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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공원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무네미로 236
인천대공원은 인천광역시 동부공원사업소에서 관리하는 11개 도시자연공원(인천대공원, 중앙, 부평, 계양, 백마, 약사, 호봉, 연희, 불로1, 불로2, 검단) 중 하나인 공원으로 남동구 장수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모산과 상아산을 끼고 있다. 인천대공원은 인천 유일의 자연 녹지 대단위공원(89만 평)으로서 연차적 조성사업계획(1982~2006년)에 의거 조성 중에 있으며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쾌적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생명의 숲이기도 하다.
연간 400만 명의 시민들이 찾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원이며, 누구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그리고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과 여유롭게 힐링할 수 있는 휴양공원이다.
시설 현황
인천대공원에는 인천수목원, 캠핑장, 식물원, 장미원, 자생식물원, 어린이동물원, 자연생태원, 자연생태관찰로, 환경미래관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식물원: 식물원은 부지 7,982m2에 온실규모 1,182m2 규모로 되어 있고, 92과 332종 6,550본의 식물을 기르고 있다.
장미원: 66종 7,800본 1만 300여 주의 다양한 장미꽃이 서식하고 있다.
자생 식물원: 1997년 9월에 조성되었으며, 1,500평방미터 규모의 면적에 144종 15,400본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어린이 동물원: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9,860m2 면적에 서식하고 있는 동물은 42종 232마리이다(일본원숭이, 타조, 면양, 풍산개 등).
자연 생태 관찰로: 2000년 6월에서 11월 사이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800m 길이에 숲의 구조 외 15개의 해설판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다.
환경미래관: 2007년 7월 16일에 개관했으며, 환경의 중요성을 알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환경문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쉽게 접근하여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와일드 파크: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9,860m2 면적에 서식하고 있는 동물은 716마리이다
관모산(冠帽山, 162m)
인천 남동구 장수동에 관모산(冠帽山:162m)이 있다. 인천대공원이 자리잡고 있어 많이 알려진 곳으로, 이는 멀리 수원 광교산에서 시작된 산 뿌리 ‘한남정맥’의 작은 가지에 해당한다. 곧 한남정맥이 인천으로 뻗어오게 되면 소래산부터 시작이 되는데, 그 줄기가 주안산(만월산)을 거쳐 북으로 올라간다. 이 때 소래산과 주안산 사이에 관모산과 거마산(距馬山:209m)이 있어 둘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관모산과 거마산은 서쪽으로 비리고개, 동쪽으로는 부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중 관모산은 그 자체가 머리에 쓰는 ‘관’이라는 뜻이지만, 원래 발음은 우리말 ‘갓모’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갓모’는 원래 이름이 ‘갈모’로, 옛날 우리 조상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갓 위에 쓰던 것을 말한다. 산의 모양이 갈모처럼 생겼다 해서 갓모산이라 불리던 것이 한자화 되면서 관모산이 된 것으로 향토사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거마산은 ‘큰 말[馬]이 뛰는[距] 모양’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사실 관모산이나 거마산이 그런 모양인지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런 만큼 원래 이들에게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뜻이나 발음의 우리말 이름이 있었을 가능성도 많다. 다만 이들이 워낙 작은 산이다 보니, 『동국여지승람』 등 옛 기록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유추해낼 방법이 없다. 관모산 기슭에는 조선 중종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한강과 황해 바다를 연결하는 운하를 파려고 하다가 암석에 막혀 중단된 곳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는 ‘무너미’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상아산
소재지 : 인천 남동구 장수동 산 78
높이는 해발 151m.
산의 형상이 코끼리 어금니와 같이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김재로 묘(金在魯 墓)
문화재 지정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호
건립시기 : 조선후기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산64-13번지
요약 : 인천광역시 남동구에 있는 조선후기 문신 김재로의 무덤. 시도 기념물.
조선 후기의 문신인 청사(淸沙) 김재로(1682∼1759)의 묘소이다.
