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70
3월22일[사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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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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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5mEweNfvVc
[인천교구 이현종 세베리노(송내1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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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비가 필요합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가장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는 아름다운 성경 구절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이자 중심은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집 떠나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귀향한 타락한 동생을 고발하고 단죄하는 큰아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저 기다리시고 환대하십니다. 용서하시고 큰 잔치를 베푸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묘사된 아버지의 사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 사랑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사랑, 한도 끝도 없는 엄청난 사랑, 어처구니 없는 바보 같은 사랑,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회개’란 용어의 원래 의미는 히브리어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입니다. 그런데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누가 계십니까?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배은망덕, 배신의 삶, 방황과 타락으로 얼룩진 지난 삶 앞에 눈을 꼭 감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는 더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돌아온 우리를 당신 품에 꼭 끌어 안으시며, ‘잘왔다. 잘왔어!’ 라고 외치시는 분이십니다.
돌아온 우리를 품에 안으신 아버지는 혼잣말로 계속 되내이십니다. “괜찮다, 다 괜찮다!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거라. 네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나는 행복하단다. 그렇게 주눅들어 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더 이상 울지도 말고, 이제 다시 새롭게 시작해 보자구나!”
그런반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원래 무(無)였습니다.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진흙이었습니다. 그런데 진흙으로 나를 빚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 덕에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그분의 품성과 영혼을 지니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났고, 그분이 보내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 왔으며,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이렇게 두 발로 서있습니다.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근원이요, 출발점이신 그분께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그분께로 거슬로 올라가는 작업, 바로 회개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 삶의 기초이자, 우리 인생의 시초인 그분께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본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의 영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참을성있고 선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요한 23세 교황님)
“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교회는 자비를 선포하고 자비를 살 때만이 그 본질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악이 끝나는 것은 하느님 자비 때문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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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활짝 열린 두 팔로>
떠나갔던 작은아들은 순식간에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삶의 가장 밑바닥에 서게 됩니다. 주머니가 두둑해서 돈을 물 쓰듯이 탕진하던 순간 사람들은 호의를 보이며 다가왔지만 무일푼이 된 그를 받아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한 푼까지 다 탕진한 그는 자존심에 한 며칠 굶었겠지요. 그러던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돼지 치는 농장이었습니다.
드디어 작은아들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돼지 치는 농장에서 지독한 분뇨 냄새를 맡으며 죽기 살기로 일한 대가로 돌아온 양식은 겨우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였습니다.
그제야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아버지집의 그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이 떠오르자 작은 아들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드디어 그는 어려운 결심을 합니다. 자존심이고 수치심이고 다 팽개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작은아들은 드디어 회개를 한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회개를 묵상하며 회개의 가장 큰 배경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만일 평소 작은아들의 아버지가 엄격한 아버지였다면,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 못하는 무서운 아버지였다면, 쉽게 분노하고 절대로 용서 못하는 아버지였다면, 작은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겠습니까?
나라도 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돌아가면 이제 남은 것은 죽음인데, 그 지긋지긋한 잔소리며, 그 다그침, 그 호통을 어떻게 견딜 것입니까?
그러나 평소 보여주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자신의 의지를 존중해주시던 분, 한번 실수했다고 해서 불같이 화를 내지 않으시는 분,
언제나 관대하고 열려있던 분, 언제나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으로 가득 찼던 분, 큰 과오에도 그저 허허, 하고 웃어넘기시던 분이었기에, 작은아들은 안심하고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깁니다. 결국 연민과 측은지심이 인간을 살립니다. 결국 인내가 모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수동적인 하느님이십니다. 작은 아들이 좋은 않은 마음을 먹을 때도 그냥 계십니다. 인간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말, ‘유산을 분배해 달라’고 할 때에도 그저 말없이 그렇게 하십니다.
떠나갈 때도 붙잡지 않으십니다. 갖은 추문을 퍼트리며 방황할 때도 그냥 기다려주십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돌아올 때도 그저 두 팔을 활짝 벌리시며 환대해주십니다.
철저하게도 수동적인 하느님, 우리 하느님의 ‘수동’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됩니다. 철저하게도 약한 하느님, 그 하느님의 약함으로 인해 우리가 해방됩니다.
