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피닉스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는 한 개인의 기고글이다.
피닉스 프로그램이 오직 공산당 세포에 관한 암살과 보복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PRU에 관한 조직과 통제에 관한 부분을 모르고는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보복과 암살이 일어난 것은 피닉스 프로그램 에서 있었던 사실들이나, 애초에 그 목적으로 활용된 부대들이 아니고, CIDG 프로그램과 비슷하게 방어가 아닌 공산당 세포에 대한 적극적 활동의 군사단체를 만들면서부터이다.
아래글은 피닉스 프로그램이 악명을 떨치기 이전의 초기에 해당되고, 그 프로그램의 고문관 으로 근무했던 사람의 기고글이다. 글에 어떤 터프하고 강한 전투 등은 별로 없다. 그러나 어떤 배경으로 피닉스 프로그램이 태동했는가를 보기에 적당한 글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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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Chi - 1967 ~ 1969 "Last Day... Last Dust Off" by: Theodore T. Jagosz, 보병대위 5보병연대 1기계화대대 본부중대 중대장 1966-67
쾅 트리 지역의 비무장지대에서 5개월을 보내면서, 나는 5기계화사단 61보병연대 1대대의 민사장교 보직을 끝냈다.
그리고 나는 MACV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디 안’이라는 곳의 미 육군 베트남고문단학교로 갔다. 그곳은 사이공 강을 따라 있는 곳으로, 전에 첫 번째 베트남 참전 (살쾡이 브라보 투 식스 편 참조)을 했던 부근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미 보병1사단의 후방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2주간의 훈련은 특별히 MAT라고 불리는 이동고문관팀(MAT)에 관한 훈련 이었다. 이 팀은 대위급의 팀장, 중위 급의 부팀장, 중화기 고문관 상사, 경화기 고문관 하사, 그리고 상병 급의 의무병으로 구성되었다. 이 MAT 프로그램은 CIA 윌리엄 콜비가 만든 피닉스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존 폴 반이라는 인물이 베트남을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연구하고 있었다.
사실상, 이 피닉스 프로그램은 우리가 졸업을 했던 1969년 1월이 그 기점이 되었다.
존 폴이 주관했다. 그리고 그는 고문관학교 최근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계획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는 고문관이 훈련시키는 민간인 군사조직에 관해서 훌륭한 의견을 내놓았다. 각기 마을들은 전투유효반경을 책임지는 민간 군사조직이 구성되었고, 이는 수 천 개의 작은 마을들을 방어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화평공작으로 진전시킬 의도가 있었다. 이것이 서류화되어 공표되자, 이는 피닉스 프로그램은 도시와 시골에 베트콩 조직에 대한 정보 분석에 들어갔다. 이 작전의 첫 3년 동안, 프로그램은 베트콩 간파에 기여했고, 약 6만 명 이상의 베트콩을 잡거나 죽이거나 지역에서 퇴출시켰다.
이러한 민간인 군사조직의 성공은 전직 베트콩 출신인 ‘호이 찬’의 역할에 달려 있었다.
그들은 수 만 명 단위였다.
이들은 ‘치에우 호이’라는 오픈 암(투항권고프로그램)에 의해서 남베트남 으로 붙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탈자들은 우리의 적을 잘 알고 있었고, 어떤 경우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다. 베트콩의 가족과 주거지까지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 귀순자들의 민간군사활동은 남베트남 정규군과 고향지역에서 같이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주었다. 그들은 RF라고 불리는 민간군사조직 으로 배정된 지역에 제한적인 구역에서 활동했다.
이들 중 25-33%는 자기가 살던 지역에서 내가 본 중 최고의 용감한 민간 조직의 병사가 되었다. 내가 처음 배치를 받아서 가자, 나의 동료였던 61 보병연대 출신의 장교가 나에게 충고했다.
"테드, 이 거친 녀석들과 작전을 할 때는 정말 조심해야 돼. 대다수가 뇌보다 내장이 큰 사람들이야!"
나는 이 말에 큰 상관은 하지 않았다. 고문관의 기간 동안 나도 조금 아는 척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이들 민간군사조직의 대원들은 군사훈련을 받고 길면 10년 넘게 게릴라전을 수행하던 사람들이다. 혹은 그 반대편에서 싸우던 사람 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관의 명령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실패한다) 내 동료 고문관이 하는 말이 안 통할 때도 있다.
