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녹색평론독자모임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박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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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영식 (drm984 at chollian.net)
등록: 2001-11-11 13:40:13
수능 몇일 전.
고3 딸애를 격려하는 전화가 쇄도한다. 할머니, 고모, 이모, 삼촌, 마누라의 고교. 대학 동창들 등등으로부터. (주로 엄마들이다. 한국 수능시험의 주연은 수험생 못지 않게 그들의 엄마들이다)
딸애가 짜증스럽게 묻는다.
아빠, 내가 다니는 지방 명문고 고3 엄마들이 어떤지 아세요. 엄마들이 애를 공주님처럼 떠받들어 주고 있어요. 그에 비하면 우리 엄마는 저에게 소홀해요. 힘들어요. 우리 엄마는 혹시 계모 아니에요?
- 네 엄마를 다른 엄마들과 비교하지 않기 바란다. 언제 아빠엄마가 너를 다른 애들과 비교한 적 있냐. 네 엄마는 네 엄마의 삶에 충실하려고 할 뿐이다. 절대로 너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은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기보다는 집착이거나, 심지어 가족이기주의일 때가 많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자면, 자식을 사랑할 능력이 없는 엄마들이 자식에게 과도한 집착을 갖게 된다고 한다(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에서).
- 아빠는 또 난해한 말을 하시네요. 아빠에게도 불만이 있어요. 등교시간이면 우리 학교 앞이 자가용 타고 오는 애들로 얼마나 붐비는 지 아세요. 학원이 끝나는 늦은 밤에도 아빠들이 차를 몰고 애들을 데리러 오고 있어요. 우리집 자동차는 전시용인가요. 아빠도 계부지요?
- 미안하다. 아빠는 자동차 몰고 다니는 거 좋아하지 않는단다. 오래 전부터 차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했단다. 게다가 아빠는 녹색평론 독자인 거 너도 알고 있지 않니. 하지만 수능날 만은 차로 데려다 주마. 차로 데려다 준다니까.
수능이 끝났다.
또다시 전화가 수없이 걸려온다. 재수생을 둔 처남댁은 교회에서 하루종일 기도 했다고 하고, 처사촌도 고 3인 딸애를 위해 하루 휴가를 냈다고 한다. 수능이 끝난 날 저녁, 딸애의 친구가 엄마와 함께 EBS TV에서 정답을 맞추어 보고 나서 예상외로 낮아진 점수에 울고불고 야단났다고 한다. 어느 영국신문에서는 한국의 수능시험을 빗대어 '세상엔 별 일도 다 있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
그런데 내 딸은 무덤덤해 한다. 침착해 보이기까지 한다. '힘든 수능시험이 딸애를 한층 더 성숙해지게 했나보다. 과연 내딸이군, 수능시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군'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딸이 입을 열었다. " 우리 고3 이 뭐 리트머스 시험지에요. 한국교육은 정말 문제가 많아요. 난 한국의 대학에 별 관심이 없어요. 기회를 봐서 유학갈 거예요"
- 아빠도 너와 동감한다. 학부모로서 책임감도 느낀다. 하지만 아빠는 네가 앞으로 몇년 간 공부해서 따게 될 학벌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을 거다. 다만 네가 서른살이 되었을 때의 너의 삶의 모습을 보고 너의 성공여부를 가늠할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집고 넘어가자. 그동안 학교 등록금과 별도로 적지 않은 사교육비를 지출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학업에 지장 없는 범위에서 네 용돈 정도는 네가 벌기 바란다. 마지막 대학등록금은 네 이름으로 대출해서 내거라.
끝으로 어여쁜 내 딸아, 네가, 아니 우리 사회가 열망하는 아름다운 몸매갖기를 위해 채식을 권한다. 건강에도 좋은 것은 물론 - 장담하건대 - 다이어트에 더없이 효과적이다. 딸아, 네 얘기를 너의 허락 없이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말한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혹시 너에게 험담이 되었다면,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너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