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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1946년 3월 24일 노암(蘆菴) 차상찬(車相瓚)의 영결식에서 개벽사 동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인에게 보낸 조사의 한 구절이다.
"선생의 일생은 우리의 가난하고 힘없는 조국과 함께 파란과 고난이 중첩한 민족 문화상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었습니다. ‥‥‥ 이제 선생께서 그렇게도 오매불망으로 염원하시던 조국의 광복사업은 비로소 자유와 광명의 첫 봄을 맞이하려 하거든 선생은 어찌하여 이 위대한 역사적 단계인 사명을 그대로 남겨 두시고 영원히 가시나이까? 조국은 정(正)히 선생과 같으신 고결한 지조, 변함이 없는 성충(誠忠), 순결한 조국애, 예리한 필봉(筆鋒), 명철한 이론과 실천의 前衛鬪士를 求함이 크거늘 선생은 이 모든 임무를 그대로 남겨 두시고 저 生으로 떠나셨습니까? 실로 백만 인구의 수도 한성이 텅 비인 듯한 느낌이 용솟음치나이다."
천도교인으로 한국 잡지언론계의 선구자인 차상찬은 아호를 청오(靑吾), 도호는 노암(蘆菴)으로 천도교 도사와 종법사, 청년회 중앙간사와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교회활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단 내에서는 개벽사의 주간으로 활동한 인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한국의 100년 잡지언론사에 큰 자취를 남긴 차상찬은 국운이 기울던 1887년 2월 12일 강원도춘성군신동면송암리에서 성균진사(成均進士) 차두영(車斗永)과 청주 한씨 사이에서 5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세 때에는 상학(相鶴), 상준(相俊)의 두 형과 함께 진보회에 가입하여 천도교의 갑진개화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천도교회월보』의 발행인(1910.8∼1918.8.)이었던 셋째형 향산(香山) 상학과 함께 평생을 천도교에 몸담게 된다. 1910년에 23세의 늦은 나이로 보성고보를 졸업(1회)하고, 1912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6회)한 후 모교에서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또한 1910년 9월부터는『천도교회월보』학술부란에「無機化學」을 연재(6회)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20년 창간된『개벽』지의 동인으로 참여하여『개벽』이 폐간될 때까지 기자·편집주간·발행인등을 맡으면서 개벽사를 이끌어 나갔다.
개벽사에서는『부인』(1921.6∼1922.)·『신여성』(1923.3∼1934.4)·『어린이』(1923.3∼1934.7)·『조선농민』(1923.10∼1931.7)·『別乾坤』(1926.11∼1934.3)·『학생』(1929.3∼1930.11)·『혜성』(1931.3∼1932.3) 등의 잡지도 발행하였는데, 차상찬은 편집기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잡지를 통해 사화(史話)·인물만평(人物漫評)·사회풍자(社會諷刺)·만필(漫筆)·소화(笑話)·민속설화(民俗說話)등 410편에 달하는 다양한 글을 발표하였다. 차상찬이 얼마나 많은 글을 썼는가는 그의 필명이 22여 개에 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필명이 많은 것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한 잡지에 여러 편의 글을 쓰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용한 필명은 청오(靑吾)를 비롯해서 수춘산인(壽春山人)·명월산인(月明山人)·삼각산인(三角山人)·취서산인(鷲棲山人)·취운생(翠雲生)·강촌생(江村生)·관상자(觀相者)·사외산인(史外山人)·차기생(車記生)·차부자(車夫子)·차천자(車賤子)·주천자(酒賤子)·풍류랑(風流郞)·고고생(考古生)·문외한(門內漢)·방청생(傍聽生)·독두박사(禿頭博士)·차돌이·각살이·가회동인(嘉會洞人)등이었는데, 이런 필명을 모르고서는 차상찬의 다양한 글들을 알 수가 없다.
