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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요 6:41-51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41-51 /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시자 분개하여 떠들어댔다. 42) `아니, 저자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가 그의 부모를 알고 있는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도대체 무슨 소린가?' 43)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한 말에 트집을 잡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내게로 오는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모두 다시 살릴 것이다. 45)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ㄴ)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분에게서 진리를 배운 사람은 결국 내게 올 것이다. (ㄴ. 70인역 사54:13,렘31:33-34) 46)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실제로 아버지를 본 사람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를 본 이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뿐이다. 47)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48-51) 내가 생명의 떡이기 때문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떡을 먹었으나 결국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떡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는 내 살이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예수님이 생명의 떡에 대하여서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수군거리다(41-43) 유대인들이 수군거립니다. 이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수군거림은 광야에서 방랑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특징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옛날에 마실 물(출 15:24) 때문에 광야에서 수군거렸으며, 먹을 양식(출 16:2) 때문에 수군거렸습니다. 또한 광야에서(민 11:1) 약속의 땅(민 14:1-3)을 앞에서 심지어 만나를 앞에 두고도(민 11:4-6) 수군거렸습니다. 이들의 수군거림은 원망이요 불평이며 결국 하나님에 대한, 구원자에 대한 믿음 없음입니다. 유대인들은 단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인 인간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였을 때 수군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있는 분이라고 하실 때 예수님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44-46)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무능력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하게 이끌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 나아갈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믿음으로 나아가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고 의의 소망을 기다려야(갈 5:5)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서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영접하지 않았고 거부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온 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47-51)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떡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떡은 한 번 배부르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비록 하늘에서 내려주신 떡(만나)이지만 육신을 위한 떡을 먹은 이들은 모두 죽고 하늘로부터 오는 참 떡(32)을 먹는 인생은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떡인 자기의 몸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속죄의 희생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생명의 떡인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위하여서 살고 있나요? 우리의 신령한 음식과 음료는 무엇인가요?(참조 고전 10:1-4)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움직이는 것이 생명일까요 코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움직이면 생명일까요 그렇다면 과학은 생명을 창조했다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생명이란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신 ‘호흡’입니다. 그 호흡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호흡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진정한 생명인 것입니다.
< 설 교 >
영생을 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6:41-51 / 이수영 목사
오늘은 기독교의 연중 첫 번째 절기인 4주간의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이 어떤 절기입니까? 대림절은 그 말 그대로 임하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누구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두말 할 것 없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다시 오심을 맞이할 우리 자신의 준비상태를 점검하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우리는 왜 그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그가 누구이시기에 우리는 그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밝혀주고 계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본문 41절에서 보듯이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말씀은 하늘에 계신 이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사명을 받아 오셨음을 뜻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갖고 오신 사명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 대답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신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로 이끌어오게 하시는 이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일이 예수님의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명 때문에 보내심을 받으신 이로서 예수님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이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내려보내셨고 그들로 하여금 그를 만나도록 그에게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과 영생에로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림절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그 은혜에 응답하기를 다짐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이 대림절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저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만 하시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말씀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가 “떡이시라”는 말씀도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그냥 다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저 우리를 잠시 만나보고 가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사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떡이 되시라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신 것입니다.
떡이 무엇입니까? 양식입니다. 우리가 먹을 양식입니다. 우리가 먹어야 살고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히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로 택하신 이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들을 위한 양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런 뜻에서입니다. 대림절에 우리가 무엇보다도 잘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바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때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먹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가 당신을 먹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0-51절을 다시 봅니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사람이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밥을 먹어서 살 수 있는 것은 잠시뿐입니다. 밥은 매일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 아무리 부지런히 밥을 잘 먹어도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은 자들도 다 죽었는데 그것은 육의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들을 위해서는 영생의 양식을 주셨는데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있는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그를 먹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에로 구원하신 백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 우리 귀에 불경스럽게 들리기도 하고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가 식인종도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우리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먹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본문 47-48절을 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하신 말씀이 답입니다. 생명의 떡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영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그를 먹는 것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또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사람에게 유일하신 구원자이시라는 것과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받으며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요3:16에서 예수님 자신이 보다 간결하게 요약해주셨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믿음을 갖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떡으로 먹는다는 말의 기본적인 뜻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고백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치신 모든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바르게 깨달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운다는 뜻으로 그의 말씀을 먹는 것이 곧 그를 먹는다는 말의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지적으로 아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 안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고 그가 메라 하신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메고 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그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머리로 먹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먹고 삶으로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찬식에서 떡을 먹는 것이 영적으로 유효한 일이 되기 위해서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성찬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그런 삶의 자세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대림절을 맞으며 우리가 할 일일 것입니다.