숙종 28년(170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 36년(1710)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겸설서를 시작으로 내외의 주요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지춘추관사로 있을 때『경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판중추부사 때에는 청나라에 가서『명사(明史)』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결백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상하가 신망하는 재상으로서의 풍모를 지녔으며, 영조는 숙종의 뜻에 따라 그를 기용하여 아꼈다. 그가 78세에 죽으니 영조가 직접 조문하고, 제문도 친히 지어 보냈다. 이듬해 기사대신으로 봉해져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재로 묘소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청송 심씨와의 합장묘로,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영동 만의골 소래산에 위치한다. 그 인근에는 정조대에 영의정을 지낸 아들 김치인(金致仁)의 묘소도 있다. 1990년 11월 9일에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김재로(金在魯, 1682~1759)는 숙종과 영조대에 활약한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정파적으로는 노론(老論)의 영수 역할을 하였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저술로는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 『예기보주(禮記補註)』, 『금석록(金石錄)』 등이 유명하다.
운연동 만의골 소래산(蘇萊山) 등산로 입구에서 200미터 올라가면 청풍김씨(淸風金氏)의 묘역이 있는데 그의 무덤은 그 가운데 가장 윗편에 위치하고 있다. 묘소 뒤로 곡장(曲墻 :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을 두르고 봉분에는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봉분 앞으로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묘갈이 있다.
묘갈은 높이 196㎝, 너비 64㎝, 두께 23㎝인데, 뒷면과 좌·우면에는 그의 관력과 생애가 정리된 음기가 있다. 이는 1761년(영조 37)에 건립된 것으로 남유용(南有容)이 비문을 지었고, 서무수(徐懋修)가 해서로 글씨를 썼다. 묘소 앞 문화재 안내판 하부에는 또 다른 표지석이 위치하고 있다. 표지석에는 1982년 8대손 김지영(金智永)이 중수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판단하건데 주요 석물이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장대석(長臺石)으로 구분한 아래의 계절(階節 :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 정면으로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로 망주석(望柱石)과 석양(石羊)이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석양의 주둥이가 일부 훼손되어 있다.
소산서원
위치 : 경기도 시흥시 소산서원길 20 (신천동)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 문효공(文孝公)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3년)을 향사하는 곳이다. 시흥시 신천동 산12번지, 하연의 묘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연은 정몽주의 제자로, 21살에 벼슬에 올라 이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의 벼슬을 두루 거쳤다. 황희, 허조와 함께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이라 일컬어진다. 하연이 세상을 떠나자 1455년(세조 즉위년) 소산재(蘇山齋)라는 재실을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다. 1467년(세조 12)에 하연의 셋째아들 우명(友明)이 이곳에 영당을 세우고 소산재를 다시 지어 봄가을로 향사를 지냈다. 1963년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쇄락한 소산재를 중건하였고, 1995년 중건하면서 소산서원(蘇山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연 묘(河演 墓)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하연(河演)의 묘.
[개설]
하연의 본관은 진주,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376년(고려 우왕 2)에 태어나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365년(조선 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판서·대사헌·대제학·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449년(세종 31) 영의정에 올랐다. 문종이 즉위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1453년(단종 1) 별세하였다. 사후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경상남도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 경상남도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위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12번지 소래산 중턱 남쪽 기슭에 있는데, 내원사 입구에서 서쪽으로 10분 거리에 있다.
[형태]
정경부인 성산이씨와 합장하였다. 묘역을 중심으로 앞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우측에 묘비, 좌측에 장명등, 좌우에 문인석이 있다. 묘비의 비신은 높이 1.33m, 폭 51㎝, 두께 20㎝이다. 신도비는 묘소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데, 비문은 남지(南智)가 짓고, 글씨는 김교식(金敎植)이 썼다.
