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69
3월21일[사순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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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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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7esyKx7o0K4
[예수회 양승환 크리산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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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집단적 악과 개인적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창세기를 통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동생 요셉의 모습에 형들은 질투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고, 요셉은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도 불구하고, 형들은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는 동생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집단적 악이 결정적으로 발동됩니다.
평소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악의가 동시에 표출된 것입니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세기 37장 19~29절)
형들이 그런 악의를 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요셉이 꾼 특별한 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창세기 37장 3~4절)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보셔요.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창세기 37장 7절)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분기탱천하기 시작하였고, 큰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들끓었고,
마침내 집단적인 광기와 폭력성으로 연결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요셉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이집트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만사 세옹지마’라고, 남의 나라 땅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한 요셉은 대제국의 제2인자로 우뚝 서게 되고, 후에 대기근으로 굶어죽게 생긴 가족들을 살리게 되는 드라마틱한 대반전 스토리를 엮어갑니다.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봐도 집단적인 악, 집단적인 광기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600만 명이 넘는 유다인 대학살, 수많은 청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대전쟁들은 집단적 악의 결과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백성은 아직도 집단적 악의 난동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이에나 떼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선량한 국민의 삶을 힘겹게 하는 검찰 집단, 기레기 집단, 국민 민폐당, 사이비 종교 단체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요셉이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이 남아있는 개인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던 르우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창세기 37장 21~22절)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악이 더 큰 악으로 확산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는 일말의 양심입니다. 거대 악을 목격하고서도, 그 악으로 인해 드러나는 참혹한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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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QgbgvIoS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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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성체의 적을 만드는 교리교육?>
오늘 복음은 ‘못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에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와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포도밭 주인 외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성체’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죽일 수도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이 주시는 이익만을 생각하지, 그분이 우리에게 없애려고 하시는 고통의 원인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입니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죠. 이 참새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았던 새라는 것을 몰랐나요? 그리고 참새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참새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3월 20일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은, 참새가 사람을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새는 다른 야생동물들과 달리 사람들의 집 근처에서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야생동물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꺼리지만, 참새는 사람들과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참새의 자연적인 적들로부터 참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에게는 뱀, 족제비, 매와 같은 자연적인 적들이 존재하는데, 이들 모두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호막처럼 사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주변을 둘러보면, 참새들이 지붕 밑에서 둥지를 틀 수 있는 장소들이 많습니다.
또한, 농지와 같은 환경은 참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중요한 장소인데, 사람들은 자연적인 적들을 차단하고 집짓기를 쉽게 만들어 주며, 먹이를 풍부하게 제공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참새가 우리와 함께 살며 자연의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일본의 나가노현의 산악지대는 원래 참새가 많이 살던 곳이었으나, 사람들이 더 이상 그곳에서 살지 않게 되면서 참새들도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참새의 비밀은, 참새가 농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참새는 때때로 모여서 곡식을 쪼아먹기도 합니다. 농부들에게는 마치 쌀 도둑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참새가 사라지면 농업에 더 큰 어려움이 생긴다고 합니다. 참새가 먹는 해충들이 증가하면서, 오히려 농업에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1958년, 마오쩌둥 주석이 쌀 수확량 감소를 보고하며 “쌀 이삭을 쪼아먹는 참새는 해로운 새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베이징의 모든 농부와 노동자들이 참새를 없애는 작전을 시작했죠. 그 결과, 2억 마리 이상의 참새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해충이 급격히 늘어나고 쌀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결국, 4,00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대기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은 참새를 잡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참새는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입니다.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참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참새의 날'이 존재하는 이유죠. 참새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가까운 이웃이지만, 매우 경계하고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기 때문에, 그 이웃은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소중한 이웃인 참새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참새를 해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새와 함께 살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참새와 함께하는 삶은 바로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그 존재들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 알아봄, 스브스뉴스, 유튜브]
예수님은 인간에게 이 참새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만 싫어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분을 거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예전 베이징에서 일어난 일이 똑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저의 경험으로 알아보자면, 바로 이 세 가지 물음이었습니다.
1.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
2.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3.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어머니가 의심될 때 다른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또한 사랑으로 해결되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어도 자신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자존감’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때 이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뭐 하고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제가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는 내가 사제가 되어야 하는지, 세상에서 결혼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를 때였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것이 어머니가 주는 ‘밥’입니다. 젖을 먹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 밥을 통해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 밥을 통해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여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합니다.
