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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호 씨가 카페 커피락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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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군 왜관역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왜관 공단이 있다. 공단의 풍경이 어딘들 따스하고 생기 있으랴마는, 겨울의 메마름 마저 더해져서인지 공단은 한층 적막했다. 인적도 드물고 때론 삭막하기까지 한 어느 공장 한 켠에 감성카페 커피락(樂)이 있다. 의외의 위치에 신기해하며 철문을 살며시 열면 더 의외의 공간이 펼쳐진다. 올드팝이 흐르고 오래된 풍금과 텔레비전 등 빈티지한 소품으로 아기자기 꾸며진 이 작은 카페는 마치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 한. 그 순간 이곳이 공장 한 구석임을 잊는다.
그런데 아담한 공간 한 켠에 작은 알림이 눈에 띈다.
‘감성카페 커피락에서는 구럼비를 파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는 삼성 카드를 받지 않습니다.’
“2012년에 서울에 있는 까페 몇 군데에서 시작했어요. 우리도 동참했죠. 삼성을 대항해서 이길 순 없어요.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삼성카드를 안 받으면 손님들이 물어볼 거잖아요. 저희가 이야기하면 손님도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잖아요.”
최성호(세바스티아노) 씨는 왜관에서 태어났다. 커서는 대구에서 생활했다. 콕 집어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하는 대표 보수지역에서 쭉 살아왔다. 그는 ‘처음부터’ 주변과 다른 생각을 했을까.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어 촛불집회 나가
“사실 저는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사고를 많이 쳐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는데, 사회에서는 그게 걸림돌이었어요. 스무살에 결혼했는데 반대가 무척 심했어요. 나이도 어린데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때 제가 선택한 게 돈이었어요. 돈을 많이 벌어서 나한테, 우리 가족한테 이렇게 대했던 사람한테 뭔가 보여주고 싶었죠. 정치는 그냥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는 거고 저는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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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락'의 삼성카드 거부 안내문 ⓒ문양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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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성호 씨가 달라진 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였다. 대구에서 열린 촛불집회에는 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나왔다. 물대포도 맞았다. 성호 씨는 그 촛불집회에 열심히 참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이들이 ‘아빠 그때 뭐했어?’라고 물어볼 때, ‘집에 있었어’라고 말하는 게 너무 창피할 거 같았어요.”
관심은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용산참사, 강정 마을 등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삼성카드 반대도 그 연장선이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딸과 함께 봤다고 했다. 소감을 물었다.
“동생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수원 삼성전기에 입사해서 몇 년을 근무했어요. 남의 일이 아닌 거죠. 제 동생 일이었을 수 있고 제 동생 친구 일일 수도 있고. 보통 이런 일이 터지면 남의 일이라 생각하는데 우리나라는 정말 좁거든요. 나중에 내가, 내 딸이, 내 가족이 겪을 수도 있는 일이죠.”
보수지역 교회의 갈등, "정치가 아니라 정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요?"
최성호 씨의 본당은 가실 성당이다. 100년여의 긴 역사를 지닌 이 성당은 종종 영화의 배경으로도 등장할 만큼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이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의 SNS에 ‘저희 성당에 와 달라’는 글을 올렸다. 글의 요지는 이랬다. 각 교구에서 시국미사가 이어지던 어느 주일, 본당 신부가 강론시간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의 활동을 담은 영상 <길 위의 신부>를 상영했다. 신자 중 일부는 본당 신부를 ‘종북 신부’라 비난하며 베네딕도 수도회 아빠스를 항의 방문 했고, (왜관의 본당 신부는 모두 수도회 소속이다.) 그는 “작은 시골 성당이라 주일 미사에 몇 사람만 빠져도 표가 많이 나니 우리 신부님 기운 빠지시지 않게 빈자리를 채워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성호 씨는 차분하고도 조용한 목소리로 “이건 정치적인 게 아니라 ‘정의’에 관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부님께서 강론시간에 ‘길 위의 신부’를 튼 게 발단이었는데, 사실 그 내용은 낮은 곳에서, 현장에서, 성직자들이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박근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아니라요.”
