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과 노래
박부민
슬픈 일이 많은 인간에게는 새들의 지저귐이 통상 울음으로 들렸다. 종다리도 두견새도 꿩도 다 운다고 표현했다. 물론 흔히 동물에게 쓰는 운다는 말은 슬픔의 눈물을 동반한 그 울음이라기보다는 발성한다는 뜻을 가진 묘사이긴 하다. 그래도 그 소리를 듣는 인간들의 정서가 이입되어 운다는 말이 고착됐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동물들의 집단성 소리는 대부분 운다고 표현했다. 늑대 울음이 그렇다. 늑대의 아이콘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 목청을 돋우는 실루엣이다. 늑대는 ‘아우우’ 하는 본태성 울부짖음이 특징이다. 그것은 종족 본능이라 밝혀졌다. 사자 울음, 호랑이 울음 등도 그들만의 교신 수단이요 영역 안에서의 힘의 과시일 수 있다. 그래서 그냥 으르렁거리는 것은 운다고 하지 않는다. 적이나 경계 대상 혹은 그런 류의 동체가 감지되어 공수 준비 본능에서 나오는 짖어댐, 으르렁거림은 굳이 운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자극에 의한 반응으로서 짖는 거다. 집 지키는 개들이 컹컹 짖는다고 하지 운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종소리가 울리거나 마을 회관에서 이장이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할 때 확성기 소리가 마을에 울리면 개들이 일제히 늑대 흉내를 낸다. 내가 키우던 풍산개도 내내 고개를 쳐들고 원시의 제 고향 그 족속을 그리듯 우우 거리는 걸 보았다. 개들이 운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그때다. 만일 누가 부득불 ‘개들이 울어 대는’이라고 표현한다면 분명 그 당사자의 심리와 정서가 투영 이입된 것이다.
동물들이 배고픔에서 내는 빈 뱃속의 울림, 그 서러움이 역시 늘 배고프고 노동에 찌들고 희락이 적은 고달픈 인생들에게는 그냥 울림의 소리가 아니라 처량한 울부짖음 곧 울음으로 체감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도록 부려 먹은 미안함에 듣는 사람의 마음에는 소 울음이 큰 슬픔이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감정이입이다. 지금이야 고양이가 애완동물로 친숙해졌지만 전설 속의 무서운 분위기를 거드는 한 몫을 고양이 울음이 담당하곤 했었다. 제 몸이 불편하거나 배고파 우는 소리일 텐데 늘 불안을 달고 사는 인간에게는 괴기스럽고 기분 나쁜 아기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개구리들은 뭐가 그리 슬퍼서 우는 걸까? 제 논 제 세상 좋아서 떠들어 대고 합창하는 거 아닌가? 이동찬 선생이 작사한 ‘개구리’라는 동요가 있다. 나무 의자 부서지라고 엉덩이를 팔짝팔짝 뛰면서 배웠던 노래이다. 나는 그 노래의 탁월성을 리듬은 물론 가사에 둔다.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도록 하여도 듣는 이 없네.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개굴개굴 개구리 목청도 좋다.” 음악 선생님이 신나고 즐겁게 부르라고 반주를 더욱 빠르고 힘차게 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듣는 사람 없는 밤에도 개구리들은 자기 세상을 즐기며 노래하는 거다. 낮에는 잠자거나 두문불출하는 그들이 먹이 걱정하며 함께 우는 거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심지어 늑대도 밤중엔 제 세상이다. 그 울부짖음은 일종의 극대화된 자존감, 만족감의 정점에서 터져 나오는 종족 간의 교신이요 존재 증명의 포효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들만의 노래일 수도 있다. 말도 속력을 재촉당하며 채찍 맞거나, 무서워 놀랄 때나, 지쳐 힘들 때의 비명을 빼고는 주로 뛰놀 때 힝힝거리는 것은 즐거워 노래하는 거다.
나아가 새들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앞서 말했듯이 보통 새들도 운다고 표현한다. 부엉이도 밤에 운다. 춥다고 운단다. 서울 가신 오빠가 기별이 없어 슬프니 뻐꾹새는 숲에서 울고 뜸북새는 논에서 운다. 싸늘한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귀뚜라미 슬피 울고 기러기도 울어옌다.
