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육영수 암살하다편
http://www.youtube.com/watch?v=FUpqpWPLRQE
육영수 암살 사건 1편 -소설-
어렸을때 tv로 본 문세광의 육영수 암살 사건은 충격이었고, 순박한 시골 노인들의 진심어린 동정론이 아직도 기억난다.
1974. 8, 15 광복절 기념 행사를 하는 장충동 국립 극장에서 제일 교포 문세광이 탄 택시는 승차 입장 표시와 비표가 없었음에도 경호팀의 몸수색없이 무사히 극장으로 들어 간다.
박정희가 연설하는 도중 총을 꺼낸 문세광은 첫발을 오발해 자신의 허벅지에 쏘는데, 박정희는 방탄 단상뒤로 숨고 연이은 쏜 총알에 육영수가 머리를 맞아 사망한다.
육영수는 박종규 경호 실장이 박정희를 여자가 있는 청와대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고 생각해 자르려고 했었다고 한다.
23살 문세광은 결혼을 한 일용직 노동자로 한국말을 할줄 모르는 제일 교폰데,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후 반한 집회에 적극적이어서 중앙 정보부에서는 문세광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문세광은 일본에서 某모씨를 만난후 돈을 펑펑 쓰기 시작했는데 육영수 사건후 某씨는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중정은 문세광이 조선 호텔에서 누군가과 같이 있었는데, 뒤늦게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당시 김종필은 호텔 직원에게 문세광이 혼자 있었다고 말하라 했다 한다.
문세광은 조총련 김호령이 박정희를 죽이라 시켰다고 말하지만, 김호령은 조사를 받지 않았다 한다.
某모씨는 오사카 경찰서에서 권총 두정을 훔쳤다고 하는데, 문세광은 한정은 호수에 버렸다고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고, 1차에 없던 권총이 2차 수색때 문세광의 집 다다미밑에서 발견 되었다 한다.
사건 당일 청와대에서 탄두 수거를 했지만 2발의 행방을 밝혀내지 못해 미스터리로 남는다.
이진우의 양심 선언에 의하면 육영수가 맞은 총알은 문세광이 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건 당일 문세광은 초대장이나 비표도 없이 극장으로 들어 갈수 있었는데, 경호실 직원이 문세광에게 비표가 없으니 로비로 나가 달라고 했다.박정희 축사 직전 안에 들어가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자 경호 계장이 문세광을 들어 가게 하는데, 경호원이 문세광를 다시 밖으로 내보내자 경호 계장은 장관을 만나려 왔다며 내두라고 한다.
의아하게 생각한 경호원은 극장에서 문세광의 뒤로 가 있었는데, 뒤로 빠지라는 무전 연락을 받는다.
육영수가 총에 맞아 실려 나간후 박정희는 연설을 계속하겠다고 말한후 연설을 마친다.
당시 박정희는 여자 문제가 복잡해 육영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었고, 유신, 인혁당 사전, 긴급 조치 남발로 독재 정권을 넘어 살인마 정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국민에게 인기가 없었는데, 육영수 암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전환되었다는 음모론이 있다.
당시 박정희는 미국, 일본과 사이가 안 좋은데다 학생들과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는데, 이 사건후 미국은 한국의 인권에 대해 함구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한국 정부에 대한 데모가 거셌던 일본에서는 반일 감정이 심해지자 일본의 수상이 찾아와 사과를 했으며, 학생들의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데모와 국민들의 저항도 자취를 감줬다.
그러자,박정희는 긴급 조치 1호, 4호를 없애는데 육영수는 14년 동안 영부인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 미스테리 사건은 공소 시효가 지났지만 재심으로 재판을 할수가 있다 한다.
결정적 한방 10회 육영수 암살 사건 2편
지난회에서 썰렁한 삼행시로 별풍선 18개를 폭발적으로 받은 박누리 아나운서는 신PD 곤조가 대단해 대통령해도 되겠다고 말한다.
탄흔을 조사하는데 육영수가 맞은 탄두를 박종규 경호 실장이 중정에서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신 헌법의 기초를 만든 김기춘 비서 실장은 당시 검사로 중정에 파견나와 있었는데, 15, 16일 이틀간 묵비권을 행사한 문세광은 김기춘을 만나"자칼의 날"이라는 책 이야기를 하면서 입을 연다.
