집단적 선택의 영역은 줄이고 개인적인 선택의 폭을 늘리자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1909-1997)은 그의 책 ‘자유론’에서 참 자유란 타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며, 끊임없는 선택을 위한 여지가 제공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다양성’과 ‘차이’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관용해야 하며, 자유가 도덕적 삶의 기초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ⅱ. 이처럼 자유주의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랫말처럼 자율을 추구하지만, 한편 거기에는 책무가 수반되어야 한다. 선택이 자유로웠던 만큼 그 결과에 대해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 이른 바 ‘자기 책임의 원칙’이다.
b. 자유의 허용 범위는 어떻게 설정되는가?
ⅰ. 나의 자유는 상대방의 자유와 만나는 곳까지다. 그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그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 그 대신 남에게 해(害)만 주지 않는다면 개인의 자유는 절대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신념(‘자유론’)이다.
ⅱ.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자는 ‘생각’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를 엄격히 구별한다. 고성방가나 교통 방해는 상상할 수 있으나 실천해서는 안 된다. 자유는 엄정한 질서와 동행한다. 자유주의자에게 질서는 오히려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밀은 자유의 원리가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신지호)
(3) 공화(共和)를 추구한다.
① ‘민주’와 ‘공화’의 개념 차이는 무엇인가?
ⅰ.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다. 한국은 1948년 건국헌법에서 ‘민주’와 ‘공화’를 최고의 정치적 가치로 여겨왔다. 민주공화국이란 민주국가인 동시에 공화국가이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복합된 정치체제이다.
ⅱ. 여기서 ‘민주’란 ‘인민 주권’ ‘권력 분립’ ‘다수의 지배’를 말한다. 다수지배 체제는 지지 숫자의 다수(多數)만을 추구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사생결단식의 대결주의와 파당주의를 피할 수 없다.
ⅲ. 한편 ‘공화(共和)’는 ‘공공의 것’이라는 뜻에서 유래했으며, 공동 화합을 의미한다. 곧, 시민 모두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회 통합을 어떻게 이룰지, 또 다수의 지배 속에서도 소수의 권익을 어떻게 보호할 지에 관심을 둔다. 원래 ‘공화국’은 중세 봉건제도하의 왕정(王政)ㆍ귀족정(貴族政)을 타파함으로 비롯되었으며, 주권 내지 통치권의 주체가 국민이고, 국가 원수로서의 군주가 없는 국가 형태이다. 공화정(共和政)은 개인의 자유와 타인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통해 사회를 유지하고자 한다.
ⅳ. 로마의 공화정은 이방인조차 로마를 사랑하고 시민권을 획득하면 동료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늘날 왜곡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방종과 자기만을 위하는 자유로 타락하거나, 아니면 획일적인 평등으로 전락하여 공동체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공화정의 요소를 살렸을 때 번성했고, 공화주의가 약화되면서 붕괴했다. 핀란드 헬싱키대학 파트릭 스케이닌은 “핀란드가 추구하는 목표는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회만이 아닙니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온 국민이 참여하고 협력하는 사회입니다”라고 말한다.
② 소수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허용되어야 하는가?
ⅰ. 과거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던 서울남부지법 이정렬 판사는 “헌법 질서만을 강조하는 것은 국가주의가 아닌가 싶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라고 만든 것이므로 나라 때문에 개인이 희생돼서는 안 된다. 여러 목소리가 있어 자유민주주의가 좋은 것인데, 아예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나라가 처한 상황 때문에 이해해 달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 개인적으로 군대에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양심을 이유로 안 가겠다는 사람에게 굳이 징벌을 내려가며 강요하는 것은 심하다. 양심의 자유를 말할 때 양심은 ‘선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민주주의 테두리 안에서 내면의 목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2006.1 국가인권위원회(참여정부)는 병역제도에 대해 양심적 병역거부 허용을 권고했다.
ⅱ. 다른 한편 많은 국민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원론적인 견해로서는 수긍할 수 있지만 우리의 현실로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남북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자기방어 및 평화 보전의 차원에서, 특히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유지 차원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세계의 다른 나라들처럼 배려할 만한 여유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 헌법은 양심의 자유(19조)뿐만 아니라 국방의 의무(39조)도 함께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거부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양심의 자유도 정의와 자결에 바탕을 둔 사회공동체의 유지와 형성이라는 가치 질서 내에서 허용되는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병역제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른 분단국가의 속성상 집단적 선택의 영역으로 남겨 놓아야 할 대상이며, 아직 개인적 선택의 영역으로 옮겨 놓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본다.
ⅲ. 우리나라 대법원은 2004.7.15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11:1).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병역의무가 이행되지 않아 국가의 안전보장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도 보장될 수 없다. 양심의 자유가 국방의 의무보다 우월한 가치라 할 수 없다. 종교 및 양심의 자유도 다른 헌법적 가치와 국가의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돼야 한다. 입영 기피자 처벌조항인 병역법 88조 1항이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부당하게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ⅳ. 헌법재판소는 2004.8.26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 유죄를 확정했다. 재판부는 “기본권의 행사는 국가의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양심 실현의 자유가 양심상의 이유로 법질서에 대한 복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ⅴ. 우리 사회에서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단골 노래가 헌법 제1조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한다.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1992년 조선노동당 중부 지역당 사건 때 ‘(김일성) 수령님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 등을 작곡한 혐의로 구속됐었다. “혁명의 길 개척하신 그때로부터 오늘의 우리나라 이르기까지 조국의 영광 위해 한 생을 바쳐 오신 수령님 그 은혜는 한없습니다”라는 노래다. 북한 세습독재를 추종하던 사람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노래를 만든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용해 ‘자유’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의도로 보인다.(조선)
(4) 인간의 오류와 부패성을 전제로 하는 제도이다.
① 국민의 선거로 권력을 심판한다.