부모의 사랑만으로는, 그러나 내가 진짜 누구인지, 내가 진짜 사랑받는 존재인지, 내가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도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진짜 만들고 낳으신 창조자를 만나야 합니다.
부모는 나에게 다시 생명을 넣어줄 수 없습니다. 그 창조자가 이 세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당신 ‘밥’을 주시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입니다.
저는 구역 판공을 하며 냉담자들을 만나 면담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하나같은 특징은 그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 곧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체의 적이 되는 교리교육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 왜 참새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성체가 주는 효과를 제대로 이해시켜야 합니다.
냉담자들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려면, 교회에서 오늘과 같은 포도밭 소작인이 만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가장 강력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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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경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요셉과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삶을 보면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형제 중에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결국 요셉을 은 20닢에 팔아버립니다. 예수님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닢에 팔았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당했지만, 나중에 그 배신이 더 큰 구원의 길이 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해 이집트로 팔려 가고, 예수님은 제자에게 배신당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배신의 원인을 보면 비슷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질투받았고, 예수님은 바리사이파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기들보다 더 뛰어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보면 실력 좋은 사람이 미움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 조직에서 튀면, 그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간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감옥에서도 꿈을 해석하면서 기회를 잡았습니다. 결국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며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요셉과 예수님에게서 한가지 공통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좌절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실패와 어려움을 겪을 때, 이 요셉과 예수님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성령을 받아라.”
우리는 작은 상처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데,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용서란 뭘까요? 용서는 약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내가 더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건 그가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그 아픔을 극복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인생에서 억울한 일,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요셉과 예수님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고, 용서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이 더 위대한 길인지, 한번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당하고,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구원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때로 요셉의 형들처럼 질투할 수도 있고, 유다처럼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요셉처럼 용서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지금의 삶에서 배신과 상처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은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쁜 포도원 소작인들은 자연을 파괴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요셉이 보여주었던 ‘인내와 용서’를 채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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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까닭을 살펴보려면 오늘 복음의 앞 이야기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라고 물었습니다. ‘이런 일’이란 성전 정화 사건(21,12-17 참조)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대답 가운데 일부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지 묻지만, 그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가 정말 궁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속으로는 성전을 관리하는 권한은 자신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행동을 비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포도밭의 소출은 주인의 것이 분명한데도 자신들이 포도밭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악한 소작인의 모습을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러한 상황이라면 포도밭 주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답해 보라고 하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포도밭 주인이 악한 소작인들을 주저 없이 없애 버려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악한 소작인들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주인인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신 것 같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22,1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포기하실 수 없었던 예수님의 마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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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3-43.45-46: 저 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해야 했을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밭 주인은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순종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과는 달리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다는 의미다.
소작인들은 그러나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 대답한다. 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 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소작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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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사랑 받고 있는.>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4-40)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2-43)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자만심과 특권의식을 버리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면, 너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있다가 빼앗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자격을 얻은 사람들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경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9-2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표현으로는 유대교가 받은 은총이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갈 것이라는 경고인데, 뜻을 생각하면, 이 경고는 유대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되고, 또 각 개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실제로 유대교는 메시아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누리고 있던 은총을 잃었고, 그 은총이 예수님을 믿는 종교, 즉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구원의 은총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종교라면, 예수님을 믿는 종교답게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되는 특권 같은 것은 원래 없습니다.
2) 우리는 하느님의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7ㄷ)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소작인’으로 표현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자녀답게 살지 않고 충실하지 않은 소작인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혹시라도 “구약시대 때에는 하느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였다가 신약시대가 되어서야 예수님 덕분에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바뀐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구약시대 때에도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았을 뿐입니다.>
소작인은, 남의 밭에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소작료를 내는 사람이지만, 자녀는 아버지의 밭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소작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거둔 소출과 그 밭을 상속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밭은 곧 자녀의 밭이고,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 자신의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3) 실제 상황에서는 비유의 표현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못 알아보고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상속 재산을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죽였습니다.(요한 16,2) 박해자 시절의 바오로 사도도 진심으로 하느님께 충성하려고 그랬고, 예수님을 죽인 박해자들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실제 상황과 비유의 표현에 그런 차이가 있긴 한데, 결과만 놓고 보면,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안 믿고, 죽인 것은, 하느님께 정면으로 반역한 일입니다. <모르고 그랬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긴 했습니다. 나중에라도 회개한 이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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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하느님의 사람>
마태오 21,33-43.45-4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께서
빚으시니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시니
사람은
사람에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빚으시고
보내시는
하느님 같은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을
보듬으니
참으로
사람이요
하느님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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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허찬란 임마누엘 신부님]
<하느님의 마음>
젊은 청년 신자들과 함께 ‘체험! 삶의 현장’이란 팀을 만들어 어려운 농가의 일손을 돕는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힘이 들어도 보람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거는 기대는 없다 할지라도 애써 힘을 보탠 농가에서 배신을 당할 때는 얼마나 속상한지 모릅니다.
