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30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루카 10,13-16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너희를 물리치면 나를 물리치는 것
벌써 20년 전 일이지만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선사했는지 우리는 아직 잊지 않습니다.
역대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기 힘들었던 우리 축구 대표 팀을 목표인 16강이 아니라 4강까지 올려놓았던 감독입니다.
그가 떠난 후에 아직까지 이런 영광은 오지 않았습니다.
히딩크라는 인물을 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맞아들일 줄 알았기에 이런 차이가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우리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8년간 브라질 대통령 룰라를 기억합니다.
그는 퇴임 당시에도 80%가 넘는 국민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으로 많은 국가 부채가 있었음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도움에 힘입어 아이들을 길가로 내몰지 않고 교육을 시켰고 8년 뒤인 지금 모든 국가부채를 갚고 세계 8위의 경제대국을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그런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던 브라질 시민들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들을 보면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성경말씀이 떠오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당신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성체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체를 생명의 양식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벳사이다, 코라진, 카파르나움을 나무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혐오스러워하는 이방인들의 도시인 티로와 시돈에서 그와 똑같은 기적을 예수님께서 행하셨다면 그들은 이미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며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위의 세 도시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해서 구원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도들을 파견하시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위에 세우신 교회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사도들 위에 세우신 교회를 볼 줄 아는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교회가 가톨릭교회라 믿고 있습니다.
동방교회도 베드로의 수위권이 로마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고, 이슬람교의 경전이란 그리스도교의 신구약 성경을 내용으로
그리스도 이후 6백년 뒤에나 생겨난 것이고,
개신교는 루터 이전에는 가톨릭 외에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로 이어졌는지 말하지 못하고, 또 누가 베드로에게 맡긴 하늘나라의 열쇠를 지니고 있는지도 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교회라면 그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됩니다.
유럽에서 프랑스혁명이란 것은 유럽인들의 정신에 참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물론 지금도 가톨릭을 많이 믿고는 있지만 사실상 유럽교회는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종교가 그들 주요관심사에서 변두리로 내쳐지게 되었습니다.
사제들은 나라에서 돈을 받는 직장인들처럼 여겨지게까지 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교회의 잘못도 없지 않지만 가톨릭교회는 조금씩 내쳐지고 있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도 여기저기서 사제가 신자들에 의해 쫓겨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물론 사제들이 잘 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가 파견한 것입니까?
결국 주교님이 파견한 것이고 교회에 의해 파견된 것이고, 그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파견된 것입니다.
내가 그 파견을 내 맘대로 좌지우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도시들이 되어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맘에 들건, 들지 않건, 일단 파견되었다면 하느님께서 파견해주었다고 믿어야합니다.
아브라함은 세 손님을 대접하다가 하느님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롯도 손님을 대접하다가 자신을 구해 줄 천사들을 대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롯은 이 손님들을 위해 자신을 딸까지도 악한들에게 내어주려 했습니다.
신자는 사제를, 사제는 주교를, 주교는 교황을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분이라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신다면,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30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다양한 하느님 사랑의 얼굴
부모자식간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하느님의 사랑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자식들을 향한 부모님들의 사랑, 생각해보십시오. 눈물겹습니다.
무모합니다.
일방적입니다.
상처와 배반에도 불구하고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강도나 크기는 하느님 사랑과 비교하면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 사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입니다.
이토록 충만하고 풍요로운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훨씬 편안해질 것입니다.
한결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 신앙은 한 차원 성숙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천개의 얼굴, 만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격려와 지지, 우정과 자비의 얼굴로, 때로 분노와 원망, 질책과 매의 형태로, 때로 재앙과 혼동, 분노와 죽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위로보다는 질책이 필요할 때가 있지요.
그런 순간, 하느님의 질책은 무섭도록 신랄합니다.
그러나 꾸짖으시는 하느님은 ‘고생 좀 해봐라!' 하시며 책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 흘리시며 분노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시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게 던지시는 예수님의 독설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번민과 고통과 십자가가 우리 삶에 밀려올 때 마다 놀라지도 마십시오.
낙담하지도 마십시오.
설레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십시오. 단 한 가지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세상 그 어떤 아버지라도 자기 자녀들의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 일부러 자녀들에게 고통을 받게 합니다.
자녀들에게 아픔을 겪게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녀의 일탈, 자녀의 그릇된 악습, 자녀의 부족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한 단계 성장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가끔씩 우리 인생 역사 안에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십자가를 보내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고통과 십자가 앞에서 도망 다닙니다.
기를 쓰고 회피합니다.
고개를 흔듭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그 어떤 고통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은총임을 압니다.
지금 비록 고통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분명히 사랑의 표현임을 확신합니다.
고통 앞에서 큰 위안이 되는 진리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의 아버지들도 고통 중에 있는 자녀나 번민하는 자녀를 더욱 아끼며 섬세하게 보살펴줍니다.
세상의 아버지들도 그러한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어떠하겠습니까?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위로와 더불어 울고 있는 우리,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귀여워하시는 이들을 고생길로 이끄시고 많이 아끼실수록 많은 고생을 내리십니다(성녀 아빌라의 데레사).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 그의 영광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09.30.금."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 16)
우리를 향한
숨길 수 없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지금 눈 앞에 계시는
예수님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마음입니다.
맞아들임은
믿음에서 오고
물리침은 무지와
죄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맞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회개의 시작으로
어둠의 자리는
빛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고서는
위험한 우리 마음을
정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사랑과 용서를 우리의
가슴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삶의 새로운
기쁨을 일깨워주십니다.
믿음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믿음을 위한
회개를 선포하십니다.
주님을 향한
하나뿐인 사랑은
회개로 드러납니다.
회개는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게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