ⅰ. 권력을 무제한하게 행사하며 남을 지배해도 좋을 만큼 선한 인간이나 단일 집단은 없다. 인간은 권력을 쥐게 되면 ‘불의(不義)해지려는 경향’이 생긴다. 민주사회 구성원들은 일정 기간을 두고 투표라는 수단으로 그와 같은 전제적인 충동에 제동을 건다. 민주주의는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이나 몇 사람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교체함으로 권력의 우상화를 감시할 수 있다.
ⅱ.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이 지닌 정의(正義) 수용 능력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불의의 성향은 민주주의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② 선출된 권력의 독재를 막는 장치로 사법부를 둔다.
ⅰ. 그 동안의 역사적 경험은 다수결의 원칙 아래서 결정된 국민대표기관의 선택이 항상 정당했던 것만은 아님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이 같은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일찍이 고안된 것이 독립된 사법기관에 의한 위헌심사 제도이다. 예컨대 헌법재판소(혹은 최고법원)는 대통령과 의회권력의 과잉 행사나 독재를 막는 마지막 보루로서 기능하는 헌법기관이다. 곧, 투표로 뽑힌 대표일지라도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ⅱ.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드 드 토크빌은 ‘미국 여행기’에서 “완전히 민주주의적인 정부는, 설사 미국이라 하더라도 너무나 위험한 제도라서,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실수와 열정에 대비해 조심스러운 장치를 만들었다. 양원제, 주지사의 거부권, 그리고 무엇보다 사법부가 그것이다”라고 썼다.
ⅲ. 토크빌은 그의 저서 ‘미국 민주주의’에서 “미국의 사법부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처하는 가장 강력한 안전장치다”라고 말했다. 선거는 대표자에게 무한 권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법 테두리 안에서 임기 동안에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선거와 법치가 동시에 있어야 한다.
③ 권력으로부터 사법부의 독립 여부가 관건이다.
ⅰ. 정치권력이 자유민주주의의 최고 감시기관인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을 정치적인 성향의 잣대로 임명하여 사법부를 지배하게 되면 자유민주주의는 유명무실하게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독재를 하게 된다.
ⅱ. 법관을 정치적으로 임명하는 미국에서는 사법부가 정치화하는 것에 대해 염려를 표명한지 오래다. 예컨대 대법원장(혹은 헌법재판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제청하여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따라서 “대법원(혹은 헌법재판소) 구성에서 누가 주도권을 쥘 것인가? 대법원장인가, 아니면 대통령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ⅲ.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법부의 정치권력 견제 역할에 대한 철저한 사명감이다. 사법부가 정권과 이념과 여론의 압력으로부터 재판의 독립과 인사의 독립을 지켜낸다면 자유민주주의는 보존될 것이다. 미국의 얼 워런 전 대법원장(1953-69 재임)은 임기 동안 ‘흑백차별 불법화’와 ‘언론자유 확대’와 같은 숱한 개혁적 판결을 이끌어내어, 그를 임명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워런은 내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고 말했다고 한다.
ⅳ. 세계 각국의 민주화 정도를 매년 측정하여 발표하는 연구기관인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2003년 말 기준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200여 개의 나라 가운데 선거에 의해 공직자를 선출하는 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는 121개로 집계됐다. 하지만 이들 나라가 모두 ‘민주적인 국가’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권리나 시민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 나라는 1점, 전혀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7점을 기준으로 할 때 두 척도 모두 1점을 받은 나라는 33개뿐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2-3점까지는 민주국가로 분류하기 때문에 두 기준 모두 2점을 받은 한국도 민주국가로 분류될 수 있다. 반면 북한은 둘 다 7점을 받아 쿠바 이라크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시리아 투르크메니스탄 등과 함께 최악의 민주 후진 8개국에 포함됐다.(조선)
(5)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다.
ㆍ시장경제는 자유경쟁의 구조이다.
ㆍ신자유주의의 폭주는 조절이 필요하다.
ㆍ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사회주의는 안 된다.
ㆍ대개의 국가는 좌ㆍ우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① 시장경제는 자유경쟁의 구조이다.
ⅰ. 시장경제는 본질적으로 자유를 중시하는 가치이다. 시장경제는 사유재산과 자유경쟁, 그리고 신뢰와 타협을 요건으로 한다. 정부의 역할을 최대한 줄이고 수요ㆍ공급의 원리에 의해 문제를 해결한다. 단, 정부는 시장의 질서를 깨는 자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응징한다. ‘친기업’이라 하면서 기업의 비리를 감싸는 것은 반시장주의적이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면 독재는 흔들리기 마련이다. 시장경제는 중산층을 낳고 중산층은 민주주의의 후원자가 된다. 따라서 자유시장은 독재자에겐 ‘트로이의 목마’이다.
ⅱ. 한편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탐욕’의 이기적 본능이 경제 발전의 큰 동기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다. 물론 테레사 같은 사람은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봉사의 삶을 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인센티브’를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
ⅲ. 경제적 인센티브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결과로 발생하는 편익과 비용의 구조이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빵 제조업자들의 박애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몰두하는 돈벌이 때문”이라는 아담 스미스의 주장은 경제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이다.
② 신자유주의의 폭주는 조절이 필요하다.
ⅰ. 1970년대 서구사회에 과도한 국가개입과 복지정책으로 인해 경제침체와 사회 활력 저하현상이 나타났다. 높은 실업률, 인플레, 경기 후퇴 외에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조적 분위기나 생동감 저하현상이 함께 나타났다. 이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 모델 등 이른바 ‘과도한 국가개입정책’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났으며, 그 해결책으로 ‘국가개입 축소’와 ‘시장경제 강화’라는 경제정책을 내놓았는데 그것을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ⅱ. ‘보이지 않는 손’의 시장원리를 따르는 신(新)자유주의는 19세기 자유방임의 자본주의를 닮은 경쟁 지상주의이다. 자유방임 자유주의는 스펜서(영국의 철학자ㆍ과학자)가 주장한 ‘사회 다윈(Darwin)주의’이다. 이것은 인간 생활을 생존을 위한 무한 투쟁으로 보고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적자생존의 법칙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부와 권력을 차지하며(승자 독식), 가난과 실패는 본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일정한 역할, 특히 공정한 시장질서 수립을 인정하는 측면에서 자유방임주의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 본질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법으로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ⅲ. 신(新)자유주의의 정책은 구체적으로 ‘교환의 자유, 사적 재산권, 자유기업,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 자기책임, 노동시장의 유연화, 인센티브, 공기업의 민영화, 세금 감축, 불필요한 규제 철폐, 정책과 행정의 투명성 강화, 법치, 과도한 복지의 축소, 작은 정부(정부 규모의 축소)’ 등을 지향한다.
