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0711. 묵상글 (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 조심하되 걱정하지 않는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25 추가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7.11 05:19
- 조심하되 걱정하지 않는
오늘 늦잠을 부득이 지난 강론을 올림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연중 14주 금요일-2021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해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네 가지 지침을 주시는데 명령어 형태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요약하자면 이제 파견되어 복음을 잘 선포하기 위해서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하는데
사람을 조심하는 것이나 걱정하지 않는 것이나 박해 시 피하는 것이
바로 슬기롭고 순박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거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이제 왜 이런 것들이 슬기롭고 순박한 복음 선포인지 보겠습니다.
슬기로운 복음 선포는 우선 사람들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을 조심하라고 할 때는
그 사람이 사기꾼인지 강도인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이고,
사기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사람을 조심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박해받게 되는 것을 기본으로 상정하십니다.
사실 복음은 모두에게 듣기 좋은 복음이 아니고,
특히 세상의 지배자들에게 듣기 좋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지 이 세상의 복음이 아니기에 근본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들에게는 도전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박해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런 박해 때 박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밀고자도 조심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대건 신부님 축일을 지냈는데 김대건 신부님 가족을 밀고하여
아버지가 순교하고 어머니를 실성케 한 것이 바로 이 집 사위였지요.
다음으로 이런 박해 때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슬기로운 것입니다.
순교의 열망으로 밀고할 테면 해보라며 조심하지 않거나 심지어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천주학쟁이라고 신앙을 증거 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무모하게 그러지말고 박해를 피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조심도 하고 박해를 피했는데도 붙잡히게 되면
그때는 오히려 걱정하지 말고 당당하고 담담할 것이며
순박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당하고 담담하라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순박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순박한 어린이처럼 걱정하지 않는 것이고
이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머리를 굴리지 않는 것인데,
그러는 이유가 성령께서 다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순박하게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뜻에서 오늘 창세기 하느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어서 박해를 받게 되었다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어야 할 것이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얼마나 믿는지는 이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만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꼭 박해 때 뿐이어야겠습니까?
일상의 어려운 순간에도 마찬가지여야겠지요?
아무튼 조심은 하되 걱정은 하지 않고,
슬기롭되 순박한 우리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의 모범이 답이다
“지혜, 사랑, 따름”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시편34,8)
오늘은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은인이자 수호자 사부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모범이신 참 자랑스럽고 훌륭한 하느님의 사람 한 분 성 베네딕도를 만납니다. 성 베네딕도를 생각할 때 마다 요셉수도원의 배경인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언제나 그 자리 거기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요셉수도원 배경의 불암산 같은 성 베네딕도입니다. 이어지는 두편의 시도 제가 즐겨 외우는 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1998.1.27.>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부 성 베네딕도는 이런 ‘산과 강’같은 분입니다. 저는 그래서 성 베네딕도의 영성을 산과 강의 영성이라 부르곤 합니다. 이어 작년에 썼던 “산앞에서 서면”이란 시에서 제가 늘 바라보는 사랑하는 불암산은 주님을 또 성 베네딕도를 상징합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2024.9.29.>
어떻게 산처럼, 강처럼, 꽃처럼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이 답을 줍니다.
첫째, 지혜를 찾는 삶입니다.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삶의 꼴입니다. 참으로 성 베네딕도는 잠언에서처럼 지혜를 추구했던 현자였습니다.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주님이 바로 지혜 자체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찾을수록 지혜로운 삶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에게는 중용과 분별력이 지혜이며 규칙서는 지혜의 결정체이기도 합니다. 성 대 교황 그레고리오는 다음과 같이 성인의 규칙서에 아낌없는 찬사를 바칩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슬기로운 절제와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했도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도다.”
참으로 지혜로운 성 베네딕도입니다. 전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인터뷰 기사에서 관용과 자제, 겸손이 바로 지혜임도 깨달았습니다.
“민주주의가, 그 본질이 뭐냐? 논의 결과 관용과 자제가 훨씬 쉽겠다고 나왔다. 관용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거고 자제는 자기가 힘이 있어도 참고 쓰지 않는 거다. 그렇다면 12.3 비상계엄은 관용과 자제의 기준으로 보아도 벗어났다. 법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겸손이다. 겸손해야 경청하고 겸손해야만 성실해진다.”
둘째, 사랑의 수행자로서의 삶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사랑의 권고가 참 아름답습니다. 이런 사랑은 그대로 지혜가 됩니다. 사랑의 지혜입니다. 흡사 성 베네딕도의 권고처럼 들립니다. 규칙서의 정신과도 일치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마지막 사랑의 옷을 입으라는 참 지혜로운 권고입니다. 바로 이런 이웃사랑의 모범이 성 베네딕도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총이 전제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수평적 이웃사랑도 수직적 하느님 사랑과 깊이 연관됨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감사와 찬미가 바로 진짜 천상적 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셋째,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의 희망이자 꿈이자 평화입니다. 우리의 모두입니다. 주 예수님을 따르는 예닮의 여정에 충실할 때 참 기쁨이요 참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모두를 버리고 따라 나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백배의 상급을 받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도 약속하십니다. 바로 이 수혜자중 한분이 성 베네딕도이며 그 제자들인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 나섬 자체가 축복임을 깨달아 자주 고백하는 제 행복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하루하루가 축복이요 주님과 함께하는 자체가 축복이요 보상인데,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하늘 나라의 삶인데 더 뭐를 더 바라겠는지요! 아마도 우리 사랑하는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이런 축복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닮았던 사부 성 베네딕도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또한 우리 모두 주님을 닮게 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제자들을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이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도 합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 하면서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서방 수도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믿음과 질서, 기도와 노동을 통해 공동체를 일으키셨습니다.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문명이 파괴되는 암흑의 시대였지만, 그는 절망 대신 ‘하느님을 찾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LA에서는 이민자들에 대한 과도한 단속과 그에 따른 시민들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정부는 군인을 투입해 진압하고, 이민자 단속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 시민들은 저항하고 있고, 우리 교구의 교구장님께서는 모든 이민자의 존엄을 옹호하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셨습니다. 그 서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국가적인 혼란과 이민자 가정들 사이에 커지는 두려움 속에서, 저는 복음의 중심과 우리 교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달라스 교구는 모든 연약한 이들, 특히 이민자와 난민을 동반하는 사명을 굳건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신앙인의 정체성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든 국가가 자국의 국경을 보호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모든 가정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특히 빈곤과 폭력, 박해를 피해 떠나는 이들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더욱 절실하다는 것도 확고히 믿습니다.
