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12월 하순경이었다.광주일고 합격자의 발표의 날 밤이었다.
1962년 6월7일 광주남중 2학년 8반 84번으로 전학온 후 1년반이 지난 날이었다.
홀어머니의 손을 잡고 완도섬에서 광주로 이사와서 어떻게 공부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광주일고가 명문이라는 말만 듣고 지원하고 시험 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2학년으로 들어와서 첫달 6월 월말시험에서 반 84명중 80등,
7월에는 46등 정도였고, 2학년 1학기 성적은 60등 정도였다.그도 그럴 것이 3월부터 5월까지
월말고사를 보지 않은 달은 "ㅇ"점 처리했으니 잘 나올리 없었다.
그리고 2학기 부터는 50등내지 60등
정도였다.그런데 1964년 3학년이 되어 3월 첫 모의고사에서 500여명중 9등이었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아니,60등이면 거의 꼴찌였는데 컨닝을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런 성적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데 따지고 보면 작은 이유는 있었다.즉.시골에서는 음악.미술은 아예 공부를 하지 않았고,
체육시간에는 내가 몸이 허약해서 항상 교실에만 있었기 때문에 성적이 잘 나올리 없었다.
그후부터 모의 고사에서 (국영수만시험보았슴)는 계속 1등 또는 2등을 했다.
그런데,다행히 우리가 일고입학 시험 볼 때 시험과목이 국.영.수와 세계사와 세계지리등 5개과목이었다.
생각해 보면 천우신조였다고나 할까?
내가 못하는 과목은 다 빠지고,그래도 자신이 있는 과목만 고교입시 과목으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한국사와 한국지리는 고교입학 시험과목에서 뺐을까?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이
얼마나 후진국적 사고였다고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완도 고금중학교에서 전학온 후 1년반이 지난 1964년 3월부터는 중학교 3학년의 매월 모의고사 때
국영수만 시험치뤘기 때문에 그 과목에서는 항상 전교에서 1~2등을 해서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쉽게 써주었다.
입학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 우리 집은 계림동에서 방세칸을 전세로 살고 있었다.
주위에서는 석홍이가 일고 시험 본다고들 다 알고 있었다.가난한 홀어머니의 아들이 일고 시험보니,
다들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T.V도 없이 라디오로만 합격자 발표를 했다.저녁 8시 반쯤에 全日방송에서
수험번호와 이름을 발표했다.수험번호 138x번 고석홍!'하는 쩌렁쩌렁한 아나운서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순간 와~와~하는 탄성이 이집.저집에서 쏟아져 나왔다.그러면서 앞집.뒷집.옆집에서 아주머니들이 문을 열고"석홍아,석홍아,"하고 어머니를 불러냈다."~워따 위따~^ 석홍이가 일고 합격했소!
어린애 데리고 고생하더니,석홍이 엄마 부러운 게 뭐 있겠나?"하고 기쁨을 같이 했다.
어머니는 없는 돈에 좋아서 돼지고기를 사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며칠 동안 잔치를 같이 했다.
그런데,광주일고에 가서 보니,
모두가 나 보다 더 공부잘하고 똑똑했다.
학급 배치를 받고 보니,작고한 조남중이가 1학년 8반 우리반에서 1등,박준호가 2등 나는 겨우 중간정도였다.
그후 박준호는 서울법대에 합격했고,조남중이는 전대 의대에 합격했었다.
안타깝게도 조남중은 몇년전 병으로 세상을 떴다.생각해 보면 인간사 새옹지마인 것을 ...
그렇게 기뻐하시던 어머니는 벌써 18년전인1998년 4월4일에 세상을 뜨셨고.
고향 완도 고금면 문중묘지에 잠들어 계시다.지금 살아 계시다면 당신이 그리 좋아하시던
고운 한복도 해드리고 화장품도 사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사드리고 해외 여행도 실컷 시켜드릴 텐데.
어머니는 내가 대학 3학년때 조그마한 사업을 하시다가 망하고 내명의로 되어있던
집을 팔아서 넘겨버리고 나에게 高碩洪 이름의 한자로 된 문패 하나를 주셨는데,
철없는 나는 그 문패를 마당으로 냉동댕이 쳐서 눈물만 흘리셨는데.....
지금은 집도 여러 채 있고,좋아하시던 것들 다해드릴 수 있는데,....
"유재 아니라도 품음직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그늘 슬허하노라."는
옛 시인의 싯귀가 오늘에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