ⅳ.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은 경제 효율성의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인류의 연대성 측면에서 반발과 분노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 소설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 당시 대자본에 밀려난 미국 농민들이 착취와 굶주림 속에서 죽고 흩어지는 비극을 그렸다. 물론 경쟁에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만약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고, 부자가 빈자를 돌보지 않는다면 자유 경쟁은 사회악이 된다. 곧, 무한 경쟁은 사람들에게 민주(民主)는커녕 빈부의 양극화, 독점화, 불황(불경기, 실업문제 등),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subprime mortgageㆍ비우량주택담보대출)로 인한 금융위기, 환경파괴, 그리고 약육강식ㆍ적자생존ㆍ자연도태의 동물적 사회를 만드는 주범이 된다.
ⅴ. 우리는 이 같은 형태의 신자유주의의 폭주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 예컨대 최근 대형 할인마트를 운영하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골목길에도 ‘작은 가게’를 열고 있다. 대기업 수퍼 체인이 들어오면 동네 수퍼는 문을 닫게 된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대기업이 지역 전통 상권을 붕괴시키지 않도록 일정 규모 이상의 유통업체는 동네 수퍼를 열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 우리도 대기업과 동네 수퍼의 공생을 위해 제도적인 장치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정부 개입이 요구된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정부의 ‘보이는 주먹’이 다 필요하다. 미국은 규제를 너무 풀어서 문제가 되었다.
ⅵ. 하지만 영국 경제학자 존 케인스(1883-1946)는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강조하면서도 “정부의 무리한 개입이 계속되면 우리 모두 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시장의 탐욕을 제어하기 위한 규제는 필요하지만 자본주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자유주의가 퇴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보다 인간적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기본으로 한다. 자유는 책임을 동반한다. 자유와 책임은 열정과 애정이 있는 사회를 가져온다.
ⅶ. 한편 정부가 개입하고 규제하는 사회는 나태와 탐욕을 초래한다. 시키는 일만 하고 윗사람 눈치나 보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탐욕이 자란다.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부당 이익을 추구할 소지가 많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부패와 부정이 만연한 것은 이 때문이다.
③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사회주의는 안 된다.
ⅰ. 자본주의의 문제는 부도덕성이다. 대량생산ㆍ대량낭비ㆍ대량폐기를 경제발전이라고 외치면서, 고용의 감소ㆍ중산층의 몰락ㆍ사회의 양극화ㆍ지구의 온난화는 외면하는 문명, 여기에 위기의 뿌리가 있다.
ⅱ. 한편 사회주의의 문제는 무지와 무능이다. 만약 자본주의의 비도덕적 경제행태와 오늘날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이유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요건인 경쟁을 제한하고 친사회주의적ㆍ친분배적ㆍ친평등주의적 방향(좌경화)으로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ⅲ. 생산수단(기업)의 사회화는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의지와 욕구를 가로막고 창의성과 성취욕을 무력화한다. 예컨대 빈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부자를 배척하면 기업가 정신은 꺾이게 되고 경제사회의 발전은 제약받게 된다. 가진 자들에게 과도한 부유세를 매기면 그들이 열심히 일할 의욕을 잃게 되고, 기업과 재산가는 해외로 빠져나간다. 병원을 국가나 공공기관의 소유로 바꾸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 재벌을 해체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ㆍ공영화하고,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노동자들에 의한 생산수단의 민주적 소유 등을 실현하면, 글로벌 시대의 국가 경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ⅳ. 그러므로 우리는 일부 문제를 과장하여 전체를 부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통상 부분적인 문제를 과장하여 본질을 뒤집으려는 행태를 보여 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적 경제제도는 89년 이후 소련ㆍ동유럽권이 반세기 이상의 실험 끝에 실패했다. 그들은 비록 하향평준화를 이루었으나 국가의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제한으로 인해 모든 발전과 향상이 정지되었던 것이다.
ⅴ. ‘강대국의 흥망과 성쇠’의 저자인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현재의 글로벌 경제 위기 다음에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완전 평등이 실현된 공산주의가 도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헝가리는 1989년 공상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자본주의로 체제 전환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로움은 기대에 못 미쳤고, 빈부 격차로 상대적 박탈감은 더 심해졌다. 시민들은 “‘자유’ 빼고는 그다지 좋아진 점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래도 지금은 다시 시작할 ‘기회’는 있어요. 예전엔 그런 기회조차 막힌 사회였죠. 그런 면에서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오.”라고 말한다.
ⅵ. 물론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묘사했던 ‘자유방임적 경제체제’도 더 이상 미래의 자본주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케네디는 앞으로 새로운 형식의 자본주의를 기대하며 예상한다. 그는 증세(增稅)와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 그리고 금융시장에 대한 국제적 감독 강화 등 슘페터와 케인스가 제시한 전망에 따라 변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④ 대개의 국가는 좌ㆍ우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ⅰ. 오늘날 모든 국가는 현실적으로 좌ㆍ우 양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위치도 고정된 것은 아니고 선거를 통해 집권세력을 바꾸고 정책을 바꾸어 그 위치를 조정한다.
ⅱ. 북한 같은 나라가 이념상으로 좌측의 극단이라면, 미국은 ‘우측’의 극단에 속한다. 한편 북구(北歐)ㆍ독일ㆍ프랑스ㆍ오스트리아 등 선진 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도 아닌 제 3의 길(절충)을 시도하고 있다. 핀란드 헬싱키대학 파트릭 스케이닌은 “우리는 복지와 교육을 통해 사회를 통합하고, 그 바탕 위에서 경쟁과 창의력으로 발전을 추구한다. 복지와 성장은 서로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회 통합을 위하여 두 가지 가치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라고 말한다.