[현황]
1986년 3월 3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묘 아래에는 재사인 소산재(蘇山齋)가 있다. 재실은 1455년(세조 1)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963년에 건립했고 1995년에 재건하면서 소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하연(河演) - 조선 초기의 문신
성리학 전파에 앞장서 조선의 기반을 다지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조선 초기 유학자. 문종 대에 이르러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평생 조정에 복무하면서 세종을 보필했으며 안평대군이나 집현전 학사들과 교유하면서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목차
정몽주의 제자로서 허조의 길을 따르다
불편부당의 길을 걷다
불교의 개혁을 선도하다
《경상도지리지》를 편찬하다
예의와 효도를 몸소 실천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 되다
조선은 창업과 동시에 성리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고려 말 성균관을 통해 대거 등장한 신진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역성혁명의 리더였던 정도전, 권근 등의 이론 정립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그들은 성리학을 학문적인 입장보다 세상을 다스리는 경세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는데, 그런 유풍이 후대까지 계속 이어지면서 세종대에는 집현전에서 《대학연의》, 《성리대전》 강의가 시행되었고, 경연에서 임금을 대상으로 하는 유학 강연이 전례화 되었다.
하연은 유학자로서 그와 같은 성리학 전파에 앞장섬으로써 조선의 기반을 다지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고, 문종 대에 이르러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실로 그는 다사다난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불편부당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임금의 굳은 신임을 받았다.
주자의 〈경제잠(敬齋箴)〉을 개인적인 수양의 요체로 신봉했던 그는 평생 조정에 복무하면서 세종대의 명신으로 알려진 황희나 허조, 맹사성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했고, 안평대군이나 집현전 학사들과 교유하면서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부인 성산 이씨의 초상은 여말선초 귀족 여인들의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정몽주의 제자로서 허조의 길을 따르다
하연(河演)은 1376년(고려 우왕 2년) 진주 여사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또는 신희옹(新稀翁)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의 관리를 역임했는데, 증조부 하즙은 원나라 기황후의 남동생 기삼만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고, 할아버지 하윤원은 원주와 상주 목사를 거쳐 대사헌을 지낼 당시 ‘그른 줄 알면서 잘못 판결하면 천벌을 받는다.[知非誤斷皇天降罰]’라는 여덟 글자를 집무실 벽에 걸어두고 민원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 하자종은 이색, 정몽주, 길재 등과 교유했던 학자이자 문신이었지만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창건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하지만 아들 하연이 1396년(태조 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녹사에 제수된 뒤 조정에서 중용되자 마음을 바꾸어 1407년(태종 7년)에 공조 참의로 조정에 출사했다.
하연은 성리학자인 하자종으로부터 8세 때부터 유학을 배웠는데, 10세 무렵 아버지의 친구인 이색과 길재로부터 필법과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14세 때인 1389년부터 이웃에 살던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성리학 공부를 했다. 당시 그는 정몽주를 부모님처럼 모셨고 그의 아들 정종본과는 친형제처럼 지냈다.
학문의 성취도 남달라서 그가 한양으로 내려갈 때 정몽주는 동구 밖까지 전송하며 “그대가 남쪽로 가니 우리 도(道)가 남(南)으로 간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스승 정몽주가 다른 신료들이 꺼리던 사행과 종군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비가 벼슬하는 것이 야망 때문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임을 배웠다. 그 때문에 하연은 4년 뒤인 1392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살해당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두문동에 은거했지만 자신은 새로운 왕조의 관직에 나아갔다.
하연의 출사에는 아버지의 고종사촌 강회백의 영향이 매우 컸다. 손자 강희맹의 글에 따르면 강회백은 하연에게 “공은 좋은 벼슬을 하여 나라에 큰 정승이 될 것이라 향곡에서 늙을 사람이 아니다.”라면서 새 나라의 수도 한양으로 가라고 권했다고 한다.
강회백은 권근의 문인이었지만 이성계 일파의 건국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정몽주가 살해된 후 가족을 이끌고 진주로 낙향했다. 그 후 하륜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했는데, 하연과 자신의 처제인 이존성의 딸의 혼사를 성사시켜 동서지간이 되었다. 그의 아들 강석덕은 또 당대의 실권자였던 세종의 장인 심온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처럼 왕실과 중첩된 혼맥 덕택에 하연은 복잡다단한 정계에서 순항할 수 있었다.