철저하게도 겸손하신 하느님, 그 하느님의 겸손으로 인해 우리가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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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동이 아니라 욕구에 집중하라. 그게 나다!>
‘헬과 마리’라는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헬은 아주 험상궂게 생겨서 사람들이 다 싫어했습니다. 그런 헬이 어느 날 아리따운 아가씨 마리를 만납니다. 가슴 깊이 찾아든 사랑의 열정으로 용기를 내어 청혼을 했지만 마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헬의 마음을 아신 하느님은 헬에게 가장 온화한 사람의 얼굴 가면을 선물하십니다. 헬은 그 가면을 쓰고 다시 마리를 찾아가 청혼합니다. 마리는 결혼에 응합니다.
결혼하고서도 헬은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면 속에 감추고 삽니다. 헬은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므로 온 힘을 기울여 마리를 보살폈고 마리는 참으로 행복하였습니다. 그런 마리의 행복이 헬에게도 크나큰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의 행복을 질투한 친구가 헬의 집으로 놀러왔습니다. 그리고 마리가 보는 앞에서 헬의 가면을 벗겨버립니다. 그 순간 가장 놀란 사람은 마리도 헬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헬의 험상궂은 얼굴은 이미 거기에 없었고 가면과 같은 인자하고 친절한 얼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에도 가면이 있는 것을 안 헬의 친구는 그것을 벗어봅니다. 그런데 헬의 이전 얼굴이 친구에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막스 비어의 ‘행복한 위선자’라는 책의 내용을 각색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그 행위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행위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가장 정확히는 ‘욕구’로 드러납니다. 본성이 욕구입니다.
사랑하면 겉모양이 아무리 험상궂어도 속에는 사랑의 본모습이 있고 아무리 착한 행동을 해도 바라는 것이 험악하면 그 사람의 본 얼굴은 험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보지 말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살펴야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가 바로 자신의 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욕구가 아닌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로만 의인이라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에 자신들이 속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속은 음탕한 마음으로 간음하고 있었고 화나는 마음으로 살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이었지만 속은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은 죄인이지만 속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세리와 죄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세리와 죄인들의 편이 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이 아닌 속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말씀의 형은 아버지 밑에서 죄라는 것을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온갖 죄를 짓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나서야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왜 죄만 짓고 온 놈을 자신보다 더 잘 대해주느냐는 것입니다.
큰아들의 죄는 이것입니다. 동생이 지은 죄를 은근히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동생은 흥청대었습니다. 이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도 마음으로는 그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욕구로는 이미 죄인이지만 겉만 보고 자신을 판단하니 의인이라 착각한 것입니다.
반면 동생은 이제야 아버지 밑에서 죄 안 짓고 형처럼 일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곁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나의 본성입니다. 남이 죄를 짓는 것을 보고 화가 나면 나도 죄를 짓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화를 내는 사람은 그 죄인들이 받을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제가 한 본당을 떠나기 직전 한 자매님이 저에게 감사인사를 왔습니다. 형제님이 외도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저에게 1년 전에 상담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매일 1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라고 했고 그분은 그것을 지켰습니다. 남편이 회개한 것은 아니지만 자매님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전엔 남편이 미워서 죽겠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불쌍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뻔히 알아도 식사도 차려주고 이불도 깔아주며 잘 주무시고 나가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기적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내가 회개를 했다면 죄를 짓는 사람들이 불쌍해보여야 합니다.
죄 짓는 것이 고통임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회개하면 무엇이 행복인지 알게 되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삶으로는 갈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가 고통임을 알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작은 아들의 길을 밟아야합니다. 죄를 짓지 않으시고 이것을 아신 분은 성모님과 예수님밖에 없으십니다.