대림절은 기독교에서 일 년 주기의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를 진정 기뻐 맞을 믿음의 준비를 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 대림절의 신앙일 것입니다. 우리는 대림절을 맞을 때마다 우리의 믿음이 형식적이고 내용이 없거나 왜곡되어있지는 않은지를 살피고 바로 잡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대림절 첫 주를 기해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탄목을 장식합니다. 바로 장식된 성탄목을 세우는 일은 우리의 신앙을 바로 잡는 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목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전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상징합니다. 사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인간의 죄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장미꽃은 어둠과 절망과 생명 없음 가운데 오셔서 생명을 싹 틔우고 희망을 소생시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사11;1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며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 한 말씀을 장미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빵과자를 단 것은 바로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촛불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과 희망과 위로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장식들만이 본래의 성탄목 장식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사역을 상징하지 않는 다른 온갖 장식물들로 뒤덮인 성탄목은 성탄목이 아닙니다. 마치 변질된 교회의 변질된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 그런 성탄목들인 것입니다. 성탄목을 순수하고 정확하게 장식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순수하고 바르게 고쳐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목을 일반 세상에서 장식하듯이 아무 의미 없이 화려하게만 장식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왜곡되고 변질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온갖 물질욕과 상술로 치장된 세상적인 성탄목을 세우는 것은 무지한 일일 뿐 아니라 대림절의 의미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참된 교회는 그런 성탄목장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탄목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고백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러 오시는 주님께서 기뻐하실 대림절을 시작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김영규 목사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모여서 수군거렸습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1-42) 예수님께 정면으로 대들지는 못하고 뒷전에서 비방하고, 불신하고, 불평했습니다. 수군거렸다(εογγυζον)는 말은 헬라어 시제로 imperfect입니다. 계속 수군거렸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조상들도 광야 시절에 계속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면서(출15:24, 민14:2, 고전10:10) 수군거렸습니다. 오늘 그 후손들도 계속 수군거리고 있는 것이 부전자전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왔다는데 대해서 수군거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 출처를 인정했습니다. 첫째는 하늘에서 온 천사들이나 사람의 모양으로 온 하나님의 사자들을 믿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왔음을 믿었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둘째는 지상에서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믿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의 계시를 믿었고, 세례 요한의의 계시를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이들이 예수를 믿지 못한 것은,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다 겸하였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왔으면 내려 왔다고 하든지, 아니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믿을 수가 있었을 텐데. 땅에서 육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나는 하늘에서 왔다’고 하니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의 아버지는 나사렛의 목수인 요셉이고,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도 우리가 다 아는데,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동시에 육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날 수 있는가?
오늘날에도 이런 어려움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분명 2000년 전에 팔레스틴에서 태어나셨는데, 어째서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인성을 믿는 것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성을 믿는 것은 어렵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뭡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육신적으로 안다는 것이 오히려 예수를 영적으로 아는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꽤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이요, 그의 아우들은 누구이고 누이는 누구라는 지식입니다. 그 때문에 이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識字憂患입니다. 무엇이나 어설프게 아는 것은 차라리 전혀 모르는 것만 못합니다. 사물에 대해서 잘못 아는 것을 오해라고 합니다. 오해는 불행을 가져옵니다. 예전에 어떤 남자가 자기 자식의 혈액형 때문에 고민하다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자신의 혈액형을 잘못 알고 있다가 자식의 혈액형을 보니 피가 달라요. 그래서 차마 아내에게 물어보지는 못하고 고민 고민하다가 ‘예라 죽어버리자’, 죽음을 결심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습니다. 아는 게 병입니다. 세계사 시간에 조금 배운 예수에 대한 지식, 위인전을 통해서 알게 된 예수에 대한 지식, 철학시간에 알게 된 예수에 대한 지식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바로 알려면 우리가 기왕에 알고 있던 예수에 대한 모든 지식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으로 하세요. 그 후에 겸손히 성경의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
아버지께서 이끌어야만 예수님께로 올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3-45) 누가 예수님을 믿는가?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는 자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아는 데 대한 인간의 무능성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아는 데 대한 인간의 무능성입니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만물의 靈長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무능한 존재입니다. 육체적 기능이 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적인 무능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영적 무능을 말합니다. 사람은 영적 세계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식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말하기를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누구라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그는 “전적 무능”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우연히 하나님을 알게 될 확률은 완전히 0 %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우월성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완전성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의지가 불완전합니다. 사물을 아는 지식이 불완전합니다. 사랑이 불완전합니다. 양심이 불완전합니다. 도덕성이 불완전합니다. 이런 불완전함 때문에 인류는 끝없는 대립과 분열 속에 살아왔습니다. 무능성의 한 단면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본 자는 없습니다.(5:37) 육신의 감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장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에게 감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희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옵소서!”(엡1:17)
무능의 자각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결코 완전한 지혜자가 아닙니다. 지식자도 아닙니다. 능력자도 아닙니다. 더우기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 무식자입니다. 이런 자신의 실상을 인정해야 합니다. 영적 무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 “나를 이끌어 주소서!”하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 말씀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을 인간 의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마음에 결단만 하면 무엇이든지 믿을 수 있고, 어떤 처지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 인간의 의지는 항상 시험에 직면합니다. 작심삼일입니다. 아무리 결심해도 오래 못 갑니다. 때로는 환경 때문에, 강압 때문에, 때로는 유혹과 회유 때문에, 굴복당합니다. 인간의 죄악성은 의지를 나약하게 만듭니다. 돈에 약하고, 여자에 약하고, 명분에 약하고, 인정에 약하고, 욕망에 약합니다. 이런 연약성을 마귀가 붙잡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붙잡고 있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바로 마귀입니다. 사탄의 영입니다. 우리는 악한 영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만큼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도적으로 나를 구원하십니다.
