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김주완
시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 중의 하나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명제이다. M. 하이데거가 처음으로 규정한 이 명제는 그러나 시 창작에만 한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 명제는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다. 하이데거는 R. M. 릴케의 20주기를 맞은 1946년에 릴케를 회상하고 그의 시를 분석하는 논문 한 편을 조그마한 교회에서 발표한다. 논문의 제목은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이며 이 논문 가운데서 하이데거 자신의 유명한 명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가 최초로 등장한다. 하이데거는 철학자이면서 그 자신도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릴케의 시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가운데서 현존재를 분석하는 하이데거 자신의 존재론이 구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인 릴케도 철학을 전공하였기에 그의 시 속에는 철학적 논의의 씨앗이 많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존재는 ‘있음’이다. 하늘도 있고 땅도 있고 새도 있고 풀도 있다. 사건도 있고 재물도 있고 전쟁이나 평화도 있다. 뿐만이 아니다. 마음心도 있고 의식도 있고 정신도 있다. 수학적 공식이나 논리적 법칙이나 가치도 있다. 이와 같이 ‘있는(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이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하늘이나 땅처럼 개별적으로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라 해야 마땅하다. 땅에도 옥토가 있고 사막이 있다. 이 또한 존재자이다. 존재자의 하위도 존재자이고 상위도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존재자의 맨 꼭대기에 있는 존재자, 그 위에 더 이상의 존재자가 없는 존재자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라고 했다. 하늘로서의 존재자도 아니고 땅으로서의 존재자도 아닌 다만 ‘있기만 하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라는 것이다.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있음(존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우리는 최상위 개념으로서 ‘존재’라고 한다. 존재는 그냥 있음 그 자체다.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개념이 존재이다. ‘있는 것有’이 있듯이 ‘없는 것無’도 있다. 그러므로 무無도 존재이다. 무는 없음으로서의 있음이다. 존재와 존재자의 개념 구분은 엄밀성을 확보해야 할 때 사용하는 구분이고 일상에서는 두 개념을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언어는 어떻게 하여 존재의 집이 되는가? 존재는 이름을 가진다. ‘산’이라는 ‘존재’는 ‘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비로소 ‘산’이 된다. 우리가 사물을 파악하고 사물로 다가갈 때 반드시 이름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물’이라는 말을 통하여 ‘물’을 알게 된다. ‘통한다’라는 것은 ‘통과한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말을 통과하여 사물로 나아간다. ‘기린’이라는 언어를 모르면서(통과하지 않고) ‘기린’이라는 동물을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는 그림책으로 공부한다. 세상에는 이름 없는 존재도 있다. 그러나 그 이름 없는 존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없는 것이 된다. 이름 없는 존재에 어떤 이름을 붙여서 불러 줄 때 비로소 그 이름을 통하여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름 없는 것이 이름 불릴 때(언어의 집에 들어갈 때) 존재는 없는無 존재에서 있는有 존재가 되는 것이다.
김춘수의 시 「꽃」은 하이데거의 명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를 가감 없이 시에 담아낸 명시이다. 꽃이라고 이름 불러 주기 전의 존재는 아직 꽃이 아니다. 하나의 몸짓이다. 하나의 허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꽃이라고 이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꽃이 된다. 다른 누군가 그를 꽃이 아니라 눈물이라고 이름 불러 준다면 그는 그에게로 가서 눈물이 되었을 것이다. 존재는 이름 불러 주어야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름은 말(언어)로 불러 준다. ‘이름’은 명사이고 ‘불러 준다’라는 동사이다. 명사와 동사만이 말인 것은 아니다. 형용사와 부사, 감탄사도 말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불러 준다’라는 명제는 형식적으로는 명사와 동사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모든 말을 포괄한다. 명사는 물론이지만, 동사와 형용사 등 모든 말이 언어의 집이다. 말로 불러 줌으로써 존재가 자신의 집에 자리 잡아 실질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미 이름이 있는 존재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서 불러 주면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시인의 소임이 그러하다. 시인은 대상을 독창적이고 개성적으로 바라보며 기존의 이름이 아닌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 시를 짓는다. 존재의 집을 짓는다. 상투성과 기시감은 시인에게 있어서 금물이다. 사물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시인은 그러므로 신이다. 그러나 반신半神이다. 신神은 이전에 있지 않았던 것을 창조하는 데 반해 시인은 이전에 있었던 것을 새롭게 창조하므로 완전한 신이 아닌 반쪽의 신인 것이다. 시인은 신과 인간들 사이의 중간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독자는 자기의 것을 보태어서 시를 읽는다. 사람마다 보태는 것이 다르므로 시는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게 된다. 다르게 읽는다는 것은 다르게 이름 불러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은 사물을 다르게 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때가 있다. 신선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사물에 대하여 자기만의 이름으로 불러 시를 창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시인으로 이 세상에 산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시인적이다>라고 한다.
언어의 생성은 존재의 생성이며 언어의 소멸은 존재의 소멸이다. 신조어는 생성된 언어이며 사어는 소멸된 언어이다. 언어가 소멸될 때 존재도 소멸된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다면 소멸된 존재는 새로운 언어의 집으로 옮겨 가서 새로운 존재로 탄생한다. 그러므로 시인이 있는 한 소멸은 언제든 존재가 될 수 있다. 시인이 있는 한, 그리고 언어가 있는 한 존재는 절명하지 않고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