팀 하우스에 보면, 나는 화려한 색깔로 그려진 철로를 벗어나는 열차를 그려놓고 있었다. 대위가 그 안에 글을 번역했다.
"나는 호각(명령)을 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을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열차가 철로를 벗어나는 엿 같은 것은 놔둘 것이다. 그리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고문관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고문관의 주 임무는 그 자리에 근무하고 있는 그 자체였다. 작전도 보통 베이스캠프에서 무전으로 지켜보는 정도였다.
당시 우리 베이스에 두 대의 무전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미 공군의 공중폭격 요청용이었고, 하나는 포병 화력요청용이었다. 그리고 미군 즉각반응군의 탱크와 장갑차도도 부를 수가 있었다.
민간조직은 근본적으로 소총수였다. 일반적인 RF 소총중대에는 오직 1문의 81밀리 박격포가 있을 뿐이었다. 고문관은 근처의 미군부대와 바로 연락하는 것에 관계가 가장 많았다. 그래서 미군부대에 마을의 상황을 계속 보고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전에 쓴 "Bobcat Bravo Two Six" 란 글이 있다. 또한 이러한 민간군대와 베트남 정규군은 가끔 미군의 탱크와 장갑차를 타고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미군과 잘 협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이 마을 행정과 검문 등의 통제를 하기 시작하면서다.) 그러나 다행히도, 베트남 병사들은 고문관들이 미군 의무헬기인 더스트 오프 (Dust Off: 의무구조헬기)를 부르는 것에 큰 신뢰심을 보이고 있었다. 차후에 미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도 좋아했다.
이는 매우 중요했다. 중상을 당해도 몇 분이면 미군 병원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베트남 병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신뢰도의 중점이었다. 과거에, 많은 미군 헬기들이 베트콩의 표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군 승무원들은 베트콩과 남베트남군의 차이를 별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당시 미군 의무 헬기는 베트남인들 태울 수 있는 책임이 없었다. 미군 고문관에게는 물론 바로 응답했다. 7개월간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우리 이동고문관팀은 그 기간 동안 네 번 이동했다. 첫 번째의 굉장히 위험한 지역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고문관 일에 오래된 현명한 격언이 있었다.
"씹는 곳에서 똥을 싸지 마라" [공군 병사들을 뜻을 잘 모를 것이다.]
불행히도, 일부 고문관들은 고문관 학교에서 이 교훈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나도 그것을 매우 어렵게 이해했다. 그것은 깨닫기 힘들었다. 어떤 베트남 여인이 친절을 베풀어도 그의 남자가 게릴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큰 코’라고 불리던 체형이 큰 미국인은 항상 조심하면서 유대관계를 맺으려고 해야 했다. 마지막 이동에, 우리는 라이 티우에서 찬 루라는 마을로 이동을 했다. 벤헷 지역이다. 당시 지휘관은 목 수스 소령, 나, 내 부지휘관인 마이클 아르노비츠 소위였다. 각 지역 고문관들은 주기적으로 서류를 교환하면서 활동했다.
아르노비츠 소위는 찬 루에서 매우 흥분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중에 나에게 보고했다. 그는 우리 팀의 1/4톤 지프를 몰았다. 내 3/4 닷지차는 나 외에 아무도 몰 수 없었다. 그는 RF그룹 본부에 도착했다.
부대는 3개 소총소대와 1개 중화기 소대, 그리고 350명의 자위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RD라고 하는 정치소조의 인원도 있었다. 총 병력은 1,500명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지휘관인 목 수스(Moc Suth) 소령이 갑자기 벙커에서 뛰쳐나오더니 마이크를 지목하면서 말했다. “나를 따르라!” 소령은 50CC 혼다 오토바이에 점프해서 올라탔고, 소위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얼마 후 이들은 도로를 따라 가다가 최남단의 전초에서 돌고 있을 때, 소위는 엄청난 총소리를 들었다. 큰 총소리와 함께 소령이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당시 11명의 대원이 논가에 숨었다.