1920년 신문지법·출판법에 의해 창간된『개벽』은 우리나라의 언론사에 선구적 역할을 한 종합잡지로 판매금지 34회, 정간 1회, 발행금지 1회 등의 일제탄압을 받다가 1926년 8월 1일 총독 사이토(齋藤實)는 안녕 질서를 방해함으로 신문지법 제21조에 의거 발행을 금지한다는 지령을 내려『개벽』은 통권 제72호로 폐간 당하였다. 이 때 일제는 개벽지를 모두 수레에 싣고 가서 한 권씩을 작두질을 하였는데 차상찬은 개벽지를 싣고 가는 수레에 매달려 엉엉 울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1927년 7월에『別乾坤』에 실린 보성전문학교 영어교수인 백상규(白象圭)의 인물평에 대한 필화사건으로 방정환과 함께 피검이 되기도 하지만 개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차상찬은 1934년 11월에 사재를 털어『개벽』을 속간하였으나 일제탄압과 재정여건이 어려워 속간 4호만을 남긴 채 다시 폐간하고 말았다.『개벽』은 천도교청년회의 편집부 사업으로 추진되어 차상찬·민영순·이돈화·이두성·김기전·박달성 등의 창간 동인들에 의해 편집활동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개벽사의 경영은 차상찬과 일본에서 귀국한 방정환이 하였는데, 1931년 방정환이 33세로 요절한 후에는 차상찬이 혼자 떠맡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개벽』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였다.
한때 개벽사에 근무했던 극작가인 박진(朴珍.1906∼1974)은 수필집『世世年年』에서 차상찬에 대한 글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줄이어서 원고만 쓰는 청오였다. 역사에 있어서는 뉘에게도 뒤지지 않는 청오였고, 인물만평·사회풍자·재치가 있는 잡종기사를 두루 쓰니 개벽사에서 나오는 잡지에 그의 글이 안 실리는 데가 없고 안 실리는 호가 없었다. 그리고도 신문과 다른 잡지에 완성하게도 글을 썼다.‥‥‥소파가 기둥이라면 청오는 들보였고, 청오가 기둥이라면 소파는 들보로 이 두 사람이 없이는 개벽사가 서있을 수가 없었다"
1933년부터 개벽사에서 근무하면서『어린이』발간을 주간하였던 아동문학가 윤석중은『大韓日報』「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차상찬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어렵게 개벽을 이끌어 가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개벽사를 이끌어 나가던 차상찬은 하루 하루가 '조마조마'였다. 검열에 걸릴까봐 조마조마, 출두하라는 전화가 걸려 올까봐 조마조마, 비행을 들춘 기사에 말썽이 붙을까봐 조마조마, 빚쟁이 나타날까봐 조마조마, 병날까봐 조마조마,‥‥‥이런 초조를 풀어주는 곳은 선술집 밖에는 없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저절로 발길이 그리로 옮겨지는 것이다.‥‥‥1934년 차상찬이 혼자서「개벽」을 속간하여 4호까지 낸 바가 있으나 혹독한 검열로 '이빨이 없는 사자'밖에 못되었다. 비바람 속에 15성상을 묵묵히 지켜온 차상찬은 가산을 탕진한 채‥‥‥우리 잡지 계의 숨은 희생자인 그를 아는 이는 드물다."
