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3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
(요한 18,1
-19,42)
For this I was born
and for this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who belongs to
the truth
listens to my
voice."
말씀의 초대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사람들은 멸시와 고통과 죽임을 당하는 주님의 종을 보며 그가 하느님께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그 종은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진 것이었다. 주님의 종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는다(제1독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에 대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위대한 대사제시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시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제2독서). 요한 복음의 수난기는 예수님께서 임금이시며 구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임금으로 현양되신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분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의 임금이 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수난기에서는
‘임금’이라는 주제가 되풀이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십니다. 당신께서 임금이심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머리에 쓰신 관과 자주색 옷 또한 임금의 표지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임금이라 자처하여 황제에게 대항했다고 주장합니다. 빌라도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여러분의 임금”이라 말합니다. 그들
모두가 역설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임금으로 인정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예수님의 명패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임금이라고 주장하셨다고 써야 한다는 수석 사제들의 말을 거절하며 끝까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명패를 달게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볼 수 있도록 세 가지 언어로 같은 내용을 쓰게 합니다. 예수님은
임금이셨습니다. 부활하신 다음 비로소 임금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수난의 그 순간에 이미 임금이셨습니다. 사랑으로 생명을 내어 주시고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이 ‘다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15,13 참조).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분
나라에서는, 다른 이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다른 이들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되어 그들의 상처를 낫게 하는 주님의 종이 임금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외아들을 살려 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러운 외아드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도록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이 순간, 하느님의 이 침묵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저는 지금 안식년
기간을 통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서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많습니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에
직장까지도 치맛바람이 불어온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 직원을 채용했는데, 그 직원의 어머니가 전화를 해서는 자신의 자녀가 얼마나
능력이 많은데 그 정도의 대우밖에 못 받는지를 따지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혹시 그 직원이 어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군대까지 다녀왔고
대학원까지 졸업했다고 하더군요. 이 정도면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닙니까? 더군다나 직장에서 채용한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그
자녀인데, 어머니가 항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이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 광경을 이야기해주는데, 요즘에는 퇴근
시간에 맞춰서 차를 회사 앞으로 가지고 오는 부모들도 많답니다. 직장 생활로 힘든 자녀들을 위해 운전을 대신 해 주는 것이지요. 물론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자녀들에게 유익한 행동일까 라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인상
깊은 글을 하나 보았습니다.
“부모 된 사람들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함이다. 부모 된 사람들의 가장 큰 지혜로움은 자신들의 삶이 자식들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요즘의 극성스러운
부모들의 모습을 듣고 또 보면서, 자식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만들려는 부모들의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붙어 다니며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는 모습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주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정말로 사랑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다 해주시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어떤 것이 유익한지를 잘 알고 계시기에, 그저 “너희들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모범을 직접 보여주실 뿐입니다.
오늘은 그 모범
중에서도 가장 큰 모범을 보여주시지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모범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아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큰 사랑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항상
우리의 편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주님의 사랑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우리 신앙인들의
자랑거리이심을 가슴으로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을 간직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것들만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주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치욕과 모욕을 던지는 유다인의 모습이 마치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 깊은 반성을 하게 되네요.
가장 큰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오늘, 그래서 우리들의 큰 자랑거리이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 모범을 간직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합니다.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나열해 보십시오. 당신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 텅 빈 공간만을 발견할 것입니다(앨런 코헨).
가장 좋은 때
어떤 젊은 여인이
자살을 하기 위해서 강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한 사공이 있어서 이 여인을 구할 수 있었지요. 사공은 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아직 젊은데 왜
목숨을 끊으려고 하오?”
이 여인은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결혼 2년 만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하나밖에 없는 제 아이가 병으로 죽은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무슨 낙이 있어 목숨을
부지하겠습니까?”
사공은 “그러면
2년 전에는 어떠했소?”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때는 결혼
전이라 남편도 또 아이도 없었으니 자유로웠고 아무런 근심도 없었죠.”
사공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은 그저 2년
전으로 되돌아갔을 뿐이오. 따라서 이제 다시 자유롭고 아무 근심 없는 예전의 당신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오.”
가장 좋은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때로 돌아갈 수 있음을 굳게 믿으십시오. 생각하기 싫은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좋은 때가 바로 지금 이루어질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이기정신부-
자동차 집 뭐든 잘
쓰려면 계속 수리하고 보완하며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해당 안 되는 줄 아는 게 사람 망가지는 길입니다. 큰 집이나 큰 사람이
고장 나면 고가품 고치는 거라 어렵기 한이 없습니다.
