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혜공주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경혜공주에게는 언니가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그 후 경혜공주가 태어났고, 동생(단종)도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산고로 인해 출산 다음날 사망했다.
그러니까 애기 때 벌써 언니와 엄마를 잃은 것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16세의 나이로 정종과 혼인
그런데 혼사 후 2달만에 세종대왕께서 승하하셨고 이후 장자였던 문종이 즉위했다.
그러나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문종은 2년만에 경혜공주와 단종을 두고 승하했다.
결국 어리고 힘없는 단종이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는데 당시 단종과 경혜공주 남매는 세종의 후궁이었던 혜빈 양씨와 그 가족들(한남군, 금성대군 등)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수양대군이였다.
결국 1455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본인이 왕위에 올랐다..
단종 즉위 3년 후에 벌어진 일이고 경혜공주도 이 거대한 풍파 속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
남편 정종은 수양대군에 의해 귀양을 가고 동생은 왕위를 뺏긴 상황에 경혜공주는 나름 머리를 써서, 세조에게 자신이 앓아누웠다는 사실을 알렸다.
쿠데타로 인해 민심을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경혜공주까지 앓다가 죽는다면 세조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세조는 경혜공주에게 약과 어의를 보내고, 결국 유배 보낸 정종도 한양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발로 정종은 다시 수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부부는 헤어지게 된다.
경혜공주는 남편과 함께 귀양을 가겠다고 했고, 세조는 이를 허락한다. 부부가 같이 귀양을 가는 건 무척이나 드문 일이다.
한양 생활과 너무나 다른 생활이었으나 부부는 둘이서 잠깐이나마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수발 드는 종도 있었다고 하니까...
그러나 사육신 사건(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된 사건)으로 인해 이 자그마한 행복도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성삼문은 고문을 받다가 단종도 이 거사를 알고 있었다고 언급했고, 이 발언으로 인해 경혜공주는 큰 시련을 겪게 된다.
경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종과 경혜공주 부부는 먼 광주까지 쫓겨났다.
그리고 세조가 재산을 다 몰수해버리고 노비를 관노로 보내 버려서 세종대왕의 손녀이자 조선의 공주인 경혜공주는 직접 모든 집안일을 하게 된다.
이건 거대한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 시기 단종은 결국 폐위, 강등되고 유배를 간다.
4개월 뒤에 단종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다.
경혜공주에게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할아버지(세종대왕)
아버지(문종)
어머니(현덕왕후)
동생(단종)
모두 세상을 떠났고 남아있는 사람은 남편 정종 뿐.
이때 경혜공주의 나이 고작 스물셋.
세조의 감시는 날로 심해져서 누구도 경혜공주와 정종 부부 근처에 갈 수 없게 된다.
문도 바깥에서 잠궈버려서 부부는 집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부부에게 기적같은 행복이 찾아온다.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아들의 이름은 '정미수'. 혼인 9년만에 생긴 금쪽같은 아이.
그런데 아들이 세 살 되던 1461년 남편 정종이 한양으로 끌려갔다.
이유는?
정종이 유배 생활을 하던 당시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알다시피 조선은 유교 국가였던 데다가, 정종은 승려들과 몰래 만나곤 했는데 이 승려들과 정종이 역모를 꾸민다는 혐의가 적용된 것이다.
정종은 온갖 고문을 받았다.
1461년 10월 정종은 세조의 명에 의해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거열형)에 처해진다.
경혜공주는 이 소식을 유배지에서 세 살 난 아들과 함께 들었다. 당시 경혜공주의 나이 고작 스물일곱.
그런데 그저 슬퍼서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배 속에 둘째 아이도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시기 경혜공주와 아들은 광주보다 더 먼 전남 순천으로 보내진다.
이때 경혜공주는 돈도 없고 종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처지였는데 세조는 경혜공주가 가진 마지막 희망마저 뺏어 버린다.
신분을 강등시킨 것이다.
한때 으리으리한 궁궐에서 살던 경혜공주는 노비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된다.
시간이 흐른 후 세조는 경혜공주를 궁으로 불러들인다.
어차피 경혜공주는 남편도, 동생도 없는데다가 너무나 초라한 행색이라 세조 역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예종실록에는 '세조께서 눈물을 뿌렸다'는 구절마저 있을 정도로.
연좌제의 그물에서도 벗어나게 해줬다.
또한 집과 노비까지 주기로 약조한다.
세조는 궁의 권위를 무척이나 중요시했는데,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준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
이전보다 훨씬 편안한 상황에서 경혜공주는 딸을 낳게 된다.
하지만 그 직후 네 살 아들과 한 살 딸을 두고 경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
동생과 남편을 죽인 자의 비호를 받고 사느니 차라리 여승이 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혜공주의 아이들은 정희왕후에 의해 잘 키워졌고 1468년 세조가 세상을 떠났다.
기록에 의하면 세조는 말년에 심한 피부병과 불면증, 악몽으로 고통받았고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다.
5년 뒤 경혜공주도 세상을 떠났는데
옆에 작은 무덤이 있다. 바로 남편 정종의 가묘(假墓).
능지처참을 당한 정종의 시신은 수습될 수가 없었기에 옆에 가묘를 설치한 것이다.
남은 자식들은 잘 살았다고 한다.
경혜공주 일생 요약
- 태어나기 전에 언니 사망
- 동생 낳다가 어머니 사망
- 결혼 후 두 달만에 할아버지(세종대왕) 사망
- 2년 후에 아버지(문종) 사망
- 동생 단종이 11살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계유정난으로 왕위 뺏김
- 오랜 유배생활 도중에 재산 다 뺏기고 신분도 공주에서 노비로 강등
- 남편은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으로 사망
- 동생은 사약 받고 사망
- 딸을 낳은 후 비구니로 조용히 살다가 묻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