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이사 끝에 다시 성전을 옮기게 해주셨다. 나갈 때 마다 쫓겨가는 기분으로 갔지만 가면 새로운 것이 반겨 주었다. 오래된 건물이고 성전세를 다까먹었다.제대로 내지 못하니 건물주는 건물을 보수해야 하니 나가달라고 했지만 나갈 때가 없었다. 주인은 계약금을 줄 때니 다른데 얻어보라고 했다. 그 돈가지고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보았지만 손에 쥔 돈은50만원 뿐 50만원을 가지고 500만원짜리 성전을 구하러 다니는 내가 놀라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니면서 이잡듯이 복덕방을 거쳐가고 있을때 500/30만원짜리 지하가 나왔다. 학교 정문옆이고 햇빛이라곤 구멍 뚤린 환기통 하나 그래도 돈은 모자랐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50만원을 걸었다. 나머지 450만원은 어떻하나? 올케의 동네 친구가 부자였는데 그 집이 망해가는 집이었지만 가게가 안나간다고 해서 작정기도를 하라고 하며 그가게에 100일작정을 하고 매일 그곳에 갔다. 영업하는 한쪽에서 기도하면서 추운데도 100일 남겨두고 며칠사이에 오지 말라고 했다. 가게방교회를 할 때 그집과 가까워서 자주 심방을 갔다. 가화만사성이 벽에 걸려있는데 그것은 100만원짜리 액자였지만 뒤에는 여러개의 부적과 좁쌀로 기도하면서 쓴 글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큰 교회를 다니는데 그 목사님이 부적 하나를 떼어갔다고 한다. 마음에 걸리는 액자를 그당시 60만원주고 했다지만 그것을 떼어버리라고 하고 그액자를 공터에 가서 태워버렸다. 그날밤 그집의 꿈을 꾸는데 보살그림 절에 있는 액자등 여러가지들이 그집을 도배를 했다. 나갈 문도 없었다. 그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며칠을 아플 때 금식을 같이 해버렸다. 다음에 그 집을 가보니 마음이 조금 평안하다고들 한다. 그 집의 할머니가 이전하는데 돈이 모자라서 금식을 한다고 하니 쌈지돈 100만원을 며느리 몰래 주었다. 그 며느리도 시어머니 몰래 100만원을 주었다. 그 안 나가던 가게가 나간 것이었다. 지금은 캐나다로 간 올케에게 당시 아파트 가격이 그 시세대로 인데 올라가면 나머지값을 십일조를 내겠다고 농담반으로 말을 했지만 난 절실했다. 또금식을 했다. 생각보다 두배나 올라 농담삼아 했던 아파트가 팔렸지만 감사헌금으로 200만원을 주었다. 시누이니 돈을 주었지 교회에다 큰돈을 낼 정도의 믿음은 없었다. 그래도 친정이 천주교 집안이라 믿음이 없이 천주교 식으로 믿었다. 450만원이 되었지만 이사갈 날짜가 가까이 올수록 초조했다. 부동산에가서 나머지 50만원은 안되면 월세로 내겠다고 했다. 그리곤 이사를했다. 이동네에서 딴동네로 갔지만그래도 거리가 가까워서 우리는 밤에 이사짐을 하나씩 날랐다. 철탑을 떼어갈 돈이 없었지만 동기목사님에게 사례비로 준 돈을 안받아서 그돈으로 철탑을 옮기는데 썼다. 그지하실은 성전을 꾸미는데 큰 물탱그가 옆에 있었다. 그래도 너무 좋았다. 한쪽기둥에 합판을 대고 방을 두개 만들고 주방도 만들었지만 바닥은 그대로 세멘 바닥이었다. 바닥에 스치로폴을 까고 전기 담요로 잠을 잤다. 조그만 석유난로를 옆에 켜 놓고 있는데 갑자기 가서 일러라 하는 소리가 들려 일어나 기도했다. 기도원에서 만난 어떤 집사님이 이전했다고 하니 와보겠다고 했다. 그집사님은 공사하다만 성전을 보며 집에가서 자기 딸에게 우리의 형편을 말했는데 중앙침례교회의 성가대에 서는 그 딸은 같은 성가대의 남자 집사님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했다. 그 분은 마침 집을 보수해 주는 직업을 가졌다고 했다. 트럭에 모래와 도구들을 가지고 와서 방과 주방을 만들어 주었고 문짝도 달아주었다. 김집사님이라는 것밖에 모른다. 그 분에게 감사와 축복해주었다. 전화번호도 집도 이름도 모른 그분은 이틀동안 다 만들어주고 가버렸다. 그 분이 예수님의 형상을 입고 우리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올케는 경희대 병원 간호사였었고 사람들을 잘사귀었다. 동네 친구엄마 들을 전도를 했다. 두명으로 시작해서 매주 화요일은 북으로 장단을 마추어서 찬양과 기도를 하며 목요일은 전도지를 가지고 전도를 했다. 3만장을 뿌렸는데도 한명도 안오더니 성전을 옮기고 나서는 한 명 두 명 오기 시작했다. 밤을 기다리며 0시예배를 드렸다. 새벽이되면 새벽기도하고 잠을 잤다. 서너명이 밤에 오기시작해서 작정기도와 그들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밤을 낮으로 삼고 기도하면서 그들의 기도응답들이 되니 전도들이 되기 시작했다. 한집사님은 어린 두딸은 두고 밤이면 나와서 기도하니 남편이 집에 늦게오니 뚜 딸만 덩그러니 자고 매일 밤에 나가니 다투어서 못 나가게 했다. 그 집을 심방을 갔을때 남편은 반대를 했다. 그래도 작정기도가 며칠 안 남았으니 그것만이라도 끝나게 해달라고 하니 안된다고 했고 교회도 못나가게 했다 .보름쯤 되었을 때 그집사님이 왔다. 