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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암진(의령관문)
서부경남과 북부호남을 연결하는 의령관문은 남강변의 자연경관과 함께 조형미도 아름답지만 밤이면 조명불빛으로 자태가 더욱 화려하게 빛나고 있으며, 임진왜란때 정암진 전투로 유명한 전적지에 세워져 역사적 의미도 크다.
이 관문은 길이 45.17m, 높이 12.87m(차량통과 높이 5.4m)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지붕은 전통 한옥지붕 형태로 서울 남대문(숭례문)과 같은 양식이다.
관문의 내부에는 정암진 승전도와 의병창의도, 세계기네스북에 등재된 의령큰줄 땡기기, 우리 민족의 전통 농경문화인 소싸움, ‘홍의장군’ 곽재우 및 17장령들의 호국 충정의 넋을 기리는 의병탑, 의령의 명산인 자굴산의 사계절, 가례 왜가리서식지 등 의령의 관광명소에 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관광의령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곽재우 홍의장군과 의병들의 정신을 기리고 의병의 고장으로서 의령을 전국에 널리 알리기 위한 상징물인 의병광장 조성사업이 최근 완료돼 의령관문이 새로운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산2-5번지 일원 7,840㎡의 면적에 조성된 의병광장에는 홍의장군 동상과 벽면 전시대, 분수, 전망쉼터, 화장실 등 기반시설과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홍의장군 동상은 기단을 합쳐 높이 17m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 백마에 올라 적진을 바라보며 호령하는 웅장한 기상을 담고 있다. 또 벽면 전시대 2개소에는 왜군들과의 전투에 임하는, 홍의장군을 비롯한 18장령의 비장한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찾는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지난 2009년 12월 착공해 1년여 공기 끝에 준공된 의병광장의 조성 사업비는 37억9천8백만원으로 진주소재 삼삼종합건설이 시공을 맡았다. 의병광장 조성사업이 완료됨으로써 지난 2006년부터 추진해온 정암 전적지 관광자원화사업과 함께 곽재우 장군의 의병 승첩지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 나라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됐다.
특히 전체 의령군민의 숙원이던 의병의 날이 2010년 5월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고 2011년부터 6월1일 의병의 날 기념식이 전국적인 관심 속에 정부 주관 하에 열리게 됨으로써 의병기념관 건립이나 충익사 의병유물전시관 건립사업 등 의병관련 사업도 추진에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의령최고의 문화축제장 ‘소싸움대회’ 전경 but 여긴 가지않는다 why 우리가족은 평화주의자라서!
정암전전적지 관광자원화 사업과 연계된 전통 농경문화테마파크 조성사업은 2011년 2차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특화사업으로 소 싸움장, 농경문화 홍보관 등을 건립하여 농경유물전시 및 도시문화 공원으로 가꾸어 아름답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 의령읍 소도읍 육성사업의 마무리로 이를 연결하는 관광벨트를 구축하게 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2) 정암루(솥바위)
경남 의령군 의령읍 남강에 있는 바위섬이다. 정암(鼎巖)으로 그 모습이 솥뚜껑을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이 바위는 반쯤 물위에 드러나 있으며 물아래 솥다리 세개의 발이 받치고 있다.
전설에 이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 이내에 큰부자 3명이 난다고 전해진다.
예부터 도선장이었다하며 임진왜란 때 의령출신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가 왜적을 물리친 승첩지이기도 하다.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이병철생가가 긴 주능선이 다하는 내청룡 끝부분에 있다. 내룡이 길어 발복도 장구한 것으로 본다. 터를 감싸듯 돌출된 오른쪽 바위는 이곳의 기운이 새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국운을 정운이라 했다 하니 극귀의 상징인 셈이다. "정암"도 세개의 발을 가진 솥을 닮은 바위다. 삼정승 버금가는 인물을 기대하는 조건이 된다. 조선말 한 도인이 이 솥바위에 앉아 머지 않아 이 바위를 중심으로 국부 3명이 난다는 예언을 한 이후 공교롭게도 재벌 창업주 3명이 근처에서 태어났다.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LG의 구인회 그리고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효성의 조홍제 등이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솥바위로 인해 태어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풍수논리엔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풍수의 주체는 용맥이지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풍수를 적용하려면 태어난 생가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다행히도 이분들 생가는 전설에서처럼 솥바위 주위로 둥글게 모여있다. 그래서 답사하는데도 편리하고 좋다.
남해 고속도로 군북 IC에서 내려 10분 가량 달리면 충의의 고장 의령의 관문에 다다르고 남강물 유유히 흐르는 철교아래 가마솥을 닮은 바위 하나가 물위에 유유자적 하니 그 이름이 바로 솥바위이다. 물에 드러난 형상만 보고도 금방 솥 모양임을 알 수 있을진대 더구나 물아래 감춘 형상 또한 세 발을 달고 있다하니 이 어찌 완벽한 솥바위라 하지 않으리오.
이곳은 그 옛날 선인들이 나룻배를 타고 왕래했던 나루터지만 임진왜란 때는 나루에서 곽재우 장군이 왜장 혜경이 이끈 수만의 왜적을 잠복 끝에 몰살시킨 승전지로도 유명하니 지금은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더욱이 정암루에 올라 강물을 내려다보면 풍류가 절로 피어나 그만 노래가락이 나올 법한데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의 모습 또한 마냥 여유롭다.
이것도 잠시 지금은 시원하게 뚫린 2차선 아스팔트 도로 위를 분주히 오가는 차량의 행렬을 쫓다보면 그 옛날 왜병들이 경상도에서 전라도의 곡창지대로 들어가려 기를 썼던 중요 길목임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다.
(3) 충익사
충익사는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망우당 곽재우 홍의장군과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의령천을 끼고 남산에 안겨 있는 충익사를 둘러보려면 먼저 의령천 둔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의병교를 건너면 양쪽 기둥을 세워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이 남산의 푸른 숲을 뚫고 그 위용을 자랑한다.
의병탑 왼편에는 시민들의 휴식공간과 화장실 등 부대시설이 있고, 오른편에는 충익사관리사무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 충의문에 들어서면 잘 가꿔진 잔디밭과 수목이 시원하게 눈을 식혀준다. 충의문에서 왼쪽으로 보면 곽재우장군 유적 정화 기념비가 있고, 기념비 옆에는 다포팔작식 목조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의 증직명과 관향 등이 적힌 명판을 보관한 충의각이다.