그런데 16일 조간 신문에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실리는 의문이 발생하는데, 중정이 정보를 신문사에 미리 넘긴 것으로 보인다.
문세광이 권총을 들고 어떻게 공항으로 들어왔는지도 의문이다.
사건 10분후 문세광이 묶고 있는 호텔로 온 중정 직원이 신분을 밝히지 않은채 문을 열어 달라는 점도 의문이 간다.
일본에서 某씨에게 차를 받은 문세광은 친구에게 그 차를 주는데, 사건 당일 경찰이 와 차의 트렁크를 여는데 일본 파출서에서 권총을 훔칠때 쓴 드라이버, 빠루등이 있었던 점도 의문이다.
문세광은 사형 판결날 재판정에서 시종 일관 웃고 있었으며, 나는 육영수를 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3일후 처형된다.
이 사건으로 경질된 사람은 박종규 경호 실장 한사람 뿐이며, 말단 경호원들이 피해를 입는다.
이후 경찰 총장은 노동부 장관으로 승진하고, 내무부 장관은 보사부 장관으로 간다.
공안 검사 출신이며 유신 헌법 초안을 만든 김기춘 비서 실장은, 수많은 공안 사건과 초원 복집사건을 일으켰지만 75살인 지금까지도 권력의 중심부에서 승승 장구하고 있다.
박누리는 김기춘의 공안 사건 베스트 3를 준비했다.
검찰 총장이었던 김기춘은 1989년 문익환, 서경원 방북 사건을 공안 정국으로 만들어 야당을 무력화 시키고 후에 법무부 장관이 된다.
분신 정국이었던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은 사회 운동권에 도덕적 치명상을 입히는데, 검찰 총장이었던 김기춘은 평검사가 되어 9명의 검사와 이 사건을 맡았다.
14대 대통령 선거를 1주일 앞두고 부산 초원 복국집에서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모여서 김영삼 지원을 논의했는데, 지역 감정을 부추기며 선거에서 지면 영도 다리에 빠져 죽자고 했는데 이때도 김기춘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오히려 영남의 표를 결집시켜 김영삼을 당선 시켰고 모두 불구속 처리 됐다.
2012년 국정원 댓글 사건이 터지는데 박양은 7인회의 우두머리 격인 김기춘을 비서 실장에 앉힌다.
육영수 암살 사건은 박정희의 독재 정권을 더욱 공고히 하여 독재 정권을 연장 하지만, 1979년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탄에 죽는다.
결국 문세광은 중앙정보부가 시키는데로 했는데도 사형을 당한다.
비밀을 알고있기에.. 현재 비밀을 아는 국정원 직원들도 문세광과 같은 길을 갈것으로 보인다....
자매품
한겨례신문 노무현타살 -현장을가다편-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2955003
노무현타살증거 플러스 완결편 -더이상의 증거는없다편-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2922113
다음에서 제제가 들어오네요..
첫댓글 중앙정보부 초대 7국장으로 임명된 김기완은 국방부 정훈감 출신으로 군에서 심리전을 담당한 바 있다. 그 후 그는 나중에 주일공사로써 DJ 납치 사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 아들이 현 주한 미국 대사인 성 김이다. 이 후 이 심리전국은 70년대 중반 무렵까지 7국으로 알려진다.
74년 8월 15일 당시 중앙정보부 6국은 안전조사업무를 담당했고, 6국장은 이용택이었다.
이용택은 주일공사로 나간 전 7국장 김기완에게 김대중 납치사건의 일본 현장 지휘를 맡긴다.
그는 박정희 특명을 받아서 사건전모를 조사하여 보고한 바 있다.
사건 전부터 6국장 이용택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이후락 중정부장을 매우 비판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6국은 흔히 특명수사국으로 지칭되었다.
유신체제의 모순이 심화되고 이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고 확산됨에 따라서 이 6국의 역할과 규모는 팽창하였고 정치 수사와 함께 국내 정보 부서(2국 국내보안정보국)와는 별도로 학원 사회 종교 등 각 대상별 정보수집과 공작 업무도 담당하였다. 민청학련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인혁당의 주무 부서가 6국이었고 당시 이 수사를 주도한 6국장 이모는 위에서 Dj 납치 사건을 조사했던 이용택이다. 이 후 6국은 제2수사국으로 바뀌었다가 나중에는 호수 명칭이 아니라 임무별 명칭인 안전국으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