그리고 약 100미터 떨어진 논가에 30명 정도의 월맹군이 쏘고 있었다. 엄청난 사격전이 진행되었다. 소령은 명령을 소리쳤다. 그는 45구경 권총을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소령은 M-16으로 무장한 11명의 대원을 이끌었다. 그리고 월맹군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르노비츠 소위는 머리를 흔들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곳에서 이런 멋진 유대인 소년을 본 적이 있나?"
소령은 소위의 트럭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에는 30종의 다양한 총이 있었다. 30구경 브라우닝 기관총, M-14와 M-16 몇 개,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AK-47 들과 다른 공산권 화기들이 있었다.
(CIA는 2차대전 노획/보류화기들을 듬뿍 베트남으로 날라다주었다.)
우리 모든 팀이 찬 루에 도착하기 전에, 우린 전투 후에, 주로 야간에 12건 정도의 의무헬기 추송을 했었다. 부상자는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찬 루에 도착한 첫 번째 의무헬기는 차량사고로 다친 부상자를 후송했다. 목숨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다. 조용한 마을의 교차로에서 람브레타 스쿠터와 미니버스가 충돌해서 다친 사람이 생겼었다. 한달 정도 많은 전투작전을 치르고 난 뒤에, 7월 18일, 일요일, ‘아버지의 날’을 맞게 되었다. 나는 한 달 이하의 참전기간을 남기고 있었다. 그 일은 참 크고 난감한 일이었다. 우리 살쾡이 소대는 35분간 배수로 도랑에서 싸워야 했다.
내 소대원 25명은 도랑에서 호된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베트콩 중화기 중대와 2개 보병소대 합해서 총 150명 정도가 우리 앞에 있었다. 20분 정도가 지나서 내 소대는 도랑으로 다시 들어갔다. 한 도랑에서는 분대에 적의 57밀리 무반 동총 두 발이 떨어졌다.
나는 병력을 몇 미터 뒤로 빼서 재편했고, 우리는 두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측면에서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 오른쪽 소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전투가 끝나고 옆 소대장에게 왜 움직이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더듬 으면서 말했다. “난,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굿바이입니다. 내일 나는 MACV의 작농 고문관으로 갑니다.”
그는 사실 매우 훌륭한 소대장이었다. 아버지의 날에 나는 편안히 쉬면서 목 수스 소령과 인근 마을 지도자인 찬 루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근 10년간의 전쟁 동안, 아주 편안한 일요일 이었다. 베트콩에게 조차도. 그때 마을 지도자가 나에게 말했다.
“다이 우이(대위), 당신은 참 열심히 했습니다. 휴식이 필요합니다. 마을에 내 친구가 좀 있는데 가면 환대할 겁니다. 소령님도요.” 난 생각했다.
‘우, 오! 게임의 법칙에 위배되는 일이 생기는군. 만약 베트남인이 초대를 한다면, 가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 마을에서 위에서 말한 ‘똥을 싸지’않을까 걱정했다. 난 빠르게 생각했다. 나는 빌듯이 말했다. ”저도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모두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소령도 의견에 동의했다. 나는 당시 라이 케 북쪽의 보병1사단 전방화력진지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썬더 로드’라고 불리는 13번 국도 근처였다. 캄보디아 국경과 가까웠다.
당시 나는 그 화력진지에 가져다 줄 고폭탄들을 내 차에 실어놓고 있었다. 350발의 81밀리 박격포탄으로, 조명탄과 백린탄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를 쓰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공중으로 가져다주어야 할 것들이었다. 나는 3/4톤 트럭(닷지)의 뒷칸을 치우고 사람들에게 타라고 했다. 나에게는 독일산 셰퍼드가 하나 있었다. 항상 어디곤 나와 같이 다녔었다. 대부분의 개들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리고 새로운 냄새를 맡기를 또한 좋아한다.