죄를 지어본 우리들이 아직까지 죄를 짓는 사람들이 행복하겠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본성이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짓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안다면 그 사람의 가면 뒤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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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엘파소에서 76세의 자매님이 ‘나물, 대추, 호도, 고춧가루, 버섯’을 가지고 왔습니다. 12시간 운전해서 왔습니다. 농산물을 팔아서 본당에 봉헌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왕복 24시간 운전해야 하는 고된 일정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성전 건립할 때 물건을 많이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76세 어르신이 기분 좋게 엘파소로 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자고 했습니다. 다행히 물건이 잘 팔렸고,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듣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 가족 간에도, 친구끼리도, 직장에서도 참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시는지요?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는 말은 단순한 생활 속 조언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돼지나 치며 힘겹게 살다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도 나보다 잘 사는데, 내가 차라리 품꾼이라도 되어야겠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끌어안고 환영합니다. 잔치를 벌이고 좋은 옷을 입혀 줍니다. 이 장면만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맏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를 속상하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몫의 재산을 다 써버리고 돌아온 동생이 오히려 더 큰 환대를 받습니다. 형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것 같습니다. "나는 평생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저렇게 쉽게 용서받지?"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탕자의 입장에서 형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탕자는 형이 억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 얼마나 기쁜 일인데!" 입장을 바꿔 보면, 같은 상황이라도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탕자의 비유뿐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은 오랫동안 억압받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출애굽을 허락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자신들도 과거에 억압받았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방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도 이방인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살면서 "나는 힘든 시절을 다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약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이 가르침은 단순히 오래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들은 폭력과 가난을 피해 어렵게 국경을 넘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탕자처럼 무언가를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가 그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는 없을까요? 이스라엘은 2000년 동안 박해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경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입장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한때 박해받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것“은 단순한 조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공감과 배려. 이 모든 것이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탕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때로는 맏아들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공감이 삶 속에서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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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을 중단한 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가끔 이러한 말을 듣습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가 두렵다. 평소에 상황이 좋을 때는 하느님을 찾지 않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하느님을 찾는 것 같아 양심에 걸린다.’ 또는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서 하느님을 찾더라도, 다시 상황이 좋아지면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아예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은아들은 순수하게 아버지가 좋아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에 돌아온 것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고 자신은 아버지의 종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는지, 그리고 큰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와 함께하였는지에 상관없이 아버지는 두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정의를 넘어섭니다. 정의를 깎아내리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서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회개의 시작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큰 차원에서 정의를 뛰어넘으십니다”(『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십시오』, 생활 성서사, 48면). 우리는 정의에 묶여서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기도 합니다. 두 아들의 아버지는 참된 정의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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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1-3.11-32: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여기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 아버지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떠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이러한 삶은 어둠의 세계에 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며, 아버지를 떠난 삶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린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알게 된다. 그는 죄인이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1)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 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와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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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몸의 배고픔’보다 ‘사랑의 배고픔’이 더 큰 고통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2-32)
1) 25절의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라는 말은, 집에서 ‘즐거운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큰아들은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26절의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라는 말은, 집에서 무슨 잔치를 벌이고 있는지, 왜 잔치를 벌이는지를 큰아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상한 일인데, 표현만 보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온 것만 기뻐서 큰아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잔치를 벌이면서 들에 있는 큰아들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도한 일은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큰아들을 소외시킨 셈이 되고, 그것만으로도 큰아들이 화를 낼만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본래의 의도와 가르침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을 당연히 큰아들에게 알렸을 것이고, 잔치를 시작할 테니까 하던 일을 중단하고 곧장 집으로 들어오라고 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큰아들은 그 ‘기쁜 소식’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집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도 없었다가 무슨 잔치인지 모르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안 들으려고 해서 못 들었으면서도 “왜 나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느냐?”라고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는 듣지 않다가 나중에 심판 때에 “나는 못 들었다. 나는 몰랐다.”라고 변명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미사 참례를 하고, 똑같이 강론을 들었는데도, 강론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고, 딴 생각만 하고 있었다면, 강론을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분명히 눈으로는 글자를 읽고 있고, 손가락으로는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무엇을 읽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일에 대해서, “그는 그저 배가 고파서 돌아온 것뿐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비유의 전체 내용을 보면, 단순히 ‘배고픔만이’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이유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7절에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정신’이라는 말은 작은아들이 ‘비로소’ 자기 잘못을 깨달았고, 뉘우치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배고픔’은 그가 그렇게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1절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그가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려고, 즉 밥을 얻어먹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면, 그는 ‘몸의 굶주림’보다 ‘사랑의 굶주림’에 더 시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절-16절을 보면, 그는 ‘몸의 배고픔’도 심하게 겪었지만, ‘사랑의 배고픔’을 더 심하게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버리고 떠났던 그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것이 그의 회개입니다.