충의각은 어느 한 곳에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충의각에서 나와 충익사당으로 가기 전 오른쪽에는 높이 8.5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3m에 이르는 수령 약 500년의 노거수가 있
는데 이 나무가 경상남도 지방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된 모과나무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우리나라 지도를 본 떠 만든 인공연못이 있는데 붉은 잉어를 비롯한 관상어가 풍치를 더해준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홍의문을 들어서면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17장령 및 수많은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충익사당이 있다. 매년 4월22일 이곳에서 추모제향을 드리며 많은 관광객들이 향을 올리는 곳이기도 하다. 충익사당을 나와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이 기념관이다. 이곳에는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의 유물과 기마도, 전투도 등이 전시되어 있어 임진왜란 때의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기념관 뒤쪽에는 지압보도 등 부대시설이 잘 만들어져 있어 의령군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체육공원이 있으며 전통활터인 홍의정이 있고, 남산을 오르는 입구이기도 하다. 충익사 경내는 그림 그리기나 백일장 등의 대회도 자주 열리는 장소이며, 전통혼례를 올리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4) 의령박물관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동동에 있는 군립박물관이다. 향토문화유산의 발굴과 보전을 위해서 중추적 역할을 함은 물론 의령군의 역사적, 문화적 뿌리를 이해하면서 조상의 얼과 슬기를 배우게 될 산 교육장으로서 삼고자 설립되었다.
1993년 고고역사실과 민속실을 마련하여 정곡면 예둔리 가야고분의 발굴 사업으로 출토된 유물과 학교 및 개인으로부터 기증받은 유물과 민속 자료 등 400여 점을 전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1993년 군립의령박물관으로 정식 등록되어 개관되었다.
연건평 3,365㎡의 규모이며, 군민문화회관내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 자리잡고 있다.
고고역사실에는 정곡면 석곡리 지석묘에서 발굴된 마제석검, 붉은간토기, 돌도끼 등 20여점의 청동기시대 유물과 가야시대 유적인 정곡면 예둔리 고분군과 의령읍 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고배, 컵형토기, 철검, 철모 등 유물 100여점과 정곡면 예둔리 고분군 25호 석곽을 이전 복원하여 현실감을 더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금동불여래입상, 이노·이운장·최장소등의 교지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있다.
의령박물관 지하1층에 자리하고 있는 민속전시실은 우리지역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실생활에 사용하시던 민속유물을 기증 받아 전시하고 있으며, 전시유물로는 우리고장의 특산물인 한지의 생산과정이 재현되어 있으며, 민간에서 혼례 때 신랑 신부가 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신랑 것은 보통 장식이 없지만 신부의 가마는 꽃가마라고 하여,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하거나 술을 다는 등 화려하게 장식된 사인교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명주·무명·모시·삼베 등의 피륙을 짜는 베틀도 재현되어 있다.
(5) 의령구름다리
의령천의 맑은 물과 함께 잘 조성된 수변공원 위로 우뚝 솟은 구름다리가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어찌나 높은지 현기증이 날 정도이지만 사방을 둘러보면 주변의 자연경관이 한눈에 들어와 흡사 전망대에 올라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꿈의 구름다리는 충익사, 의령천, 남산 산림욕장을 연계한 새로운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주변에는, 충익사(500m), 정암루와 솥바위(4km), 목도수목원·일준부채박물관(5km), 호암 이병철선생 생가(13km), 망우당 곽재우장군 생가(20km), 백산안희제선생 생가(22km) 등의 관광명소와 함께, 목장형 유가공체험장(의령 정암 4km), 아자촌(가례 갑을 10km), 나무누리(대의 신전13km) 등의 체험마을이 있다.
남천 의령구름다리의 전설 : 이곳은 자굴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의령천과 벽화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남천이 합류되는 삼각지로 예부터「宜寧의 西泉」이라 불리었던 곳으로 동쪽에서 구룡(九龍)이 西泉의 發源地에서 솟구치는 용출수 수증기가 서남풍에 따라 남산의 동쪽에서 九龍이 노닐고 갔다하여 지금도 구룡마을이 있고, 이곳은 구름다리 주탑에서 동쪽으로 남강 정암진 솥바위가 있어 솥바위 반경 30리(12km)에서 부자가 난다는 전설과 함께 우리나라 경제인 가운데 삼성그룹 호암 이병철(의령군 정곡면), 효성그룹 만우 조홍제(함안군 군북면), LG그룹 연암 구인회(진주시 지수면)선생이 그 실제인물로 태어나 우리나라의 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으며, 이곳 구름다리(주탑)에서 동쪽 해뜰무렵 솥바위쪽을 바라보고 기원하면 아홉용(龍)의 기운을 받아 부자가 된다는 전설(傳說)이 있는 이곳에 의령군에서 공원화하여 의령구름다리를 건설(2005)하였다 한다.
(6) 뗏목 체험
의병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남강을 따라 의병 전적지를 뗏목으로 탐사하는 체험프로그램이다. 뗏목 탐사는 의령군 화정면에 있는 남강 연수원에서 탐사팀을 구성해 임진왜란 승첩지인 정암진까지 뗏목으로 탐사하는데 체력단련과 호국정신을 함양하는데 아주 좋은 프로그램으로써 중ㆍ고등학생들로부터 많은 각광을 받고 있다.
프로그램을 이용하려면 남해고속도로 지수 IC에서 장박교를 건너거나 의령읍 하리를 거쳐 화정면 장박 마을에 있는 남강레저를 찾으면 된다.
⦁장 소 : 의령군 화정면 화양리 장박교 아래 남강변
⦁문 의 : 055-574-2212, 011-584-4401
⦁체험비 : 개별(성인:20,000원 어린이:15,000원), 단체(성인:15,000원 어린이:10,000원)
⦁도시락 : 5,000원
(7) 벽화산성
척곡마을 입구에서 1.5㎞정도 승용차로 오르면 총 연장 777m의 산성이 있는데 이 산성은 처음 삼국시대 때 축성되어 조선시대 때 부분 재 축성 된 성으로써 임진왜란 때 진주와 전라도 지방으로 가려던 왜적을 무찔렀던 의령의 중요한 방어선이 되었던 곳이다.