ⅲ. 하지만 이 같은 절충의 실험은 여러 국가에서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곧, 그들의 ‘고비용 노동복지 모형’은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고 청년 실업률을 증가시켰다. 일단 취업한 사람은 평생 ‘철 밥통’이 보장되지만, 신규 취업자는 정규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양립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한쪽을 아주 희생하기보다는, 개인 행복과 공동체주의의 공동선(善)을 동시에 수용하는 방향으로 계속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구현해 나가는 데 있어 공동체와 공동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포기될 수 없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ⅳ. 영국의 정치가이며 소설가인 디즈레일리는 1845년 발표한 ‘시빌, 또는 두 국민’이란 소설에서 영국의 두 국민, 곧 부자와 빈민을 한 국민으로 통합해야 함을 역설했다. 한 국민이 두 국민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양극화’, 곧 중산층이 붕괴함으로써 ‘다이아몬드형 사회’가 ‘모래시계형 사회’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디즈레일리가 지적한 현실은 되풀이되고 있다.
ⅴ. 한국과 같이 취약한 경제 기반을 가진 나라는 보기에 좋다고 해서 무조건 북구(北歐)형 자본주의를 도입하기보다는 한국의 수준에 맞는 형태의 자본주의를 신중히 선택할 필요가 있다. ‘성장’을 중시하는 자유시장경제와 ‘분배’를 중시하는 사회주의 사이에서의 선택은 어려운 과제지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세계 역사의 흐름’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어느 체제가 성공했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ⅵ.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꽃피운 나라인 미국의 건국 원로들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도록 견제(牽制)도 해야 하지만, 부자들이 애써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이 함부로 흔들지도 않는 나라를 만들자”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보다 17년 앞서 발표한 ‘도덕 감정론’에서 부의 분배 과정을 설명하면서 “구성원 각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하되 남과의 공감을 잃지 않는 사회가 바로 도덕적인 사회”라고 역설했다.
(5) 자유민주주의가 최선의 제도는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란 ‘최선이 아닌 차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얼마씩 양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유민주주의의 함정이 있다. 그래서 윈스턴 처칠은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거나 완전한 것이기 때문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때때로 최악의 정치형태라고 일컬어져 왔다”라고 고백했다. 자유민주주의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ㆍ공동체의 해체 및 비인간화ㆍ소외 등의 역기능
ㆍ정당한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는 위험
ㆍ정치권력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독재를 함
ㆍ대의(간접)민주주의와 참여(직접)민주주의의 오ㆍ남용
ㆍ자유민주주의의 과제
① 공동체 해체 및 비인간화ㆍ소외 등의 역기능
ⅰ. 자유민주주의가 근대 서구의 현실에 구현되었을 때 그 해방적 순기능에 못지않게 공동체의 해체와 더불어 비인간화, 소외 등 역기능의 그림자 또한 길게 드리웠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역기능은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우경화이다. ‘무한 경쟁’이 빚어내는 빈부의 격차와 경제력의 집중 문제, 경쟁에 뒤지거나 경쟁에도 참여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의 고통 등이 그것이다.
ⅱ. 장은주는 그의 책 ‘생존에서 존엄으로’에서 “우리는 지금 모욕사회를 살고 있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기계나 도구나 동물, 또는 그 비슷한 어떤 것으로 대하는 사회가 모욕사회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그 모욕사회 속에 속물사회가 자리 잡고 있다. 모두가 부자가 되기 위해, 권력을 얻기 위해, 좋은 학벌을 차지하기 위해, 그래서 그 잘난 ‘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 벌거벗은 채로 욕망의 바다를 허우적거린다. ‘부자 되세요’가 새해 인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고, 필요하면 가짜 학위라도 사서 얼굴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사회적 현상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나 일시적ㆍ우연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체계적 삶의 양식과 문법의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ⅲ. 그는 ‘존엄’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를 분석하면서 “결정적인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문법을 바꾸는 일이다. ‘생산’과 ‘효율성’, ‘경쟁’과 ‘이익’ 같은 가치들이 중심인 사회에서 인권ㆍ보편적 존중ㆍ참여적 평등ㆍ연대ㆍ존엄성과 같은 가치들이 조금씩이나마 사회의 모든 중요한 제도들과 삶의 양식의 틀을 규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존엄한 시민들의 공화국’의 실현을 위해서는 법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 존중’이라는 정의 원칙과 그 제도화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적 이상으로서의 민주적 정치 공동체에 대한 기획은, 시민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모욕 없이 당당하고 가치 있게 살아가는 존엄한 존재들로서 존중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ⅳ. 우리나라 중ㆍ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조사에서 ‘자본주의’ 하면 연상되는 말 1위로 ‘빈부 격차’였다. 로버트 서비스는 그의 책 ‘동지들! : 세계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를 향해 “공산주의를 향한 충동은 휴면상태가 아니다. 박해가 계속되고 있다. 얼마 후 ‘자유민주주의ㆍ자본주의 경제ㆍ다원주의 사회’와 충돌을 빚는 미지의 운동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는 “자본주의가 그들 공동체의 물적ㆍ정신적 기초를 파괴한다”는 믿음에 의해 자극을 받는다고 했다.
ⅴ. 빈부 격차는 자본주의 사회의 난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 가장 극심하고 고착화된 ‘빈부 격차’는 전체주의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봉건왕조에서 왕과 귀족들이 호화로운 궁궐과 성을 짓고 사치와 향락에 탐닉하는 동안 대다수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고, 구(舊)소비에트연방에서 공산당 간부들은 흑해 연안에 있는 그들의 별장에서 비밀 연회를 즐겼다. 북한의 지도부는 극심한 식량난으로 주민들 수백만 명이 굶어죽는 동안에도 환락을 자제하지 않았다.