이 순간, 북텍사스에 사는 많은 이민자 형제자매는 추방, 가족의 분리, 그리고 자신들이 힘들게 일구어 온 삶의 터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낯선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본당 신자이며, 학생이며, 이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입니다. 모든 이민자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임을 결코 잊지 맙시다. ‘나는 낯선 이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들였다’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정신 안에서, 우리는 모든 가톨릭 신자는 분열이나 분노가 아니라, 믿음과 기도, 연민으로 응답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우리 교구는 계속해서 본당, 가톨릭 자선회, 교구 사무국을 통해 필요한 이들에게 지원, 법률 상담, 사목적 돌봄, 영적 동반을 제공할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옳고 정의로운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으며, 우리는 자비롭고 인간적인 이민법 개혁을 지지합니다. 법의 원칙을 존중하면서도 가족의 신성을 지켜주는 정책이 마련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우리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이 지혜와 용기, 자비로 이끌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자이신 과달루페의 성모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전구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심으로, ✠ 달라스 교구장 에드워드 J. 번스 주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한때는 이집트에서 이방인으로 살지 않았느냐?” 이 말은 단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깨우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어느 시대, 어느 땅에서나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낯선 환경, 낯선 언어, 낯선 법의 그늘에 서 있는 사람들. 그러나 낯섦은 하느님의 심판 근거가 아니라, 자비의 이유입니다. 성 베네딕토는 혼란 속에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산속으로 들어갔고, 기도와 노동을 통해 질서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교회와 사회가 모두 흔들리는 상황에서 ‘신앙 공동체’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두려움 속에 웅크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믿음의 등불을 높이 드는 용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끝까지 견디라’라는 단순한 인내의 덕목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사랑과 정의를 포기하지 말라는 초대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Geworfenes Dasein)”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지고, 정해진 틀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이민자, 난민, 가난한 자, 병든 자는 모두 ‘낯선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 낯섦의 한복판에 계신다.” 낯선 땅에서 불안 속에 살아가는 이민자들, 이름 없이 사라지는 노동자들, 경계에서 밀려나는 이웃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봅니다. 오늘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세상 속 혼란과 불안 앞에서 피하겠는가, 아니면 다시 불꽃을 지피겠는가?” 우리는 믿음을 피난처가 아니라 불꽃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회의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복음의 정의와 자비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바로 성인의 길입니다. 성 베네딕토의 정신을 다시 지피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그 유산을 따라 복음의 삶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과달루페의 성모님,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요나: 종교, 정치, 예언...
하느님의 숨
2025.07.10. 18:2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7월 10일 목요일 - 스물여덟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요나와 하느님의 괴이한 자비(Jonah and God's Scandalous Mercy)
요나는 종교적으로 동기부여를 받은 정치 활동가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랍비 슈물리 얀크로비츠 박사(Dr. Shmuly Yanklowitz)는 요나의 행위를 신앙과 정치에 의해 촉발된 항의로 묘사합니다:
시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시위한다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시위 행위는 긍정적인 발걸음이기도 합니다. 시위는 인간의 행동에 책임을 묻고, 인간 제도를 바로잡으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우리의 확신을 상징합니다. 시위는 불평등, 증오, 탐욕, 그리고 심지어 두려움과 싸우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이 왜 의의가 있는 것일까요?
요나서는 종교적인 행위가 정치적으로는 체제전복의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부터 시작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첫 번째 두 개의 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종교적으로 동기부여를 받은 정치 활동가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사회를 거슬러 항의를 표하라고 분부하십니다. 우리가 종종 공적으로 하는 정치적 시위를 세속의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요나서에서 하느님은 요나라는 예언자에게 종교적 행동을 취하라는 소명을 주십니다. [1]
리처드 로어는 예언자들이 어떻게 해서 자주 "정치적인 이들"이라는 비판을 받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당신은 영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하는군요." 하고 말할 때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자들은 권력의 오용에 대해 말하지만, 언제나 영감을 받은 더 높은 차원의 도덕성을 지니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시민의 권리를 외친 마틴 루터 킹 주니어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성직자들의 개혁과 평화 조성을 옹호한 시에나 카타리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노예 제도 폐지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를 생각해 보십시오; 농장 노동자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일한 세자르 차베스(César Chávez)의 업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했던 비평과 약속은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안에서 제시되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영적 의미와 동기가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힘없는 이들에게는 기꺼이 받아들여졌지만, 교만한 이득 추구자들과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멸시되고 거부되었습니다.