그는 예학의 대가인 권근의 제자 허조와 인연이 깊었다. 허조의 형 허주는 하연의 아버지 하자종의 상관이었다. 허주가 경기감사였을 때 하자종은 안산군수를 지냈고, 허주가 완산부윤일 때 하자종이 경차관이었다. 마찬가지로 하연이 예조참판이 되었을 때 허조는 예조판서였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하연은 세종 대에 들어서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이 되기까지 수차례 예조판서로 복무했다.
하연은 고지식한 재상 허조처럼 관직에 있을 때나 학문에 임할 때나 공히 원칙에 충실했으며 조심성이 많았고 엄격하여 주변 사람들이 함부로 청탁을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훗날 하연이 영의정이 되자 허조는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서대(犀帶)를 전해주었다.
서대는 단령과 같은 관복을 입을 때 겨드랑이 아래 고리를 달아 띠를 걸어 가슴에 닿도록 하는 장식인데 1품관의 서대는 무소뿔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연이 받은 서대는 국초부터 의정부의 정승에게 차례로 전해 내려오던 것으로 좌주가 문생에게 전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경재집》에 따르면 하연은 자신과 비슷한 벼슬을 지냈던 이효인, 민의생, 조서강, 이석형, 남지 등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들은 하연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원칙주의자였는데, 모두가 예조에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인연이 있었다.
하연은 말년에 문종의 스승으로서 금성대군, 안평대군, 젊은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서화를 감상하고 시문을 지으며 교유했다. 특히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던 안평대군은 많은 문사와 승려에게 소상팔경(瀟湘八景)의 시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소상팔경(瀟湘八景)이란 중국의 소수(瀟水)과 상수(湘水)의 여덟 군데의 경치를 지칭하는데, 조선의 시인묵객들은 그 정경을 상상하면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당시 안평대군으로부터 초대받은 사람들 가운데 하연을 비롯한 9명만이 1447년에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에 찬시를 썼다. 그의 시문이 당대에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편부당의 길을 걷다
하연이 과거에 급제한 뒤 조정에 나오자 권근은 그가 장차 높은 벼슬에 올라 천지의 덕을 조화시킬 것이라면서 “특히 경술이 이미 어수(魚水)의 기회를 만났으니 모름지기 업적을 이루어 국가의 기초를 보좌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정도전, 하륜, 권근 등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숭유억불정책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그들의 후예들이 집현전과 홍문관을 중심으로 많은 서적을 편찬하면서 성리학을 널리 펼쳤다.
하연 역시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서 태조와 정종 대의 암중모색 단계를 거쳐 27세 때인 1402(태종 2년)에 사헌부 감찰이 되었고, 예조좌랑, 병조좌랑, 이조정랑 등의 요직을 섭렵했다. 39세 때인 1414년(태종 14년)에 사헌부 장령, 2년 뒤에는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사헌부는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중요한 관아였으므로 장령과 집의는 문과 급제자 중 청렴 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인물을 뽑는 것이 원칙이었다.
42세 때인 1417년(태종 17년)에 태종은 그의 손을 잡고 “경이 사헌부에 있을 때 홀로 그 직책을 다했으므로 그때부터 내가 잘 알았다.”라고 치하하며 승정원 동부대언에 제수했다. 태종이 그의 강직한 태도와 언변을 직시했음을 보여준다. 세종이 즉위한 뒤에 하연은 비서실장 격인 지신사로서 신중하게 처신하여 신임을 받았다.
1419년(세종 원년)에 그는 참찬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여 《대학연의》를 강론했다. 《대학연의》는 주희의 제자인 남송의 유학자 진덕수가 지은 책으로 역대 중국 제왕의 역사적 사례를 대학의 순서인 ‘격물치지(格物致知)·성의정심(誠意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대로 논하고 있다.
불교의 개혁을 선도하다
1423년(세종 5년) 대사헌으로 복무할 때 그는 상소문을 올려 불교의 현실적인 폐단을 지적하고 개혁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당시 그는 철저히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배척했는데 현재까지 상소문의 일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일찍이 구담씨가 군부를 버리고 작위도 사절하여 머리를 깎고 산중에 거처하여 그 도를 이루게 되었다는데, 그 뒤에 사람들이 혹 믿기도 하고 혹 배척하기도 했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동포인 백성들이 기아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놀고먹는 승려들이 그들을 꾀어 먹을 것을 앗아가는 것부터 벌써 사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런 판국에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논밭을 주어 생활을 풍족하게 합니까?
