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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시대의 수레바퀴에 으깨진 한 여성의 비극적 운명
이 책은 일제하 중요 독립운동 인사였던 현순 목사의 맏딸로 제1호 하와이 출생 한국인이자 박헌영, 김단야 등과 독립운동, 재미한인 진보운동에 헌신했던 현앨리스의 비극적 삶과 그 시대를 조망한 것으로 현앨리스의 개인사에서 출발해 현앨리스와 아들 정웰링턴의 가족사를 거쳐 4세대에 걸친 현씨 집안의 근대사를 다룬다. 더불어 재미한인사, 한국 독립운동사, 한국 현대사, 북한 현대사, 냉전사와도 일정한 교집합을 형성한다.
저자 : 정병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다. 서울대·한국외국어대·방송대·조선대에서 강의했고, 국사편찬위원회·목포대학교에서 근무했다. [이화사학연구]·[역사와현실] 편집위원장, [역사비평]·[한국민족운동사연구]·[역사학연구]·[한국사연구] 편집위원, 한국문화연구원 부원장·이화사학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현대사를 전공하고 있으며, 새로운 자료 발굴과 글쓰기가 주요 관심사다. 한국 현대사의 다양한 인물과 쟁점이 되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50여 권의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집을 기획·간행했다. [몽양 여운형 평전], [미국 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I NARA 소장 RG59·RG84 외], [우남 이승만 연구],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광복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역사 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일기](편저), [독도 1947: 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한국전쟁]으로 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상(2007년), [독도 1947]로 제36회 월봉저작상(2011년)을 수상했다.
저자의 글
서장 한 장의 사진: 박헌영, 주세죽, 그리고 현앨리스(1921년, 상하이)
1장 하와이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다(1903~1920년)
아버지 현순, 하와이를 유람하다(1903~1907년)
현앨리스, 서울에서 자라다(1907~1919년)
1919년 현순, 상하이로 떠나다
현앨리스의 상하이행(1920년)
2장 3·1운동의 후예들(1920~1923년)
상하이에서의 조우: 박헌영 혹은 사회주의
어떤 결혼: 정준과의 결혼(1922년, 상하이)
극동피압박민족대회(1922년,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현앨리스(1923년)
3장 하와이와 뉴욕에서의 삶(1924~1945년)
하와이로의 가족 이주(1922~1925년)
웰링턴의 출산, 사라진 모자이크 조각(1924~1930년)
뉴욕에서의 대학 시절(1931~1935년)
하와이 노동운동, 공산주의 운동과의 조우(1936~1941년)
태평양전쟁기의 행적(1941~1945년)
4장 서울로의 짧은 귀환(1945~1946년)
현앨리스, 도쿄를 거쳐 서울로 부임하다(1945년 12월)
서울로 부임한 통역 현피터(1945년 11월)
현앨리스와 박헌영의 재회
주한미군 공산주의자들의 박헌영 회견
민간통신검열단의 현앨리스
현앨리스와 주한미군 내 공산주의 그룹
서울에서 추방된 현앨리스
5장 『독립』·재미한인 진보진영에 가담하다(1946~1949년)
로스앤젤레스로의 대이동 1946년
재미한인 진보진영: 중국후원회-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독립』
『독립』·재미조선인민주전선에서의 활동(1946~1949년)
한줄기 빛: 체코의 한흥수
김일성·박헌영에게 편지를 쓰다(1948년)
6장 희망의 빛, 죽음의 길: 체코에서의 몇 개월(1948~1949년)
체코로 향하는 현앨리스와 정웰링턴(1948~1949년)
체코에서의 체류와 활동(1949년 2~11월)
7장 파국: 박헌영 간첩사건에 휘말리다 (1953~1956년)
북한에서의 나날들(1949~1953년)
이강국 재판: ‘미제의 스파이’ 현앨리스, 리윌리엄(1953년)
박헌영 재판: 알려지지 않은 현앨리스의 최후(1955~1956년)
남북한에 비친 현앨리스의 이미지
8장 그 후: 남겨진 자의 운명
청문회에 소환된 ‘마오쩌둥의 제1요원’ 현피터
16년간 추방 위협에 시달린 현데이비드
북한으로 추방된 김강, 파니아 굴위치 부부
평양에서 실종된 곽정순, 이춘자 부부
사리원에서 실종된 전경준, 송안나 부부
60세에 추방의 기로에 선 신두식
에필로그: 어떤 죽음
정웰링턴, 세상을 버리다(1963년, 체코)
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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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현순과 그 가족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근대 세계를 지향하고 해외 교육과 체류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독실한 기독교 목사는 한반도로 밀려드는 시대정신의 급류에 휩싸였다.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의 운동이었고, 신사조 민족주의의 대폭발이었다. 세계대세, 정의인도, 민족자결이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화두였다. [중략] 200만 이상이 동원된 거대한 민중적 에너지는 1894년의 동학 농민전쟁 이후 최대의 것이었다. 현순은 이러한 이글거리는 민족 에너지의 최첨단에 올라탄 셈이었다. ---p.43
1920년대 초반 박헌영은 상하이에서 급격하게 사회주의자로 변모했다. 그의 출발점은 3?1운동이었고, 그 토양은 민족주의였다. 박헌영은 고려공산당이 운영하는 사회주의연구소의 직원으로 활동하며 사상과 생계 문제를 해결했다. 박헌영은 1921년 3월 고려공산당의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상하이 지회 비서가 되었고, 5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1921년 9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결성에 참석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22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 제2차 중앙총국 회의에서 공청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박헌영은 1922년 4월 국내로 잠입하려다 단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박헌영의 상하이 체류 기간은 1920년 11월부터 1922년 4월 단둥에서 체포될 때까지 1년 7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진정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로 단련된 것은 상하이의 조직 생활이 아니라 경찰의 고문과 총독부의 감옥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p.55