한번은 잘 가꾼 농장을 주인이 다단계에 빠져 팔아버린 적이 있습니다. 농장주인의 처지가 안타까워 저는 조용히 그가 판매하는 전기요를 하나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삽시간에 소문이 나서 아주 곤란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제인 제가 자신의 물건을 샀다고 자랑스럽게 알린 모양입니다.
“내 아들, 상속자야 알아보겠지” 하고 기대하다 크게 실망하고 노하신 하느님의 마음처럼 저 역시 그 농장주인에게 실망하면서 여지없이 마지막 남아 있던 선량한 마음까지 박살나버렸습니다.
자존심은 물론 교회의 나눔 정신까지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사회복지, 자선사업을 생각하며 가난한 이웃을 도우려 해도 자주 머뭇거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가만히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복음을 들여다보니, 하느님이 너무도 이스라엘을 믿으셨고, 당신의 외아들마저 내놓으시는 무모함을 느끼게 됩니다.
만일 저처럼 사회가 금지시키는 다단계 신자를 도운 사목자가 있다면 다들 처신을 잘못한다고 욕할 테지만 이런 험한 세상 속으로 오늘도 사제를, 신자들을 보내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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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1726년 18세기의 작품으로, 의사 걸리버가 선박 의사로 취직해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큰 사람들이 사는 나라, 날아다니는 섬의 나라 등을 방문하게 되는 기행문 형식의 소실입니다.
저의 경우, 이 책을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걸리버 여행기는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일까요? 사실 원본은 신랄한 성인용 풍자였습니다. 당대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풍자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해 사라졌고, 대신 어린아이도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된 것입니다. 고전화가 이루어졌고, 세계적인 독자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단정 지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것이다.’, ‘이것밖에 안 된다.’ 식의 한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뜻에만 맞게 살아가려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세상이라서 그렇게 살아야 지혜로운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냉담 중인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신부님,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단정 짓는 자기 생각이 맞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만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운 사람은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포도밭을 일구시고 이를 소작인들에게 맡기시지요. 이 소작인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이들을 나타냅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주인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죽입니다. 주인이 아들까지 보내지만, 포도밭을 차지할 생각으로 죽여 버립니다. 바로 예언자들을 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척과 예수님에 대한 배척을 보여줍니다. 그 모든 것이 세상의 논리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못된 모습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보다는 영원한 만족을 추구해야 하고, 세상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상상도 못 할 그분의 힘 속에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나’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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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포도밭 주인의 인내심에 다시 한번 탄복했습니다. 만약 저라면 처음 종을 보내고 그 종들이 매맞아 돌아왔을 때 소작인들에게 철퇴를 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밭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몇 차례에 걸쳐 종들을 보내다 안되자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우리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알아주겠지, 오늘은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오늘은 오늘 하루가 왜 주어졌는지 알아주겠지….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매일 들려주고 계신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은 밭을 경작하고 그곳에서 소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그 소출의 얼마를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소출의 모든 것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끔 욕심에 눈이 멀어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존경과 사랑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의 모습은 같은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은 제발 제가 그분의 뜻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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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가 되자
“한낱 벌레일지라도 자기 의지대로 산다면 그렇게 살지 않는 인간보다 낫다.”(중략)
카프카는 이런 세계를 보여 주고 싶어 했으리라. 끌려다니는,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이성에 지배받는 불쌍한 인간들을 잠시 벌레로 ‘변신’시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벌레가 되자, 벌레가 된 순간, 인간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내면의 나 자신과 대화하라.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이 보이고 들릴 것이다. 충분히 생각하고 자신과 대화한 후에 다시 인간으로 변신하라. 그리고 살아라. 원래 당신이 태어난 이유로!” -고전이 답했다. (라곰, 고명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작품을, 삶을 통해 녹여낸 글입니다. 문장과 그 깊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 소개합니다.