<큰아들은 ‘몸의 배고픔’은 실제로 겪지 않고 있었는데, ‘사랑의 배고픔’은 그 자신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3)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 모습에서 ‘사랑은 곧 기쁨’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큰아들이 화를 내는 모습은 ‘사랑 없음’을 나타냅니다. ‘화’는 사랑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실 때나, 위선자들을 꾸짖으실 때 화를 내시는 것 같은 모습을 접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화’가 아니라 ‘안타까움’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화’와 ‘증오심’만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그들 마음 안에 사랑이 없었다는 것도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에서, 자기들만의 신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랑은 볼 수 없고, ‘화’와 ‘증오심’만 가득한 모습을 볼 때가 많은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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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루카 15,1-3.11-32 (되찾은 아들의 비유)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당신과 나>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당신
떠나는
나 괜찮아도
나
떠나보내는
당신 아리시지요
당신
멀리에
나 있어도
나
바로 곁에
당신 계시지요
당신
곁으로 차마
나 가지 못해도
나
늘 그렇게
당신 품고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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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부모님은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사고 치고 걱정을 한가득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의 생각과 다른 결정을 하여 실망시켰을 때에도 부모님은 그런 저를 지켜봐 주셨습니다. 어쩌면 무엇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부모님은 늘 그러하듯 묵묵히 저를 바라봐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님은 자식을 기다려 주십니다. 자식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아들을 그렇게 기다려 줍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요구하는 작은아들에게 아무런 꾸중이나 충고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아들을 바라봅니다.
떠나간 아들을 걱정하며 마음속으로 잘 지내기를 바라며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의 끝, 아들이 거지꼴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괘씸한 마음이 아닌 가엾은 마음으로 달려가 안아 줍니다.
더욱이 아버지는 큰아들도 기다려 줍니다. 큰아들은 아우와 달리 아버지를 섬기며 순종하고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자기 몫으로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아 서운해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약속합니다.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큰아들을 이해합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차이는 기다림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가, 있지 않은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들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생각에만 집중하여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고, 기다려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기다립니다. 자비로움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와 맞지 않고 내가 이해할 수도 없지만, 조금만 기다려 보는 지혜를 가질 때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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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우리 가정에도 복음에 나오는 작은아들 같은 아들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시겠지요. 머리로는 이 복음을 이해하려고 애써 노력하지만, 끝까지 작은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작은아들이 집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큰아들같이 마치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면서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사고도 저지르고 반항도 조금씩 해 가면서 그럭저럭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졸라 얻어 내어, 그것을 날려 버리기까지 해야 할 정도로 유산이 탐났을까요?
그러나 만일 작은아들이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ㅠ어쩌면 끝까지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그는 알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복음의 거의 마지막 장면까지도, 그는 자기가 집에 돌아가면 아들이 아니라 품팔이꾼으로 살아야 하리라고 생각하고 굳게 다짐합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어떻게 맞아 줄 것인지를 올바로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그는 아버지를 아직 모릅니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반응은 그가 예상한 것과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 순간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부서지고 깨지고 잘못하고 죄를 짓고, 사순 시기마다 회개한다고 또 애를 쓰지만 매번 같은 죄를 반복하고, 후회하고 좌절하고 …….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약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은,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찾아가는 우리를 기꺼이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는 계기가 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갑시다. 아버지의 품은 고향의 오솔길처럼 포근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마음의 고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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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떻게 마음먹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가 노인의 사망 시기를 연구한 결과, 생일 되기 전에 사망률이 뚝 떨어졌다가 생일이 지나면 급격히 상승하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왜 생일 전후에 노인의 사망률에 현저한 변화가 나타날까요? 생일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영향을 준 것입니다. 즉,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의학계의 거물 한 명이 위독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훈장을 받기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정식으로 수여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병상에서 훈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갑자기 건강을 회복해서 몇 년을 더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중요한데도 우리는 그 마음을 소홀히 여깁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그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특히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지금을 힘차게 살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다며 온갖 불평불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 역시 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적 행동 변화가 아닌, 내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쳐서 하느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중요한데도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 속에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비유 말씀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이 타락한 생활 끝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바꾸는 것, 회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아들의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따뜻하게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큰 잔치까지 벌이게 되지요.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바꿔서 당신께로 나아오는 것을 기쁘게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들이십니다.