의령군에서는 2003년 현재 183m의 성곽을 복원하여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것과 동시에 인근 용국사 등과 연계한 관광코스로 개발하고 있는 곳이다.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되었다.
의령읍 서남쪽에 있는 벽화산은 상당히 험하고 또 산석이 많은 곳으로, 주봉과 중봉이 있는데 이 양봉에 각기 대규모의 석성이 남아 있으며 각기 상벽화성·하벽화성이라 부른다. 가야시대(伽倻時代)에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상벽화성은 526m, 하벽화성은 378m로 약 1km 가까운 성벽이 남아 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의령읍성(宜寧邑城)을 축성하면서 전란에 대비하여 부분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조선시대 말기인 1876년(고종 13)에는 당시의 의령현감 주기로(朱基露)가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가 이 벽화산성 싸움에서 왜적 수천 명을 무찔러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원래 이 산성은 벽화산 아래까지 연장되었던 듯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주변 마을에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유물, 삼국시대의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8) 보천사지 3층석탑과 부도
보천사지 삼층석탑의령 보천사지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얹었는데, 고려초기의 탑임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이어받고 있다.
탑의 바닥돌은 아래에 네 모서리마다 큰 괴임돌을 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양 모서리와 가운데 부분에 기둥 모양을 하나씩 새겼다. 그 위에 맨 윗돌은 구성이 독특한데, 두 장의 길고 판판한 돌을 좌우로 얹고 그 사이에 작은 2개의 널돌을 끼워놓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닥돌에서의 괴임돌처럼 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주어 탑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배려인 듯 하다. 위층 기단은 각 면의 양쪽 모서리에만 기둥 모양을 새겼을 뿐, 가운데부분은 생략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여, 층층이 온화하게 크기를 줄이면서 올려놓았다. 몸돌에는 모서리에만 뚜렷하게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처마의 윗선은 거의 수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서 서서히 들려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쳐주는 네모난 노반(露盤)만 남아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노반 위로 불꽃조각을 한 수연(水煙)이 얹혀 있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전체적으로 원만한 비례를 나타내며, 기단부에서의 독특한 구성이 돋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1967년 사리유물을 도난당하는 바람에 탑이 쓰러져 많이 부서졌으나 곧 보수하였다. 이 때 사리를 장치하였던 흔적이 밝혀졌는데 그 안에서 청동으로 만든 불상과 광배 모양의 구리조각, 흙으로 만든 탑 등이 발견되었다.
보천사는 수암사(水巖寺)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사찰로, 승탑(부도)은 절터의 북쪽 산기슭 계곡에 세워져 있으며, 위아래 모두 8각형의 기본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기단의 아래받침돌ㆍ가운데받침돌ㆍ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에 돌띠를 돌려 구분하였으며, 윗단에는 용과 구름무늬를 얕게 돋을새김 하였다. 가운데받침돌도 8각으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긴 후 면에 타원형의 조각을 두었다. 윗받침돌에는 2겹으로 16장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탑신은 각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고, 8면 가운데 한 면에만 문짝과 자물쇠 모양을 새겨놓았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운 모습으로 정상에서 각 모서리로 뻗치는 선을 높게 돋을새김 하였고, 그 끝마다 큼직한 꽃장식을 얹어 놓았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각 면을 안으로 굽어 깍은 점이 특징적이며 기단의 아래받침돌에 새긴 용과 구름무늬가 무기력해 보이는 흠이 있다. 또한 지붕돌이 무겁고 두꺼운 점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볼 수 있어 승탑이 건립된 시기는 고려 전기로 짐작된다.
(9) 용국사
1997년 9월에 창종된 대한불교불이종의 총본산으로, 사찰 건립연대는 1995년이다.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하리의 벽화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대지면적 26만 4,000㎡의 대규모 사찰이다. 사찰에 이르는 길이 650m의 진입로 양쪽에 옥석으로 만든 높이 2.8m의 관음상 333개가 줄지어 서 있어 이채롭다. 관음상 길을 통과한 후 2층 누각형식의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양쪽에 요사가 있고, 그곳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넓은 대지 위에 대웅광전·극락전·관음전·범종각 등의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광전은 건물총면적 826m² 규모로, 내부에 금동만불상 등의 불상을 모시고 있다. 대웅광전에서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법당식 납골당 시설인 도솔궁이 나온다. 도솔궁은 건물총면적 1,980㎡의 지상 3층 건물로, 4만여 기의 납골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관음상들이 도열해 있는 용국사 입구 쪽에는 보물 제373호 보천사지삼층석탑(寶泉寺址三層石塔)과 보물 제472호 보천사지부도(寶泉寺址浮屠)가 있다.
벽화산 기슭아래 자리잡은 사찰로 입구에 333개의 관세음보살이 양쪽으로 줄지어 서서 절을 찾는 구도자를 안내하고 있다.
특히, 세계 최대 규모인 250평의 대웅전 위에 지상 10층 높이나 되는 43m 크기의 미륵삼존불상을 건립중에 있는데 불상 안쪽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된다. 용국사 입구에는 보물 제373호인 보천사지 3층석탑과 보물 제472호인 보천사지 부도가 있다. 또한 3,500기를 안치할 수 있는 "영혼의 쉼터" 납골당이 있다.
(10) 의령 서동리 함안층 빗방울 자국
빗줄기가 바위를 뚫었다면 그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그 흔적이 여기 있으니 그게 바로 천연기념물 의령의 빗자국이다.
약 1억년 전 공룡이 살았을 법한 시절에 부드러운 퇴적물 위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져 표면에 빗자국이 남았는데 그것이 서서히 굳어지다 끝내 단단한 돌이 되니 그 흔적 지금도 너무나 뚜렷하다.
1968년 5월 23일 천연기념물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1965년 의령읍 서리 국도변 암벽에 도로로부터 177㎝ 높이에, 함안층 기저로부터 150m 회적색 셰일 지층면에서 무수한 빗방울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분포면적은 400㎡이다.
빗자국 밀도는 1㎠당 1.5개 정도이며 지름은 8∼15㎜, 깊이는 1㎜ 미만이다. 빗자국이 큰 것은 고리모양의 둘레능이 발달하였고 많은 빗자국이 겹쳐져 있다.