요나는 니네베가 고통을 받기를 바랐던 애국자요 국수주의자였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언제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통치하심"(하느님 나라)이라고 칭하신 바를 실현하기 위해 일하는 범국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했던 "정치적"인 외침 안에서 예언자들은 언제나 인간의 관계성들은 물론이고 하느님과의 관계성마저도 파괴하는 권력 방정식(power equations)을 지적하며 거기에 맞섰던 사람들입니다. [2]
얀클로비츠는 예언자들에게 있었던 중압감이 지닌 의미에 대해 존중하여 말합니다:
우리 중 많은 이는 우리가 충분히 행동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 무거운 책임감이라는 엄청난 중압감으로 인해 지쳐 있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지어 예언자마저도 그 중압감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으며, 그래서 그에 대한 대응으로 자신의 책임감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3] 요나는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바로 요나인 셈입니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멋지게 느껴지지도 않고 인기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예언자는 파티의 주인공도 아닙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요청과 인간의 필요 사이에서 곡예를 부려야 하는 불안한 존재입니다. 고립이나 죽음까지도 끊임없이 감수해야 하는 예언자는 소외되고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4]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CAC의 매일 묵상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강의를 통해 엄청난 도움을 받았습니다. CAC는 제 신앙이 해체되고 재건되는 이 시기에 제게 생명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금 제게 있어 가장 큰 도전은 제 기도 생활입니다; 가부장적인 하느님을 뒤로 하고 떠나온 지금 저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저는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태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쳐야 할 이 과정을 신뢰하고, 영적인 삶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며 기도와 명상을 계속한다면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Hilary L.
References
[1] Shmuly Yanklowitz, The Book of Jonah: A Social Justice Commentary (Central Conference of American Rabbis, 2020), 1.
[2]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Tears of Things: Prophetic Wisdom for an Age of Outrage (Convergent, 2025), 87–88.
[3] 랍비 얀클로비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는지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일가요? 아니면 침묵과 영적인 참여로부터 도망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죽어야 할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일까요? 우리는 난해한 신학적 질문들을 피하는 것이 좋을까요? 실제로 이런 문제들 안에서 숨어 있고자 하는 것은 인간 뿐입니다." (Yanklowitz, 142).
[4] Yanklowitz, Book of Jonah, 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ong Marshes, untitled (detail), 2017,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물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당황하여 발버둥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물 위로 끌어올려 주시는 하느님 자비의 부드러운 햇볕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우리 마음이 완고해진 것은 아닌가요?
====================
숨영성 묵상글
참된 호연지기의 삶을 향해....
하느님의 숨
2025.07.11. 05:59
이집트 제2의 권력자였던 요셉과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가 결국은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의 형제들과의 대화는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연상시켜 줍니다. 요셉은 자기 권력을 다 내려놓은 채 대화의 장벽을 깨버리고(필리 2,7),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는(필리 2,7-8), 그의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저에게 가까이 오십시오."(창세 45,4).
아가서를 보면 하느님께서는"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주오." 하며 바위틈에 숨어있는 사랑하는 이를 애타게 부르십니다(아가 2,14).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우리를)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시는 분"이십니다(호세 11,4).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가까이) 오너라."(마태 11,28).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 11,29) 당신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우리를 어르어 주십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권고 진복팔단이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든가, 목숨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든가, 아니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당신 때문에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등의 다른 권고들에 더 신경이 쓰이는가 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이 양극의 두 상황을 한 번 우리 삶과 연결시켜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 삶을 높은 산에 오르는 여정에 비유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삶은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기에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마치 산 정상을 오르는 과정과도 같을 것입니다. 등산을 하다 보면 고통스러운 과정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이 과정들을 하나하나 넘어서고 정상에 오르게 되면 "천지간에 가득 찬 넓고 큰 원기를 의미하는 호연지기"와 같은 그 어떤 용기와 자유로운 영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 인생의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그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거쳐야 하는 당연한 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에고의 유혹에서 벗어나(자기를 버리고, 즉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그 어려운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여(십자가를 지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더러) 당신께 가까이 오라고(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이 인생의 여정에서 힘을 줄 것이니 용기를 내어 당신의 힘을 받아 결연한 마음으로 산의 정상에 오르라고 격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창세기의 요셉은 예수님을 전조해 주는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자기 형제들에서 질투와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하려다 이집트로 팔려간 신세가 되었지만, 오히려 이 상황을 이렇게 해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이게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께 온전한 신뢰심을 드리면서 높은 산을 오르는 우리 삶의 등정 과정에서 함께 걸어가 주시는 우리 주님의 현존을 시시각각으로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동안 우리의 이기심이나 욕심으로 낭패를 보는 순간에도 요셉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이런 주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요셉의 형제들처럼 우리 에고의 유혹에 넘어가 나가 자빠진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요셉처럼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라며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는 분이심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는 단순한 용서의 기도가 아니라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기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 자신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부러 고통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삶에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도 당신처럼 다른 이들에게 그러한 용서와 용기를 주는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우리에게 전해진 이 기쁜 소식은 '나'만을 위한 보증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보증인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 주님의 이 헤아릴 길 없는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며 차곡차곡 우리 마음에 쌓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또 다른 예수님, 또 다른 그리스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연속되는 것이 결국 이 삶 이후에 연결될 참된 하느님 나라의 삶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약점과 부족함 때문에 겪게 되는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또다시 일어나 우리 생명의 원천이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의 손을 붙잡고 다시 시작하는 삶을 죽을 때까지 결연히 해가도록 합시다!
우리가 삶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도 사실은 궁극적으로 볼 때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맹자는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물망물조](勿忘勿助: 잊지도 조장하지도 않는 삶)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호연지기의 의와 도를 일상에서 실천하되 자신의 힘을 믿지도 말고, 또 결과에 집착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키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맹자도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삶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믿은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마태 10,17)
그들이 너희를 채찍질 할 것이다
또다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십니다. 그들은 부당한 대우와 남들이 가하는 벌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십나다. 이는 선을 위해 악을 참고 견딜 때 승리가 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그들에게 영원한 전리품이 마련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하는 이들과 맞서 싸우거나 저항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극한의 고통을 당신이 함께 겪어 주시리라는 것 뿐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우리는 이 작은 성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난다. 하느님이 그렇듯이, 하느님 나라도 단순하고 단일하다. 그것은 이름도 없고, 형태도 없고, 완전히 자유롭고 텅 버어 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이 자신 안에서 자유롭고 텅 비어 있는 것과 같다. 하느님 나라야말로 사람과 하느님의 공유지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름 불일 수 없는 신성과 접촉하고, 하느님은 신적인 이름과 위격을 떠나서 안으로 들어온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성을 깨닫고, 하느님의 형상과 모상인 우리 존재의 실현을 실감한다. 영혼이 하느님과 대등해지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 부분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과 대등하다는 것이 확인되고, 우리의 신성이 경험된다. 액카르트는 바울로 사도의 말에 기대어, 우리가 신적이고 하느님의 모습을 한 존재라고 설명한다.