또 생각해보자. 뻐꾸기, 뜸북새도 뭐 그리 숲에서 슬피 울 일이 있던가. 그들은 사실 자기 계절을 만나 즐겁게 노래하는 거다. 그러다가 불청객인 인간이 다가오면 흠칫 놀라 뚝 그친다. 행복 끝, 긴장 시작이다. 새들이 운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걸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이 슬퍼서 그렇다. 귀엽게 짹짹거리는 참새는 운다고 하지 않고 지저귄다, 노래한다고 한다. 반면 구구구구 중저음으로 산을 울리는 비둘기 소리는 울음으로 들린다. 들리는 소리에 따라 마음을 실어 표현해서 그렇다.
그러므로 새들의 경우는 노래한다고 하는 것이 더 맞다. 그들은 계절이 되면 자기들의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는데 발성의 뜻이건 슬픔의 뜻이건 그저 운다고 하는 건 격이 안 맞다. 부엉이도 밤이 되면 제 세상이니 즐겁게 노래하는 게 맞다. 싱그러운 숲에서 들리는 온갖 새들의 저 소리는 울음보다는 노래이다. 제철 제 세상을 만난 즐거움이 흘러넘쳐 표출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꼬끼오 외치는 닭 울음도 사실상 노래이다.
인간은 물론 지상의 동물들은 유독 생존 경쟁의 까칠함 속에서 매일 쫓기듯 긴장하며 생활한다. 도시민들이 현저히 그렇다. 지하철을 타보면 느끼지만, 안색에 기쁨이 서린 이들이 많지 않다. 노래마저 마음껏 못 부르고 들을 때도 귀에 이어폰을 꽂아야 한다. 공중도덕 수칙으로 늘 긴장을 풀 수 없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새들은 외부의 조건으로부터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워서 늘 여유롭고 생기 있게 마음껏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월트 휘트먼은 ‘새 울음소리’라는 글에서 “얼마나 많은 음악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새들은 타고난 연주가이며, 성악가이고 배우이다. 신은 그들에게 언어가 아닌 노래를 주셨다.”라고 했다. 그도 새 울음소리를 노래로 받아들인 것인데, 이처럼 계절마다 각양 새들의 노래가 산록에 어우러져 아카펠라 화음을 낸다. 그중에는 무척 재미있는 새 소리도 있다. 특히 보리누름을 지나는 늦봄부터 초여름까지 우리나라 전통 보리타작 민요 ‘옹헤야’의 한 대목인 ‘어절씨구’를 흉내 내듯 힘차게 노래하는 새를 만난다. 산마을의 어디를 가도 틈만 나면 ‘어절씨구’ 하고 흥을 돋우니 나 또한 그다음 대목인 ‘옹헤야’로 화답하며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아침에도 대낮에도 저녁에도 그저 ‘어절씨구’이다. 땅만 바라보며 고민하고 염려 근심만 하지 말고 오늘 하루 하늘을 보라 한다. 창조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라고 한다. 노래로 마음껏 표현하며 살라고 깨우침과 위로와 격려를 준다. 하도 기특하고 궁금해서 알아보니 그 새는 ‘검은등뻐꾸기’란다. 상처 같은 검은 등을 갖고 사는 그 뻐꾸기가 외로운 산길, 적막한 산골에서 울림 큰 청아한 소리로 가장 힘이 되는 노래를 불러 주니 마냥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도 날개는 없지만, 새처럼 살 일이다. 이 땅에 울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함께 울어 줘야 할 많은 이들을 외면하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개인적 사회적으로 마땅히 울 일은 울어야 한다. 정당한 눈물에 인색해서는 참 인간다움에서 멀어진다. 다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성실히 살면서도 꼬이고 힘든 세태를 만날 때 노래를 잃어버린 삶이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나는 절망과 울음에만 익숙해지지 않고 하늘을 자주 보며 ‘어절씨구’ 노래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기조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여전히 역경 속에 있고 각계각층에 엄존하는 여러 종류의 갈등도 채 치유되지 않아 세상이 불안정하다. 우리 사회와 개인의 내적 눈물이 다 마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눈물에만 젖어 있으면 대부분 감정이입을 하며 모든 만물과 만사를 슬픈 마음으로 보기 쉽다. 이럴 때 특히 시인, 가객들은 긍정적 사회 변혁을 위해 울고 아울러 삶의 긍정을 함께 노래해 주었으면 한다. 긍정의 노래를 소진시켜 버리는 우울을 떨쳐내고 삶의 근원적 기쁨이 이 사회에 전이되어 밝아지도록 격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