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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문”이라는 단어의 유래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
앞에 나온 ‘사문 바라문’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불교 밖에서 사문이란 출가 수행자를 의미한다. 불교 안에서는 부처님의 아들이자 승가의 구성원인 비구를 의미한다. 이처럼 사문이라는 말은 잘 알려져 있으니 달리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바라문’이라는 말은 보다 정교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 말은 빠알리어로 ‘브라흐마나’라고 한다. 디가 니까야의 “세기경(世紀經. D27. Aggañña Sutta)”은 바라문이라는 말이 처음에 어떻게 쓰이기 시작했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태초에 여러 겁이 지나자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선행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을 선출하여 ‘마하 삼마따(Mahā Sammata. Great Elect.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여 뽑은 사람)’인 왕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통치하게 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있다. 타락하여 왕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다. 우리는 숲으로 들어가 이러한 악을 제거하고 씻어내자.”라고 말하면서 숲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수행하여 선정(jhāna)에 들면서 살았다. 그런 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을 바라문이라고 한다.
바라문의 빠알리어인 ‘브라흐마나(Brāhmaṇa)’는 ‘악을 제거하는 사람’을 뜻한다. 바라문은 스스로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나무에서 떨어진 과일이나 마을에서 모아온 음식으로 살아갔다. 이처럼 그들이 브라흐마나라는 말뜻대로 청정하고 성스런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바라문이라고 불린 것이다. 그들은 ‘구나(Guṇa. 有德) 브라흐마나’ 즉 ‘성스런 수행의 덕목을 지닌 바라문’이었던 것이다.
많은 겁이 지난 뒤 이 유덕 바라문들 중 일부는 수행을 계속해서 선정에 들어가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마을의 외곽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베다를 저술하고 열정적으로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들은 더 이상 악을 제거하고 선정을 얻기 위한 수행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바라문이라는 이름을 유지했지만 더 이상 유덕 바라문은 아니었으니, 성스러운 수행이라는 덕목을 구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출생에 의한 바라문(Jāti brāhmaṇa)’이라고 불릴 뿐이었다. 그들은 선정을 얻기 위한 수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열등한 계급의 사람(inferior class)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베다를 저술하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꽤 존경할 만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이 바라문들은 선정을 계발함으로써 번뇌를 제거하거나 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이려고 강물이나 흐르는 물속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러한 기만행위를 ‘불순한 것을 정화하는 목욕’이라고 불렀다.
바라문들이 자신의 죄를 씻어내기 위한 이러한 실천법(practice)이 “부리닷따 자따까(Bhūridatta Jātaka)”에 나온다. 용들의 왕이었던 부리닷따는 계율을 지키기 위해 인간 세계를 방문하곤 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돌아가야 할 시간에 용의 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두 동생들이 용왕을 찾으러 갔다.
(영역자 주: 그들은 뱀 장수에게 잡혀 있던 용왕을 제때에 구해낼 수 있었다. 용왕은 ‘네사다(Nesāda)’라는 바라문에게 속는 바람에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네사다는 용왕이 개미 언덕 위에서 계율을 지키는 것을 보았다. - 이 구절은 이야기의 연속성을 위하여 영역자들이 삽입한 것이다.)
동생인 ‘수보가(Subhoga)’ 용은 용왕을 찾으려고 ‘야무나(Yamunā)’ 강을 따라 가는 동안 ‘네사다’ 바라문을 우연히 만났다. 용이 뱀 장수에게 잡힌 것은 그 바라문 때문이었다. 그 바라문은 자신의 배반이라는 잘못을 씻어내기 위해 야무나 강에 들어가 있었다.
부처님이 ‘인내는 바라문의 힘이다’라고 말할 때는 오직 유덕 바라문만을 염두에 둔 것이다. 흰 옷을 입은 채 번뇌의 제거를 실천하던 세기경(D27)의 고행자들은 보통 바라문이나 출생 바라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출현하여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을 때에는 바라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질에 대한 설명이 완성되어 있었다.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품(Vagga) 하나[제26장 바라문(Brāhmaṇavagga). 383-423번 게송, 모두 42개의 게송]를 진정한 바라문이라 부를 수 있게 하는 위대한 자질들을 설명하는데 모두 할애하고 있다. 그러한 자질을 갖춘 바라문은 모두 유덕 바라문이다. 이 유덕 바라문에 차이란 없다. 그러나 출생 바라문은 여러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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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Sixth Pāramī: The Perfection of Forbearance (khantī-pāramī)
Samaṇas and Brāhmaṇas
With reference to the terms Samaṇas and Brāhmaṇas in no. (8) of the above list, it may be asked whether samaṇas are of equal status.