있는 그대로의 본질, 곧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자신의 본질 속에서, 하느님은 꾸멈없는 마음의 본질, 곧 지성과 의지보다 뛰어난 마음의 본질 속으로 들어기십니다. 마음의 본질이 지성과 의지보다 뛰어난 것은 본질이 그 기능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를 통해 이 성으로 들어가셔서, 신적인 존재를 은혜로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듯이, 신적인 존재는 존재의 본질과 관계가 있습니다.(422)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이 세상의 삶에서 먹고살 만큼에 해당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품위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합니다. 이웃과의 우정에 대해서도 범위를 너무 좁게 잡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어떤 사람에게는 좀 더 강하게, 어떤 사람에게는 약하게 느끼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호감과 사랑을 받거나 주고 싶은 모든 사람이 우정의 대상입니다. 원수들조차도 우리의 우정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우정의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 모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를 거룩하고 헌신적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우리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친구들을 가진 사람은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직 그러한 우정을 나눌 사람들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러한 사람물을 가지게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행복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목표인 하느님
우리가 가진 인간적인 동경을 채울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 우리가 가진 이 동경은 그것이 참으로 채워지기까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기도하게” 한다. 이 동경이 채워지는 데에는 “이 하나가 꼭 필요하다"(257)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시험 성적을 잘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사업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할까요? 그렇다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마 열이면 열, 모두 이렇게 답변하실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말했었고 또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노력만으로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열심히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보다 하느님의 뜻이 중요했습니다. 이 뜻을 찾은 사람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힘든 일을 피해 가지 않으며, 가진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만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로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했다고 반드시 행복할까요? 또 가진 것이 많아야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손길 없이 행복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적인 노력은 세상의 물질적 가치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는 운이 좋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에 이어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는 장면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하시지요. 그래서 “내가 너희를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양처럼 보낸다.”(마태 10,16)라고 말씀하시면서, 회당에서 채찍질 당하고,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라고, 또 가족 간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고(마태 10,19 참조),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마태 10,22 참조).
어떻습니까? 세상의 논리로 따졌을 때, 과연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끔찍한 삶이고, ‘왜 저렇게 살아야 해?’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세상 것 너머에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시간과 이 세상의 시간은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을 ‘영원한 생명의 삶’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이 세상 삶은 짧은 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1초의 행복을 구하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행복을 구하겠습니까? 세상 논리만을 좇는 사람은 모두 1초의 행복을 구하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사람이 아닐까요?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일러 주실 것이고, 우리 안에서 아버지의 영이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마태 10,19-20 참조). 이것이 하느님의 손길에 굳게 믿고, 하느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면서 끝까지 견디는 이만이 구원을 받습니다(마태 10,22 참조).
-------------------
오늘의 명언: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에이브러햄 링컨).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수도와 은수로 예수님 가신 그 길을
박윤식 [big-llight] 2025-07-10 ㅣNo.183372
서방교회 수도 생활의 아버지인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경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그의 쌍둥이 누이동생이다.
그는 청소년기에 로마에서 수학하면서 로마의 멸망을 겪는 교회의 혼란스러운 모습에 환멸을 느껴
고향 근처의 고요한 광야를 찾아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준비 없는 수도 영성이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인적이 드물고, 찾기 어려운 수비아코의 동굴에 정착하게 되었다.
성인은 3년이나 그 동굴에서 밧줄에 매달아 내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고독과 철저한 금욕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는 온전히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 사는 것이 소망이었지만,
그의 성덕과 엄격한 생활이 주위에 널리 알려지자
한 수도공동체에 알려져 그들로부터 원장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성인의 엄격한 규칙에 반대하였기에 수비아코의 동굴로 되돌아왔다.
그 후 여전히 많은 곳에서 그를 찾아 몰려왔다.
그리하여 수비아코는 영성과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529년경 그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수비아코를 떠나 몬테카시노로 이주해
서방교회 수도원의 발생지가 되는 대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인근에 여자 수도원을 설립하고 자기를 뒤따라 수도생활을 시작한
쌍둥이 여동생 성녀 스콜라스티카에게 초대 원장의 직분을 맡겼다.
그는 오랜 체험으로 흐트러진 수도생활을 바로잡고
서방교회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상식을 존중하면서 올바른 금욕생활 속에서 기도와 독서,
그리고 노동을 실천하도록 하며 수도생활을 규정하는 규칙서를 썼다.
이렇게 해서 성 베네딕토의 수도 생활 정신을 온전히 담아
서방교회 수도 생활의 기초인 ‘수도 규칙’을 만들었다.
이는 서방교회에 새로 설립되는 여러 수도원의 규칙에 적용되면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모토는 ‘기도하고 일하라’로, 성무일도를 중심으로 한 기도와 노동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선종하고 얼마 후,
547년 3월 21일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에서 두 수도승의 팔에 의지해
양팔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가운데 선 채로 선종하였다.
성인의 축일은 사순시기와 겹치는 관계로 로마전례력 개정 작업으로 7월 11일로 옮겨졌다.
베네딕토 성인은 1964년 10월 24일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가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서방교회 수도 생활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성인인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원을 개혁하려는 도중에 많은 이로부터 반발을 받기도 하였다.
어느 날 어떤 이가 성인이 마실 포도주에 독약을 넣었지만,
성인이 십자 성호를 그었더니 잔이 깨졌다.