신앙은 인간의 의지로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이끄심이 있어야만 됩니다. 오늘 말씀에 이끈다는 말은 ελκυω 입니다. 이 단어는 항상 어떤 抵抗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인간이 비록 죄를 좋아하고 하나님을 배척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공적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에 대하여 인간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의 이끄심(ελκυω)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저항한 사례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이끄시는 자는 어떤 악인이라 해도 믿지 않을 수 없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의지까지라도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우리를 이끄시는 것은 죄인을 사형대에 이끄시는 것 같지 않고, 모든 자가 사랑하고, 누구든지 기꺼이 가고자 하는 은혜로운 인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끄신 결과는 팔려가는 당나귀처럼 코를 꿰여서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기꺼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신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아하 그렇다면 나는 무능하니 가만히 있어도 구원되겠구나!” “나는 의지가 약해서 화투나 놀음에서 손을 뗄 수가 없어. 하나님이 떼어 주시겠지!” “나는 술을 끊을 수 없으니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겠구나!” 여러분, 오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나태와 방종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고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이끄심에는 두 가지 방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외적인 부르심입니다. 외적인 부르심은 보편적으로 전파되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사54:13,렘31:34)고 합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다 예수께로 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신앙의 동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5:39) 성경은 예수를 증거 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듣든지, 성경을 읽든지,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곧 우리 신앙의 계기가 됩니다. 외적인 부르심의 또 다른 경우는 특별한 사건들을 통해서 부르시는 방법입니다. 저는 지금도 생각해 봅니다. 내가 만일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었더라면 예수를 믿었을까? 아마 아직도 신앙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질병, 사업의 실패, 좌절, 인간적인 갈등, 불의의 사고, 재난 등. 절망적인 사건을 당할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며 무능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적인 부르심을 받는 자마다 다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사람들에게 전도를 받았다고 해서 다 신앙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환란을 당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음 단계의 부르심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내적인 부르심입니다. 내적인 부르심은 곧 성령의 부르심입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거역하지 못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 죄를 자각하게 만듭니다. 아하, 나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허물되고 가증스런 존재로구나!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게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인간의 무능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적인 어떤 노력도 결코 내 자신을 죄악에서 건져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내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 갈 수 없음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게 만듭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부르심은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심으로 누구도 거부하지 못합니다. 앞서 37절 말씀에서 본 것처럼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자는 한 사람도 낙오자 없이 반드시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내 자신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를 알고 확신해야합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다 가다가 우연히 걸려든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철저하신 계획과,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내면적인 부르심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해서 큰 긍지를 가지고 담대하게 믿음을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강조하신 것은 예수 믿고 영생 얻는 겁니다. 47절의 말씀에서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47)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서 중요한 두 가지 주제는 예수를 믿는 믿음과 그 결과로 얻는 영생입니다. 믿음, 영생!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첫째로, 영생입니다. 주님의 최대 관심사는 영생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심사는 육신의 배부름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6:25,31)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영생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서도 육신의 배부름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현세 영달, 웰 빙, 노후의 안락한 생활, 경제 문제가 주요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그게 내가 예수님께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까요? 예수님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께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뭡니까? 바로 영생입니다.
관심은 곧 행동의 지표입니다. 사람은 관심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어떤 면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역할이 달라집니다. 내가 의식주에 관심을 둔다면 예수님은 백화점이나 수퍼마켓 주인이 됩니다. 내가 돈에 관심을 둔다면 예수님은 은행장이 됩니다. 내가 육신의 건강에 관심을 둔다면 예수님은 의사와 병원장이 됩니다. 내가 권력에 관심을 둔다면 예수님은 권력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은 미래를 말하는 예언가도 될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보디가드요, 어떤 이에게는 해결사가 됩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영생에 관심을 둔다면 주님은 영생을 주시는 분, 즉 영생 양식의 제공자가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우리의 영생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역할은 바로 영생 양식이 되시는 일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영생 얻으려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거듭 선언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48-51) 앞서서 영생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셨지요?(6:27) 영생 양식은 예수님이 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영생 양식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시대의 만나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만나를 먹은 사람들도 결국은 다 죽었습니다. 육신의 양식은 영혼의 죄를 씻지 못하고, 영혼을 살리지 못합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느냐’ 하는 문제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영생은 내가 준다! 나를 믿어라! 믿으라는 말 대신에 먹으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나를 먹어라! 그러면 영생한다! 52절에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은 곧 자신의 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용된 ‘살’(σαρξ ,flesh)이란 용어는 대단히 충격적인 말입니다.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몸(σωμα , body)이 아닙니다. 정육점에서 파는 고기, 살점입니다. 살을 먹으라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속죄를 위해서 찢기신 자신의 몸을 먹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피를 주십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써 모든 사람들이 죄의 저주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한 끼의 양식이 아니라, 영생 양식입니다. 그 생명은 예수님의 살과 피의 代價요, 가장 값진 희생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입니다. 영생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에 관한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성경은 이 믿음을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 혹은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 혹은 예수와의 연합 등등.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의지하고 맡기세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믿는다는 말 대신에 먹는다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50-51) 예수를 믿는 것을 예수를 먹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왜 먹는다는 말로 표현하셨을까요? 먹는다는 것은 곧 철저한 동화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서 철저하게 분해되고 소화됩니다. 그 후에는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를 먹는 다는 것은 예수의 인격이 완전히 우리 마음속에 들어 와서,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삶의 원동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예수가 사는 것”(갈5:20)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내 인격체에 들어 와서 나를 동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의 능력이 됩니다. 특별히 예수의 살을 먹으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찢기고 상하신 주님의 속죄를 온 몸과 마음으로 받으라는 말입니다. 51절 말씀에 하늘로서 ‘내려온’이라는 말은 헬라어 時制 상 aorist tense로서 once for all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의 내려오심은 단 한번으로써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역사상에 단 한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만, 그것으로써 족하며, 또 다른 화육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번의 희생으로써 완전히 속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정죄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능력자가 됩니다. 영의 사람이 됩니다.