그런데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식당으로 간 다음에 베이컨을 얻어서 트럭 안에 던져놓았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개가 무언가 안 좋은 느낌을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것이 나쁜 징조로 보였다. 개는 나를 떠나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버렸다. 무언가 잠재의식이 개를 일깨웠던 것 같다. 찬 루에서 벤 헷의 지역본부로 가는 13번 국도는 일반적으로 매우 더럽고 먼지가 많이 나는 도로다. 도로는 거의 일직선이다. 운전자에게 지옥을 선사한다. 항상 매복의 타킷이 되기 때문에 매우 빨리 달려야 한다. 아무도 느리게 달리길 원하지 않는다. 왜 3/4트럭들이 캔버스 덥바를 장착하지 않고 알 것이다. 물론 시트 벨트는 꼭 한다. 만약 매복을 당하면, 당신은 아마도 계속 앞으로 달리길 원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빨리 내려서 응사를 해야 한다. 그 도로를 나는 전날 운전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코너를 빠른 속도로 도는데, 나는 피할 수 없는 포탄 크레이터를 발견했다. 난 선택의 여지없이 그냥 밟기로 했다. 빈 트럭은 공중으로 튀어 올랐고, 왼쪽부터 땅에 떨어졌다. 차는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렇게 차를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노력하는데, 갑자기 오른쪽에 노변에 구덩이가 다가왔다. 피할 수가 없었다. 영화 같았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난 도랑을 보고 있었고, 왼쪽 바퀴가 도랑에 빠졌다. 신의 은총으로, 차는 도랑에 쿵 하고 그냥 떨어졌다. 차는 거의 온전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차량과 적재물을 검사했다. 아무 것도 폭발하지 않았다.
나는 큰 도시로 가고 있던 벤 켓의 민간인 군대에 구조되었다. 그들은 나를 찬 루로 되돌려 보내주었다. 의무병이 팔에 붕대를 감아주었고 나는 트럭을 가지러 돌아갔다. 그리고 돌아가보니 내 차는 위험천만한 것을 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기뻐다. 나는 이 교훈을 ‘Dog 101' 라고 불렀다. 그때 아르노비츠 소위는 중위로 진급했다. 그 시기는 내가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이어서 매우 중요했다. 상급 고문관은 아르노비츠 중위가 내 일을 대신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난 아르노비츠 중위가 나를 대신하기 를 바랬다. 그러나 대위 계급이 좋을 것으로 생각도 했었다. 나는 약 70 마일을 차를 몰아서 롱 빈의 베이스에 가 중위진급 파티를 위한 냉동 스테이크를 가져왔다. 우리는 좋은 시간을 가졌으나 늦은 밤에 몸이 아팠다. 우리 팀의 의무인 카운터마쉬 중사가 내 체온을 쟀다. 고문관 팀의 의무 치고는 계급이 높아서 우리는 그를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화씨 104도였다. 중사는 한밤중에 나를 헬기로 의무후송시켰다. 헬기는 라이 케의 1보병사단 병원으로 데려갔다. 증상은 FUO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체온)이었다. 그들은 말라리아를 의심했으나, 카운터마쉬 중사는 하루에 두 번씩 말라리아 예방약을 항상 챙겨 먹였었다. 라이 케에 밤새도록 박격포탄이 떨어졌다. 우리는 막사에서 나와 벙커에서 밤을 지새웠다. 군의관은 나를 다시 ‘푸 로이’인가 ‘디 안’인가로 재후송시켰다. 그들은 내가 신경이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일시적인 정신착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열흘간, 매 시간 피를 뽑아서 검사했다.
나는 매 시간 찬물 샤워를 시켜달라고 했고, 아니면 간호사가 나를 알콜로 닦아 주었다. 열을 내리는 것이 중요했다. 좋게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결국 체온이 떨어졌고 그들은 퇴원을 허가했다. 친구가 나를 데리러 와서 나는 다시 벤 헷으로 돌아갔다. 난 평상시에 175-185 파운드가 나간다. 그러나 베트남의 더위와 훈련 등 기타에 155파운드로 떨어졌다. 내가 벤 헷의 선임 고문관인 도밍고 소령 에게 신고할 때는 1969년 7월 중순이었다. 난 그때 125파운드가 나가고 있었다. 그는 나를 한번 보더니 말했다. “테드, 자네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닌데, 찬 루로 일단 돌아가는 방법 밖에 없겠어. 오늘 밤은 아니고. 하여간.” 나는 잠을 자려고 했으나 전투환상음이 자꾸 들려 발작적으로 깨어나곤 했다.