또 그를 시기한 이가 빵에 독을 넣어 선물하였지만,
성인은 이를 알고 까마귀를 통해 그것을 버리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기도와 일로 수도생활의 삶을 실천한,
베네딕토 성인을 여러 번 죽음에서 구원하셨다.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세 번째 마지막 이야기, 신앙인의 카리스마는 어디서 나오는가?
강만연 [fisherpeter] 250710. 20:52 ㅣNo.183369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는지요? 어떤 신자는 비록 평범한 신자이지만 성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에 거의 근접할 정도로 뭔지는 모르지만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 말입니다. 또한 그런 분이 그렇다고 뭔가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지으려고 방어막을 치는가 하느냐면 그런 모습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사람들이 대개 공통적으로 그런 분께 하는 행동을 보면 대개 다 평소 사람이 경거망동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 사람조차도 그런 분께 쉽게 행동하지 않는 걸 보면서 과연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해서 주위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렇게 대해 주는지 요인이라고 할까요 그게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를 고민해 본 적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수녀님과 만나서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제외하고 들려드릴 마지막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바로 '신앙인의 카리스마는 무엇이 결정하는가?' 입니다. 방금전에 언급한 내용은 제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데 밑밥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인위적으로 어떻게 연출한다고 해서 연출이 될 수 있을까요? 절대 연출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연출이 된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어느 정도는 철저히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닌 타인의 모습으로 위장을 한다고 해도 오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온 저력, 일종의 관성, 이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물리법칙 '관성의 법칙'을 예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다시 한 번 더 상기를 돕고자 다시 한 번 더 이해를 해봤으면 합니다.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면 가령 평면에서 공을 굴리는데 공과 맞닿는 평면에 마찰저항이 없다고 전제한다면 그 면이 계속 존재한다고 했을 때 외부에서 그 공에 외적인 힘을 가하지 않는 이상 그 공은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계속 굴러가려고 하는 성질이 있고 또 역으로 어떻게 외적인 힘을 가해 원래 처음 공에 가한 힘보다 더 큰 힘으로 막게 된다면 그런 상태에서 다른 물리적인 힘이 가하여지지 않는 이상 그렇게 해서 정지된 공은 그 상태 그대로 있으려고 하는 성질, 이 역시도 관성입니다. 그럼 이 두 가지 역반응의 모습을 모순이 아닌 상태로 쉽게 정리를 포괄적으로 하게 된다면 단순히 다음과 같이 표현을 해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태가 있다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힘 바로 그 힘이 관성의 성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면 제가 서두에 언급한 신앙생활에서 어떤 독실한 신앙인이 있다고 했을 때 과연 그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의 카리스마는 과연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가를 고민해본다면 이제는 왜 조금전에 인위적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위장을 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계가 있다는 뜻이 관성의 법칙을 조금 이해한다면 확실하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위장의 힘이 계속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그 임계점, 한계점에서 원래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바로 한계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다 이해가 되신다면 이제는 서두에 언급한 사람들의 카리스마는 과연 어디서 나오는가를 좀 더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겁니다. 그냥은 그런 힘이 절대로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런 카리스마도 그냥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고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너져도 또 일어나고 무엇보다도 예수님만을 잘 섬기고 따라가겠다고 하는 결연한 뜻을 잘 실천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전형적인 힘 이런 걸 가지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분들에게도 쉽게 감히 범접하기도 힘든 상황이 그래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원래 뜻은 우리가 아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강한 뭔가 다른 독특한 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강한 힘을 카리스마라고 표현하지만 원래의 뜻은 개인적인 매력입니다. 이제 정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독실하고 신실한 신자의 카리스마는 과연 어디서 나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답은 정확한 정답은 제시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의 설명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설명 속에서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다시 답을 제시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진지하게 고민해보시는 것도 유익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마지막 이 이야기의 내용을 정리하는 게 가장 힘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분에게는 이게 자신의 신앙을 가꾸어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구심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한번 진지하게 이런 부분을 묵상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봅니다. 이제 마치겠습니다. 세 번으로 나누어서 수녀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제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문제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만 제가 정리를 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수녀님께서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언젠가 한 번은 보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좋은 영적인 유익한 말씀을 무상으로 전해 주셔서 진심으로 수녀님께 감사함을 지면을 통해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녀님.
----------------------------------------------------
==========================================================
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하얀 셔츠
서하 [nansimba] 250711. 00:55 ㅣNo.183373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마태 10,16)
나는 지난 주일 복음을 묵상하며
나에게 있어 '이리 떼'는 어디인가를 자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질문은 조용히 방향을 틉니다.
이제는 나를 '양'으로 보내시는 그분의 의도에 머물고 싶어집니다.
왜 양인가? - 연약함의 선택
왜 하느님은 우리를 힘 있는 자, 말 잘하는 자, 무장된 자로 만들지 않으시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 도망치지 못하는 존재,
울음으로밖에 저항하지 못하는 ' 양 '으로 보내실까요?
시편의 시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1)
양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바로 그 의존성 안에서 진정한 안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 또한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라고 하시며
우리와 같은 양의 존재방식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진짜 사랑의 모습 - 힘이 아닌 현존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진짜 사랑은 힘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곁에 남는 존재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우리는 보통 더 강해지려 합니다.
더 논리적으로, 더 공격적으로, 더 영리하게 대응하려 합니다.
하지만 양으로 산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적으로 만들지 않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진실한 눈빛으로,
때로는 변함없는 성실함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마스크를 벗고 존재하기 - 양으로 사는 삶
양으로 산다는 것은
마스크를 벗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SNS에서 완벽한 모습을 연출하려 애쓰는 대신,
진짜 나를 드러내는 용기를 내는 것.