큰아들의 모습도 우리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을 위한 잔치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종처럼 일만 하였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사랑 가득한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마음을 바꾸지 못해서 즐기고 기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곁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바꿔 얼른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 곁에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마음을 바꿔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마음부터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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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 15,11-34 참조)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상속 새산을 미리 받아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되돌아오자 그를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드러냅니다. 또한 둘째 아들의 회심과 첫째 아들의 질투는 우리가 동일시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제공하지만, 오늘 둘째 아들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도움의 은총의 통로인 고해성사를 통한 회개 과정의 첫 단계는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는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후, 고백 후에 부여된 보속을 하게 됩니다.
죄를 뉘우칠 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같은 동양인의 문화에서는 shame 즉, 죄를 범하는 나를 남이 볼 때 그들 앞에서 느끼는 감정인 부끄러움이 크게 작용한다면 서양인의 문화에서는 guilt 즉, 남이 보든 안보든 상관없이 범한 죄를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느끼는 감정인 죄의식이 크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주님께서 우리가 범하는 죄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의식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이나, 우리가 범하는 죄를 아무도 못 본다고 하더라도, 죄는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양심이 느끼는 죄의식은 회개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이러한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을 너무 자주 혹은 오랫동안 느끼거나 가지는 경우에도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러한 감정들을 무시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한 양심을 가지거나, 혹은 무자비한 사람이 되면 우리는 영적 질병을 가지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거나 무자비함이 득세하는 듯한 요즈음입니다. 살아 있는 양심이나 자비를 베푸는 일은 낭만적이고 현실을 모르는 아이의 생각처럼 치부되고,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양심적으로 무자비하게 될수록 강한 국가나 멋진 사람으로 보여 인류애라는 가치가 파괴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사순시기는 범한 죄에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느끼며 둘째 아들이 한 고백을 우리가 하는 때입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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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부모님은 자녀들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실까요? 바로 ‘기다림’을 통해서입니다. 여러가지로 부족해도, 수많은 실수와 잘못들로 당신을 걱정시키고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도, 결국은 올바른 길을 찾아갈 거라는 믿음으로, 언젠가는 당신 마음을 알아주리라는 기대와 바람으로 묵묵히 바라보시며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아들들을 그렇게 믿고 기다려 주십니다.
먼저 작은 아들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게 답답하고 불편하여 집을 나가고 싶다고 해도 서운해하지 않으십니다. 나중에 돌아가시면 저에게 주실 유산 조금 일찍 준다 생각하시라는 철 없고 무례한 모습에도 화내지 않으십니다. 이런거 하면 안되고 저런거 조심해야 한다는 충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제야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다며 신이 나서 떠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시며, 그가 잘 지내기를 바라고 또 바라십니다. 그 작은 아들이 결국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산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그가 죄송스런 마음에 밖에서 방황하지 않기를, 어서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아들이 저 멀리 보이자 버선발로 마중나가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받아 주십니다.
다음으로는 큰 아들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큰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랑 같이 못살겠다며 집을 뛰쳐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만 아버지 곁에 있었을 뿐 마음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지요. 아버지 곁에서 큰 은총과 복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건 참고 하기 싫은 건 억지로 해야한다고 여겨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그런 희생과 노력을 하니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바람대로 되지 않자 오랜 시간 동안 마음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제 멋대로 살다 돌아온 동생을 탓하고 혼내시기는 커녕 그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서운하고 화가 나서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리지요. ‘난 한 순간도 당신 아들로 산 적 없다’고, 당신과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 나에겐 지옥 같았다고...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그 소리에도 아버지는 그를 탓하거나 혼내지 않으십니다. 그저 언제나 한결같이 그를 향해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인 당신 사랑을 표현하실 뿐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오늘 비유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을 향한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지요. 참된 신앙은 구원에 대한 보증 때문에 억지로, 심판과 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게 아닙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도 이해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나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참고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그분을 굳게 믿고 그분께 나 자신을 의탁하면 하느님의 것이 곧 나의 것임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분과 함께 하는 일상을 잔치처럼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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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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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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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닮의 여정-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새벽 성무일도 독서기도시 시편 136장 26절까지 매 구절마다 반복된 후렴이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였습니다. 자비하신 주님을 찬미함으로 시작된 하루입니다. 오늘은 그 유명한 복음중의 복음, 순복음이라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자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환히 보여주는 복음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은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바로 우리 삶은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자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자비하신 주님을 노래합니다. 미카 예언자도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 해 주시리라.”
