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퍼라인탄광
내가 생전처음으로 국제우편을 받은 건 반세기 전이었고 대전에서 하숙을 함께하던 L형이 독일 촐퍼라인Zollverein 탄광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그땐 대다수가 가난에 찌들어 살았기에 L형은 한 푼이라도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 봉함엽서 모서리에까지 깨알 같은 글자를 빼곡하게 적고 있었다. 네댓 살이나 아래인 사람에게 새로 맞닥뜨린 악전고투 작업현장을 편지로 전하면서 향수를 달래는 것 같았다. 당시는 이미 5.16이 이태가 지났고 혁명정부는 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일소하면서 민생고 해결에 나서고 있었다. L형이 팔자에도 없던 광부로 이역만리 독일 땅에 돈벌이를 나간 것도 군사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63년 1차로 모집한 광부 500명에 4만6천 명이 몰릴 정도로 국내 실업난은 심각했고 파견될 경우 급여는 우리나라의 8배나 되었다. 이 대목에서 바르게 알려야 할 일이 하나 있다.
학교 숙제라며 인터넷에다 묻는 학생들에게 소위 나라를 헐뜯는 불순세력들이 얼마나 왜곡되게 파독광부를 소개했으면 소득의 팔구십 퍼센트를 나라에 빼앗긴 걸로 질문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당시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경제개발 붐을 타고 시쳇말로 3D직종 인력의 부족으로 외국에서 수입을 하게 되었고 우리는 인력수출을 계기로 독일로부터 경제개발 자금을 빌리게 된 것이다. 그때는 독일도 동서로 갈라져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로서의 동병상련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통 꼴로 보내온 L형의 편지로 인해 지금까지도 그를 기억하고 있을 터이다. 독일로 떠나기 전 하숙에서 한 방을 쓰면서 두 사람은 비교적 마음이 잘 통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 위축되어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말단 신입사원이긴 하지만 한쪽은 공기업에 몸담았고 그는 일당벌이나 다름없는 광고용 애드벌룬을 띄우고 있었기에 그러했을 터이다.
영화 <국제시장>이 비춰주는 파독광부들의 작업현장을 보면서 콧잔등이 시큰했다. 동시에 지하 천 미터가 넘는 갱내에서 35도를 웃도는 지열과 맞서 사투를 벌였을 L형이 떠올랐다. 영화의 감동이 뇌리에서 사라지기 전 서둘러 서울 양재동 파독근로자기념관을 찾았고 거기서 L형의 캐나다 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소만 받고도 그를 직접 만난 것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졸작수필집과 몇 장의 사진파일이 든 시디와 편지를 받고 캐나다에서 걸려온 전화음성은 L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선생이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점잖게 밝히고 있었다. 동명이인으로 독일에서 광부생활을 끝낸 이민자였다. 20여 년 전 부부가 패키지여행으로 독일을 찾은 일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괴테하우스를 둘러보고 시청사 앞 광장으로 이동하자 가이드는 개별시간을 주었다. 우리는 기념품점을 들러서 작은 지도를 한 장 샀다.
상점의 한국인 부부는 한국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독일로 떠나기 전 조폐공사 바로 뒤에 자기 집이 있었다면서 당시 그 인근 럭키아파트에 사는 우리 부부를 고향사람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광부와 간호사로 왔다가 서로 결혼해서 독일에 눌러앉은 사람들이었다. 부부는 그때까지도 향수병을 앓는지 적적해 보여서 행복하냐고 물었다. 대답을 못하고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아무데나 대고 행복하냐고 묻는 게 아니라는 경고가 떠올랐다. 부부는 우리와 비슷한 연배였다. 독일에서 가장 컸던 탄광 촐퍼라인을 대면서 나이와 얼굴 생김새에다 L형의 고향까지 들먹이면서 혹시 그런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야말로 서울에서 김 서방네 집 찾기였고 주인은 눈만 껌벅이면서 대답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파독광부는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77년까지 15년이나 이어졌고 파견인원 7천 9백 명은 탄광도 여러 군데인데다 같은 탄광이라도 작업장이 다르고 숙소가 다르면 서로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다 3년이 끝나서 독일에 주저앉든지 귀국을 하든지 제3국으로 이민을 떠났다면 더더구나 만났을 확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름휴가로 찾았던 독일에서 촐퍼라인이 있는 에센의 인근 뒤스부르크까지 접근하자 반세기도 더 지난 세월 저쪽의 L형이 떠올랐다. 하지만 빡빡한 일정에 쫓겨 에센까진 찾아가지 못하고 끝났다. 지금은 인구 60만인 독일의 중소도시지만 에센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뛰어난 자연생태환경으로 도시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반세기 전에도 촐퍼라인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 또한 최대였던 탄광이었다. 하루에도 무려 1만2천 톤이나 되는 석탄을 캐내면서 1970년대의 독일 중공업을 이끌었지만 석탄이 석유산업에 밀리면서 위기를 맞아 결국 1988년 문을 닫기에 이른다.
그러자 에센은 녹슨 제철공장을 환경생태공원으로 탈바꿈시켜 세계적인 눈길을 끄는 뒤스부르크를 주목했다. 뒤스부르크처럼 산업건축물을 남겨두되 쓰임을 달리해서 새롭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1997년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여 결국 2001년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환경’이라는 이미지에 접근한 뒤스부르크와는 달리 ‘디자인’이라는 문화에 접근하여 지금은 ‘디자인 성지’로 불리는 에센이 되었다. 투박하고 딱딱한 이미지의 탄광설비가 부드럽고 아이디어가 톡톡 튀는 디자인을 만나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 기발한 착상이 아닐 수가 없다. 탄광시설을 폐기하지 않고 활용하여 문화콘텐츠를 개발한 독일정부는 루르공업지대 전체를 재생공간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현대 디자인의 메카로 불릴 정도로 디자인의 미를 탄광 전체에 투영했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독특한 스타일링을 시도한 것.
그러한 노력으로 가장 권위 있는 어워드인 ‘레드 닷 디자인’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섰다. 박물관에는 지금까지 레드 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자동차와 가전제품 생활소품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탄광의 외형과 내부를 그대로 살려 현대산업 디자인의 상징물들을 배치해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진 멋진 공간을 창출했다. 탄광엔 각종 문화공연이 열리는 공연장과 서점 분위기가 느껴지는 레스토랑도 들어섰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제 에센의 탄광에는 더 이상 석탄이 생산되지는 않지만 현대의 아름다운 디자인 문화콘텐츠가 생산되는 문화예술 공장이 되었다. 이전에는 광부들과 석탄산업 종사자들만 이곳을 방문했지만 이제는 멋진 디자인과 문화공연을 감상하고자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공공디자인이란 이렇듯 공간의 역사와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그저 철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비록 용도 폐기되었다하더라도 공간 속 지역의 역사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에 시대의 문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시민들에게는 쾌적한 삶의 공간을 제공하면서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공간도 창출한 것으로 디자인이 살아있는 세상은 기능도 중요하다는 걸 말해준다. 이제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된 L형인지라 더 이상 그를 찾을 방법은 없다. 위험한 작업현장이다 보니 사고를 당하여 유명을 달리한 광부들도 적지 않았다고 하지만 영면한 고인들 명단은 뒤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힘겨운 광부생활을 담아 보내왔던 편지들을 지니고 있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타고난 성실함으로 생을 계속 꾸려왔다면 어느 하늘 아래 있더라도 그는 지금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혹시라도 이 글이 웹을 타고 퍼져서 관심 있는 누군가 L형의 소식을 전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영수 1939년 경북 성주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