경북대학교 지질학과 교수 장기홍(章基弘)이 처음 발견하여 연구되었고, 의령 외에도 함안군 칠원읍 부근의 함안층산(咸安層産), 고성군(固城郡) 덕명리 샛골해안가의 진동층산(鎭東層産) 등 경상남도 지역에 다수, 인도를 비롯하여 전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빗자국은 점토질 세립퇴적물이 정체성을 띠고 퇴적작용을 일으키던 범람원 지면이 공기에 노출되면서 건조 현상이 일어나고 순간적인 소나기가 급강하하여 깊은 빗자국을 내면 얼마간의 퇴적면 건조기가 수반되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조건은 비가 귀한 건조기후에서 보인다.
빗자국이 생기기 위한 자연환경은 하성환경 가운데 범람원상 호소 주변이거나 물이 마른 범람원 표면으로 추정된다.
(11) 신포리 입석군
입석은 바위를 길게 다듬어 세워놓은 것으로 선돌이라고도 하며, 고인돌과 함께 큰돌 문화의 일종이다. 그 목적이나 유래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선사시대에는 고인돌 주변에 세워 묘의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였고, 역사시대에 와서는 마을 입구에 세워 귀신을 막거나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토착신앙과 결합하여 장수를 비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농경사회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의식과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식을 위해 세우기도 하였다.
신포리 마을을 에워싸듯 둘러서 있는 이 입석들은 모두 8기에 이르며, 그 중 2기는 마주보며 거의 붙어 있다. 규모는 작은 것이 높이 2m 가량이며, 큰 것은 4m 정도로, 너비는 1.5m 가량이다
규모는 ①높이 2m, 폭 1m, 두께 0.8m, ②높이 1.2m, 폭 1.3m, 두께 0.4m, ③높이 1.8m, 폭 1.7m, 두께 0.8m, ④높이 1.3m, 폭 0.9m, 두께 0.7m, ⑤높이 0.8m, 폭 0.8m, 두께 0.6m, ⑥높이 1.8m, 폭 1.4m, 두께 0.6m, ⑦높이 1.6m, 폭 0.7m, 두께 0.6m 등 모두 8기의 선돌이 190㎡ 면적에 늘어서 있다.
이들 선돌은 7개(8기 중 2기는 붙어있으니..)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유적의 특징 때문에 현재 부르고 있는 면의 명칭이 칠곡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이들 바위 중에서도 가장 큰 바위는 높이가 약 3m 가까운 것이 있는데, 이를 ‘칠성바구’ ‘선바구’ ‘자지바구’라고 부른다. 이를 칠성바구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들 선바위 유적이 7개에 이르기 때문에 그 바위를 대표해서 칠성바위라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바위가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치성을 드리는 기자석이기 때문에 칠성바위라고 한 것이다.
신포리의 칠성바위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칠성신앙과 결부되어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기자석으로 일찍부터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는 자식을 못 낳는 여인이 이 바위에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인시(3∼5시) 무렵에 바위에다 금줄을 걸고 황토를 뿌려 정화시킨 후에 치성을 드렸다는 것이다. 치성은 대개 첫닭이 울기 전에 마친다. 그리고 단순히 치성만을 드린 것이 아니다. 칠성바위에 손을 얹고 치성을 올려야만 효험이 높았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에 칠곡면의 부녀자들이 곧잘 몰려와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12) 일편단심민들레농장
칠곡면 내조리에 있는 일편단심민들레(573-6533, http://www.mdltea.com)는 민들레식품을 개발하여 판매하고 있으며 자연 속에서 맘껏 뛰어놀면서 민들레의 생명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맑은 공기와 시골의 넉넉함을 느끼게 하는 곳으로 민들레꽃물들이기, 꽃따기, 비누만들기를 체험할 수 있다.
(13) 왜가리 서식지
⦁ 위치 : 경남 의령군 가례면 가례마을 뒷산
⦁ 개요 : 의령군 가례면 가례마을의 뒷산에는 떡갈나무 등을 비롯한 100 년 생의 잡목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른봄이면 왜가리떼가 몰려와서는 온산을 하얗게 뒤덮은 채 둥지 를 틀고 여름 한철을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늦가을이 되면 낙동강 하구인 을숙도 방면으로 이동했 다가 아열대지방으로 날아간다. 왜가리떼가 언제부터 이곳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않으나, 대략 일제말인 1940년대쯤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불과 수십마리에 지나지않던 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그 수가 불어나서 지금은 매년 수천마리가 날아들고 있다. 왜가리가 날아드는 봄부터 여름철이면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아와 왜가리의 생태와 활동장면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 왜가리 부부의 자식 사랑
온통 눈 덮인 듯 하얀 산!
이른 봄 왜가리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가족을 불린 뒤 여름 한철을 지내다 가는 곳, 가례면 가례리 뒷산. 이곳에 왜가리가 살림을 시작한지도 1940년대쯤 된다하니 가히 왜가리의 고향이라 할만하다.
왜가리는 원래부터 이곳저곳 기후를 쫒아 떠도는 철새인지라 이곳에서 사계절을 나지는 못하지만 타향객지에서 향수에 젖다 꿈에나 그리던 고향집을 찾는 사람처럼 늘 하이얀 옷을 깨끗하게 차려 입고 매년 찾아오니 왜가리 가족 순백의 날개 짓 그지없이 아름답구나!
(14) 자굴산 둘레길
의령군은 자굴산 권역 산림경영모델 숲 조성사업으로 3억8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자굴산 해발고 650m 선상에 전망대와 데크계단, 정자, 안내표지목 등을 설치하고 최근 둘레길을 조성했다고 한다.
둘레길은 쇠목재 정자에서 출발하여 절터샘 - 전망대 - 달분재를 수평으로 연결하는 3.7km의 등산로를 개설하여 내조 마을, 새가례 마을 등 기존 등산로와 연결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길은 종전 수직상하 이동의 힘든 등산개념에서 숲이 가진 좋은 것을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수평 개념의 등산로를 조성하여 자굴산만의 생태와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편안하게 심신을 단련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둘레길로 가장 많이 이용하는 쇠목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돌아오는 거리는 6.8km로 누구든지 하루 이용하기에 적정한 등산로를 개설하였다. 또한 5개소의 산속 쉼터를 조성하여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치유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자굴산 둘레길에서는 다양한 수목 군락지를 만날 수가 있는데 능선부에는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천년다지송과 희귀목인 노각나무, 사람주나무, 비목나무 등이 있다. 또한 골골이 많은 전설을 지닌 기암괴석과 풍광을 접할 수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자굴산은 의령의 명산이요 진산이다. 의령군 서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합천군과 경계를 이룬다. 기암괴석을 비롯해 풍경좋은 곳과 더불어 사연과 전설 등이 이어지고 있는 자굴산은 해발 897m이다.