우리도 우리 태어난 이유로 살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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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포도밭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오. 21,37-39)
세상이라는 포도밭을 주님께서 소작인인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 삶을 위하여 맡기셨기에 우리는 소작료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맡기신 포도밭에서 주님께 바쳐야 할 소작료는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소작료를 주님께 드리기를 싫어합니다. 현실에서 포도밭을 차지하는 것이 소작료를 애쓰며 내는 것보다 더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포도밭주인을 거부하고 ‘상속자를 죽여 버리고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면 소작료를 굳이 낼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소작권을 넘어 소유권에 집착하는 우리는 포도밭주인이 원하시는 것을 거부합니다. 세상이라는 포도밭을 소유하려는 집착으로 주인마저 희생을 시키려 합니다.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를 외면하고 거스를 때마다 우리는 상속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거나 희생시키게 됩니다.
무관심과 거짓, 불의와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상속자를 죽이고 상속재산을 차지하려는 우리의 욕심은 포도밭의 소유권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라는 포도밭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우리의 집착은 잠시 포도밭에 왔다가 주님의 일을 하는 일꾼인 소작인의 소임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포도밭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라는 소작료를 부지런히 드려야 합니다. 포도밭의 주인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보내신 상속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들어 실천하여 그분의 피를 더 이상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시고 맡겨주신 우주의 포도밭을 소작인으로서 잠시 관리하다가 우리는 주님께 되돌아가게 되어있는 존재입니다. 바쳐야 할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공정이라는 소작료를 우리가 사는 동안 충실하게 드려야 합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고, 언제 만날지 모르는 포도밭주인을 기쁘게 맞이하는 사람은 오직 충실한 소작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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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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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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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마지막 떠남, 죽음-
“하느님의 사람, 성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얼을 지니셨기에 세상의 영화를 업신여기고 버렸도다.”(입당송)
오늘은 참 아름다운 축일입니다. 바로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인 우리는 오늘 사부 성 베네딕도의 별세 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흡사 성인의 천상축일인 죽음의 날이 축제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떠난 분들의 죽음은 슬픔보다는 모두가 축제의 선물처럼 느껴지는 기쁨 충만한 장례미사들입니다.
성인의 마지막 떠남인 아름답고 거룩한 임종장면을 소개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이 쓴 <베네딕도 전기> 37장 내용은 읽을 때 마다 늘 새로운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 내용중 길다싶지만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분은 임종하시기 엿새 전에 당신을 위해 무덤을 열어 두라고 명하셨다. 곧이어 그분은 열병에 걸리셨고 심한 열로 쇠약해지기 시작하셨다. 병세는 날로 심해져서 엿새째 되던 날 제자들에게 당신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하셨다. 그분은 거기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영하심으로써 당신의 임종을 준비하시고, 쇠약해진 몸을 제자들의 손에 의지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흡사 불가의 거룩한 고승들의 죽음을 보는 듯, 아니 그 이상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성 프란치스코 <태양의 노래>에 나오는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음조차 선물로 감사찬미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임종도 참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이 아름답습니다. 문득 가톨릭 교회의 3대 거장, 성인 경지에 이르렀던 문학에 최민순 신부, 음악에 이문근 신부, 성서에 선종완 신부 세분이 생각납니다. 제 장례미사때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하는 성가에, 강론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고백시로, 퇴장성가는 위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태양의 노래를 불러달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런 준비가 성인의 말씀처럼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초연한 삶을,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게 합니다. 저는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이 프란치스코 수사입니다. 저에게는 성 요셉, 성 베네딕도, 성 프란치스코 세 수호성인이 있으며, 앞에서는 성 요셉이 좌우 양편에는 성 베네딕도와 성 프란치스코가 있습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자작 좌우명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정주의 산, 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 향해 맑게 흐르는 강, 성 프란치스코”
이렇게 사는 것이 제 소박한 소원입니다. 이어지는 임종후 성인의 환시를 본 두 형제의 증언입니다. 말그대로 하늘길을 따라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는 성인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방에서부터 동쪽을 향해 하늘에 이르기까지 똑바로 나 있는 길을 보았는데, 그 길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고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자 그 위에 빛나는 옷을 입은 존엄한 분이 나타나시어 이길이 누구를 위한 길인지 알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모른다고 하자, “이 길은 주님께 사랑받는 베네딕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다”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더라는 것이다.’