ⅵ. 자본주의 체제에서 빈부의 차가 더 심한 것처럼 생각되는 이유는 부유층과 서민의 생활이 철저히 격리되어 있지 않아서 빈곤계층이 부유층의 소비 행태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인 측면도 있고, 또한 민중의 의식이 깨어 계층 간의 경제적 차이를 부당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공산국가의 빈부 격차는 더 극심했지만 생활고와 억압에 짓눌린 무력한 일반 백성들은 지배계급의 부를 감히 문제 삼지 못했다.
② 정당한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는 위험
ⅰ. 1859년에 나온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현대사회를 짓누르는 ‘다수의 횡포’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한다. 다수가 관습과 여론을 내세워 진리를 독점하고 정답을 강요하면 소수는 숨을 쉴 수가 없다.
ⅱ. 밀(Mill)은 다수의 횡포를 민주주의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 지목한다. 예컨대 1896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흑인 전용시설을 두는 것이 미국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때 유일하게 위헌 견해를 낸 사람은 존 할란 대법관이었다. 그는 “미국 헌법은 피부색을 구별하지 않는다”며 학교나 버스 등에서 흑인용과 백인용을 분리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58년이나 지난 1954년 연방대법원은 전원일치로 ‘흑백분리’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위헌 대 합헌이 ‘1:8’에서 ‘9:0’으로 뒤집혔다.
ⅲ. 그러므로 양승태는 그의 책 ‘우상과 이상 사이’에서 “민주주의란 단순한 ‘다수결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고, ‘그저 좋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도 곤란하다. 민주주의가 ‘좋고 바람직한 국가생활의 실현’이라는 이상으로 연결될 수 있으려면 국민 다수가 잡고 있는 가치관이 얼마나 보편적인 가치와 이상에 접근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말한다.
③ 정치권력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독재를 함
ⅰ. 투표(혹은 선거)가 민주주의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투표를 통해 전체주의가 나오고, 민주독재 혹은 민중독재(민중민주주의)가 나오기도 한다. 포퓰리스트나 선동가에 휘둘리면 민중은 어리석어지며 올바른 판단을 못한다. 이것이 바로 투표의 역설이다.
ⅱ. 독재는 군부독재, 군주독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민독재도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펼쳐진 독재는 대부분 인민독재였다. 파시즘, 공산주의, 남미식 사회주의 같은 것들이 인민독재의 유형에 속한다. 과거 우리나라 박정희 정권은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한 바 있다.
ⅲ. 마이클 만은 그의 책 ‘민주주의의 그늘’에서 정치권력이 국민의 이름으로 합법성과 정당성을 획득하여 독재를 할 때 그 폐해가 가장 심각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1994년 르완다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하면서 외친 전투구호는 ‘다수결 민주주의’였다. 스리랑카인(人)들이 가톨릭 소수파나 타밀 반군을 비난하는 근거도 소수파가 ‘다수결 민주주의’를 저해한다는 것이었다. 19세기 미국 캘리포니아의 가장 가혹한 인디언 절멸정책인 인디언의 강제 추방도 인디언의 권리를 일부나마 인정하려 했던 중앙 정부에 맞선 캘리포니아 백인들의 투표에 의한 것이다. 20세기 초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터키의 인종청소(학살과 약탈)도 다수의 국민의 동의를 얻어 민족자본을 육성하고 빈민을 위한 경제적 재분배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나치의 대량학살과 홀로코스트는 그 규모와 체계 면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나치의 대학살은 ‘대중운동’적 성격이 강했다.
④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오ㆍ남용
대의(간접)민주주의자들은 참여(직접)민주주의자들에 대해 민주주의의 과잉을, 참여민주주의자들은 대의민주주의자들에 대해 민주주의의 결핍을 비판한다.
a. 참여민주주의
ⅰ. 대의제로 선출된 대표의 의사결정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말한다.
ⅱ. 참여민주주의의 최대 맹점은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의 큰 특징은 자신들이 선거에 의해 뽑혔다는 이유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데 있다. 민주주의가 자유의 제도화를 뜻한다면 그 제도를 박살내고 정권의 자유만 추구하는 게 포퓰리즘이다. 이것은 의원들의 소신 있는 입법 활동을 위축하고, 의회의 위기와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온다.
ⅲ. 그러므로 참여가 무조건 좋다고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최근 미국 같은 의회 중심의 나라에서도 현안에 따라서는 직접민주주의(주민투표 등)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주민소환법은 지역주민이 소환투표를 청구하여 단체장ㆍ지방의원을 해임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b. 토의민주주의(심의민주주의)
ⅰ. 시민사회에서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공론을 이룬 뒤 의회에서 이런 공론을 바탕으로 타협을 하여 최종 의사결정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ⅱ. 그러나 유럽 선진국들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는 ‘직접민주제’는 오ㆍ남용 소지가 많으므로 지방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단계적으로 적용해가야 하고, 중앙정치의 대의(代議)민주주의제는 그 근간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주성수의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⑤ 자유민주주의의 과제
ⅰ. 자유민주주의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사회주의(공동체주의)적 대안은 더 나쁜 결과를 예고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구(舊)소련에서 망명한 노벨상 수상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78년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공산주의 체제에서 보낸 사람으로서 객관적인 법의 잣대가 없는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안다”고 말했다. 다만 공동체주의자들의 공헌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자기반성과 함께 ‘공동체적 가치’를 보완한 ‘성숙한 자유주의’를 재구성하는 계기를 제공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ⅱ. 대한민국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이 체제에 결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현재까지 이보다 더 우월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김진홍 목사는 과거 빈민과 함께 살아가는 세월 속에 깨닫게 된 것이 있다고 한다. 그는 “성장 속에는 분배가 들어가 있지만 분배 속에는 성장이 들어 있지 않다. 그리고 자유 속에는 평등이 포함되지만 평등 속에는 자유가 포함되지 못한다. 성장을 무시한 채 분배를 강조하면 남미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가 되기 쉽고, 자유 없이 평등만을 강조하게 되면 북한 같은 굶주리는 평등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현실적 선택은 더 좋은 체제가 나올 때까지는 약점을 보완해 쓸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최악’에 맞서 ‘차악(次惡)’을 선택한 결과이다. 인간사회에서 정치란 어차피 ‘차악(次惡)’을 추구하는 기술일 수밖에 없다.(임지현)
ⅲ.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과제는 진정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조정함으로써 ‘자유주의적 공동체’라는 제3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유방임의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비판하고 수정하는 사회적 자유주의, 질서 자유주의, 수정자본주의, 복지국가 등이 출현하여 왔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평등(사회주의)과 공동선(공동체주의)의 비판과 견제 속에서 발전해 왔다. 사실 자유민주주의는 공동체주의적 비판을 수용ㆍ보완함으로써 보다 합당한 공동체적 자유주의로 성장할 수 있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4. 교회는 공동체적 자유주의를 지향한다.
