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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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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 스크랩 나를 기쁘게 해 준 선물 하나
권종상 추천 0 조회 72 08.12.20 22:05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시애틀에 큰 눈이 기습적으로 내리던 날 아침, 출근길에 애를 먹었습니다. 평소에 막힐 때도 대략 한 시간 안짝으로 걸리고, 안 막히는 토요일 같은 경우 3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의 직장까지 가는데 이날 거의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만 그렇게 고생한 게 아니어서, 일곱시 반까지 도착해야 하는 직장에 열 시 넘어서 온 사람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시애틀은 언덕배기들이 많아서, 일단 눈이 쌓일 정도로만 오면 그때부터는 말 그대로 '꼼짝마라' 입니다. 이 눈 때문에 교통사고도 많이 나고, 이번엔 한파까지 겹쳐 그 눈이 모두 얼음으로 변하면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 라우트의 토마스 스트릿에는 아주 급경사의 언덕길이 한 군데 있는데, 어제 아침엔 배달을 하다가 이쪽으로 돌아가려는 차량들을 제가 몇번 막기조차 했었습니다. 내려가면 사고날게 너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떠나 다른 곳의 배달을 하다가 문득 TV를 통해 바로 그곳에서 큰 사고가 난 것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차터 버스 두 대가 이곳을 무리해 내려가다가 미끄러지면서 충돌, 이중 한 대는 고속도로와 이어지는 옹벽과 차단 배리어를 들이받고선 공중에 달랑달랑 걸린 것이었습니다. 자칫하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했습니다.

 

아무튼 안 미끄러지려 애쓰고 메일 배달을 하다보니 발목에 약간의 무리가 오고, 운전에 신경쓰다보니 목이 다 뻣뻣해지고... 눈이 온 첫날은 아예 집으로의 퇴근을 포기하고 우체국 근처에 사는 친구의 집에서 하루 신세를 졌습니다. 다음날 어떻게 집으로 운전해 돌아오긴 했는데, 우체국에서 고속도로 진입까지가 40분이 걸렸습니다. 그나마 고속도로는 좀 형편이 나아져서, 집으로 귀가하는데 걸린 시간은 한시간 반이 채 안됐습니다.

 

출퇴근이 힘들고, 일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제한파를 반영하듯 과거보다 우편물의 양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체국에서도 조회시간에 12월조차도 이익 감소를 겪고 있다는 스테이션 매니저(우체국장)의 훈화 내용이 어쩐지 섬?하게 다가올 정도로, 올해 겨울은 확실히 지난해와는 틀리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말이라 그런지 소포는 평소보다 꽤 많습니다.

 

우체부들에게, 특히 연말에 가장 신경쓰이는 부분이 이 소포를 어떻게 안전하게 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사는 세상이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남의 집 문앞에 놓여진 소포를 훔쳐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체부인 저조차도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보내준 마른오징어며 자질구레한 것들을 담아보낸 박스를 저희 집 문앞에서 누가 훔쳐간 것이지요. 아무튼, 그런 일을 개인적으로 겪고 나서 저는 더욱 신경써서 소포를 배달하려 합니다. 되도록이면 집에 있는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와서 물건을 받는 것을 지켜보는 편입니다. 어쨌든, 이 덕에 제 라우트에서 소포 배송 관련한 주민들의 불평을 받아본 적이 없고, 주민들 역시 제 노력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해 주는 것을 느낍니다.

 

매년 12월은 우체부들에겐 연중 가장 힘든 때이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보람을 느끼는 때이기도 합니다. 손님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우체부들에게 선물을 줄 때도 있기 때문이지요. 주민들이 자기 우체부들이 정말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내주는 이 성원, 정말 가슴 뿌듯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올해 이 경기한파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랄만한 선물도 하나 받았습니다.

눈 속을 헤치고 가서 어떤 콘도미니엄(우리나라의 아파트 개념)에 배달을 시작하려 메일 박스의 큰 도어를 연 순간, '우리의 우체부 조셉에게'라고 쓰여진 봉투를 발견했습니다. 일단은 메일 가방에 넣어 놓고, 배달을 모두 마친 후에 제 가방으로 옮겨 넣었습니다. 사실, 곳곳에서 이런 봉투들을 발견했는데, 대부분은 커피 카드나 초컬릿 같은 것들이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콘도미니엄의 입주자대표로부터 받은 이 봉투는 조금 특별했습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50달러짜리 와인 상품권이었습니다. 제 라우트 인근에 있는 Vino Verite 라는 와인샵에서 와인을 구입할 수 있는... 하, 하. 조금 놀랐습니다. 원래 제가 와인 좋아한다는 것을 이 사람들도 저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걸 참조해서 이렇게 와인샵 선물권을 마련해 주다니. 고맙고, 또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메일박스엔 와인 한 병이 들어가있기도 했습니다. 작년에도 손님들에게 와인 몇 병인가를 받긴 받았었지요. 하하.

 

그래도, 일단은 이게 제가 나름으로 일년동안 열심히 그들을 위해 일했다는 반증이다 싶기도 해서 많이 기뻤습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우체부를 위해 와인 상품권을 준비했다는 것도, 그들이 제게 가진 애정과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보람있고 뿌듯했습니다.

아마 오늘 오후엔 이 와인샵에 들러 와인 샤핑하는 데 시간을 좀 쓸 듯 합니다. 무슨 와인을 살까,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는데요? 하하... 오리건산의 좋은 피노 느와 한 병 사야겠습니다. 아니면 평소에 하던대로 좀 싸고 괜찮은 와인들로 박스신공을 해 버릴까... 아무튼 즐거운 고민이 되는군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 안에 기쁨과 행복, 그리고 보람이 녹아 있는 것이고, 또 제가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이 세상은 아직은 살맛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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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2.21 01:44

    첫댓글 흠.. 담부터는 현금도 괜찮다고 하면 안될까요..? ㅎㅎ

  • 08.12.21 01:52

    저도 행복을 배달해 주시는 조셉님께 마음의 와인 뉴질랜드산 몬타나 한병 보냅니다. ^^

  • 작성자 08.12.21 22:24

    하하... 현금 선물도 조금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을 헤아려준 선물들이 이렇게 있다는 게 고마워서요... 그리고 단풍님, 저도 몬타나의 피노느와 좋아합니다. 브랑코트... 던가요?

  • 08.12.23 11:12

    하하하 일하는 맛 나시겠어요~~훈훈한 성탄소식이네요~~~

  • 09.02.19 19:02

    세상은 아직 살 맛 나는 곳이다... 강추입니다. 열심히 살아온 것을 인정 받은 것에 대해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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