의령의 명산이요 진산인 자굴산은 한우산과 응봉산, 신덕산을 잇고 있다. 의령을 감싸고 있는 이 거대한 산 전체의 형상이 마치 황소를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굴산과 한우산을 가르고 있는 잘록한 곳을 일컬어 쇠목재라고 부르고 있다. 이 쇠목재는 소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자굴산의 우람한 덩치가 소머리고 동남으로 길게 뻗은 한우산 자락의 산줄기가 몸통으로 큰 황소처럼 생겼고 엉덩이 부분이 용덕의 신덕산(新德山)에 해당된다. 쇠목재 아래 갑을이란 지명도 옛 촌명은「쇠목」또는 「쇠목촌」이었다. 쇠목재를 넘으면 대의면 모의골인데 옛날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잿길이었다.
지금은 자굴산 순환도로가 생겨서 차량이 쇠목재에 오를 수 있고 갑을마을에서 모의골까지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다.
(15) 자굴산 치유수목원
자굴산 치유수목원(구, 목도수목원)은 가례면 괴진리 543번지 (☎574-4458)에 위치하며, 면적은 5.7ha로 수종은 1,200종 / 125,000본으로, 남부지역 식물과 한대 식물을 한자리에서 견학하도록 하였고, 산림욕을 겸할 수 있게 피톤치드발생이 많은 수종을 150m거리에 좌우 식재하여 지나면서 느끼고 정신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종착지 옹달샘의 바위 틈새에서 흐르는 약수한잔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휴식할 수 있도록 하였다.
◀ 힐링하우스.. 수목원에서 약초와 다양한 식물과 조각상 등을 감상할 수 있는 현장
▶ 명상피라미드.. 부채박물관에서 부채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전통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현장
▲ 강의동숙소 ▲ 노천까페 ▲ 대나무 숲길
▲ 척추교정평상 ▲ 물레방아 ▲ 송천정 한국차정
▲ 자기 별자리 나무와 교감 ▲ 온도별 컬러 욕탕 ▲ 족욕탕
▲ 걷기 교정지 ▲ 크나이프 시설 ▲ 효소 체험지
▲ 동난정 중국차정 ▲ 연구실, 온실 ▲ 맨발 워킹 코스
본 원내에는 관찰로 주위에 조각이 70여개소에 분산시켜놓아 지나면서 함께 감상하도록 유도하고 식물은 종간 친화를 극대화 하였다.
부대시설은 미니골프장, 야외공연장, 바닥분수, 아로마테라피, 삼각 피라미드 등이 있으며, 산림생태기행, 분재체험, 식물그리기 등의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의령군과 무료입장 약정을(2009.01.21) 체결하여 의령군민에 한하여 무료로 입장 할 수 있다.
이 수목원에는 자굴산·한우산 등 의령군에 산재한 약용식물을 포함한 약 300여종을 재배해 피톤치드 등 140여종이 포함된 좋은 공기를 한꺼번에 마실 수 있는 숲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또 크나이프시설, 숲속햇빛, 어디서든 이용 가능한 식수, 경사도와 계단을 안배한 산림로 등을 제공하여 명상과 워킹을 겸한 면역력 증대를 위한 각종 숲길 및 숲속 공간이 갖추어있는 등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면역력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16) 일준 부채박물관
일준부채박물관은 1전시실(조선유물 전시관), 2전시실(근.현대 전시관), 3전시실(일본, 중국 전시관)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300점 보유하고 있다.
1층의 1전시실에는 선면화 전시관으로 선면화 부채는 옛날에는 생활 도구로써 때로는 얼굴 가리는 모습이나 판소리에서 멋진 풍경을 연출하는 하나의 생활 도구이다.
선면화 전시관에는 김홍도의 선면화를 비롯한 200여점의 선면화 부채가 전시되어 있다.
2전시실에는 근.현대 전시관으로 100대 한국화단의 주역을 기준으로 한 대표적인 작가 청정, 이상범, 김은호, 변관식, 남농 선생 등의 활약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곳은 현대 젊은이들에게는 선면화의 일면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의 기능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3전시실에는 일본.중국 전시관으로써 유럽시장을 겨낭한 부채작품들이 있다.
체험프로그램으로는 부채만들기, 부채글씨, 부채그림그리기를 운영하고 있다.
(17) 환상의 드라이브코스
이 코스는 한우산을 도는 관광순환도로로 15㎞가 넘는 긴 구간이기도 하다. 가례면 갑을리를 출발하여 한우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한 갈래는 거리가 짧은 쇠목재 코스이고, 봉림 마을 뒤로 오르는 다소 먼 코스인데 일반적으로 이 코스를 많이 택한다.
이 코스는 용덕면 이목리와 유곡면 상곡리, 정곡면 죽전리로 가는 코스가 몇 갈래 있고, 궁류면 운계리코스와 벽계관광지로 가는 등 다양한 코스이며, 한우산 정상 바로 아래는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이기도 하다. 또한 벽계나 운계 방향의 코스는 중간에 시원한 계곡 물을 만날 수 있는 코스여서 드라이브의 정취를 한층 더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봄에는 한우산 철쭉제가 있어 한우산의 붉은 철쭉과 패러글라이딩, 산악자전거 대회 등도 함께 즐길 수 있고, 여름에는 벽계계곡을 따라 흐르는 시원한 물로 발을 적시며 땀을 식힐 수 있는 코스로 가을에는 오색 찬란한 단풍이 온 산을 물들이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부대시설로 정자가 중간 중간에 설치되어 있으며, 한우산 정상부에는 화장실도 마련되어 있고 주차공간도 잘 만들어져 있다.