ㆍ교회는 천민자본주의를 배격한다.
ㆍ교회는 사회주의적 정신은 지지하면서도 사회주의 제도는 지지하지 않는다.
ㆍ교회는 성경적 토지제도의 현실적 적용을 연구ㆍ제시할 필요가 있다.
ㆍ교회는 ‘시장경제의 인간화’를 추구한다.
(1) 교회는 천민자본주의를 배격한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가서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할 쌔"(마25:14-19)
①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이 자본주의의 발달을 크게 뒷받침했다는 설이 있다.
독일의 신학자 막스 웨버는 개신교의 직업에 대한 ‘소명 사상’이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말했다. 곧, 소명의식은 자기 직업에 대한 신념을 갖게 하고, 또한 자기의 가능성을 개발하도록 촉구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개혁자들의 자본주의 사상에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것은 ‘나눔과 섬김’이라는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자본주의였기 때문이다.
②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천민자본주의다.
a. 천민자본주의의 문제점.
ⅰ. 천민자본주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타인들의 안녕을 고려하지 않고, 또한 실제로 타인을 무자비하게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부와 외적인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수정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레이먼드 베이커는 그의 책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을 ‘불법자금ㆍ빈곤ㆍ왜곡된 철학’으로 지적했다.
ⅱ. ‘불법자금’은 돈세탁, 리베이트, 허위가격 책정 등 각 가지 방식으로 조성된다.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하며, 각자가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다 보면 조화로운 상태가 된다고 했지만, 실상은 각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이 되고 있다.
ⅲ. ‘빈곤’은 현대 자본주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자본주의가 무자비하고 냉혹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 지구적인 빈곤이다. 이렇게 풍요로운 시대에 아직도 지구상에는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고 있다. 최상위 20%가 최하위 20%보다 120배 높은 소득을 갖고 있는 구조는 ‘자본주의를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위험 수준이다.
ⅳ. ‘왜곡된 철학’이란 부패와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근거를 말한다. 제러미 벤담은 사회적 이익을 최대화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면서 일부 구성원의 인권이나 이익이 희생돼도 좋다는 철학을 제시했다.
b. 자본주의의 쇄신.
ⅰ.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는 그 안에 자본주의의 요소인 시장경제와 사유재산, 그리고 개인능력별 차등 소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ⅱ. 레이먼드 베이커는 “자본주의를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자유 시장만큼 인간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해주는 체제는 없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제대로 운영하고 제도를 신뢰한다면 인류 전체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쇄신이다. “검은 돈을 없애고, 빈부격차를 좁히는 것이 자본주의의 위험 회피 전략”이며, “자본주의는 정의를 제일 원칙으로 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ⅲ. 한국 사회 역시 갈수록 진행되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본주의의 경쟁체제 속에서 노동자와 서민들은 상대적으로 궁핍한 삶을 강요받는 측면이 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여전히 자본과 노동 간의 갈등관계이다. 천민자본주의로는 이런 문제를 풀 수가 없다.
ⅳ.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빌 게이츠는 ‘인센티브와 경쟁’을 통해 빈곤과 싸우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힘을 이용하여 지구상의 빈곤과 싸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2) 교회는 사회주의적 정신은 지지하면서도 사회주의 제도는 지지하지 않는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고”(행2:44-45)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①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제거한다는 주장 아래 사람들을 기만했다.
ⅰ.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해악들을 지적하는 데는 좋은 시각을 제공했지만 정작 문제 해결에는 도움은커녕 오히려 세상을 더 암울하게 만들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각종 굴레에서 해방시킨다는 꿈을 제시했으나, 공산주의 국가들은 실현 과정에서 당(黨) 관료가 자본가를 대신하여 억압하는 독재체제를 만들었으며, 결국 얼마 안 가 스스로 붕괴되고 말았다.
ⅱ. 평론가 김병익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지적하는 진보주의의 이상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혁명’이나 ‘투쟁’으로 인간 사회의 근원적인 ‘부도덕성(不道德性)’이 극복될 것으로 믿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김진홍 목사는 “무소유 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왜 공산주의가 안 되는지 절감했다. 공동체를 해 보니, 사람들이 권리 주장만 하고 책임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② 교회와 공산사회주의의 비교.
ⅰ. 공산주의 제도는 “모든 소유를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준다”는 점에서 성경 말씀과 피상적인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나눔’에 관한 성경 말씀은 개인적인 윤리 차원에서 적용되어야 할 말씀이다. 곧, 사회주의적 정신을 강조하는 것일 뿐, 사회주의 경제제도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ⅱ. 초대교회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였으며, ‘소유의 분배’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자원함과 믿음의 분량대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한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으로 모든 것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자발적인 기초 위에서 그렇게 했으며, 어느 누구도 사유재산을 포기하도록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나눔이 제도화되고 강제되는 순간, 인간은 자율성을 잃게 된다. 그래서 영감 받은 사도들은 항상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잊지 않았다.