그 집을 다녀간날밤부터 원인도 모르게 목부터 허리까지 아프며 몸을 못 움직여서 침도 맞고 병원도 다녀도 병명이 안나왔다고 했다. 두부부가 기도원에 가서 불 순종했던 것을 회개 하고 왔단다. 그남편도 청년때 교회를 다녔다고 했다.그리고 그남편은 교회를 나와서 다하지 못한 교회를 보수해주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니 그가 하는 일도 잘되었다. 한집사님은 큰교회를 다니는데 대충다니는 집사님이었고 남편은 전기공사를 하는 사업을 하는데 술과 도박을 즐겨해서 그 돈들이 새어나갔다. 밤이면 남편을 잡으러 다녔다. 어느날 남편이 1500만원을 가지고 나갔다고 연락을 해서 밤새도록 기도했다. 박집사님을 비록 가방끈이 짧지만 하나님에게 헌금은 잘했다. 다음날새벽에 150만원을 가지고 교회에 왔다.1000만원을 다잃고 500만원이 남았는데 그 판을 움켜지고 교회로 왔다. 그때 우리는 기도원에 다니려면 봉고차가 있어야 한다고 기도를 하던 시기였다. 그 집사님은 그 돈으로 봉고차를 계약하라고 했다. 우리는 기도응답에 감사하며 그 돈으로 봉고차를 샀지만 할부금을 낼 돈이 없었다. 불순종했던 김집사님의 남편이 교회 봉고차 할부금은 23만원을 내겠다고 선언하면서 그집도 일이 잘풀려서 그 집도 봉고차를 샀다. 우리는 그당시 운전면허가 없었다. 고물상하던 박집사님이 차를 몰고 새벽기도에도 , 목사님의 세미나에도 운전해주고 부흥회때도 성도들을 실고 다녔다. 세쌍의 부부가 협력하여 밤이면 기도하고 낮에는 심방을 다녔다. 봄에는 심령부흥회(봄에 밭을 뒤집어 갈아서 씨를 심는 것같이), 가을이면 심령사경회(말씀으로 열매를 맺게 하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려 왔다.) 우리는 몇 년을 그렇게 했다. 그때는 말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나서 그들이 불순종했다가도 다시 순종을 했다. 남편목사님은 설교를 하고 우리는 팀을 이루어 밤기도로 여름이면 한얼산으로 부흥회를 다녔고 겨울에도 부흥회가 있다면 성도들을 태우고 다니며 극성을 부렸다. 산기도로 금식으로 기도를 하면서도 신학을 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부흥사협회로 연합부흥회강사로 미국L.A로 갔다가 동생이 다니는 교회 아리조나에서 부흥회를 하면서 한 달을 그 곳에 있었다. 그사이에 고물상 하는 남자 박집사님의 시영 어머니가 무당이었는데 나이가 들어 그 분이 돌아가셨다. 그 분의 임종을 해주었다. 아내 임집사님은 고집은 세지만 교회를 나가자고 해도 안나갔던 분인데 밤이면 귀신이 윗목에서 아랫목으로 내려오면 성냥개비로 십자가로 만들었다고 했지만 간증과심방으로 교회를 나오기시작했다. 교회 반찬과 우리의 먹거리를 담당했다. 그 당시 똥손이었고 시간도 없었기에... 남자 박집사님은 호남향우회 회원이었기에 회원들이 주일을 낀 장례식은 안된다고 했지만 주일날에는 장례식을 못한다고 했다. 그남자 박집사님은 그 당시 무조건 순종하는 분이었기에 향우회사람들의 반대에도 교회의 방식대로 했다. 금식을 해도 꼭 물어보고 했다. 남편 목사님이 없이 노회에 목사님을 초정을 해서 장례식을 치루었다. 그당시 난 전도사였기에 그렇게 해도 되었다. 성도들은 아파트파와 주택파가 되어서 서로 잘하였다. 아파트파들은 대부분 새벽기도를 안나왔다. 왜 사모님 올케는 새벽기도를 안나오냐고... 교회는 식구들의 믿음도 시험해본다. 본인의 믿음인데.... 구역도 세구역으로 늘었다. 여러가지 방해도 있었지만 그대로 기도로 밀고 나갔다. 장마가 지고 지하실의 물탱크가 넘쳐서 이불과 영창피아노가 물이 찼다. 이불보다도 성물들이 망가질까봐 안타까워하며 물을 퍼내고 새벽이면 지하 내려 오는데 술먹은 사람들이 소변과 대변을 하고 가면 남편은 그것을 치웠다. 우리는 다시 성전을 이전하기 위해 합심기도를 하였다. 아파트 근처로 가게 해달라고 해서 우리는 아파트 뒤편에 지하로 이전을 했다. 전에는 30평이었지만 그곳은 40평이었다. 7평에서 20평으로 30평으로 이제는 40평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차도 생기고 성전도 늘어나고 사택도 얻었지만 다시 교회가 더중요하기에 ...
첫댓글 우리 손목사님의 인생은 참으로 귀한 도움이들이 많으시네요..
그만큼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신다는 의미겠죠..
평생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셨으니..
이번 이사가는 일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되실걸 믿습니다..
어머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인도하시니 라는 고백이 귀하십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
또한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 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많은 분들께 그 은혜를 나누는 귀한 분이되심을 믿습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