나는 결국 찬 루로 후송되었다. 그런데 그 때, 우리 구역에서 전에 겪을 수 없었던 큰 전투가 벌어졌다. 대부분이 월맹군으로 구성된 ‘동 나이’ 베트콩연대의 K-2대대가 남단의 한 우리 구역 마을의 중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시작에 월맹군은 남쪽 끝의 우리 중대에 약 500발의 박격포탄을 퍼부었다. 그로 인해서 본부의 모든 292안테나가 파괴되었으나, 계속 무전기로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 개의 57밀리 무반동총을 거취하고 방어선을 포격하면서 북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굉장히 심한 부상을 당한 사람이 하나 노출되었으나 우리 포격유도의 집중점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그냥 방치되었다. 아르노비츠는 즉각 다시 화력요청을 했으나 두 번째 포격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마이크는 "Puff The Magic Dragon"라고 불리는 미 공군의 AC-47 건쉽을 불렀다. 건쉽이 적의 주공격대의 전면인 마을 북쪽에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건쉽은 하나의 독단적으로 떨어져 있던 초가집을 집중사격했다. 이 야간의 전투 중간에, 중위는 남단의 중대 지역으로 들어가서 중상자 한 명을 헬기로 후송시켰다. 여명이 터오자, 철조망에는 11명의 베트콩 새퍼가 죽어 있는 것을 마이크 중위가 발견했다. 수스 소령을 따라서 적의 흔적을 추적했다. 도중에 화기와 함께 자고 있던 월맹군 2명을 발견하여 포로로 잡았다. 그들은 남쪽을 향해서 안전지대로 도피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범한 베트콩이 아니었다. 동나이 정식 베트콩연대였다. 난 전투 후 다음날 아침에 도착했다. 그 동안 중위가 내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디아즈 상사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는 내 화기 하사관 선임이었고, 2차대전과 한국전을 겪은 베테랑이었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 에 세 번째 참전이었다. 팀장을 맡아도 될 만큼 숙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생각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아르노비츠 중위는 정말 팀을 맡을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뭔데요?” 내가 상사를 압박했다. 디아즈 상사가 말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겠는데, 중위는 좀 약하죠?.” “네.” “느낌이 안 좋지. 안 그래?” “네 그렇습니다.” 그런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았냐고? 우리는 모른다. 그저 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전장에 오래 있으면 왠지 어떤 사람이 죽거나 사라질 것 같은 이상한 아우라를 느낀다. 그러면 그 사람은 꼭 그렇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무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내가 떠나고 한 달 뒤, 중위가 내 후임이 되었고, 어느 날 밤 중위는 항상 해 오던 의무헬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스토브 라이트로 헬기를 지상에서 유도했다. 스토브 라이트는 그렇지 않지만 헬기는 항상 베트콩의 주요 목표다. 적은 우리 헬기를 격추시키려고 RPG-7을 쏘았다.
공교롭게도 이 로켓은 헬기 짐칸 중앙을 통과해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관통해서 날아간 로켓은 건너편에 있던 아르노비츠 중위 자리에서 폭발했다. 우연이라구?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르노비츠 중위에게 은총을.... 다시 복귀한 날로 돌아가면, 나는 마지막으로 부대를 재구성했다. 내가 떠나기로 되어 있었던 바로 그 전날에, 나는 다음날의 작전에 관하여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다. 우리 고문관 팀과 RF중대가 전투작전에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날 우리 대원 5명이 총에 맞았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이 떠나는 날이었다. 부대는 좀 더 위험한 북쪽에 나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중대도 근처에 있었다. 작전 출발 전에 나는 모두 에게 작별인사를 해놨었다. 마침내, 나는 내 두 번째 참전의 마지막 날을 맞게 되었다. 나는 작전을 나가는 우리 팀에게 이별을 고하고 내일 알아서 나 혼자 떠난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에 비엔 호아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게 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두 개의 더플백을 쌌다. 그리고 그것을 1/4톤 지프에 실었다. 그 것을 타고 나는 지역 본부로 먼저 신고하러 가게 된다. 내 화기를 반납하고 지역본부에서 편지를 확인한다면, 비엔 호아의 거대한 PX에 들를 예정이었다. 조용했고 나는 내 일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모두 야전에 있었다. 정말 조용했다. 그런데 야전에서 우리 TOC(전술작전센터)를 호출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프에서 무전을 듣고 있었다. 엔진은 돌고 있었으나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전술작전센터에서 나오는 작전장교를 보았다. 그는 뛰어 나오면서 나에게 말했다.