ⅲ. 베드로는 자신의 전 재산을 헌납한 것처럼 거짓말한 아나니아에게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4)고 말했다. 행5:4의 말씀은, 그 재산의 소유권이 팔기 전이나 판 후에도 항상 아나니아에게 있다는 것이며, 또한 재산 헌납의 문제도 강요가 아니라 본인의 자유의사에 의해 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는 헌금을 하면서 구태여 교회를 속일 이유가 없었다. 재산의 일부를 하던지 전부를 하던지 혹은 전혀 하지를 않던지 간에, 그것은 전적으로 아나니아의 자유인 것이다. 제도에 의한 ‘소유의 분배’는 그리스도인의 인성(人性)의 자율적인 성장에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윌리암슨의 ‘소요리 문답 강해’ 참조)
ⅳ. 그러므로 나눈다는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와 공산사회주의는 유사하지만, 그 동기와 방법과 목적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기독교는 개인적으로 힘써 벌어 공동으로 소비하지만, 공산사회주의는 공동으로 생산해서 공동으로 소비한다. 기독교는 사유재산을 자유의사로 사용하지만, 공산사회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 안 한다. 기독교는 신앙의 감격과 사랑의 자발적 행위이지만, 공산사회주의는 강제적ㆍ제도적이다. 기독교는 물질을 행복의 제 1조건으로 취급하지 않지만, 공산사회주의는 물질을 행복의 제 1조건이요 목적으로 생각한다. 기독교는 물질을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공산사회주의는 물질 그 자체를 복음으로 생각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지만, 공산사회주의는 물질을 믿는다.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지만, 공산사회주의는 인위적인 공산사회가 최종목표이며 그 실현을 위해 피를 흘린다.
③ 공산주의가 이 땅에 존재하게 된 책임은 교회에게 있다.
ⅰ. 미국 유니온 신학교 총장이었던 존 버네트는 “공산주의가 이 땅에 존재하게 된 책임은 기독교가 져야 한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사회의 가난한 자, 고통당하는 자, 억압당하는 자, 노동자, 농민 등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다’며 일어난 것이다”고 말했다.
ⅱ. 그러므로 교회는 공산주의로 짓밟히고 황폐화된 국가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친북좌파 세력들의 왕성한 활동을 바라볼 때마다 “내 탓이요” 하는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 아무리 교회를 많이 세워도,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 하지 못하면 언제 공산주의와 같은 괴물에 의해 다시 심판을 받을지 알 수 없다.
ⅲ.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해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18:19)라고 말씀한다.
(3) 교회는 성경적 토지제도의 현실적 적용을 연구ㆍ제시할 필요가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누어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의 계수함을 입은 수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찌니라 그 다소를 물론하고 그 기업을 제비뽑아 나눌찌니라”(민26:52-56)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찌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25:28)
ⅰ. 하나님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레25:23)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구약의 초기 이스라엘은 토지의 가치를 모든 백성이 나누어가지는 사회를 이루었다. 토지는 12지파에 가족 단위로 분배되고, 이것은 세습재산으로 상속되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난 때문에 토지를 매각한 경우에는 근친자가 이를 무를 의무가 있고(레25:25-35), 또한 50년째의 해인 희년에는 원주인(原住人)에게 자동적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ⅱ. 이 같은 구약성경의 토지법은 공산주의와는 다르다. 공산주의 사회는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분배까지 공동으로 하는 것인데 반해, 성경의 토지법은 토지에 대한 국유화가 아닌 모든 개인의 평등한 소유를 규정하며 생산물에 대한 사적 소유를 인정한다. 구약성경의 토지법을 비롯한 빚 탕감(신15:1-3)과 노예해방(신15:12)에 관한 법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자유를 누리며 노예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들이다. ⅲ. 구약성경의 토지법이 현대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토지는 투기의 대상이거나 축재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적 토지제도의 장점을 연구 제시함으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방지할 필요가 있다. 헨리 조지는 “오늘날 세계 경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성경의 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성경의 토지법은 자본주의 모순과 사회주의의 맹점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4) 교회는 ‘시장경제의 인간화’를 추구한다.
① 자본주의(자유)의 울타리 안에서 사회주의(평등)를 지향한다.
ⅰ. 성공회 김광준 신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민주화와 인권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지만 성장과 반(反)좌파와 시장경제는 기독교와 무관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ⅱ. 이에 대해 성경의 원리는 개인과 공동체, 곧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본다. 성경은 ‘시장경제의 인간화’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다소 모순된 과제(둥근 사각형?)를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말로 ‘상생의 자유주의’ 혹은 ‘공동체적 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엄한 존재이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생존을 위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 생존을 위한 기본권과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아야 한다. 자유 없는 평등은 맹목이고, 평등 없는 자유는 탐욕이다(칸트).
ⅳ. 존 롤스(1921-2002)은 1971년 ‘정의론’에서 ‘사회정의 원칙’을 내세웠다. 그것은 ‘자유의 평등’과 ‘기회 균등’과, 그리고 ‘차등’의 원칙이 순차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차등’의 원칙이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되도록 재화를 분배하는 것이다. 최소 수혜자란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최하위층인 미숙련노동자를 일컫는다. ‘최저 임금제’와 같은 복지정책은 이 원칙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롤스의 사회정의 원칙에는 ‘우선성’이 적용된다. ‘자유의 평등’가 최우선이고, 다음이 ‘기회 균등’이고, 마지막이 ‘차등’이다. 상위의 원칙이 충족되지 않으면 다음 순위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다. 예컨대 ‘자유의 평등’이 충족되지 않으면 ‘기회 균등’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다. ‘우선성’의 원칙은 자유를 절대시하는 자유주의의 기본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ⅴ. 박호성(서강대)은 그의 책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에서 자본주의(자유)의 울타리 안에서 사회주의(평등)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기존 체제에 대한 전복이나 거부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건설적인 사회운동을 추진하는 것만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한편 정운영은 “나는 우리 사회에 왼손의 역할이 한층 강화되기를 기대하면서도, 전통적으로 오른 손이 감당해온 과제와 그 가치의 해체를 극히 위험스럽게 바라봅니다”고 말했다.