Outside of the Teaching, ‘Samaṇa’ means a recluse. Within the Teaching, it is understood as a bhikkhu, a member of the Order, a son of the Buddha. The term ‘Samaṇa’ is thus well known and needs no further explanation.
What requires elaboration is the word Brāhmaṇa. The Aggañña Sutta of the Pāthika Vagga, Dīgha Nikāya, gives an account of how this appellation ‘Brāhmaṇa’ comes to be used first.
At the beginning of the world, (after humans had lived on earth for aeons) evil ways had appeared amongst them and they elected a certain individual to rule over them as ‘the Great Elect’, King Mahā Sammata. At that time, some people saying: “The world is being overwhelmed by forces of evil; we do not wish to live in association with people who are so corrupted as to be governed by a king. We will repair to the forest and drive away, wash away these evil ways,” went to the forest and stayed there meditating and being absorbed in jhāna. Because they lived in this manner they were called Brāhmaṇas.
‘Brāhmaṇa’ is a Pāli word which means ‘one who has done away with evil’. Brāhmaṇas did not cook their own food; they lived on fruits which had fallen from trees or on alms food collected from towns and villages. They were called ‘Brāhmaṇa’ because they led a pure, holy life in keeping with the literal meaning of the Pāli word ‘Brāhmaṇa’. They were thus Guṇa brāhmaṇas, that is, brāhmanas by virtue of their holy practice.
After lapse of many aeons, some of these Guṇa brāhmanas failed to keep to the practice of meditation and absorption in jhāna. They settled down on the outskirts of towns and villages; they composed and taught Vedas to those eager to learn them. They no longer practised meditation to attain jhāna absorption and to cast off evil. But they still retained the name of Brāhmaṇa; but they were not Guṇa brāhmanas since they did not possess any more, the attribute of holy practice. They could only claim to be Jāti brāhmanas, i.e. brāhmanas by birth being descended from the Guṇa brāhmanas. As they could not practice meditation to attain jhāna, they are regarded to be of inferior class. But with lapse of time, writing Vedic books and teaching, they came to be considered as quite respectable and noble. Although these brāhmanas by birth would not actually cast off and wash away mental defilements by cultivation of jhāna, they immersed themselves in the waters of rivers and streams to deceive people, calling their deceptive performance as acts of ablution to wash away impurities.
A reference to this practice of washing out one’s sins by brāhmanas is found in the Bhūridatta Jātaka. Bhūridatta, King of Nāgas, used to visit the human world to observe precepts. On one such visits, he failed to return to the nāga land at the expected time. His two brothers went in search of him.
(They were able to retrieve him in time from the captivity of a snake charmer who ill-treated him. He was betrayed by a brahmin named Nesāda who saw him observing precepts on top of an ant-hill.)
His younger brother, Subhoga Nāga, while following the course of the river Yamunā in search of him, came across the Brahmin Nesāda who was responsible for his capture by the snake charmer. The Brahmin was found immersed in the Yamunā river in order to wash out the impurities of his betrayal.
The Buddha had in mind only Guṇa brāhmanas when he said that tolerance is the power of samaṇas or brāhmanas. The ascetics of Aggañña Sutta, who, wearing white clothes, practised to rid themselves of defilements were ordinary brāhmanas or brāhmanas by birth. But when the Buddha made His appearance and started teaching, He described attributes only by virtue of which one may be called a brāhmana. In the Dhammapada, the Buddha devoted an entire Vagga-Brāhmana Vagga of 42 verses to explain fully the noble qualities, possession of which would entitle one to be called a brāhmana. Such brāhmanas are all Guṇa brāhmanas; there is no division of this class. The brāhmanas by birth, however, are split into many divisions.
(The last four Paragraphs dealing with the etymology of ‘뿐나(미얀마 글자)’ which is Myanmar word for brāhmana are left out from our translation.)
참고문헌:
1. The Most Venerable Mingun Sayadaw, Translated by U Tin Lwin & U Tin Oo(Myaung), 『The Great Chronicle of Buddhas, Volume One, Part One, Anudipani』, The State Buddha Sasana Council's Version, First Edition, November, 1997, pp. 257-259.
2. https://www.wisdomlib.org/buddhism/book/the-great-chronicle-of-buddhas/d/doc365134.html
3. 최봉수 역주, 『大佛傳經 Ⅱ』, 한언, 2009, 411-413쪽.
4. 각묵 스님 옮김, 『디가 니까야 제3권』, 초기불전연구원, 2006,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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