영생 양식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먹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영적 사망자가 됩니다. 주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영생의 씨를 가집니다. 우리의 모든 사상, 모든 생활, 모든 행동이 비로소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먼저 영혼의 생명을 얻으세요. 그러면 육신의 의식주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러나 만일 영혼의 생명을 얻지 못하고 물질적인 축복만 받는다면 그것은 거추장스러운 삶의 굴레가 될 뿐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예수 생명, 예수 영생! 할렐루야.
수군거리지 말라
임덕순 목사
여러분의 신앙은 그 연조만큼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믿음이 좀처럼 자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뭔가 장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옛 생활의 습관이 장해물 노릇을 할 것입니다. 예배는 잘 참석 하는데 성도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기피하는 성도가 있어서 왜 그런가 했더니 몰래 즐기는 술과 담배 때문이었습니다. 교인들은 자기가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기는 이것을 끊지 못했으니 떳떳하게 앞에 나와 교제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옛 생활의 습관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성격이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데, 사람을 너무 의식해서 자주 상처를 받는 성격이라서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치명적인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것에 걸려 넘어지면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는 걸림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오해 때문에 구원을 잃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이 옥중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또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인자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른 신앙을 가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나에 대한 오해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진 문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을 하려면 “예수가 누군가”라는 이해를 먼저 해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너무나 훌륭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자기들의 왕이 되어 주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헤매다가 가버나움에 와서 주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막상 주님이 그들에게 자신이 누군가에 대하여 말씀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지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41절을 보면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41-42)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계신 곳은 가버나움인데,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2고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모도 알고 예수님의 성장과정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너희들의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예수가 이상하다. 믿을 사람이 못되는 것 같아” 하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잘 아는 가버나움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특출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낳은 부모가 있고 자라난 과정을 다 알고 있는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외모는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의 아들 같지가 않고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출중하지도 않았고 학식이 많거나 좋은 가문의 출신도 아니었고, 그냥 평범한 나사렛 사람이어서 사람들이 외면할 것이라고 예언했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가 태어나시기 천수백년 전부터 그에 대하여 유대인 선지자들은 예언을 계속하여 왔습니다. 하나님이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비록 출중하지 않은 외모를 가진 작은 아이로 태어나지만,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평강의 왕이며 영존하시는 만유의 아버지라고 예언되어 있으며, 그는 처녀가 잉태하는 과정을 통하여 베들레헴에서 유대지파의 자손으로 태어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수많은 예언의 성취로 태어나신 분이지만 자기 동네에서 자라나서 외모만 잘 알고 있는 가버나움 사람들은 선듯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놀라운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손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날마다 타나났습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귀신들렸던 사람이 정신이 온전해졌으며,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당장 일어났고, 소경이 눈을 떴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인기나 권력이나 사람들이 다 가지는 돈 문제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직 사람들의 죄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 예수가 당시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저분을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저분은 분명 보통 사람일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저분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저 말이 사실일까? 그를 낳은 부모를 내가 알고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니 내가 저 말을 믿어야 해? 말아야 해?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었고 어떤 사람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고 떠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수군거리는 이유는 그가 갈릴리 가난한 집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왕궁에서만 태어났다고 해도 그런 의심을 하는 사람이 적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들과 똑같이 자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갈릴리 사람들 속에서 자라게 하셨고, 우리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와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그분의 하신 일과 본질을 알을 믿고, 누구는 그분의 외모와 출신을 보고 믿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수군거릴만한 요소는 또 있었습니다. 그가 짊어진 십자가입니다.
당시에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람이 짊어지고 사형당하는 저주의 사형 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최고대우는 못 받을망정, 인간 백정이 짊어지고 처형당하는 사형 틀에 매달려 죽었다고 하니, 십자가가 얼마나 흉측한지를 아는 사람들이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다는 말입니까? 그들이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보다 자기가 가진 상식을 믿는 사람은 믿을 수 없도록 걸림돌을 두셨습니다. 자신의 이성이나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는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롬 9:33에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일부러 걸림돌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사람은 수군거리다가 결국 주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믿음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가 태어나시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이 죄인들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다고 예고되어 있습니다. 한 두 명이, 한 두 번 예언한 것이 아니라, 수십명이 계속적으로 이 사실을 겹겹으로 예언했습니다. 그는 예언대로 인간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 죄지은 인간과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고, 그들의 죄를 책임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수많은 이단들이 다른 이유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이 사람들에게 이해가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인간이 될 수 있느냐, 어떻게 한 몸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함께 존재할 수가 있느냐, 그럴 수는 없다는 자기의 상식을 포기하지 못해서 이단설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성경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을 해서 사람들을 꼬이는 이단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은 환상이었고 실제의 몸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을 보기는 했지만 손으로 만질 수는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게 얼마나 거짓말이고 사단의 역사인지를 요한서신에서 지적했습니다. 요일 4:2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했고, 요이 1:7에서는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일은 우주에서 가장 이해 못할 신비입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인 분만과정을 거쳐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지만, 실제로는 부정모혈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기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성장과정을 밟으셨습니다. 모두가 이해 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신비를 만드신 참으로 신비하신 분입니다. 어떻게 하늘의 별들을 만들어 매달아 두시고 그것이 항상 제자리에 있게 하셨는지 신비할 뿐입니다. 물과 불과 생명도 신비입니다. 이 모든 신비한 것을 만드신 신비한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는 일은 못하시겠습니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꼭 그렇게 하셔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우리 대신에 형벌 받을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수 없기 때문이고,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시고 이 세상에 살아보시지 않으면, 연약과 비참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를 이해할 수도 없고 동정하실 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53:5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그가 오시기 이전에 몸을 입고 오셔야 하는 이유를 밝히 예언하셨습니다.