② 평등의 개념.
ⅰ. 평등은 단순한 ‘획일적’ 평등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유지를 위해 각자 분야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중층적(衆層的) 평등이며, 또한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어야 한다.
ⅱ. 송호근은 그의 책 ‘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에서 평등주의의 양면성을 지적한다. 평등주의의 좋은 측면은 나보다 잘난 사람과 같아지려는 소망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발전의 원동력이다. 세계에서 유례 없는 한국의 고속성장은 단기간에 선진국과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성취 열망’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평등주의의 부정적 측면은 고학력ㆍ전문직ㆍ부자 등에 대한 선망은 높은데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등주의의 심성은 어느 국가나 존재하지만 한국과 같이 강한 불만과 분노로 표출되는 국가는 거의 없다고 한다. 송호근은 ‘그런 불신의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앞으로 더 치러야 할 것인가’라고 질문하면서, 이제 ‘질투의 시대’를 넘어 ‘인정의 시대’로 진입하기 위해 대안을 마련할 때라고 말한다. 성공한 사람을 끌어내리면 사회는 침몰한다. 대안은 평등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강화하는 것이다. 활력은 살리되 분열 요인은 제거하는 것이다.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많은 이가 공유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성공한 중산층의 도덕성 강화도 필요하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평등 관념은 이웃집을 부자 되게 하는 이웃집 암소가 죽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이 보답을 받아 자신도 암소를 가질 수 있는 자아성취와 자기실현, 자기상승의 평등관이다.
ⅲ. 차하순 서강대명예교수는 그의 책 ‘형평의 연구’에서 고전적 평등주의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며 ‘형평(equity)’의 개념을 강조한다. 그는 “고전적 평등의 개념에는 문제가 있다. 형평의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평등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무조건 똑같아질 수는 없다. 정의로운 평등, 정당한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대통령은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달릴 수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반인은 안 되는데 대통령은 왜 되느냐’라도 해선 안 된다. 대통령이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신호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직능, 직무, 공적 등에 따라 평등에도 차이를 둘 수 있다고 보는 게 형평 개념이다. 평등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대통령의 직능을 존중하므로 형평 차원에선 합당하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③ 자유와 평등의 양 날개.
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극대화할 수 있는 사회제도는 현실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할 것인가?
ⅱ. 오늘날 서구의 자유주의를 보면 사실상 자유방임을 뜻하는 자유주의는 아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에는 무자비한 이윤 추구를 위해 약한 사람을 돌보지 않은 시대가 많지만, 사회주의와 경쟁 속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얼굴이 변화해 왔다. 그 변화를 가져온 온 것은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가슴 따뜻한 개인들이다. 이 시대의 자유주의는 사회민주주의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새로운 진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안전망ㆍ독점의 규제 등 일정한 시장개입과 규제를 배제하지 않는다.
ⅲ. 우리나라의 역대 정권 중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은 좌파적 성향의 정권으로 분류된다. 예컨대 민중민주주의, 성장보다 분배를 우선시하는 정책, 근로자 우선의 노동정책, 규제 일변도의 경제적 중앙통제정책, 재산권을 도외시한 사학규제법, 교육평준화, 언론통제와 정권언론 만들기, 관변단체 육성과 동원, 친(親)정권 시위 선동과 동원 등의 정책들은 ‘좌파’가 지향하는 것들이다. 원래 좌ㆍ우파란 용어에 선악의 가치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좌ㆍ우’ 용어는 프랑스 혁명으로 1792년 국민회의가 소집됐을 때 의장의 오른쪽에 귀족과 승려계급이, 왼쪽에는 시민대표들이 앉게 된데서 비롯됐다. 이 후부터 이데올로기의 성향을 좌ㆍ우로 나누어 분석하고 설명하게 됐다. 곧, 현존하는 정치체제의 변화에 대한 성향에 따라서 ‘온건 중도파’를 가운데 놓고 ‘우익’에 보수주의와 복고주의, ‘좌익’에 평등주의와 급진주의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바보이고, 나이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면 더 바보”라고 말한다.
ⅳ. 바람직한 정치체제는 자유와 평등의 양 날개가 모두 건강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밀(Mill)은 ‘자유론’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정당과 ‘진보’를 주장하는 정당 둘 다 있는 것이 정치적 삶의 건강을 위해 긴요하다고 말한다. 반대편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 건강한 정신 상태를 누릴 수 있다. 역사의 교훈은 어떤 제도에도 함정과 한계가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제도를 끊임없이 찾아야겠지만, 그보다는 부유층과 상대적 빈곤층 모두 ‘상호의존 관계’임을 직시하고 인간적인 화합과 공존의식을 갖도록 하는 일이 가장 절실하다. 곧, 승자와 패자가 냉엄하게 가려지는 시장경제 경쟁체제의 도입 아래서, 부를 축적한 승자들이 부를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관행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가슴의 경제학이 바탕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2008년 다보스포럼에서 발표된 ‘창조적 자본주의’나 2009년 UN 글로벌 콤팩트에서 거론된 ‘깨어 있는 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
ⅴ. 결국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복지주의의 길이 답이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 성장과 복지의 균형을 통해 사회 통합으로 나아가는 ‘공화’체제를 지향해야 한다. ‘공화’는 타인에 대한 존중, 공동세계의 구성, 법치의 구현, 자유와 평등의 균형을 특징으로 한다. 이처럼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면서도 공동체적 정의가 자리 잡는 일, 곧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조화는 건강한 사회의 조건이다. 예컨대 행운이 따르고 능력이 있어서 먼저 부를 이룩한 사람들은 자기 보호를 위해서라도 부의 혜택이 사회전반에 파급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다른 한편 상대적인 빈곤층 역시 성급히 자본가들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경제기반의 붕괴로 그들은 다시 절대빈곤의 상태로 후퇴하게 되고, 절대빈곤은 다시 억압과 의식의 퇴보를 초래할 것이다. 실로 자유와 평등의 동시적 구현은 인류사회의 과제이며 난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