사원의 토지와 그 안에 사는 승려의 수효를 비교해 보면, 영통사의 밭이 2백결인데 살고 있는 승려는 겨우 7명이요, 운암사의 밭이 2백결인데 살고 있는 승려는 겨우 4명이며, 흥덕사의 밭이 2백 50결인데 살고 있는 승려는 겨우 20명이며, 흥복사의 밭이 140결인데 살고 있는 승려가 10명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나머지 다른 절의 사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밖에 사원에서 소유하고 있는 1만 1천 1백여 결의 좋은 밭이 그처럼 버려져 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하연은 이 상소문을 통해 현재 불교 사원에서 소유하고 있는 대규모 토지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백성들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승려들은 놀고 먹으면서 세금조차 내지 않고 있으니 이와 같은 부조리를 하루빨리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불교 자체를 비난하기보다는 현실적인 불교의 폐단을 고치자는 제안이었다. 이런 하연의 주장을 가납한 세종은 불교의 조계종을 비롯한 7종파를 선교 양종,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에 환수했다.
이처럼 하연은 숭유억불이라는 조선의 건국이념을 합리적인 관점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영의정으로 재임하던 1451년(문종 원년) 문종이 대자암을 중수하려고 하자 극력 반대하면서 사임하기까지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주자가례》에 따라 삼년상을 치렀고, 자신의 임종이 임박하자 자손들에게 불교식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런 전력으로 볼 때 그는 천상 유학자였다.
《경상도지리지》를 편찬하다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1425년(세종 7년)부터 하연은 국가기반을 다지는 데 정성을 쏟았는데, 그 결과물이 《경상도지리지》와 《오례의》 편찬이었다. 특히 《경상도지리지》는 1424년(세종 7년)에 왕명으로 착수하여 1여년 만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훗날 《세종실록지리지》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이 책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지리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지리지 다음 가는 오래된 지리지로 내용이 풍부하고 상세하여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왕명으로 《신찬팔도지리지》를 편찬하게 되자 예조를 통하여 각 도의 도지를 만들어 춘추관에 보내도록 통첩했다. 이에 따라 경상도 관찰사였던 하연과 대구군사 금유, 인동 현감 김빈 등이 편찬했다. 이때 만들어진 다른 지방의 지리지는 모두 소실되었지만 《경상도지리지》만은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현재 전해지는 책은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으로 경상도 감영에 보관되었던 것인데, 말미에 “이하십이장무(以下十二張無)”라는 추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뒷부분의 12장이 보관 도중 손상되어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여타 지리서와 다른 점은 산성, 읍성에 보이는 결부제(結負制)의 기록이다. 결부제는 토지의 면적과 그 토지의 수확량을 이중으로 표시하는 독특한 제도이다. 이는 중앙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연의 독자적인 아이디어였다. 지도에서 단순히 성벽의 길이만 나타내는 것보다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내부의 면적을 밝히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와 같은 하연의 시도를 중앙정부의 담당자들은 일종의 기밀누설이라고 보았던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의 내부 면적이 기록되지 않았다.
예의와 효도를 몸소 실천하다
하연은 55세 때인 1430년(세종 12년)부터 허조와 함께 《오례의》의 〈길례〉 부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하연은 법과 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경계하는 상소문을 수차례 올렸다. 특히 그는 중국에서 법과 예에 어긋나서 일어난 폐단을 예로 들면서 남의 이목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부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친족 간에 어질게 대했으며 친구를 저버리지 않고 경조사를 폐하지 않았으며 가산을 모으지 않고, 평소 화를 내지 않아 집안이 화목했다. 또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대궐 쪽을 향해 앉았으며, 좌우에 서책을 쌓아두고 독서나 시문에 몰두했다.