이래서 참으로 잘 산 이들에게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지상 삶에서 천상 삶으로의 옮겨감이자 천상고향집으로의 귀향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희망의 죽음을 향해 사는 이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와 같은 삶을,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 것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떠남의 여정이 아름다울 때, 마지막 떠남인 죽음도 아름다운 축제일 수 있습니다. 정말 잘 살았는가는 공동체에 남긴 결과를 보면 압니다. 공동체에 평화의 일치를 남겼느냐 혹은 분열의 불화를 남겼느냐를 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그의 평생 삶입니다. 참 좋은 명품인생을, 선물인생을 살았는지는 성 베네딕도처럼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사실 성 베네딕도의 생애를 보면 떠남의 여정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누르시아 고향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수비아코로, 수비아코에서 몬테가시아노로, 마지막 몬테가시아노에서 천상고향의 죽음의 떠남으로 요약되는 생애입니다. 성인의 죽음의 떠남을 노래하는 미사중 부르는 부속가 전반부도 아름답습니다.
“새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안식일, 성총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마음속에 울리네. 동쪽길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성조 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오늘 우리는 복음과 독서에서 떠남의 모범인 예수님과 아브라함을 만납니다. 십자가의 길 죽음에 앞서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기도(요한복음17장)가 감동적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남은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고별기도가 오늘 복음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믿는 이들 모두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이요 이를 위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제1독서의 아브라함이 떠남의 장면도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겠고, ‘너는 복이 될 것이다’(you will be a blessimg).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이어지는,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었다(창세12,4)’ 라는 대목이 신선한 감동입니다. 말그대로 떠남의 여정에 충실했던 75세 고령의 나이에 상관없이 영원한 현역의 영원한 청춘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에게 주어진 축복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에 완성의 여정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삶자체가 복이 었던 예수님처럼, 아브라함처럼, 세상의 복이 되어 살다가 떠나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삶이겠는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 수 있도록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강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떠남의 여정이 되기를 소망하며 쓴 좌우명시 일부를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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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시편118,22)
오늘 복음(마태21,33-43.45-46)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들려주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포도밭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 곧 하느님의 백성'이고, 포도밭의 소작인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인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납니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주인은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죽입니다. 주인이 더 많은 종들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도 죽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소작인들에게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하고 그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내신 종들은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성경 전체를 묵상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한 민족을 선택하셔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사랑과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모든 민족들에게로 퍼져나가게 되는 하느님 구원의 손길을 묵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신원, 나의 신원에 대해서도 묵상하게 합니다. 나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뽑힌 일꾼, 소출을 내야하는 일꾼입니다. 그리고 선택된 소작인일 수 있고, 세상 안으로 파견된 예언자일 수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소명에 충실한 지에 대해서도 묵상하게 합니다.
지금 여기라는 삶의 포도밭에서 거두어들여야 할 소출은 바로 '사랑 실천이고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것으로 충만한 '하느님의 나라 건설'입니다.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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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마태 21, 38)
새롭게
찾아오는
봄의
생명력은
그야말로
대단합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합니다.
생명의 가치가
하느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바쳐
생명을
살리십니다.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살아야 할
생명입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람이
같은 사람을
죽일 순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복음입니다.
폭력을
이기시는
빛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생명을
얻는 것이
하느님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생명이십니다.
모든 생명은
진심어린
사랑과 기도로
자라납니다.
우리들의
생명을
귀하고
아름답게
보시는
하느님과 함께
생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축복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역사가
살인과 폭력의
발자국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발자국이
우리의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함께 사는
기쁜
하느님의
세상입니다.
우리는
그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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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태오 복음 21장 37절)
우리의 존중을 되돌아보게 된다. 존중에서 멀어지면 사랑에서도 멀어진다. 존중에 빚을진 사람들이다. 참된 존중은 결핍과 부족함도 은총이 되게 한다. 우리를 향한 존중으로 탄생과 십자가가 주어졌다. 구원을 이해하는 방식은 바로 존중이다.
하느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으시다. 존중으로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사랑을 늘 가르쳐주신다. 기다림도 존중이고 걸어가는 이 여정도 존중이다. 구원의 방식은 언제나 존중의 방식이다. 존중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 관계이다.
존중은 모든 관계를 떠받드는 받침돌이다. 우리의 폭력성과 살인의 욕구를 치유해주는 존중이다. 사순 시기는 다시 존중으로 돌아갈 때이다. 생명과 생명은 존중으로 연결되어 있다.
존중은 다양성과 함께 살아가는 말씀의 반석이 된다. 말씀이 존중이 되시어 여기 이곳에 오셨다. 존중이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의 시간은 존중의 시간이다.
참된 존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구원의 핵심이며 여정의 전체가 되는 것은 존중이다. 모든 것은 존중받고 존중하는 사랑이다. 심오한 진리란 다름 아닌 존중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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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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