국민 책임자들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에 녹슨 사건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유태인 수석 사제들은 로마 황제를 높이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좀 살았다는 분들이시여!
몸 건진 말고 양심건진 이거 아주 중요하잖아요?
“그러자 유다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수석 사제들이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요한 19,15)”
예수님의
죽음은 삶의 결과입니다.
-반영억신부-
오늘은 깊은 침묵
속에 머무릅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모두를 내 놓으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습니다. 당신의 모두를
내어 놓고 아버지의 뜻 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요한15,13-15) 우리를 위한 사랑이 넘쳐났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못하고
권력에 맛들인 이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높이 달려야 했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시고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고발한 사람들에게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8) 하시며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요한13,5) 겸손과 봉사, 참된 사랑의 본을
보여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5)하시며 사랑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가운데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하고 간청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은 선을 낳고 악은 또 다른 악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차마 십자가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오직 사랑밖에
없기에 기꺼이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결국 일상의 삶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삶이었기에 그 삶의 결과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고통이 아니라 그 큰 사랑을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큰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곧
드러내시길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고백 했듯이 우리도 사랑 때문에 죽게 하시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이세상의 삶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삶의 결과이듯 우리의 죽음도 사랑의 삶의 결과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하고 콜로사이 공동체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처럼 사랑을 증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경배를 통하여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여러분은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성녀
쥴리 빌리아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목요일 성유축성 미사 강론에서 장 가브리엘 주교님께서는 교황님께서 한국사제에게 당부하신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1,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지 말고 대 사제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가난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라. 2.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사제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봉사하는 사제가 되어라. 사제는 평신도와 교회에 봉사해야 한다. 사제는 겸손한 봉사자이다. 3,고백성사를 잘 집전하는 사제가 되어라,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 어떤 죄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다. 자비로 감싸주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라. 사제는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잘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이콘(living icon)
-신원확립을
위한 세 질문-
-이수철신부-
얼마전
'이콘과 우상(icon and idol)'이란 글을 의미 깊게 보았습니다.
얼핏보면
비슷한 단어 같지만 내용은 극과 극입니다.
이콘은
눈으로 보는 성서와 같아 기도와 묵상에 도움이 되지만
우상은
우리를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정적 장애물입니다.
10년전
로마에서 베네딕도회 시토회 트라피스트회 수도자 모임 시 미사 중 좋은 반응을 보였던,
생전
처음으로 했던 '살아있는 성상(living icon)'이란 제목의 제 영어 강론 내용도 생각이 납니다.
믿는
이들 모두의 얼굴이 하느님의 살아있는 이콘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이지만 세상에 똑같은 얼굴은, 살아있는 이콘은 없습니다.
얼굴의
신비입니다.
제가
요즘 면담성사를 주면서 부쩍 관심을 갖게되는 얼굴들입니다.
믿음이
투명히 반영되는, 주님을 닮은 '살아있는 이콘' 같은 얼굴을 보면
마치
성모님의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을,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정말
진짜 이콘은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들입니다.
"신부님
주신 큰 말씀의 처방전 때문에 한달은 잘 견디며 지냈습니다.
신부님
늦은 시간인데도 답답해서 하느님
같으신 신부님께
또 하소연 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
주신 책 남동생에게 주었더니 좋아하더라구요.
잘하면
수도원에 갈 것 같기도 해요.
신부님
기도 부탁드립니다.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시는 신부님,
건강하시고 행복한 부활 맞이하세요.“
어제와
며칠 전 받은 카톡 편지입니다.
'하느님
같으신 신부님'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시는 신부님'이라는 대목을 잊지 못합니다.
새삼
사제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이콘이 되어야 함을 깊이 깨닫습니다.
살아있는
이콘의 원형이 예수님입니다.
사랑할수록
닮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을 닮아갔던 얼굴들이 바로 성인들의 얼굴이요
우리가
희망하는 주님을 닮은 우리의 얼굴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성형수술이나 화장이 아닌 사랑공부와 실천을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여
옛 성인교부들은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기도하면서 신학을, 하느님을 공부했습니다.
나이
40세가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자기 얼굴 관리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얼굴
관리에 앞선 마음 관리입니다.
살아있는
이콘의 원형인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이 참 나의 얼굴을 찾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수난 금요일,
말씀을
중심으로 신원정립을 위한 '세 물음(3 W)'을 통해 '살아있는 성상'의 내 얼굴을 찾아 보도록 합시다.
첫째,
"누구를 찾느냐(Whom are you looking for)?"라는 물음입니다.
