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5월 25일 강원도 춘천 남이섬으로 여행을 가는데 너, 올 수 있니?”
수도권으로 이사 한 후 처음으로 받은 친구의 전화였다. 하루 전날 화사하고 고운 색의 잠바를 하나 샀다. 이발소에 가서 이발도 했다. 치질 수술 탓인지 괄략근이 약한 나는 외출할 때 신경을 많이 쓴다. 아침에 볼일을 해결해야만 실수 없이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철저히 대비했다. 일찍 집을 나섰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마음이 많이 설렌다. 뜨거운 여름 어느 날 집 앞 방죽에서 발가벗고 물고기를 잡았다. 가물치 한 마리와 손바닥만한 붕어 한 마리를 두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웃집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같은 반 여학생이 나오는 게 아닌가? 내 소중한 물건을 손으로 가릴 새도 없이 그녀에게 몽땅 보여주고 말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녀는 아마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녀를 만나면 왜 내 얼굴이 화끈거릴까?
“10시 55분 발 용산역 ITX(Intercity Train eXpress) 청춘열차로 출발하니 10시 30분까지 용산역 2층으로 와” 용산역까지 가는데 충분한 시간에 시내버스를 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하차해야 할 강변역을 지나쳤다. 허둥거렸다. 겨우 10시 50분 용산역에 도착했는데 또 출구에서 2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가지 못했다. 패잔병처럼 혼자 지하철을 타고 가평역에 도착하여 택시를 탔다. 〈미스터 닭갈비〉 식당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반갑게 맞아 줘서 기뻤다. 스치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니 알 듯 모를 듯한 친구들도 있었다.
나미나라 공화국 입국비자를 발급받아 남이섬(Nami island)에 입국했다. 남이섬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MBC 강변 가요제가 열렸고 한류 문화의 원조 격인 멜로드라마(Melodrama)였던 겨울연가(Winter Sonata)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유명한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과학고에 다니던 주인공 강준상(배용준역)이 아버지를 찾아 춘천으로 전학을 오게 된다.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 강준상과 정유진(최지우역)이 처음 만난 이후 학교에서 풋풋한 사랑을 이어가는 극이다. 나이가 드니 친구들이 다리가 아프다느니, 허리가 아프다니 하면서 걷지 않으려고 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걸으면서 즐기고 싶었지만 나도 친구들의 등살에 〈나눔열차〉를 탔다. 바다와 어우러진 푸른 울창한 숲이 햇살에 빛난다. 환상적 열차를 타고 연신 샷을 눌러댔다. 나는 울창한 메타스퀘이아(metasequeia)숲길을 걸으면서 겨울연가의 주인공처럼 나의 첫사랑을 떠올렸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초저녁 말없이 걷다가 불현듯 자석처럼 끌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목덜미에 한 움큼의 눈을 넣어주었다. 깜짝 놀라는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주인공 준상과 유진도 하얀 눈이 쌓여있는 이 숲길에서 자전거도 타고 눈싸움도 하다가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었다. 각자의 눈사람을 조금씩 밀어 입맞춤도 시도한다. 자율 학습 시간 땡땡이를 치기도 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 일탈 행동도 한다. 어느 날 사랑싸움 끝에 토라진 유진이가 숲에서 사라진다. 준상은 캄캄한 밤에 넘어져 울고 있는 유진을 발견하고 얼싸안는다. “나 너한테 진심이었어” “준상아, 나 너 안 미워해” 화해한 두 사람은 숲길을
걷는다. “ 너 어딘지 알고 걷는 거야?” “응” “저기 하늘을 봐. W자 모양의 별 보여?” “그 옆에 폴라리스 북극성이야. 북두칠성하고 카시오페이야 사이의 큰 별” “앞으로 길을 잃을 때는 저 폴라리스를 찾아봐”
준상과 유진이가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어느 날 유진이 집에서 사진 한 장을 보고 준상은 충격을 받는다. 유진의 곁을 떠난 준상은 교통사고로 죽는다. 유진은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10년의 세월을 보낸다. 〈폴라리스〉라는 간판으로 건축사업을 시작한다. 유진은 방송국 PD인 김상혁(박용하역)과 약혼을 약속한다. 약혼식 날 오채린(박솔미역)이 준상과 똑 닮은 이민형을 데리고 나타난다. 유진은 민형이가 준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준상은 기억을 상실해서 지난 날의 추억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정자 밑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옥구초등학교 49회 야유회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임원진이 준비한 간식이 펼쳐진다. 웅성웅성 이야기꽃을 피운다.
나는 일어나서 김홍신 작가의 마인드 셋을 낭송한다. 《하늘의 꽃은 태양입니다. 태양의 꽃은 지구입니다. 지구의 꽃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꽃은 용서입니다. 용서의 꽃은 기쁨입니다. 기쁨의 꽃은 인생입니다. 인생의 꽃은 즐김입니다.》 준상이처럼 기억상실증이 오기 전에 지금 인생을 즐기면서 살자는 나의 제안에 박수가 쏟아진다. 경제활동에서 물러난 지금이 황금기인 것 같다. 각자 여유로운 시간에 취미생활도 하고 여행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면서 인생을 즐겨야 한다. 회장이 만학도 친구 이야기를 꺼낸다. 이 친구에 대한 나의 희미한 기억이 떠오른다. 친구의 가정은 몹시 가난했다. 그래서 입고 다니는 옷은 남루했고 항상 코를 흘렸다. 얼굴은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남아있어 곱지 않았다. 수줍음도 잘 타고 사회성도 떨어졌다. 그러기에 깍두기 취급을 받았다. 깍두기는 팀의 승패를 좌우하지 않기에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냥 끼어주는 친구였다. 이 친구가 상경하여 온갖 궂은일을 다 감당하면서 전자기술을 익혔다. 그 기술로 자수성가하고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지도자로 우뚝 섰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 검정고시를 거쳐 작년에 전문대학에 진학하였다. 우리는 친구에게 힘찬 박수를 보냈다. 내년에는 4년제 대학교에 편입학하여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포부도 이야기도 한다. 친구야말로 어떻게 노후를 보내야 할까 망설이는 친구들을 인도하는 폴라리스 별이었다.
“길을 잃었을 때는 폴라리스를 찾아봐” 겨울연가의 대사가 내 귓가에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