또한 만화가로 잡지편집자이며 경향신문 문화부장을 지낸 崔永秀(1909∼납북)는 1947년 4월에 펴낸 수필집『困憊(곤비)의 書(서)』「靑吾 先生」에서 차상찬의 빈한한 생활 속의 면면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선생의 애는 사업과 생활에 있어 함께 빈한하였다. 담배 한 갑을 못 사 피우면서도 개벽사 외따른 방구석에서 물 뿌리를 깨물어 뜯으며 일을 하였다. 선생이 조선의 잡지에서 불후의 이름을 남기기까지의 노력은 인위(人爲)의 경지(境地)를 떠난 것이다. 현 문단의 수많은 작가가 개벽사를 거쳐 나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靑吾선생의 운영자재(運營自在)한 그 실력의 가치를 넉넉히 헤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생활 또한 그러하였다. 선생은 오로지 안빈(安貧)하는 철학 속에서 살았다.‥‥‥"
차상찬은 1922년 방정환·김기전 등과 함께 어린이운동에도 참여하여 '어린이 날'을 제정하고 천도교회 소년회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또 1921년 11월 27일에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기자단체인 무명회(無名會)에 가입하여 기자로서 뿐만 아니라 항일 언론인로 활약하였다. 1923년 9월 동경의 대진재(大震災) 이후 조선노동자의 입국을 금지시키자 1924년 5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과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에서 이 문제에 대한 강연을 개최하려 하였으나 일제가 무조건 금지시켰다. 두 단체는 전국적인 여론을 일으켜 일제의 언론탄압을 규탄 투쟁할 것을 계획하여 1924년 6월 7일 무명회·시대일보·조선일보·동아일보 등 언론계를 비롯한 31개 사회단체의 대표 1백여 명이 모여 결성한 '언론집회압박탄핵회'(言論集會壓迫彈劾會)에서 실행위원(徐廷禧·韓愼敎·李鐘麟·安在鴻·尹洪烈·李鳳洙·車相瓚·金炳魯·金弼秀·申明均·李仁·金鳳國)으로 선출되어 항일언론투쟁 운동에도 활약하였다.
또한 1925년 3월 15일 무명회에서 주관하여 신문·잡지 기자로 결성된 '全朝鮮記者大會準備委員會'에서는 김기전·송진우·안재홍·조봉암 등 34명으로 구성된 서무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기자대회준비회의 사무실을 개벽사 내에 두었고 집행위원장이 천도교의 이종린이었기 때문에 차상찬은 준비를 위한 실무를 주도적으로 담당하였다. 4월 15일부터 3일간 '죽어 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질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열린 초유의 '전조선기자대회'에서는 朴昌漢·呂海·金炳淵과 함께 대회 서기로 선출되어 우리나라 언론신장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1년 조선잡지협회의 창립위원으로 활약하여 우리나라의 잡지언론사에 크게 공헌하였고, 1936년 조선어학회의 '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서 천도교회에서 참가한 이종린·조기간·공탁 등과 함께 한글운동에도 이바지하였고, 경성방송국(JODK)의 방송위원으로 야사(野史)와 민담(民譚)을 방송하였다.
『개벽』이 없는 세월에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에는 저술에 전념하여 1937년 잡지『野談』에는「野史와 民譚」을, 1938년 일간지『朝鮮中央日報』에는 역사소설「장희빈」을 집필 연재하였다. 또 1939년 조선일보의 출판부에서「朝鮮名人傳」을 집필하는 한편『每日申報』에는「징기스칸」을 연재하는 등 왕성한 문필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왜놈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던 그는 왜놈이 패망하고 조국이 광복되었으나 이듬해 신병으로 환원하니 향년 59세였다.