(18) 궁류마을
‘우순경 사건’ 30년, 의령 현장을 가다
청와대서 궁류지서로 좌천
인사불만에 주벽, 난폭한 성격…
4개 마을 돌며 카빈총 난사
반나절새 56명 죽고 35명 총상
전두환정권, 민심 달랜다며
아스팔트 깔고 저수지 만들어
딱 30년 전, 그러니까 1982년은 기억할 만한 해였다. 그해 3월27일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닐고, 약 보름 뒤인 4월10일 군사정권은 ‘의식개혁 국민운동’이란 것을 시작했다. 의식개혁 국민운동이라는 이름의 관제 캠페인이 시작된 지 보름 남짓 지난 4월26일 경남 의령군 궁류면의 오지마을에서는 역사상 최악의 대량살인(mass murder) 사건이 벌어졌다.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 줄여서 ‘우 순경 사건’이었다.
우 순경 사건이란 당시 의령경찰서 궁류지서에 근무하던 우범곤(당시 27살) 순경이 지서 및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친 카빈 소총과 수류탄으로 반나절 만에 민간인 56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총상을 입힌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우 순경은 1981년 4월부터 서울의 한 ‘특수근무처’(청와대)에서 근무하다 ‘주벽이 심하고 성격이 난폭하여’ 8개월 만인 같은해 12월 궁류지서로 사실상 ‘유배’됐다. 의령경찰서 궁류지서는 일선 경찰서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작은 ‘4급지’에 속했다. 사건의 주요 원인은 좌천에 따른 인사불만과 본인의 난폭한 성격과 주벽 탓이었다. 우 순경은 궁류지서에 내려온 직후 궁류면 압곡리에 살던 애인 전말순(당시25살)씨와 교제를 시작했다. 우순경은 1982년초 전씨와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시작했으나, 그녀 집안에서는 평소 주사가 심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겨 결혼을 허락하지 않자, 사건 당일 술에 취한 우 순경이 궁류면 주민에게 방아쇠를 당기며 내뱉은 말은 ‘이 더러운 세상’ ‘순경 못해먹겠다’ 등이었다.
전두환군사정권은 당시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위해 103억원 규모의 ‘궁류마을장기개발계획’을 시행한다. 앞서 갔던 벽계계곡관광지도 그때부터 조성된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목숨하고 지역발전하고 바꾼 것이다.
▲ 우범곤 순경은 마지막 범행 장소인 평촌리 문두출씨 상가에 침입해 문상객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뒤 서인수(당시 61살)씨 집(오른쪽 사진 가운데)을 찾아가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서진규(75·왼쪽 사진)씨 뒤쪽 건물이 들어선 자리가 당시 문씨 상가 터다.
(19) 벽계(찰비)계곡 관광지
삼복에도 골짜기에 겨울비 같은 찬비가 내린다는 이름을 가진 찰비. 그 이름만으로도 벌써 시원함이 가슴에 와 닿으니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야 어찌 궁금하여 견딜 수 있으리오. 병풍처럼 둘러싼 산세에 명경 같이 맑은 물. 그 옛날 아름다운 신랑신부의 혼례에 얽힌 전설을 간직한 각시소와 농소 그리고 아소, 누구나 시인이라면 저절로 시구가 줄줄 터져 나올 것 같은 비경에 잠시 젖노라면 저만치 흐르는 흰구름이 걸음을 멈춰 서고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더없이 정겹다.
⦁문의처; 055-570-4958, 011-595-1822
⦁입장료; 어른(2,000), 청소년(1,500), 어린이(1,000)
※ 편의시설이용료포함 (물놀이 2곳, 샤워실(온수))
⦁주차료; 소형차 3,000(당일) 6,000(숙박시)
⦁야영장; 소형텐트10,000, 중형텐트12,000, 대형텐트17,000
※ 입장료,주차료,편의시설이용료 포함(물놀이2종, 샤워실)
※ 전기료 별도 : 1㎾당 실비적용 [..이후 다 마찬가지임]
⦁방갈로; 6.6㎡(30,000), 9.9㎡(40,000), 13.2㎡(45,000)
⦁펜션형; 12.84㎡(50,000)
※ 입실: 13:00이후, 퇴실 : 익일 12시 이전
⦁주변 숙박지;
현대장여관(부림면) : 전화 572-6851(객실수 : 16실)
동원장여관(부림면) : 전화 573-6164(객실수 : 18실)
제일장여관(부림면) : 전화 574-3510(객실수 : 18실)
봉황별장(궁류면) : 전화 572-0291(객실수 : 12실)
석신정(궁류면) : 전화 572-7942(객실수 : 3실)
⦁민박; 김명환(572-7832), 김준규(572-1722), 최진흠(572-7910), 김기출(572-7902), 김충규(572-3026)
의령군 궁유면과 유곡면 일원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79년에 만든 벽계저수지와 봉황대·벽계계곡 등을 연결하여 조성한 관광지이다. 저수지는 산과 산을 가로막아 만들었기 때문에 규모가 크고 잉어와 향어·빙어 등 어종이 다양하여 낚시터로 인기있다. 저수지를 따라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에 경치가 아름답다. 저수지 상류에 야영장이 있고 남서쪽 상류에는 민속촌이 있다.
벽계계곡 주변은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산세가 웅장하며, 특히 이 계곡에 내리는 비가 한겨울의 비처럼 차다고 해서 찰비계곡이라고도 한다. 계곡 인근에 전통 목공예품을 만드는 불교조각연구소가 있다.
(20) 의령예술촌
⦁위치 :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595번지 ⦁문의 : 055-572-0104
경남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595번지 옛 평촌초등학교를 활용한 의령예술촌은 이광모 감독의 작품인 안성기, 송옥숙, 주연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인 한우산 기슭 아래 자리잡고 있다.
봉황대와 일붕사에서 약 500m정도 벽계관광지 방향으로 가다보면 숲 속에 쌓여있는 정겹고 투박한 느낌의 허름한 옛 학교건물이 의령예술촌이다.
입구에 '의령예술촌'이라 새겨진 솟대가 달린 간판이 청량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고, 장승이 평화를 부르듯 웅장한 자태로 반겨준다.
경남 의령의 의령예술촌은 의령에서 경관이 가장 수려한 궁류면에 자리한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무대이다. 1999년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 문을 연 이 예술촌은 미술, 음악, 문학 등 경남 남부지방 예술계의 만남과 발표의 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각가인 조갑식 선생이 운영을 맡고 있는데,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다른 작품보다는 조갑식 선생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운동장으로 쓰이던 마당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장승들과 학교 건물이 2층을 개조한 전시실에서 다양한 조각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정기적으로 또 비정기적으로 화가들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지역 음악가들의 발표회도 이곳에서 수시로 만날 수 있다. 또 이곳은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도 있어 일반인들이 찾기에도 좋다.