오늘
수난복음 서두 부분에서 당신을 찾아 나선 성전 경비병들을 향한 예수님의 물음이 심오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근본적 물음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찾습니까?
평생
찾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성전
경비병들은 제대로 찾았습니다.
제대로
찾았지만 무지에 눈이 가려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요.“
정답입니다.
평생
하느님을 찾는 우리들이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찾고 따르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이콘입니다.
하느님의
아드임이자 하늘 위로 올라 가신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신 분,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넷 째 노래에 나오는 분처럼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신 분 역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예수님 바로 그분께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폭로되는 우리의 온갖 죄악입니다.
아,
바로 우리가 찾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원한, 살아있는 이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 거푸 물었고 성전 경비병들의 대답도 똑같았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답변 역시 심오합니다.
"나다(I
AM).“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 'I AM'입니다.
언제나
영원히 있으신 분, 존재하시는 분, 하느님 같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환히 드러나는 대답입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이 말씀에 성전 경비병들은 뒷걸음 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합니다.
진정
찾아야 할 분은 세상 우상들이 아닌 하느님의 이콘인 예수님뿐입니다.
어제
아침성무일도 본기도 첫대목의 말씀도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오니“
주님을
사랑함이 구원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을 닮아 우리 역시 주님의 살아있는 이콘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진리는 무엇인가(What is truth)?"라는 물음입니다.
이
또한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회의주의,
상대주의, 혼합주의가 만연된 시대일수록 절실한 물음입니다.
'진리는
무엇인가?'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한 질문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를 향한 물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단도직입적 물음에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이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아둔한 빌라도는 동문서답식 질문을 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예수님만
아니라 이 또한 우리의 성소요 존재이유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이기에 우리는 진리를 압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천명하신 예수님 말씀을,
또
우리 모두 진리에 몸바치게 되는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간곡한 기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진리는
자유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사랑으로
진리이신 주님과 일치할 때 진정 자유인입니다.
진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바로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다음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 사랑이 눈물겨운 감동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바로
주님이 사랑하던 애제자 요한의 자리가 우리의 자리입니다.
늘
십자가 주님 아래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이런
항구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통해서만 비로소 진리의 실현, 진리의 증언이 이루어집니다.
셋째,
"당신은 어디서 왔소(Where are you from)?"라는 물음입니다.
이
또한 평생화두로 삼아야 할 물음입니다.
빌라도가
두려움 중에 예수님께 한 질문은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우이독경,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임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이 말씀이 힌트입니다.
빌라도
역시 깨닫지는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수중에 있음을 봅니다.
위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았기에
도저히
진리와 더불어 예수님의 근원을 알지 못하는 빌라도입니다.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어느 수녀님의 유명한 정답을 기억합니다.
"I
am from nowhere“
'나는
아무 곳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입니다.
어느
불가의 고승은 임종시 '어디로 가느냐?' 물었을 때
'온
곳이 없는데 갈 곳이 어디 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딱
맞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답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우리의 인생 순례 여정입니다.
분명
어제 주님 만찬 미사 복음중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요한13,3ㄴ) 라는 구절이
이
진리를 입증합니다.
평생화두로
삼아 자문해야 할 세가지 근본적 질문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두 임종어가 또 감동입니다.
"목마르다.“
평생
하느님 아버지를, 진리를 목말라 했던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다
이루어졌다.“
이
또한 평생 삶의 요약입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아버지의 뜻에 충실했던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사랑과
진리, 자유의 완전 실현을 의미합니다.
아침기도
세 번째 후렴의 고백으로 오늘 강론을 마칩니다.
"주의
십자가를 경배하오며 주의 거룩하신 부활을 찬양하나이다.
십자가
나무를 통하여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아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인영균신부-
죽음의
경계선에 선 한 사람을 모두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려있습니다. 하느님이 죽으셨습니다. 죽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고통의 철저함 속에서 비참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지막 자리인 죽음마저 당신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철저한 하나됨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죽음의 의미를 말해줍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
십자가를
차마 쳐다볼 용기도 면목도 없습니다. 숨을 죽이고 가슴만 칠 뿐입니다. 어떤 말도 필요없습니다. 눈물마저도 사치스럽습니다. 오늘은 나의 탓,
우리의 탓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희생임을 마음에 깊이 각인합니다. 사랑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에
새겨집니다. 어제에서 오늘로 넘어오는 시간, 겟세마니에서 주님이 핏땀을 흘리며 고뇌하던 그 시간, 수난 제대에 모셔진 주님 앞에서 내 입에서는
세리의 기도만 흘러나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 19,30)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안계십니다. 늘 함께 계시던
그분이 안계신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늘
그리하셨듯이 언제나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었지요.