가족과의 갈등에서 누가 옳은지 따지기보다 다,
그저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받으려 무리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진심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마라"(마태 19,14)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어린이처럼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연약함의 얼굴로 부르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연약함의 얼굴을 하고
우리를 세상 속으로 부르십니다.
"거기 있어라, 도망치지 마라.
너를 무섭게 만드는 그 자리에서 존재하라."
그것이 곧 '파견'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모든 힘을 포기하셨습니다.
변호하지도, 증명하지도, 복수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가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무방비한 존재가
오히려 가장 강력한 사랑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의 존재 - 무모함이 아닌 용기
이리 떼 가운데 보낸다는 말은
우리에게 두려움 없는 전진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움 속에서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 길을 가리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할 때,
부모는 아이에게 "더 강해져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괜찮다, 엄마가 있다"라고 말하며 아이 곁에 머물러 줍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이사 43,5).
질병으로 고통받을 때,
실직으로 좌절할 때,
관계의 상처로 아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며 사랑을 배우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드디어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주님,
저를 양처럼 보내신 뜻을
이제야 조금 이해합니다.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라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존재로 사랑을 살아가게 해 주소서.
아멘.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
----------------------------------------------------
25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0,16-23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도 어제에 이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건네시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먼저 그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힘 없고 약한 ‘양’과 같은 사도들을 탐욕으로 잔뜩 굶주려 포악해진 ‘이리’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신다니, 세속적인 시각으로 보기에 이는 다윗이 자기 부하 우리야를 가장 위험한 전장에서 선봉에 서게 한 것처럼, 거의 죽으라고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양들은 십중팔구 이리들에게 잡아먹힐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믿고 사랑하는 사도들을 그저 개죽음 당하라고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희생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신 것처럼, 사도들이 당신의 뜻과 가르침을 따르는 복음적 삶을 통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싹틔우고 자라게 하는 ‘밀알’이 되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당연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목숨을 잃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널리 퍼뜨리는 민들레 홀씨가 된다면 그들의 희생은 절대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큰 기쁨과 영광이라는 보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 안위만 지키려고 든다면,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이리들의 마음에 들어 그들 무리에 속하려 든다면, 바보같이 계속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엔 잡아먹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의미도 보람도 찾을 수 없는 ‘개죽음’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 기준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뱀처럼 슬기로워지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즉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데 자꾸만 사람을 믿어서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원하는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믿기에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다 자기가 다른 이에게 기대하고 바란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며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지요. 그러나 사람은 자기 머리카락 하나조차 제 뜻대로 하지 못하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입니다. 그 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는 사람을 믿지 않기에 상처 받을 일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아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며 대범하게 넘어가기에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죄를 지을 일도 없습니다.
한편, 비둘기처럼 순박해지라는 말씀은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순진 무구한 어린 아이들이 전적으로 부모를 믿고 자신을 의탁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온전히 믿고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걱정에 무겁게 짓눌려 한숨 쉴 일이 줄어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뜻에 따라 알아서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희망 속에서 매 순간을 기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가 동전 몇 닢만 가지고 커다란 병원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어린이처럼 순수하게 하느님을 믿고 온전히 의탁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주님께서 시키신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
================================================
================================================
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81
7월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연중 제14주간 금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의정부교구 강태현 안드레아(진접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냥 순박함이 아니라 슬기로움을 토대로 한 순박함입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꼭 필요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선과 악이 공존하는 요동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조건 착해빠져서만은 안될 것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 참 많이 봤습니다. 어디 가나 사람 좋다는 말 듣습니다. 누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갑니다. 언제나 속아 넘어가고 이용당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뱀처럼 슬기로운 태도입니다. 슬기로움이란 지혜로움입니다. 이상과 현실을 잘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정확한 식별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균형감각을 지니고 상식을 중요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약삭빠르고 계산적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비둘기처럼 순박한 자세가 또한 필요합니다. 그냥 순박함이 아니라 슬기로움을 토대로 한 순박함입니다. 슬기로움 역시 순박함을 기초로 한 슬기로움입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최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선포의 길에서 고유한 매력과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갖은 유형의 적대자들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탁월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지만, 최첨단•글로벌 세상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모범사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우등생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경쟁력과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복음 정신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며, 삶을 통한 복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깊고 착하기만 하지 성적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지라는 주님 말씀에 좀 더 방점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의 빛나는 승리의 길, 강한 경쟁력, 불굴의 의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결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악한 이리 떼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도 패배자나 낙오자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 사랑 받는 사도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
<우리 입에서 언제 힘 있는 말이 나오는가?>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앞둔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할까,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신앙의 위대한 선조들이 남긴 마지막 말에서 우리는 그 답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마지막 증언에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교회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원망이나 저주가 아닌 용서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 7,59-60)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 대신 평화가 가득합니다.
뜨거운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는 고통에 찬 비명 대신 박해자를 향해 태연히 외쳤습니다. “자, 이쪽은 다 익었으니, 나를 뒤집어서 다른 쪽도 굽게 하시오!” 죽음을 조롱하는 듯한 이 거룩한 담대함 앞에 공포는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원수가 아니라, 하느님께 데려다줄 친근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는 눈을 감으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소서, 나의 자매인 죽음이여.”
이태석 신부님은 “Everything is good.”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까지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말씀을 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마귀가 세속과 육신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이 무기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영혼, 즉 삼구가 죽어버린 영혼 안에는 텅 빈 공간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텅 빈 자리는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채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할 때 성령의 말씀이 나올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이 영적 원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알아두시오. 우리의 원수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으니, 바로 세속(世俗)과 육신(肉身)과 마귀(魔鬼)입니다. 이 세 원수는 밤낮으로 우리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 이 삼구와 싸워 이기지 못하면, 천국의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성인들은 바로 이 전투의 대가들이었습니다. 그들 안에서 '나'라고 불리는 옛 인간이 죽었기에, 죽음은 더 이상 그들을 위협하는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자신에게서 비워졌을 때, 성령께서 그 안을 가득 채우시고 당신의 말씀을 그들의 입에 담아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죽음이라는 무기를 역으로 사용하여 나의 자아와 삼구의 욕망을 이길 때,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는 힘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성인이 바로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십니다.