(21) 의령 봉황대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이곳에서 벽계저수지를 향해 꺾어드는 길 초입의 산과 바위 그리고 정자이름이 모두 봉황대다.
의령읍에서 동북간으로 의령 기점 약20km 지점. 이 봉황대는 한마디로 기암괴석이 연출하는 일대장관이다.
설악의 절경인들 이에서 더 하랴, 가히 금강산 절경의 부분 축소판이라 할 것이니 신비한 자연의 조화 앞에는 누구라도 넋을 빼앗기기에 꼭 알맞은 아름다운 경관이다.
봉황대 돌계단을 따라서 오르면 암벽사이로 자연 동굴이 하나 있고 이 동굴을 지나면 좁은 석문이 앞을 가로 막는다. 이 석문을 간신히 빠져 나서면 또 다시 동굴을 하나 만나게 되는 바 이 곳에는 사시사철을 철철이 넘쳐흐르는 약수터가 있어, 봉황대를 찾는 이들은 여기서 일단 시원한 목을 축이기도 한다.
봉황대 중턱에는 약간의 평지를 깎아 누대 하나를 마련해 두었으니 이름하여 봉황루이다.
50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봉황새의 머리처럼 생긴 이 봉황루에서는 인근의 유생들에 의해 잦은 시화 모임도 있었다고 하니 지금은 가고 없는 옛 사람들의 풍류를 잠시 엿보는 듯 현실의 눈에 선연하다.
바로 옆에는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잘 알려진 일붕사라는 큰 절이 있어 불자들의 내왕이 많은 곳이다.
(22) 일붕사
천혜의 자연요건을 갖춘 봉황산에 소재한 이곳은 대한 불교 일붕선교종 총본산이다. 일반 대웅전과는 달리 동굴 법당이 2개 있는데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서경보스님의 유품이 마련된 기념관도 있으며, 서기 727년에 신라의 혜초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이다. 동굴법당 외에 바위틈에 자리잡은 나반존자와 병풍바위 밑의 약사여래불, 삼천불의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는 지장전이 있으며 80여과의 일붕존자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경남 의령의 일붕사는 일붕선교종의 총 본산으로, 응봉산 아래 비교적 평지에 자리한 사찰이다. 본래 727년 신라의 혜초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이름은 성덕암이었고 그후 폐사되어 흔적만 남아 있는 자리에 1900년대 들어서 일붕사가 창건되었다.
일붕사는 세계 최대의 동굴 법당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세계 최대의 동굴 법당은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고 한다. 두 개의 동굴 법당과 바위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지장전과 연못 등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이 일붕사는 큰 규모의 일붕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23) 현고수
2008년 3월 12일 천연기념물 제493호로 지정되었다. 이종삼(李鍾三)이 소유하고 있다.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곽재우가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면서 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쳤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크기는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7m, 높이 15m에 달하며 나이는 600년 정도이다.
곽재우는 이곳에서 매부인 허언심(許彦深)과 함께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고 가재(家財)를 털어 병사의 의식주를 해결하였다고 전해진다. 근처에 있던 곽재우의 생가(生家) 터는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 있다.
유곡면 세간리 느티나무에 매단 큰 북소리 둥둥 천지사방 번져나가니 여기저기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들 모여들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강 홍의장군 붉은 도포자락 펄럭이며 왜적에 맞서 싸워 이기자는 승리의 기치 하늘높이 외쳤으니 북을 매단 느티나무 이름하여 현고수(문화재 제97호)이다.
의령고을 어디간들 곽재우 장군의 기개가 넘친 흔적 어디 이 뿐일까만 유독 이 현고수가 있는 유곡면 세간리는 곽재우 장군께서 태어나신 태생지요. 허언심과 더불어 구국의 대의를 위해 선비의 몸으로 분연히 일어나 각 고을의 의병을 모으고 조련시킨 곳이니 가히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발상지의 원조라 일컬어도 좋으리라. 지금도 그때의 충정을 과시라도 하듯 갖은 풍상 600년의 세월에도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으니 나라를 사랑했던 장군의 애국 혼 영원하여라!
(24) 망우당 곽재우 생가
2005년 복원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곽재우(郭再祐 1552~1617
)의 생가로,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형태로 꾸며졌으며, 안채·사랑채·별당·대문간채·중문간채·대곳간채·소곳간채 등 7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대지면적은 5,636㎡이다. 의령군은 2008년 11월 현재 생가활용 및 주변정비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사업이 마무리되면 생가 내에 숙박체험시설과 건물 내의 생활모형이 마련되고, 생가 뒷산에는 곽재우가 칼싸움을 하던 장소와 공부하던 장소 등이 새로 정비된다.
생가 바로 앞에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 제302호로 지정된 수령 600년이 넘은 노거수가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제493호인 ‘의령 세간리 현고수’가 있다. 현고수(懸鼓樹)는 수령 52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로 ‘북을 매던 나무’라는 뜻인데 임진왜란 때 곽재우장군이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고 한다.
곽재우 장군은 1585년(선조 18)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기 때문에 파방(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하던 일)되었습니다.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난하자 같은 달 22일 제일 먼저 의령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의병의 군세는 더욱 커져 2천에 달하였습니다.
5월에는 함안군을 수복하고 정암진(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때 홍의(붉은옷)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조정에서는 이 공을 인정하여 그해 7월 유곡찰방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형조정랑에 제수하였습니다. 10월에는 절충장군으로 승진하여 조방장을 겸임하다가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악견산성 등 성지를 수축하였습니다. 또한 1차 진주성전투에 휘하의 병사들을 보내어 김시민 장군이 승리하는데 조력하였습니다.
곽재우는 1595년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좌도방어사로 임명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화왕산성을 수비하면서 왜장 가토 군을 맞아 싸웠습니다. 이후 그는 병마절도사와 삼도수군통제사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제수를 거부하고 낙향을 거듭하였는데 당쟁으로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죄없이 잡혀 올라오고, 또 절친한 사이인 광주의병장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에 휘말려 죽는 등의 일련의 사태를 보고 더 이상 관직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25) 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선생은 구한말에서 광복전후 시대에 우리나라의 광복을 위해 공헌한 위대한 민족지도자이다.