주요 단행본 저서로는 조선의 역사를 正史보다는 裏面史와 秘史를 중심으로「朝鮮七大內亂記」「朝鮮二大政變記」「東方三大國創建記」「朝鮮最初外國公使行」「景福宮建築秘錄」「朝鮮海軍秘錄」「張禧嬪哀話」「思悼世子哀話」「新解鄭鑑錄」등과 부록으로「歷代人物列傳」을 편술한『通俗 朝鮮四千年秘史』(北星堂書店. 1934. 10. 5)가 있으며, 후비(后妃)·왕녀(女王)·공주(公主)·궁녀(宮人)·명부인(名夫人)·명첩(名妾)·열녀효녀(烈女孝女)·투부(妬婦)·추부(醜夫)·명기(名技)등 여성들에 관한 전설·민요·괴담·만담·희담(戱談)을 발취하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엮은『海東艶史』(漢城圖書.1937.12.20)가 있다.『해동염사』의 서문에는 "남자 본위로 조직된 재래사회에는 역사의 붓을 잡는 사람까지도 모두 남자뿐이기 때문에 여자의 역사는 거의 불문에 붙여져 매몰되고 말았다"고 전제하고 "여자들에 관한 기록을 모아두었다가 하나의 책으로 엮는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여성의 지위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遺稿集으로 李浩雲(목원대 초대학장)에 의해 출간된『朝鮮史外史』(明星社. 1947.5.20)는 우리나라의 제도와 풍속을 다룬 민속학총서로 평가되고 있으며, 1942년에 출판을 계획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출판이 금지된『朝鮮百話集』은 조선의 옛 制度·명절과 행사·인물열전·역시전(力士傳 )·名醫列傳·生六臣傳·역대명인물관상·역사인물1인1화집·不遇詩人列傳·誌上漫遊·명고적명승지·팔도28폭포·寶劍·花草鳥獸類名産地 등의 내용을 엮은 책이다. 그리고 1959년 출간된「韓國野談實話全集」(東國文化社.1959.10.5)이 있다.
특히 육필원고·관련잡지·사진·서한 등 다수의 유품은 2002년 3월 21일에 개관한 한국잡지정보관(여의도)에 영구 보전되고 있으며, 독립기념관에는 천도교·개벽사의 관련자료 18점이 전시되고 있다.
【참고자료】
①車相瓚「無機化學」學術部『天道敎會月報』1910.9.315∼1911.2.15
②車相瓚『通俗 朝鮮四千秘史』北星堂書店 1934.10.5 ※井邑東學農民革命記念館(유물지정)
③車相瓚『海東艶事』한성도서. 1937.12.20
④잡지언론의 선각자-차상찬『月刊 中央』1974년 3월호
⑤鄭晉錫「言論團體의 抗日鬪爭」『日帝下 韓國言論鬪爭史』正音社 1974.6.20
⑥잊혀진 별-「靑吾 車相瓚 先生」『江原日報』편집부 1982년
첫댓글 차상진 선생과 혼돈이 있어 죄송했습니다. 보성전문학교는 지금의 고려대일것입니다. 차상찬 선생님은 한국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이며 김우영의 처이기도 했던 나혜석을 취재하기도 하며 여성의 지위에 대한 인식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셨던 분입니다. 차상찬 선생의 사진이 독립기념관에 있으며 당신의 외모가 의박님과 국화빵이라고 하십니다. 의사박경식님은 이 글 읽고 조상을 기리며 마음을 다지신후 기력을 재충전하십시오. 천도교에 대한 공부를 저도 하고 싶지요. 도올선생 그리고 박경리와 그 사위 김지하님도 천도교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실컷 까페지기 비판해놓고 이제는 조삼모사하냐는 시선이 많으신데, 제가 의박님 외조부님 게시물을 올린 이유는 현재 운영진이 다 빠지고 이목님과 이름뿐인 의박님만 홈피 행정부에 존재하니 힘을 실어드리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허약한 틈을 노려 기어들어올 무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까페지기와 운영진 그리고 김교수는 가려는 목적은 같다. 단지 방법론상의 합일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실패하면 갈라지는 것이 현명하고,합일하면 그로서 단점을 보완해가며 나아가면 되는것이다. 그러나 순전히 분란을 일으켜 자기가 왕자리에 앉으려는 또라이 종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문제점은 김교수에게 애정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저는 지난주 조삼모사를 자청하여 무식하나 이쪽저쪽 의견을 듣고 화합의 방안에 다리가 되어 드리고자 했습니다. 까페지기는 구명홈피 이름에 맞게 조속한 석방의 현실론을, 김교수는 정도와 소신의 원칙론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두 분의 의견이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누군가 두 분의 합일점을 찾아 드려야 하는데 아무도 그 작업이 진행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오. 갇힌 공간의 김교수는 면회자들 말에 우왕좌왕하고, 의박님은 의견을 나누고자하나 도청자있는 면회5분동안 대화나누려니 태부족한 시간이고, 진료도 있는데 고민만 하다 시간만 잡아먹게 되었습니다.