“다이 우이(대위), 당신이 좀 도와주십시오! 우리 중대가 월맹군 중대와 교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 중대가 발견하고 그들을 격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명이 부상을 당했고, 한 명은 배와 가슴에 총을 맞았습니다!”
난 물었다.
"목 수스 소령과 내 이동고문관팀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도울 수 없는가?"
작전장교가 “그들은 북쪽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습니다. 중대는 남쪽에서 교전중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한 "의무구조헬기를 불러주십쇼!!!"라고 추가했다. 전에 의무후송헬기 더스트호프를 부른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전 현장에 고문관이 없이 대원들만 있는 상태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나는 베이스캠프에서 의무후송헬기를 불렀고, Angel(dust off)은 위치가 어디냐고 응답했다. 나는 우리 동료(베트남 병사)가 쓰러져 있는 장소를 통보했다. 그리고 나를 베이스캠프에서 같이 그 장소로 데려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헬기가 물었다.
“로저, 후송 장소 지상에 미군 고문관이 있는가?”
“있다.(‘속으로, 나다!)”라고 나는 응답했다.
잠시 후, UH1D 헬기가 날아와 베이스캠프에 착륙했고 나와 작전장교가 올라 탔다. 작전장교가 랜딩존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약 500피트 상공에서 아래의 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내 눈으로, 우리 민간 RF중대가 월맹군 중대를 공격적으로 추격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정말 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상의 월맹군은 우리를 조롱하는 액션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착륙했다. 그러자 탁탁탁 휙휙휙 하고 초음 속의 총알들이 날아와 올라와 열려진 양쪽문 사이로 통과했다. 헬기 중간 공간을 총알들이 통과했다.
이것은 이른바 "hot" LZ라는 실감케 했다. 월맹군은 우리 의무후송을 방해 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것을 조종사가 눈치 채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조종사는 이미 느끼고 불쾌한 기색이 역역했다. 나는 헬기로 향해 병사들이 부상자를 들것으로 데리고 오는 것을 보았다.
조종사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어디에 염병할 고문관이 있다는 거야? ”
나는 들것이 실릴 공간을 비웠다. 결국 나는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조종사의 얼굴을 보고 고함쳤다.
”자! 나를 봐. 결국 현재 고문관이 여기 지상에 있잖아!“ 부상자가 들것에 실려 나에게 인도되었다.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고통을 참고 있었고, 나를 향해서 전세계적인 제스츄어로 OK를 표시했다. 부상자가 타자, 헬기 조종사는 아마도 나를 버리고 이륙하려는 것 같았다.
월맹군은 마구 쏴대고 있어서 위험했다. 결국 나도 올라탔다. 고도가 안전고도에 이르자, 모두가 웃기 시작했다. 조종사를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난 인터컴으로 조종사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친구들. 이 용감한 친구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전에 나를 다시 찬 루 베이스에 내려달라고... 참고로 오늘이 내 참전 마지막 날이야. 난 내일 귀국한다구!” 그들은 그렇게 해주었고, 내내 웃고 있었다.
찬 루 베이스는 조용했다.
정말 조용하게 내려앉았다.
기총수가 이륙하면서 마지막으로 고함을 쳤다.
“당신은 운 좋아. 염병할, 나도 두 달 남았어!”
1. 민간군사 단체가 여러 관할로 일어났다 2. 미군고문관들이 방어 이상의 목적의 부대를 만든다 3. 귀순프로그램에 의해서 월맹군/베트콩출신들이 유입된다 4. 이들이 검문과 통제, 베트콩 색출의 경찰권한을 받게 된다 5. 나중에 이것은 PRU-전문 추적부대로 형성된다 6. 반공주의자들이 PRU에 형성되면서 문제가 파생된다 7. 남베트남인들의 검거, 색출, 심문은 강한 편이었다 8. PRU는 남베트남 경찰과 공산당 검거의 경쟁도 한다 9. 미군 고문관들은 처음에 깊게 관여할 수 없었다 10. PRU가 만들어지자, 미군들이 들어와 직접작전도 하게 된다 11. 이 PRU는 고위지휘부 외에 노터치였다... 그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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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S 의 빛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