수도회 정문 앞에는 “정의구현‘기사단’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붙었다. 성호 씨는 “왜관 모든 본당 신부님들이 그 수도회 신부님이신데, 결국 자기가 다니는 성당 신부님을 향한 것 아니냐”면서, “대구보다 왜관이 훨씬 보수적인 것 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대구는 촛불집회도 열고 거리행진도 할 수 있지만 왜관은 그런 시도조차 못해요. 예를 들어 왜관에 주둔하는 미군부대가 고엽제를 땅 속에 묻은 일이 알려져 대구 시민단체들이 와서 시위하는데 지역 주민들은 ‘빨갱이 물러가라’고 해요.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이슈화 시키고 돕는 사람들에게 말이죠. 게다가 자기 마을 일이잖아요. 우익단체들이 지원을 많이 받고 행사도 많이 주최해요. 그러면 학생들이 동원 돼죠. 행사 이름엔 항상 ‘평화’가 들어가요. ‘세계평화축전’ 이렇게요.”
지역의 보수를 안타까워하는 그에게 “그렇다면 당신의 성향은 진보와 보수의 다양한 스펙트럼 어디쯤인가?”물었다.
“아, 그렇게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재미로 해 본 테스트에서는 아나키스트라고 나오던데요?”
진보, 혹은 보수. 세상에는 단순하고 고리타분한 이 두 개의 양분화 된 범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들이 훨씬 많다. 두 개 중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를 물으며 섣부른 판단으로 경계를 짓고 싶어 하는 것은 오히려 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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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락의 최성호 씨. ⓒ문양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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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웠지만, '부도'에 감사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일을 시작한 최성호 씨는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본 것 같다”며, 지금까지 한 일의 종류가 20가지도 넘는다 했다. 결혼 뒤 시작한 의류 사업은 반응이 좋았다. 작은 옷가게로 시작해 프렌차이즈 형태로 개장한 매장이 전국에 10개가 넘었다. 욕심을 부려 확장했다. 독하지 못해 매장 점주에게 모질게 대하기도 어려웠다. 사정을 다 봐 주다보니 사업이 확장되어도 수익은 생기지 않았다. 부도를 맞았다.
빚 독촉이 이어졌다. 사람을 피하기 시작했고 집 앞 마트도 갈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공황 장애였다. 가족과 함께 처가가 운영하는 공장의 사택으로 이사했다. 이사한 날, 통장 잔고는 3만 4천 원이었다.
힘들어하던 그에게 아내는 손재주가 좋고 마침 사택 1층의 작은 공간이 비어 있으니 공방을 열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는 프렌차이즈 사업을 할 때, 매장 인테리어를 직접 했었다. 20가지 넘는 직업 중엔 웹디자인과 목수도 있었다. 2010년 공방을 열고 가구를 만들었다. 얼마 뒤, 작업장으로 쓰이던 공간은 까페가 됐다. 공장 안에 카페가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카페를 준비하면서 전국의 유명한 핸드드립 카페를 찾아 다녔다. 커피 내리는 모습을 관찰하고 같은 원두로 연습했다. 1년간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 끝에 ‘더 이상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겠다’ 싶은 날이 왔다.