비오 신부님은 마지막 순간뿐 아니라, 평생의 모든 순간이 삼구와의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오상(五傷)은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의 표징이었고, 밤마다 악마와 싸운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는 세상의 편안함과 명예를 철저히 멀리했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렇게 매일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았기에, 그의 평범한 한마디 한마디에는 엄청난 힘이 실렸습니다.
그가 고해소에서 죄인에게 건넨 짧은 권고, 불안에 떠는 이에게 던진 “기도하고, 희망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단순한 말은 수많은 영혼을 뒤흔들고 하느님께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말이 힘이 있었던 이유는, 그 말 안에 비오 신부님 자신의 자아가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정화된 영혼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힘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 삼구를 죽이는 '죽음'을 두려운 원수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나의 이기심이 고개를 들 때, 헛된 욕망이 나를 유혹할 때,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오려 할 때,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자매인 죽음'을 초대하여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죽여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단언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1코린 15,31)
우리가 이렇게 날마다 죽을 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될 것입니다.(갈라 2,20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입을 통해 말씀하실 것입니다. 매일을 마지막 날로 삼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말은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위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성령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서방 수도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믿음과 질서, 기도와 노동을 통해 공동체를 일으키셨습니다.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문명이 파괴되는 암흑의 시대였지만, 그는 절망 대신 ‘하느님을 찾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LA에서는 이민자들에 대한 과도한 단속과 그에 따른 시민들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정부는 군인을 투입해 진압하고, 이민자 단속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 시민들은 저항하고 있고, 우리 교구의 교구장님께서는 모든 이민자의 존엄을 옹호하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셨습니다. 그 서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국가적인 혼란과 이민자 가정들 사이에 커지는 두려움 속에서, 저는 복음의 중심과 우리 교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달라스 교구는 모든 연약한 이들, 특히 이민자와 난민을 동반하는 사명을 굳건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신앙인의 정체성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든 국가가 자국의 국경을 보호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모든 가정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특히 빈곤과 폭력, 박해를 피해 떠나는 이들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더욱 절실하다는 것도 확고히 믿습니다.
이 순간, 북텍사스에 사는 많은 이민자 형제자매는 추방, 가족의 분리, 그리고 자신들이 힘들게 일구어 온 삶의 터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낯선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본당 신자이며, 학생이며, 이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입니다. 모든 이민자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임을 결코 잊지 맙시다. ‘나는 낯선 이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들였다’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정신 안에서, 우리는 모든 가톨릭 신자는 분열이나 분노가 아니라, 믿음과 기도, 연민으로 응답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우리 교구는 계속해서 본당, 가톨릭 자선회, 교구 사무국을 통해 필요한 이들에게 지원, 법률 상담, 사목적 돌봄, 영적 동반을 제공할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옳고 정의로운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으며, 우리는 자비롭고 인간적인 이민법 개혁을 지지합니다. 법의 원칙을 존중하면서도 가족의 신성을 지켜주는 정책이 마련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우리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이 지혜와 용기, 자비로 이끌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자이신 과달루페의 성모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전구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심으로, ✠ 달라스 교구장 에드워드 J. 번스 주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한때는 이집트에서 이방인으로 살지 않았느냐?” 이 말은 단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깨우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어느 시대, 어느 땅에서나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낯선 환경, 낯선 언어, 낯선 법의 그늘에 서 있는 사람들. 그러나 낯섦은 하느님의 심판 근거가 아니라, 자비의 이유입니다. 성 베네딕토는 혼란 속에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산속으로 들어갔고, 기도와 노동을 통해 질서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교회와 사회가 모두 흔들리는 상황에서 ‘신앙 공동체’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두려움 속에 웅크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믿음의 등불을 높이 드는 용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끝까지 견디라’라는 단순한 인내의 덕목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사랑과 정의를 포기하지 말라는 초대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Geworfenes Dasein)”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지고, 정해진 틀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이민자, 난민, 가난한 자, 병든 자는 모두 ‘낯선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 낯섦의 한복판에 계신다.” 낯선 땅에서 불안 속에 살아가는 이민자들, 이름 없이 사라지는 노동자들, 경계에서 밀려나는 이웃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봅니다. 오늘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세상 속 혼란과 불안 앞에서 피하겠는가, 아니면 다시 불꽃을 지피겠는가?” 우리는 믿음을 피난처가 아니라 불꽃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회의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복음의 정의와 자비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바로 성인의 길입니다. 성 베네딕토의 정신을 다시 지피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그 유산을 따라 복음의 삶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과달루페의 성모님,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제자들은 앞으로 박해를 겪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나를 증언하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8)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렇게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고통과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제자들은 그 순간에 오히려 더욱더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명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까요?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시고, 해야 할 바를 하도록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기에 죽음조차도 그들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힘으로만 증언할 수 있기에, 인간의 힘만으로 해 보려는 태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걱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지혜와 힘으로 해 보려는 자세이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미리 알려 주시지 않고 증언해야 할 바로 그때에 알려 주시는 것도, 미리 앎으로써 인간이 자기 지혜와 힘을 섞게 되는 것을 막으시려는 의도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박해받을 제자들에게 미리 당부하시는 ‘뱀 같은 슬기’란, 증언이 하느님의 몫이며 우리의 몫은 온전히 그분께 의탁하는 것임을 아는 것인 듯합니다. 그리고 ‘비둘기 같은 순박함’은, 순박함이라는 단어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과 외곬, 단순함을 뜻한다는 점에서 오직 하느님과 그분 뜻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자세를 일컫는 듯합니다. 하느님과 그분 뜻만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의탁하는 자세가 참제자의 모습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6-23: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하느님의 백성은 역사적으로 박해를 당해왔다. 이 박해는 사도들로부터 교회 역사 안에 계속되고 있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따라서 그분과 함께 그분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요한 15,20; 16,1-3) 그들 역시 그분이 마신 잔을 마셔야 하고 그분이 받으신 세례를 받아야 한다.(마르 10,38-39; 마태 20, 22-23)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박해를 당하신다.(사도 9,4-5; 콜로 1,24) 제자들은 박해를 당하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며(필립 1,29) 기쁘게 생각하였다.(1베드 4,12-14) 자기 동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2티모 3,12)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당하시면서도 아버지께 신뢰하셨으며(마태 26,53; 요한 16,32),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루카 23,34) 예수께서는 박해를 참아 견디는 최고의 표양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보여주신 태도를 제자들도 스승처럼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마태 5,44; 루카 6,27-28; 로마 12,14) 이겨내라 하신다.