하지만 몸을 가지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은 “저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야,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저럴 수가 있어” 하면서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수군거린다는 말은 뒤에서 비방하고 비웃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제가 설교를 하고 있는데 성도들이 저 뒤에서 설교를 가지고 비방하고 비웃고 있다면 아마 무척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직접 말씀 하시는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도 나빴습니다. 큰 소리로 떠들기도 하고, 대놓고 비방도 했습니다. “저 사람 우리 동네 요셉의 아들이잖아, 그 부모를 내가 아는데 지금 뭐라고 했어? 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구? 내 참 웃겨서, 저 사람 엉터리야” 이랬다는 겁니다.
그들이 왜 이랬을까요? 예수님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낮아지신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나 하시는 놀라운 일들은 하나님 다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 다웠습니다. 그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면 하나님다워야지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과 똑같으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모습과 그들이 보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으면 설교를 그렇게 씹으면 분하고 참을 수 없어서 당장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침착하게 그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3-44) 너희가 내말에 수군거리는 이유를 안다. 하나님이 이끌지 않고서야 누가 네게 오겠느냐, 그런 말씀입니다.
그럼 누가 하나님이 이끌어 주님께로 데려오시는 사람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모습, 즉 하나님이 못난 인간중의 하나처럼 되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처참하게 죽으신 그 사실을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입니다.
고전1:23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것이나 하나님이 인간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유대인들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이성과 논리로는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진 비천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이성을 신뢰하는 사람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사실 때문에 의심하면서 믿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를 아십니까? 독일 출신의 의학박사, 음악박사, 신학박사였습니다. 그가 영광을 누리지 않고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라고 믿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일 리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인간이 닮아야 할 가장 모범적인 인간으로 생각하고 그분을 닮으려고 아프리카로 갔던 것입니다. 그는 착하게 살기는 했으나 구원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지, 자기의 착한 행실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만 얻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사람의 이성이나 경험이나 지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하고, 믿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방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끈다.”는 “인양한다.”는 뜻으로, 깊이 가라앉은 배를 강인한 줄로 묶어서 끌어내듯이, 자기 힘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을 외부의 강한 힘이 작용하여 건져내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그들의 수군거림에 화를 내지 않으신 이유는,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을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이게 되어있다는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겠지만, 하나님이 특별하게 은혜를 주셔서 자기의 이성이나 지식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의 죄와 타락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몇 사람만 그리스도께 나아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된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시며, 계속 말씀 하시는 이유는 빈정거리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려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은 간단하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면 당시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그들에게 말씀을 계속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그 가운데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붙들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는 않으면서 놀라운 기적으로 자기들을 도와주기만 바라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저런 일들을 하실 수가 없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아들이 오시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신다고 하셨는데 저분이 그러셨잖아” 하면서 주님이 하신 일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결심을 하다가도 옆에서 누가 그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금방 귀가 솔깃해져서 흔들리는 법입니다. 사람들 중에 일부는 지금 예수님을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 믿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해결하실 분은 이분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부정적인 말들을 합니다. “저 사람을 낳은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떻게 자기가 하늘에서 왔다고 말할 수가 있어?” 이 소리에 금방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남의 말 듣고 넘어지지 말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외모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런 부정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은 주저하지 말고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수많은 훼방하는 소리를 눌러가면서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사람은 내게로 오라. 자기의 죄 때문에 괴롭고 가슴아파서 용서받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이 너의 마음에 죄를 깨닫게 하시고 나를 믿게 하시어 이끌고 계신 것이다. 그런 사람은 곁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말고 내게로 오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사람은 내게 올 것이고,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유달리 나만 죄가 많은 것 같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교회에 다닐 자격이 있어도 나만은 너무 죄가 많아서 교회 다닐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이끌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51)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죽을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떡으로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어떻게 생명의 떡으로 준다는 것이지요? 영원히 죽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대신 죽겠다는 말씀입니다. 떡, 즉 음식은 그것을 먹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음식은 없어지지만 음식을 먹은 사람은 그 음식 때문에 살아납니다.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하신 것은 죄의 형벌로 영원히 죽을 사람들을 대신해서 자기가 죽어 주심으로 믿는 사람을 살리겠다는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죽게 된 것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이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죄 값을 치르려고 육체를 입고 오셔서 대신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예수님을 나를 살리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라고 믿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여 살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훌륭한 성인일 수는 있고 모범적인 인간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일 수는 없다고 수군거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려고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수군거립니다. 그 수군거리는 말을 귀담아 들으면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남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만 크게 들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들이 별 소리를 다해도 자신의 죄를 용서하고 새 생명을 주실 분은 주님뿐이라고 믿어지고, 주님을 잘 믿고 싶은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입니다. 수군거리지 말고, 수군거림에 흔들리지 말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시라고 믿고 그 말씀만을 따라 살아서 모두가 영생을 누립시다.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라
박근호 목사
