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라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삼천리』, 1941.4)
[어휘풀이]
-애련 : 애처롭고 가엾게 여김
-함묵 : 함구(緘口). 말하지 아니함
[작품해설]
이 시는 ‘의지의 시인’이라 불리는 유치환의 허무 극복 의지를 확연히 보여 주는 작품이다. 「깃발」에서 드러난 허무에의 절규가 「생명의 서」 · 「일월」 에서는 생명과의 치열한 대결 의식으로 변모되었다가, 마침내 「바위」에 이르러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생의 의지로 완성되어 생명파로서의 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게 된다.
이 작품에서 노래하는 대상인 바위는 어떤 의지나 이념을 표상하는 것으로 일체의 감정돠 외부의 변화에도 움직이지 않는 초탈의 경지을 상징한다. 그러한 주제 의식에 어울리게 시인은 한국 시사(詩史)에서 마치 전통처럼 되어 왔던 여성 편향의 목소리를 철저히 배제하고, 단호하고 웅장한 어조로 불굴의 의지를 토해 내고 있다.
의지의 이상적인 결집체인 바위를 통해 죽음으로 비롯되는 허무 의식을 극복하는 이 시는 먼저 ‘내 죽으면 하개 바위가 되리라’ 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그 나머지 시행은 모두 그 선언의 이유가 되는 바위의 속성을 나타낸다. ‘애련’ · ‘희로’로 대표되는 일체의 감정에 좌우됨이 없이 안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수련과 고행의 자세로 비바람의 외부 시련을 겪어냈을 때, 마침내 스스로의 생명도 망각하고 모든 흔들림을 극복하는 경지, 곧 바위가 될 수 있을 것임을 말한다. 여기에는 인생의 유한성과 자연물의 영원성을 대조시킨으로써 유한성을 극복하는 영원성에의 갈망도 담고 있다.
어떠한 감정도 개입할 수 없는 ‘비정의 함묵’인 바위의 세계, 그것은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의지의 세계이다. 화자에게 구름이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소리는 다만 외부적 자극일 뿐 아무런 동요를 주지 못한다. 그러한 초연적(超然的) 경지에 들었을 때, 화자는 그 어떤 이상을 가진다 해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 노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자기 몸이 두 쪽으로 깨뜨려지는 파멸이 온다 해도 결코 아픔의 비명을 지르거나 불평을 토로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렇게 꿈도, 자기 파멸도 초극한 바위 같은 뜨거운 생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이 시는 바로 허무감을 이겨내기 위한 시인의 사상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작가소개]
유치환(柳致環)
청마(靑馬)
1908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
1937년 문예 동인지 『생리』 발행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1947년 제1회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
1957년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
1967년 사망
시집 :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蜻蛉日記)』(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유치환 시초』(1953), 『동방의 느티』(1959),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청마시선』(1974),
『깃발』(1975), 『유치환-한국현대시문학대계 15』(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