자비하신 주님을 고백한후,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사, 또 저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달라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는 미카 예언자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평생 배워가며 자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평생숙제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공부는 덕을 쌓아가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 곁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다산>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고, 명성을 얻고, 장수를 누린다.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천명을 받는다.”<중용>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에게 더해가는 참 좋고 큰 덕이 바로 애덕愛德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는 누구인지 거울처럼 비춰주는 복음입니다. 마치 하느님 자비의 거울같은 복음입니다. 부단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자기 몫을 챙겨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을 회개로 이끈 것은 바로 자비로웠던 아버지의 추억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자기 중심의 삶이 참 자유가 아닌 방종이었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극한의 곤궁한 처지에 있던 작은 아들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철저한 회개를 통해 제정신을 찾은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합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부단한 회개를 통해 자비하신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하는 홈컴잉(home-coming)의 시간입니다. 오매불망 날마다 길목에 서서 작은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한, 제 집무실에 걸려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이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바로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작은 아들의 회개의 고백을 듣는둥 마는둥 아버지는 당신 종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이 마음이, 이 사랑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이리하여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으니 바로 회개한 우리들을 위한 미사잔치를 닮았습니다. 거지같은 삶에서 회개를 통해 자녀로서의 고귀한 품위를 회복한 작은 아들같은 우리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는 작은 아들이요 우리들이라면, 평생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충실히 섬겨온 큰 아들은 당대의 의롭다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물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아우의 귀향을 반기기는커녕 격한 반응을 보이는 큰 아들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여지없이 폭로되는 큰 아들의 내면의 본색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자녀답게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종처럼 살았던 큰 아들입니다. 아우를 저 아들이라 부르며 적대적인 그 언행이 참으로 목불불견, 무자비합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마음은 멀리 떠나 있었음을 봅니다.
제대로 ‘자녀답게’가 아닌 그냥 ‘종처럼’ 생각없이 아버지를 섬겼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범 신자의 정체일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을 달래는, 회개를 바라시며 호소하시는 아버지의 반응입니다. 두 아들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두 아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배웁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바로 큰 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또 하나의 아들,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큰 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과연 나는 큰 아들, 작은 아들, 예수님 중 누구를 닮았는지요?
우리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거룩한 미사잔치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좋은 도움이 됩니다.
“하늘의 하느님을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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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21ㄱ)
<회개의 기쁨!>
오늘 복음(루카 15,1-3.11ㄴ-32)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복음 중에 복음, 곧 기쁜소식 중에 기쁜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믿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느님의 기쁨은 무엇이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청해 받고 먼 고장으로 떠난 작은 아들이 창녀들과 어울리며 방종한 생활을 한 끝에 자기 재산을 모두 탕진합니다. 부정한 동물인 돼지를 치는 일을 하며, 돼지가 먹는 열매로도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는 완전한 거지 신세가 됩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생각났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께 돌아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21ㄱ)
그러자 아버지는 어떠한 이유를 묻지 않으시며, 종들에게 이렇게 이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루카 15,22-23)
들에 나가 있었던 큰 아들은 돌아와 이 모습을 보고 화를 내면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1-32)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냉담 교우들이여, 이런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고해성사 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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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루카 15, 32)
다시 살아나는
축제이며
잃었다가
되찾는
사랑의
축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삶을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의 일상을
다시 만나는
사랑의
사순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아픔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절실히
우리 삶에서
깨닫습니다.
떠나보내는 일도
맞아들이는 일도
모두
아버지 하느님의
간절하신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기다림이
돌아가는
우리의
길을 만듭니다.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기에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사람은
기다림과
사랑으로
진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자아가
무너져야
돌아갈 곳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고귀한
사랑의 관계를
다시 뜨겁게
체험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어느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조건 없이
우리를
반겨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회개는
우리 모두의
축제가 됩니다.
새로워지는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의 여정을
기다려주십니다.
기다림과
돌아감 사이에
참된 만남과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창조하시고
되찾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참된 회개가
참된
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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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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