'사람이 먹는 목적은 살기 위함이고, 사람이 사는 목적은 먹기 위함'이라는 다소 냉소적인 격언이 있습니다. 이건 '병아리가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명제 만큼이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넌센스적인 말장난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거기에 인생의 정체에 대한 고민 또한 엿보이기에 곧잘 우리 사회에 회자되는 말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사는 게' 인생이고, 또 '먹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게' 인생일 것입니다. 사람의 노동행위나 경제행위가 명분과 타당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 삶과 먹거리의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먹고-사는' 이 두 가지를 떠나서는 인생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이 떡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역설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는 것은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먹는 것으로 시작해서 먹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 지구촌 곳곳에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먹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넉넉히 잘 먹는다고 해서 다 잘 살고 다 건강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 먹어서 병들고 너무 먹어서 고통받는 사람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먹되 무얼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먹거리를 잘 가려서 바로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습니까? 다이어트 열풍이 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먹는 것이 곧 건강과 생명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먹거리'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면 이런 책제명들이 주욱 뜹니다. 'IQ, EQ를 높이는 먹거리', '약이 되는 먹거리', '중국 5천년 먹거리의 지혜', '새로운 먹거리의 과학'... 현대인들이 그만큼 먹거리에 관심이 많다는 겁니다. 먹되 무얼 먹을 것이냐는 관심이 현대인들에게 점점 더 지대해지고 있습니다. 다이어트 때문에 육류를 멀리하고 패스트후드를 안먹는 사람, 체질 때문에 유전자 조작 식품을 멀리하는 사람 등등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날로 더해가는 실정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얼 먹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데 그 먹는 것 때문에 죽는다면 그처럼 황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이 예나 지금이나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은 바로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가 이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다 따먹어도 좋지만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큼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먹어선 안될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고 그로 인하여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실낙원 이야기는 옛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는 그것이 우리를 만들어가고 우리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먹거리로 검색한 도서 가운데 이런 인상적인 제목의 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먹거리'...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명하신 먹거리를 먹지 않고 금하신 먹거리를 먹고서 인생을 망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먹거리가 그토록 많았지만 하필 그 유일한 금단의 먹거리를 먹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여기서부터 인생의 비극은 시작된 겁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몸에 좋은 것들을 가려서 먹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몸에 좋지 않고 오히려 해로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입맛에 달고 맛있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먹으려고 고집을 부려 부모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인간의 먹거리 문화가 타락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기대를 져버리고 몸에 나쁜 불량 식품을 탐닉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명하신 먹거리를 무시하고 욕심에 따라 자기 나름의 먹거리 문화를 만들어 버린 인간이 겪는 고통의 사례들을 참으로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얼 먹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겁니다. 분명 우리 삶을 풍요롭게 윤택하게 하는 먹거리가 있고 그렇지 않은 먹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먹거리와 생업, 먹거리와 인생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왜 일을 합니까? 생업 또는 노동이라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한나 아렌트라는 정치철학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 중의 하나가 노동'이라면서 '노동은 생존을 위한 인간의 활동'이라고 했습니다. 노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일함으로서 빵을 얻습니다. 결국 노동은 생명과 생존에 관련된 빵을 얻게 하는 과정입니다. 일함으로 빵을 얻어 그것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고 그 생명으로 일함으로 빵을 얻는 순환의 역사가 계속됩니다.
그럼 이것이 인생의 전부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노동과 일의 전체적 의미일까요? 정말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사는 것으로 인생을 정의내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무얼 먹느냐가 우리의 체질과 삶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 곧 인생을 결정하는 겁니다. 여기엔 그만큼 먹거리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의 인생살이 속에서 취해야할 삶의 먹거리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사람들이 서로 수근거리자 주님은 그들에 대해 수근거리지 말라면서 거듭 당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원한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십니다.
여기 주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우리의 삶이 빵을 위한 노동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셨습니다. 즉 인간이 자신과 가족의 빵을 위해 노동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깨우쳐주신 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노동에 묶여 생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불경기엔 노동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합니다. 생존을 위한 현실에의 순응, 이거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체제 속에서 운명적으로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고 또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유롭지 못한 형편일수록 선택의 폭은 더욱 좁습니다. 거기서 인생의 비애를 느끼고 회의를 맛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그러다 좀 여유가 있어 일차적 노동으로부터 다소 해방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업적을 쌓는다는 개념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명예 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되면 그 다음 단계 곧 뭔가 이름을 남기는 자리로 돌입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업적 지향적 삶입니다. 뭔가를 남기는 인생이 되자는 겁니다.
노동과 업적의 차이를 말하자면 업적은 그 자취가 오랫동안 남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업적이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소유격의 활동이어서 누구누구의 업적, 누구누구의 작품 이렇게 불리워집니다. 요즈음 거의 모든 대학에서 종합평가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보고하게 되어 있는데 이 업적이라는 활동이 일상의 노동하고는 성격이 좀 다릇습니다. 저서를 내고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업적이라고 할 때 업적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다해 이루어내는 열매로 그것은 자신의 최선의 분신이요 자기 얼굴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엔 업적주의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업적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나 중심으로 변질된 활동을 말합니다. 업적을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모든 것들에 유용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나에게 유용한가로 가치 기준을 삼을 때 업적주의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럴 때 논문도 빼낄 수 있고 서예도 대신 써서 상을 받을 수도 있는 믿기지 않는 황당한 현실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위해 먹고 살고 또 이런 삶을 통해 더 잘 먹고 살려한다면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먹는 것에 책임지고 음식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까도 생각해야 하지만 무얼 먹을까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러한 노동의 노예상태가 되는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당부하셨던 겁니다. 그것은 노동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업적도 뛰어넘는 새로운 인간활동의 모습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자기에 갇히거나 자기를 벗어나는 데만 만족하지 말고 더 큰 비전을 가진 삶을 이루어가라는 것이고 그게 바로 믿음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데만 갇혀 있으면 그렇게 살 수 없으니 먹고 사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세워가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기 위해서 살아가고 자기 업적을 세워가기 위해 일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오로지 믿음의 역사로 가능한 현실이기에 주님은 그렇게 권면하신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주님의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다. 주님이 정치적 업적을 세우려 하셨습니까 자기의 공적을 내세우려 하셨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서 온갖 노예상태에 있는 인간의 해방을 위한 행동을 하심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도모하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행동은 그 무엇도 업적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유형의 것으로 남지 않고 공중으로 산화되어 없어지고 맙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입니다.