“감각이나 재주를 타고 나신 것 같아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진 않았는데...저한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았다면, 그걸 할 수 밖에 없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저도 평범하게 학교 졸업하고 대학가고 회사원으로 살았겠죠. 어렸을 때부터 주어진 여건이 조금 다이나믹 했어요. 주어진 여건에 맞춰서 살다보니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조급함이나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아요. 더 이뤄야 하는데, 혹은 더 나가야 하는데, 그런 거 말이예요.” “예전엔 그렇게 살았어요. 돈이 있는데도 조금 더 하면 더 벌 수 있을 텐데 했죠. 그걸 지키려고 아등바등했어요. 그런데 부도가 나고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니 세상이 완전히 달리 보였어요.” “부도가, 삶 전체로 봐서는 선물이었을 수도 있네요.” “저 인생에서는 아주 감사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성호 씨는 “가족이 견뎌야 했던 고통이 적지 않았다”며 미안함을 드러냈다. 너무 미안해서 운전 도중에 ‘내가 여기서 핸들만 틀면 보험금이라도 나올 텐데’하는 생각마저 해봤다고. 성호 씨는 언제나 그의 곁을 지켜준 가족에게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다. 특히 그의 아내는 “이젠 아무것도 없으니 누가 가져갈 것도 없다. 어차피 바닥에서 시작했지 않냐. 지금도 늦지 않다”며 한결같이 그를 격려했다.
공동브랜드 창업, 그러나 커피 한잔 당 100원을 기부하고 정규직 사원을 뽑아야
현재 ‘감성카페 커피락(樂)’은 공동브랜드 창업을 지원한다. 공동브랜드는 지점의 자율권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초보 창업자들을 위해 교육과 인테리어를 돕는다는 면에서 프렌차이즈 사업과 차이가 있다. 개인샵과 흡사하지만 브랜드 파워를 높이도록 공동의 브랜드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전에 프렌차이즈를 해봐서 아는데, 급속도로 많아지면 피해가 발생하거든요. 본사 쪽에 유리한 조건들이 많으니까요. 대부분 창업하시는 분들에게는 그게 전 재산인데 하루아침에 날아가면 안 되잖아요.”
하지만 ‘감성카페 커피락(樂)’에도 중요한 몇 개의 원칙이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건 커피 한 잔에 100원의 기부를 하는 것과 본인이 커피를 내리고 운영을 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정규직을 고용하는 것이다.
“공정무역 원두를 구입했는데 원하는 향과 맛이 나오지 않았어요. 차라리 직접 지원하자 싶었죠. 정규직도 작은 까페에서 실행에 옮기기엔 부담스러울 수 있겠지만, 핸드드립은 누가 내리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거든요. 그러니 손님들을 위해서도 계속 아르바이트생이 바뀌는 것보다는 정규직이 낫다는 거죠.”
그는 “형식이 아니라 진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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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락의 최성호 씨 ⓒ문양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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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카페 커피락(樂)’에서는 3년째 장애인들을 위한 바리스타 교육을 한다. 혹시 청각장애인을 교육할 경우가 생길지 몰라 수화를 배우러 칠곡 농아인 센터에 간 것이 인연이 돼 첫 번째 수업은 청각장애인들과 했다. “좋은 직업훈련인 것 같다” 했더니, “아, 꼭 직업으로 가는 기술이라기보다는 적성에 맞나 안 맞나 테스트 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그런 기회가 별로 없잖아요.”라고 말한다.
“제가 가르쳐 드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늘 이야기해요. 순서가 어떻든, 또 어떻게 내리든 커피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마신다고 생각하고 내리면 맛이 있어요. 저도 기분 안 좋을 때 내리면 맛이 안 좋거든요. 방법이 아니라 마음을 배운다면 좋겟어요.”
한 달에 한 번 교육 기금 마련을 위해 더치커피를 판매한다. 사비를 털어 교육을 하던 어느 날, SNS를 통해 소식을 접한 누군가가 “후원을 하고 싶으니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 했다. 그는 돈을 그냥 받을 수는 없으니 커피를 사 달라 했고, 그 날 이후부터 한 달에 한 번 더치커피를 판매한다.
성호 씨는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다” 말했다.
“전에 사업이 잘 될 때, 매장이 50개가 되면 미혼모들이 운영할 수 있도록 기증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부도가 났고 결국 하지 못했죠. 그 뒤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를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돈을 많이 번 다음에, 더 이룬 다음에 하는 것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걸 찾고 그걸 꾸준히 해나가려고 해요. 용산에 가보지 못해도, 강정에 가보지 못해도 작은 무언가를 계속 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결국 힘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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