박해가 일어나면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마태 10,23; 사도 13,50-51). 그러나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며 죽임을 당할 것을 항상 각오하여야 한다(마태 10,16-39; 요한 16,1-4). 이것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하느님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끊고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운명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요한 16,33) 제자들이 법정으로 끌려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재판을 받을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참조: 마태 10,19-20) 중요한 것은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항상 깨어 있는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할 때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지혜를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알려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삶이 중요하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게 하소서>
마태오 10,16-23 (박해를 각오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사람이게 하소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마태 10,17)
사람이게 하소서
사람을 반기니
사람이 반기는
사람이게 하소서
사람을 맞이하니
사람이 맞이하는
사람이게 하소서
사람을 벗하니
사람이 벗하는
사람이게 하소서
사람을 품으니
사람이 품는
사람이게 하소서
사람을 믿으니
사람이 믿는
사람이게 하소서
사람을 바라니
사람이 바라는
사람이게 하소서
사람을 사랑하니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게 하소서
사람을 살리니
사람이 살리는
사람이게 하소서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의 인내는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16-23)
1) 신앙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리 떼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양들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리 떼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양들’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2)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는 일은, 즉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신중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적대감을 품고서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하는 태도로 선교활동을 한다면, 가는 곳마다 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물리치십시오. 알다시피 그것은 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주님의 종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잘 가르치며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자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시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또 악마에게 붙잡혀 그의 뜻을 따르던 그들이 정신을 차려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2티모 2,23-26)
3)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는 일은, ‘말’보다 먼저 ‘삶’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 자체가 ‘신앙의 증언’입니다. 만일에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말로만 신앙을 증언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증언’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4) “증언할 것이다.”는, 뜻으로는 “증언하여라.”입니다. <“박해를 증언의 기회로 삼아라.”라는 명령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증언만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라,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의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든지 간에, 죽음은 끝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5)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는 말씀은, ‘온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노력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을, 성령께서 우리 대신 증언하신다는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박해 때에 자동적으로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증언을 해 주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능동적으로 신앙을 증언하는 사람만이 성령의(주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안 도와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주시는 도움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6)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는 말씀은 ‘뱀처럼 슬기롭게’ 처신하라는 말씀에 포함됩니다. 박해를 피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도망가라는 뜻이 아니라, 어디서든 어떻게든 신앙생활을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순교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마지막 승리는 박해자들 쪽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박해를 끝까지(죽을 때까지) 참고 견디는 것은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이시라면?>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굳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예수님이시라면?'이라는 자문이 필요합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넘어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거리는 소리에 속상해하지 말고, 뒤에서 딴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하며 상처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악, 고통, 죽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움과 실패, 그리고 죽음의 도구에서 사랑과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의 표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3,726 세계청소년대회)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광주대교구 김권일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금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매를 맞거나 통치자들 앞에 끌려 나가 증언해야 할 일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돈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 감각적인 것에 대한 집착, 절대적 가치나 신적 존재를 부인하는 상대주의와 세속주의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스러움과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 그리고 복음적 가치들을 외면하게 한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현실 속으로 나를 파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고도로 기술문명이 발달한 현대를 하이테크 시대라 칭한다. 존 나이스비트는 하이테크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하이터치’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기술문명이 제공해 주는 편리함과 빠른 속도에 열광하고 있지만, 그칠 줄 모르는 경쟁과 속도감에 지친 사람들은 그 내면에서 느린 삶의 형태가 가져다줄 수 있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갈망하고 있다.
복음서를 보면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러한 손길을 현대인들은 원한다. 현대인들의 갈망을 고려한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오늘 복음은 말한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체화되어 온유하고 따뜻한 태도로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바로 현대인들을 위한 복음 전파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덕경에서는 “최고의 선은 물처럼 부드럽다.”라고 말한다. 무한 경쟁 구도에서 현대인들은 지쳐 있고 마음이 병들어 있다.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가가 그들을 섬기고자 할 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살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듣고 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인내와 침묵이 함께하지 않는 말은 언제나 서로를 아프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도 매순간 믿음을 중심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주신 우리의 평화 또한 너무나 쉽게 깨뜨려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말씀과 우리 삶의 연결부위는 우리의 수많은 걱정처럼 언제나 약하고 부실합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우리의 나약한 믿음뿐입니다.
걱정해야 할 것은 걱정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아야 할 것을 걱정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걱정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사랑과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 말씀으로 정화되고 완성되는 신비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인내의 영으로 알맞은 때를 택하여 당신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며 위로하십니다.
온전한 열매는 참고 견디는 인내 없이 맺어질 수는 없습니다. 매순간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인내를 일깨워줍니다. 인내 없는 지혜 또한 믿음이라는 중심에 뿌리를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하느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무엇보다 하느님 말씀을 나누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하느님 말씀 위를 걸어가는 말씀의 자녀들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