광녀님의 정보능력을 타의 추종을 불가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조만간 집행부에서 합일점을 찾을 것이니 우리 회원들은 그동안만이라도 글퍼나르기 그리고 사악한 무리가 이틈을 노려 홈피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철통같은 수비를 강화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상한 메일오는 것은 모두 운영진들에게 공개해 주십시오. 어째서 저런 인간들을 수사들어가지않고 이때껏 두고 본건지 이해가 안됩니다.
광녀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최대한의 합의점을 기대합니다.
소프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김교수님과 카페지기님의 의견통일이 가장 중요해요~
카페지기님! 이목님! 힘내세요~ 광녀님의 깊은뜻에 감사드리며 더욱 더 카페에 힘이 되는 글을 실어주세요~^ ^*
누구든 교수님께 사식 좀 넣어드렸으면 싶습니다. 몸이 너무 초췌해 지셨어요. 대추가 안정감에 좋은 한약재라 하니 대추넣은 삼계탕은 사식으로 어떠할지 싶지요. 회원들은 새로 제작된 동영상 [바위처럼]을 퍼나르기해 주십시오. 아직 블러깅이 없는 분들은 네이버,Daum,파란,야후 등의 포털사이트에 만들어 김교수 관련 게시물을 올려 주십시오. 그 자체로 효과가 있습니다. 대문에는 공지128 모라님의 게시물에 대법원 마크가 들어간 그림을 깔아 주십시오.
어제 오전 이목님으로부터 운영진 제의를 받았습니다만 저는 운영진에 참여할 자격도 여유도 되지못함을 양해해 주십시오. 운영진은 오프라인도 살펴야 하므로 본국거주자여야 하며 되도록 24시간 몸과 정신을 희생할 수있는 열정과 에너지가 충만해야 합니다. 저는 다수의 블러깅이 많고 아들을 돌보아야 하는 가장이므로 온라인에서 시간나는대로 글퍼나르는 일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양해해 주신 이목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법부 , 검경이 피고인에게 목을 잡힌 본건의 경우가 왕왕 발생할때의 협조자들은 두가지형태로 나타나는 데 사건축소하려는 사법 검경의 입장에서(위법한 본인에게만 잘못을 전가하려는 생각) 서는 경우와 본건처럼 검경. 김용호판사등 대법원 떼거리들을 청소하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추궁하는 형태2가지가 통상 나타나는 걸 보앗다 , 저희 아들건도 비슷하다 . 아마 박경식 카페지기님과 김교수님의 의견합일도 이문제로 파악한다. 그러나 본건은 한수학자의 인생을 망치면서 드드러진 사법부정의 치부가 하늘을 찌르듯 뚜렷한 영상으로 올려졌기에 김교수님의 의견에 비중을 둠이 마당하다 , 본인은 김교수님의 본론적인 투쟁에
힘을 실어 박경식님께서 선배로서의 노하우를 협조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김교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요점입니다. [석궁을 든 것은 어쨋든 잘못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런분은 홈피에 계실 이유가 없어요. 역지사지해서 제가 김교수와 같은 꼴을 당했다면 석궁을 들기만 했겠습니까? 석궁을 든 행위는 잘못이 아닙니다. 석궁은 무기의 용도가 아니오. 김명호 교수는 잘못한 일이 단 한가지도 없다. 구명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구명하느냐가 중요하다. 그가 나올 방법을 몰라서 쐬고집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가 국민의 합의를 얻어 늦더라도 올바르게 구명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가 옥중에서 고통스럽다면 술수를 써서 나온다손 그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로서는 김교수가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원하는대로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 그의 어떠한 선택이라도 이해하고 따를수 있다.
나도~~~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