현앨리스가 가족도 없고, 생계 방도도 명확하지 않은 중국 땅에서 어떤 생활을 했을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여성의 몸으로 혼자 헤쳐 나갈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체나 조직에 속하지 않고서는 도움을 얻을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앨리스는 스스로 앞길을 개척하는 운명의 주인공이자 의지적 인간형이었다. 그녀는 두려움의 포로가 된 적이 없었다. 1949년 프라하로 홀로 떠날 수 있었던 결단력도 그녀의 삶 속에서 다져진 제2의 본성이었을 것이다. ---p.91
[현앨리스와 현피터 남매는] 하와이에서 출생한 한국계 미국인으로 식민지 한국에서 성장했고, 미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지만, 이들의 정체성과 정신은 그들의 시민권이 속한 미국에도, 그들의 강제된 국적 일본에도, 미국 내 객관적 위치였던 동양계 이민에도 속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여타 한국인 이민 2세들과도 다른 정신세계에 속해 있었다. 이들의 정체성과 정신은 상하이 시절 받은 독립운동과 혁명 활동의 세례에서 발원했다. 이들은 진정한 한국인이길 희망했다. 하와이에서 남매의 삶은 여전히 1920년대 초반 상하이의 꿈결 같은 순간들이 계승되거나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p.112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력한 힘이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경합하고 있었고, 한반도는 그 원심력에 빨려 들어갔다. 제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이제 강대국 도마 위의 생선과 같은 신세였다. 강대국의 결정에 그 운명이 달려 있었다.
미소라는 거대한 자기장은 한반도 주민을 책받침 위의 쇳가루처럼 힘의 서열에 따라 재배치했다. 보이지 않는 달의 인력이 밀물과 썰물의 조수간만 차이를 만들어내듯 한반도에서 두 힘의 파급력은 결정적이었다. 한반도가 양극단의 원심력에 의해 둘로 쪼개졌고, 두 힘의 마찰 면에 위치하고 있던 현앨리스는 산산조각 나버렸다. 현앨리스의 비극적 최후는 그리운 해방 한국과 조우하면서 필연적으로 파국이 예정되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p.126
현앨리스는 1945년 12월 중순 서울에 부임했는데, 1946년 1월 11일 박헌영과 회견한 것이다. 1946년 1월 11일이라면 신탁통치의 대파동이 한반도를 휩쓸던 시기였다. 조선공산당 본부에서 공식 면담을 한 것인데, 양자의 접촉이 이 정도에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박헌영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선공산당 당수로서 남한 공산주의 운동의 최고 지도자인 박헌영은 미군정 정보참모부 예하의 가장 민감한 정보기관인 민간통신검열단의 서울지구 부책임자를 만난 것이다. 또한 박헌영은 현피터와도 수시로 접촉했다. 현피터는 강원도지사 전속 통역관이자 경기도 공보과 고문으로 활동했는데, 미군정 내에서는 최고위급 한국인 통역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개인적으로는 수십 년 전의 친구이자 동지의 재회였으나, 객관적으로는 조선공산당 당수와 주한미군 정보책임자?고위 군속의 회견이었다. 개인적 관계와 객관적 직위?입장 간의 간극이 현저하게 컸다. 박헌영은 미국?미군이 해방군으로 평가되는 시대상황 속에서 청년 시절의 옛 친구들을 자연스럽게 만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산당 당수라는 직위의 무게는 몇 년 지나지 않아 그에게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또한 이는 그 반대편이었던 현앨리스, 현피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현앨리스 남매의] 한국 귀환과 추방 과정은 이들이 장차 미국 사회에서 깃들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자 한반도가 당면할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현앨리스와 피터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진정한 해방, 진정한 완전 자주독립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움직였다.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의 길을 따라 옛 친구, 동지들과 함께 길을 가고자 했을 뿐이다. 반면 ‘해방자’로 등장한 미국은 이들의 행동을 공산주의 활동으로 단정하고 이들을 해임한 뒤 추방했다. 이들은 짧은 해방을 맛보았고, 깊은 좌절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자신들의 소중한 신념 그리고 그에 기초한 행위와 삶이 부정당했다고 느끼자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p.179
현앨리스와 이경선은 1949년 11월 말에서 12월 초 사이에 평양에 들어갔다. 두 사람이 평양에 들어간 후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앨리스는 현미옥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동맹의 기관지 『조선여성』 1950년 4월호에 「미국의 로동녀성들」이라는 글을 썼다. 북한에 들어간 뒤 ‘앨리스’라는 영어 이름 대신에 ‘미옥’이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북한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현미옥으로 부름으로써 ‘조선인’으로서 자기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3년 뒤 북한의 재판정에 ‘현미옥’이 아닌 ‘현앨리스’로 소환되었다. 그녀가 희망했던 혁명가로서 ‘조선’ 정체성은 부정당했고, 스파이로서 ‘미국’ 정체성이 호명된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이 현앨리스를 미국의 간첩으로 규정하면서 국적을 강조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현앨리스의 법적 신분은 미국 시민이었지만, 그녀의 정신적 지향은 ‘조선인’이었고, 북한의 공격 대상은 미국이 아니라 박헌영과 남로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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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믕..; 추천사를 조금이라도 적어주셨으면 좋겠어용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