그러니
그분은 다시 살아나실
겁니다. 분명 그리하실
겁니다. 여태까지와 다른
방식일지는 몰라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그 약속은
저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성체의
모습으로 매일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몸속 저 깊은
곳까지 오셔서
머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아도 늘 함께 있음을
압니다.
그분이 오늘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슬프진
않습니다. "다 이루시고"
가셨으니 여한도
없습니다.
이제 내 몫이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물리적으로 내곁을
떠났지만 영적으로는 늘 내
마음 안에 살아있음을 잘
압니다. 이제 나도 남은
여생 잘 살아 내몫을 "다
이루는" 그 일만 남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만날 것입니다. 기쁨에 흥겨워
얼싸안고 춤추게 될
것입니다. 암요. 꼭 그리 될
겁니다. 아멘.
아픔과 죄를 품는 넓은 가슴으로
-기경호신부-
오늘은 주님께서
오직 사랑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수난의 신비를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다. 오늘 돌아가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는 것은
그분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나왔음을 표상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외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 사랑의 마지막 증거를 몸소 보여주신다. 빌라도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19,6)라는 군중의 외침에 손을 씻어 보임으로써 그 판결이 자신과는 관계없음을 표현하려 했다. 빌라도는 사람들 앞에
예수님을 끌어내다 보이며 "자, 이 사람이오!"(요한 19,5)라고 말한다. 이제 그분의 어깨에 십자가가
지워진다.
예수님께서는 부당한
판결에 분노하여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18,11) 하고 타이르신다. 그분은
십자가 밑에 세 번씩이나 넘어지면서 무참한 조롱을 당하신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무산시키고, 당신의 가르침과 행적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조롱을 묵묵히 받아들이신다. 성모님과 키레네 사람 시몬과 베로니카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향하여 가시는 사랑의 길에 동행하였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들처럼 "내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마태 25,35-36) ‘너는 나를 도와 십자가를
졌더냐?’ 하고 물으실 것이다.
사람들이 옷을 벗겨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눕히고 못질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예수님의 몸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물이 되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이가 구원에 초대받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손발과 뼈마디를 꿰뚫고 들어오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의 몸은 자기 체중 때문에 갈수록 아래로 처져 기도가 막혀 거칠고 힘겹게 숨을 쉬신다.
십자가 위에 매달린 그분의 몸의 무게와 거친 호흡에 인간의 죄와 세상의 고통이 매달려 있었다. 그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신다. 그분은 자신을 조롱하고 죽이려는 이들의 함성을 철저히
무력하게 하는 사랑의 절규를 쏟아놓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고 울부짖으시며 성부와 더할 나위 없이 깊이 일치하시어 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신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팔을 넓게 벌리시어 당신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이들을 끌어안으시고, 폭력과 음모와 무자비함의 죄를 삼키는
엄청난 구원 업적을 묵묵히 하고 계신다. 우리는 십자가의 횡목 위에 활짝 벌려진 저 팔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사도 17,28).
우리는 한 순간도 사랑의 죽음을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주님!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과 더불어 저도 자신의 죄와 어둠과 교만에 죽게 하소서! 저희 모두 "내 뒤를 따라오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일상의 고통과 오해받음과 모욕과 죄와 죽음을 사랑으로 견디어내고 받아들이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 발이
들려 매달려 계신 예수님과 더불어 아버지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제 자신을 희생제물로 기꺼이 봉헌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고 계신 아드님의 넓고 관대한 품으로 다른 이들과 세상의 어두움과 아픔과 죽음의 문화를 끌어안게 하소서. 수난의 사랑을 회상하며 끊임없이
눈물 흘렸던 성 프란치스코처럼 ‘타자의 아픔’에 울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과 연민의 정을 지니게 해주소서. "목마르다!"(19,28) 하시며
저희의 회개와 사랑을 갈망하시는 예수님의 그 목마름을 살아내게 하소서!
-한상우신부-
"다
이루어졌다."
예수님을
통해 살고 죽는
법을 다시 배우는
성금요일의
시간입니다.
십자가의
수난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새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또다른
이름이 십자가임을 배우게
됩니다.
좀체 자라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것이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라는
세상을 새로이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를 또다시
물어옵니다.
십자가의
발견은 생명의
발견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생명을
자라게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살아있는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위해 십자가를 받아
들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우리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남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기에 당신 사랑으로
부족한 우리 사랑을
채워주십니다.
"다
이루어졌다." 주님께서는
모든
부족함까지도 다 이루어지게
하는 봉헌이
되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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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