선생은 고종 22년(1885) 부림면 입산리 속칭 설뫼마을에서 안씨가문 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학문에 뜻을 두고 보성전문(普成專門),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수료하여 구포에 구명학교, 의령에 의신학교를 창설하였으며, 기미육영회를 설비하는 등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한창 혈기 왕성하던 27세 때는 서상일, 신성모와 함께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1909)해 시베리아, 만주 등 독립군 기지를 3년간 순회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였고, 독립순보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서른 살 되던 해 조국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치하의 조선 독립을 위한 자본금 마련에 진력 하셨고 1926년에는 언론창달을 위해 시대일보를 인수하였는가 하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및 1943년 만주 대종교단 사건으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루다 출옥 4시간 만인 평생의 소원이던 조국광복을 이태 앞둔 1943년 8월 3일 향년 59세로 안타깝게 운명하셨으니 조국을 위해 희생한 대한의 큰별로 역사에 찬연하다.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 부속사로 구성되어 일반적인 농가형으로 민가나 사대부(士大夫)의 주택과는 달리 단순한 배치를 보인다. 안채는 정면 6칸으로 전후 퇴간이 발달한 팔작집이다. 안채는 훤칠하게 높아 앞 뒤 퇴간이 발달하여 길어진 측면의 길이와 조화를 맞추고 있다.
실내의 구성은 좌로부터 마루, 방, 대청 2칸, 방, 부엌이 배치되어 안채가 동향하여 있으므로 특이하게 남측면이 남향으로서 마루가 1칸으로 구성되어서 사랑의 역할을 하고 있다. 평면도 전후 퇴간이 발달하여 겹집 형식으로 발전하여 다양한 기능을 갖는 방이 필요함에도 별동(別棟)을 만들지 않고 한 건물내에서 처리하는 조선시대 말기의 주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사랑채는 안채정면에 안채와 같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대지가 좁지 않은데도 특이하게 안채와 바짝 붙어 있다. 정면 4칸의 전후 퇴간으로 구성된 3량구조의 초가집이다. 사랑채 역시 안채와 같이 남측면에 마루를 두었다.
(26) 호암 이병철 생가
호암생가는 삼성그룹의 창업자이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끈 대표적 기업가인 호암 이병철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1851년 호암선생의 조부께서 대지 면적 1,907㎡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손수 지었으며, 호암선생은 유년시절과 결혼하여 분가하기 전까지의 시절을 이 집에서 보냈다.
일자형 평면 형태로 지어진 생가는 남서향의 평평한 땅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동안 몇 차례의 증·개축을 거쳐 은은하고 고고한 멋을 풍기는 오늘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현재의 생가는 안채, 사랑채, 대문채,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담한 토담과 바위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구분되고, 주위로는 울창한 대숲이 조성되어 운치있는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집은 곡식을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氣)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혈(穴)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地勢)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南江)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당(明堂)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 호암 생가 뒷산에 올라 내려다 본 집터의 전경. 숲과 언덕 사이에 묻힌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명망 높은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이었지만, 꿈많은 호암에게는 마을보다는 언덕 넘어, 물길 넘어 보이는 세상이 궁금했을것이다.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이래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기업을 일으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61년에는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를 발의하고 초대회장에 추대되었다. 1965년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우리의 정신적 자산을 풍족하게 하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고, 1980년대에는 특유의 통찰력과 선견력으로 반도체산업에 진출하여, 우리나라 첨단산업의 발전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호암선생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하였다. 또한 선생은 성균관대학교 운영을 통한 인재육성을 비롯, 문화, 예술,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의 발전에 많은 업적과 교훈을 남겼다.
(27) 입산문화역사마을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에 있는 입산마을은 마을 앞에는 여름철에는 피서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유곡천이 흐르고, 뒤쪽에는 장백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전통마을로써, 입산마을은 호국역사와 전통문화 그리고 농촌다움을 함께 보존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탐진안씨 집성촌으로 문화예술과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한 정신문화의 고장으로, 항일 애국지사이신 백산 안희제 생가, 항일독립 정신의 배양소였던 사립창남학교, 지역의 인재들을 배출한 고산재가 있으며 경상남도 문화재가 5곳이나 지정되었을 정도로 역사적 문화재가 잘 보전되어 있는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입산문화역사관은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본관동, 체험관동, 세미나실, 전시장, 야외무대, 천연잔디 운동장, 족구장, 농구장, 씨름장, 생태공원을 2009년 9월에 조성하였습니다.
⦁전통체험 : 문화유산탐방, 민속놀이, 연날리기 ⦁서당체험 : 한학공부, 예절교육, 다도교육
⦁농촌˙생태체험 : 농사체험, 생태숲체험, 유곡천에서 물놀이 ⦁공예체험 : 짚풀공예, 한지공예
⦁망개떡(의령백산식품) 당일체험비 : 1인당 20,000원, 1박 2일 체험비 : 1인당 30,000원(20인 이상)
고산재 : 영남의 구학 본산으로 설산재 안여석이 1778년에 설립하였고, 접장 유치명, 이진상 공이 강학하였고, 안효제 안창제, 안희제 선생 등 애국지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서당으로써, 고산재는 마을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뒤에 있는 산속에 있는데, 대나무, 소나무 숲으로 어우러진 고산재는 전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유서 깊은 고산재에서 서당체험을 할 수 있다.
⦁ 상로재 : 1722년에 안여석이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건립되었는데, 문중을 부흥하게 한 현조들을 추모하고, 조상의 높은 뜻을 자손이 이어 가고자 하는 정신을 받드는 곳입니다. 서리가 내리면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군자의 도에 따라 조상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뜻에서 상로재라 이름하였다.
▲ 상로재 앞쪽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연못에 비친 앙상한 나무가 왠지 서글퍼 보인다.
백산 안희제 선생께서 산 교육기관으로 최초로 문을 연 사립 “창남학교”가 바로 상로재의 재각을 학교의 임시건물로 사용되었던 유서 깊은 곳으로, 항일 애국의 민족사상을 일깨운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첫댓글 선배님! 본 자료에 사진들이 몇 번을 시도 해 봤지만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올리는 과정에서 에러가 발생 하지 않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