그는 효성도 지극해서 조정 업무 때문에 돈의문 밖에 살고 있던 부모님을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릴 수 없게 되자 아예 거처를 돈의문 밖으로 옮기고 옆에 부모님의 집을 지어 구경당(具慶堂)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의 부모님은 이런 자식의 효도를 받으며 80세 이상 장수를 누렸다. 또 다섯 형제끼리 우애가 좋았지만 서로 만날 때는 반드시 예의를 지켰다.
56세 때인 1431년(세종 13년)에 하연은 세칭 문형(文衡)이라는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겸임직으로 당대에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고 가문에도 하자가 없는 학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수많은 천재들이 명멸한 세종 시기에 하연의 학문과 인품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1437년(세종 19년)부터 하연은 판이조사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토지의 평균을 내어 세금을 매기는 공세법(貢稅法. 연분9등, 전분6등)을 마련했고, 1442년에는 각 품의 행수법(行守法)을 제정했다. 행수법에서 행(行)은 관직이 품계보다 낮을 때 붙이며, 수(守)는 반대로 관직이 품계보다 높을 때 붙인다. 품계와 관직 체계를 정밀하게 구분한 것이다.
그는 평소 사대부를 예로써 접대하여 문 앞에 기다리는 손님이 없었는데 이조에서 5년 동안 봉직하면서 일체의 사사로운 면회를 받아들이지 않아 배척 당하기까지 했지만 결코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처럼 원리원칙을 지키고 공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여 일을 처리했으므로 임금이나 동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 되다
1445년(세종 27년) 하연은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그해에 전시독권관이 되어 강희맹 등 25인을 뽑았고 또 중시독권관이 되어 성삼문, 신숙주, 이개, 박팽년 등 19인을 뽑았다. 그해에 70세가 되어 궤장을 받은 다음 두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는 ‘잠(箴)’을 지어 정신을 수양했으며, 금성대군의 부탁으로 기문을 짓는 등 글 짓는 일과 수양을 계속했다. 좌의정으로 복무하던 1449년(세종 31년)에 그는 진주향교 사교당의 요청으로 기문을 썼는데, 이 글에 그의 학문관이 잘 나타나 있다.
‘학문하는 도가 두 가지가 있다. 실제로 힘쓰는 학문과 이름만을 힘쓰는 학문이 그것이다. 실제로 힘쓰고 그 밖은 돌아보지 않는 것은 자신를 위해서 하는 학문이고, 이름만 힘써 이름에 매달리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남을 위해서 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8세가 되면 소학에 들어가서 대학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하는 일, 음식 먹고 하는 행동, 한 마디 언어가 학문이 아닌 것이 없다. 그것을 두 배로 북돋우고 함양하고 수양하여 차례대로 나아간다.
마침내 성공에 이르게 되면 덕성을 존중하고 경학을 연구하게 되는데, 뜻하지 않아도 문장이 의리의 근본에서 나오게 되고, 뜻하지 않아도 정치가 도덕의 작용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닦는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하게 하는 근본이 된다.’
이 글에서 하연은 학문을 하는 목적이 일상생활에서 적용하는 실무를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곧 평소에 자신을 수양하여 학문에 정진하다 보면 그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밖으로 드러나서 문장으로 드러나고 크게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대학》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일맥상통한다. 천하를 제대로 다스리려면심신 수양이 우선이라는 뜻이겠다.
그해 8월 요동지방에 야선(也先)이 이끄는 타타르족이 침입하여 변경이 소란해지고, 두만강 인근에서도 여진족의 움직임이 수상했다. 이에 따라 세종은 김종서를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북방을 경계하게 했다. 그러자 하연은 아들 하우명으로 하여금 군문에 들어가 김종서를 보좌하게 했다. 그가 정승의 입장에서 혈육의 정보다는 국가 안보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실로 그는 오늘날에도 보기 드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주역이었다.
1451년(문종 1년) 영의정에서 물러난 하연은 1453년에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인천 소래산 묘소에 묻혔다. 이듬해인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인천대공원&관모산&김재로 묘&소산서원] 탐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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