그것은 남들에게 보이려 하지 않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 역사의 특징은 은밀성입니다. 자고 깨는 중에 자라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부풀어 오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아니하고 누가 알아주건 말건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희생적인 활동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활동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이름을 내세우는 업적이 아니라, 자기는 없고 오직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고, 타자의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럼 누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무얼 먹어서 그런 체질의 사람으로 나를 바꾸어 갈 것인가... 이게 우리 삶의 관건입니다.
주님이 당신을 가리켜 "밥"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먹는 것이 바로 인생을 바로 살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거듭 말씀하심으로서 당신이 바로 우리가 먹어야할 양식의 원천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양식으로 먹을 때 우리도 그분의 체질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 삶다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다. 언니 마르다는 분주하게 손대접하려고 준비하는데 마리아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합니다. 바쁜 언니를 도와주지 않고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런 마리아의 행동이 불만인 마르다가 주님께 마리아를 나무라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마르다의 생각은 마리아가 주님을 존경한다면 지금 그분을 위해 나와 함께 봉사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마르다는 매우 현실적이며 상황에 맞추어 최선을 다하는 관점을 가졌습니다. 그는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언니가 아무리 바빠도 개의치 않고 마치 더 중요한 것이 있는 사람처럼 다른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르다의 현실주의적인 관점보다 다소 적절치 않아 보이는 마리아의 행동을 더 높이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에 마음쓰며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니라. 너보다 마리아가 참 좋은 몫을 택했구나. 너는 그것을 훼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마르다는 노동에 쏠린 인간을 상징합니다. 무얼로 대접할까에 골몰합니다. 그래서 먹거리를 장만하느라 분주합니다. 이에 반해 마리아는 먹거리에 쏠린 인간을 상징합니다. 무얼 먹을까에 골몰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먹거리를 취하는데 집중합니다.
주목할 것은 언제나 복음서에서 동생 마리아는 언니 마르다보다 더 사려깊고 기특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300 데나리온이나 나가는 값비싼 나드 향유를 주님께 드리는 것도 마리아입니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저들이 먹은 먹거리의 차이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먹음으로서 그녀의 체질이 그런 영적 체질로 바뀐 것이고 마르다는 육신의 양식에 골몰만 했기에 그렇지가 못했던 겁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밥으로 취한 마리아는 어느 새 사랑과 긍휼과 자기비움이 체질화된 하나님의 딸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영적 먹거리로 무엇을 취하느냐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마술적이지 않고 지극히 자연적입니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납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게 영적 세계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내 생명의 밥'으로 먹으면 우리의 체질도 그렇게 변하는 겁니다. 먹는대로 체질은 형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질병이 먹거리에서 오듯이 우리의 많은 영적인 문제 또한 영적 먹거리에서 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권면하지 않습니까? 특별한 보약이 따로 없습니다. 평소에 먹거리를 잘 가려먹으면 그게 보약입니다. 먹어야 할 것을 먹고 먹지 말아야할 것을 안먹는 지혜가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하는 겁니다.
주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통해 저들이 먹어야 할 생명의 양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빵을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건네며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내 피'라고 하셨습니다. 즉 당신을 당신 백성의 먹거리로 주신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주님 같은 체질의 하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가 하프타임을 거쳐 이 한 해의 후반전을 새롭게 살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무얼 먹을까를 생각하면서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먹는 게 내 체질과 건강과 년수를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멋지고 보람되고 유쾌한 인생은 다짐이나 생각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내 속에서 나를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달린 것이고 또 그러기에 내가 내 속을 무엇으로 채워가느냐는 결단에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이 힘주어 말씀하시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내가 곧 생명의 떡입니다. 여러분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영생의 양식입니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입니다.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입니다..."
이 먹거리로 인해 언제나 강건하고 보람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얼 먹을까를 생각함으로 체질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 싱그럽게 한해의 후반전을 뛰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신성종 목사
제가 미주성산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을 때 북한에서부터 이번에 엘에이에 강영섭 목사님, 황시천 목사님 등 다섯 분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통일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언제인가는 우리가 평양에 방문도 하고, 함께 예배도 드릴 수 있는 기회도 하나님께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함께 은혜받기를 원하는 설교의 제목은 먹는 문제입니다. 인간에게는 뭐니 뭐니 해도 먹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심각합니다.
첫째는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고,
둘째는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운명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아야 할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를 범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레위기 11장에 보면 ‘카수룻’이란 음식에 관한 법규를 정하여서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이상구 신드롬을 일으켰던 안식교회의 음식법은 노아의 홍수시대에 주신 채식중심의 생활을 생활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채식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심판 후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기도 먹으라고 허락하셨기 때문에 음식은 건강에 좋도록 먹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본문의 배경은?
본문에 보면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잘 보여줍니다.
한국의 보리고개를 해결한 박정희 대통령의 [할 수 있다]의 철학은 한국의 기근을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그 철학은 사실은 김용기 장로의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김용기 장로님이 살아계실 때에 왜 사람들은 총을 쏘면서 총하지 않고, "땅", 혹은 "빵"하고 소리를 내는가? 그것은 총 쏘는 목적이 땅을 차지하려고, 아니면 빵을 빼앗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땅이 중요한 것은 곡식을 심어 먹기 위해서이고, 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한 이 말씀을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주신 말씀이란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당시 기적으로 된 떡을 먹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로마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해방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와
둘째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가장 중요한 먹는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했습니다.
피한 것은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에 유대의 왕이 된다는 것은 승진이 아니라 모독이 되기 때문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왕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강조하시려는 것은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보여준 대로 이적을 일으키는 권능의 주님이시지만 우리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산떡이 되신 주님 자신을 먹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으나 죽었지만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먹음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소위 모형론(Typology)의 방법으로 자신을 떡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음식처럼 우리들의 영적인 생명을 유지케 해주고, 오직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며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기독교인들은 식인종이 되고 맙니다. 우스운 것은 실제로 로마제국 시대에 기독교인들을 식인종이라고 해서 체포하고 죽인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식에서 피처럼 생긴 포도주를 마시고, 또 빵을 떼며 먹는 것이 멀리서 보면 마치 고기를 찢어 먹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했을까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자신의 본질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떡, 즉 음식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주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며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2. 음식에는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보면 카쉬룻, 즉 음식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물론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그대로 지켜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거기서 주는 영적 의미만 취하면 됩니다. 그러나 음식에 관한 규례는 세 가지 뜻에서 주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는 보기에 흉측한 음식은 피하게 했습니다. 예를 들면 목매여 죽인 것 같은 것은 피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비위생적인 것도 피하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이방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도 피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런 규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구태여 구약시대의 규정을 그대로 지켜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먹는 문제에 대해서 조심할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강조하는 음식에 관한 규정은 무엇입니까?
음식은 육체의 필요에 따라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비타민 등을 골고루 먹어야 하듯이 우리들이 영의 생명을 위해서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요즈음 보면 우리 한국 사람들의 평균 신장이 많이 변했습니다. 제 아들도 178센티미터입니다. 제가 자랄 때처럼 굶는 것을 음식으로 삼지는 않고 배부르게 먹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육적으로는 아주 잘 먹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영양부족에 처해있습니다. 더욱이 미국은 쌀 부자 미국입니다. 칼리포니아의 쌀은 세계 제일입니다. 과일 많고, 쌀 많고, 채소 많고,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정신적으로 해이하고, 영양상태가 형편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은 미국병 중에서 병입니다.
지금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만불 시대가 넘는다고 자만하면서 세상 것 많이 먹으니 종교의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적으로 죽어가고, 교인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국민들은 영적으로 병들고 있습니다.
(예화)왜 갈매기는 죽었는가?
(영국을 여행하던 한 사람이 해안지방을 지나는 동안에서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을 청소하고 있는 인부들에게 물었다.
“예,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많은 먹이를 던져주지요. 맛있는 음식이지요, 그러나 사실 갈매기는 자연식, 즉 물고기들을 잡아먹어야 하는데 그러다가 여행객들이 뜸해지면 사람음식에 익숙해진 갈매기 떼들은 그만 굶어죽고 맙니다.
바다에 그렇게 많은 고기 떼들이 있는데도 먹는 법을 잊어버려서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것을 너무 좋아하거나 집착하면 신령한 미각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고 맙니다.
3. 하늘에게 내려온 떡을 먹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먼저 배고픔을 느껴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으려고 갈급함 같은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배고픔을 느껴야 합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느낌이 없습니다. 이것은 병중에 병입니다.
(2)다음은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영적인 편식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편식을 하면 건강에 나쁘듯이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42절에 보면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하면서 그런데 어떻게 하늘로서 내려왔다고 하느냐 하면서 수근 거렸습니다.
편견을 가지면 세상만사가 따 삐딱하게 보입니다. 주님이 옆에 계셔도 안보입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3)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천국 잔치에 참여해야 떡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자라고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 믿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을 육적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두 번째 이유는 외형적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알아야 합니다. 영으로 알아야 참으로 아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 당시에 거짓 메시야가 64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거짓 메시야를 추종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참 메시야가 왔을 때에는 배척을 한 것입니다.
왜 그러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세를 통해서 예수님을 평가하고 모세를 통해서 메시야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롬7:6). 그러므로 우리는 영으로 보고 영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네 가지를 믿어야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 떠나면 죽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즉 십자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께로 오는 자는 누구든지 굶주리지 않고 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넷째는 주님이 자신과 떡을 동일시 한 것은 그의 본질을 말씀하기 우해서가 아니라 성도들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임을 깨닫고, 그가 자신의 목숨을 주셨으므로 음식을 먹듯이 주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여야 산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떡은 영양을 주기위해서, 스스로 부서져서, 우리의 몸 안으로 들어가듯이 주님을 그런 심정으로 대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4. 주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고 먹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영생입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서 영생을 미래적인 말씀으로 표현하지 않고, 현재적인 면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영생이란 죄에서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닫고 사는 참된 삶, 자녀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사함을 받습니까? 저는 미국에서 고학을 할 때에 소제를 하면서 소위 소제 철학을 배웠습니다. 소제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먼지와 떼가 집니다.
그러나 기름기가 있는 것은 비눗물로 씻어야 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2)영생은 요17:3절의 말씀처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영적인 깊은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3)영생이란 장차 주님 재림하실 때에 다시 생명의 부활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어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먹는 문제입니다. 지금 세계는 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영양실조를 아이들이 시력을 잃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매년 세계적으로 보면 이천 만명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인 북한에도 그동안의 천재지변과 여러 가지의 이유로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과 기근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년에 가는 곳마다 복음의 전하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떡입니다. 바로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굶주린 영혼처럼 주님의 말씀을 먹고 참 만족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