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71
3월23일[사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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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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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iAkM-0XeQ
[서울대교구 이병철 안드레아(청소년국 가톨릭스카우트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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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고!>
예수님 시대 통치자들 입장에서 가장 골치아픈 지역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변방 중의 변방이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비교가 될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로마 식민 통치나 허수아비 헤로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폭동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었으니, 눈엣가시 같은 지방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갈릴래아 대학살 사건도 그 지방 사람들이 폭동을 음모했다는 정보가 빌라도의 귀에 입수되어 초래된 사건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대학살 사건 때문에 갈릴래아 지방의 분위기는 흉흉했었는데, 하필 그즈음에 실로암 연못 근처에 있는 높은 탑이 무너져 18명이나 되는 사람이 압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 사건이나 실로암 탑 붕괴로 인한 압살 사건에 대해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진노 내지는 책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와 부족함으로 인해 저질러진 인재를 하느님과 연결시키지 말라고 엄중히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 자주 직면하게 되는 불운은 하느님의 책벌이라기보다는 경고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더불어 갑작스레 닥친 날벼락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보다 악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남았다고 안심하지 마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불완전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불행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라는 하느님 메시지로 여겨야겠습니다. 시련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 지금 현재 내 삶이 크게 불행하지 않고, 크게 요동치지 않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함부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다가는 조만간 큰코다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불행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순간에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우리의 죽음도, 인류 전체를 향한 종말도 그렇게 번개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노력입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바라보고, 어쩔 수 없는 죄투성이 인간임을 주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하며, 주님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수시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틈만 나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은총에 호소함을 통해 은총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 13,7)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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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yLTV2BqrF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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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로 가지게 되는 열매: 사람들과 섞이는 게 힘들다면?>
‘회개’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종종 단순하게 죄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회개는 단순히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세상과의 관계를 깊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에 대해 말씀하시며 포도밭에 심어진 무화과나무 한 그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열매가 있어야 다른 포도나무들과 섞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거름’을 한 해 더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거름으로 우리 안에 사람들과 섞이게 만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체코 단편영화 ‘다리’(Most)의 줄거리입니다. 영화의 무대는 체코의 한적한 강가 주변입니다. 주인공인 아버지는 강 위로 지나는 기차가 안전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는 교량 관리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아내와 헤어져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고,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어 장치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언제 다리를 들어올려야 하고 언제 내려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려줍니다. 둘은 함께 점심도 먹고, 때로는 관리실 밖으로 나가 강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시각, 기차 안에는 여러 승객이 타고 있는데, 그중에는 마약에 중독된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직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지만, 삶에 지쳐 보이고 눈빛이 불안정합니다. 인생에 낙이 없는 듯,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 주변 사람들과 대화도 없습니다. 그녀가 탄 기차는 빨간 불 신호를 무시하고 배가 통과하게 하려고 들어 올린 다리를 향해 돌진합니다. 이런 상태라면 기차에 탄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을 보고 있고, 이에 아들은 수동으로 다리를 내리려 다리로 올라갑니다.
그 순간, 관리실 창밖을 내다보던 아버지는 아들이 다리 하부 기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더 큰 문제는 아들이 실수로 발을 헛디뎌 기어 장치 틈새에 끼인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만약 지금 레버를 내려 다리를 닫는다면 기차는 구출될 것이지만, 아들은 기어에 깔려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올린 채 둔다면, 기차는 강으로 추락해 승객 전원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치열한 번뇌 속에서 아버지는 레버를 잡고 손을 떨며 주저합니다. 하지만 결국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레버를 힘껏 내리며, 다리를 닫습니다. 굉음과 함께 기어 장치가 돌아가며 다리가 내려오는 순간, 아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창을 통해 아들이 끼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무너집니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떨구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의 희생 속에 다리가 정상적으로 내려지고, 기차는 안전하게 지나가 버립니다.
아버지는 관리실 창문을 붙잡고 창백한 얼굴로 기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승객들은 자신들이 구조된 사실도, 열차가 위험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웃고 떠들며 일상으로 향해 갑니다. 누군가는 신문을 보고 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칩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비통한 얼굴과 절규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일어났다는 예감에, 그녀는 순간 두려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기차는 이미 속도를 내어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아버지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집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화면에는 활기찬 도심의 거리나 기차역 풍경이 지나가고, 그동안 세월이 어느 정도 흘렀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큰 상실감에 잠겨 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려 애씁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죄책감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타인을 살리기 위해 치른 희생이라는 사실이 그를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한편,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젊은 여인이 아버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날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이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녀는 말끔한 옷차림에 밝은 얼굴로 서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손에는 아기가 안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그녀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녀도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이내 따뜻하고 감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미소를 보냅니다. 그녀가 더는 마약을 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평온한 모습과 부모의 책임을 다하려는 듯한 태도가
아버지 눈에 들어옵니다.
화면 너머로 알게 되듯이, 이 여성은 그날 기차가 강 위를 지날 때, 누군가 자신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을 어렴풋이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불만에 찬 자기 행동을 후회하고 그 누군가의 희생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비록 아들을 잃었으나, 그 희생으로 인해 어떤 이는 삶을 되찾고 관계의 확장으로 나아갔음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긴 시간 그를 짓눌렀던 슬픔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자신이 베푼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사람과 섞이지 못하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교만은 무엇에 의해 사라집니까? 바로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였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입니다. 탑은 교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파견된 그리스도의 교만이 무너진 순종으로 우리 안의 교만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거름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우리 교만이 죽습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교만이 죽어 눈물로 빠져나옴을 경험했습니다. 이때 세상에서 내가 가장 큰 죄인으로 느껴졌고 비로소 신학생들과 섞이기 시작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럼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저에게는 당신께 붙어있으라고만 하셨습니다. 위 이야기에서 마약을 하던 여자 청년은 자기가 하던 잘못에서 돌아섰습니다. 주님의 희생에 자기 피를 섞은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의 희생에 내 피를 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모반이 지워지도록 손으로 문지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더 슬프게 울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녀는 이렇게 결심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다시는 얼굴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제 모습 때문에 기뻐서 눈물을 흘리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림, 곧 그분의 제물에 나의 피를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일조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해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제가 바치는 빵과 포도주에 우리 피가 섞여야 하는데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느님께 먼저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내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이 무언가를 나에게 해 주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이 겸손과 감사, 희생의 열매가 없다면 하느님 나라 포도밭에 머무는 사람들과 섞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잘려져 불 속에 던져진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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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서 ‘공진화’라는 주제를 읽었습니다. 공진화란 생태계에서 여러 생명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생태계에서는 벌과 꽃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함께 발전합니다. 기업도 생태계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최근에 기업은 서로 협력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서로 발전하는 모델을 만들고 있습니다. 삼성은 텔레비전의 디스플레이를 엘지의 제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애플과 앱 개발자들이 협력하며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이 개념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세상의 공진화와 신앙의 공진화가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의 공진화는 ‘적자생존’, 즉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원리에 따라 움직이지만, 신앙의 공진화는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해방되었고, 광야를 지나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다져 나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삶이 힘들 때면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떠올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잘 아는 ‘금송아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잊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결국 큰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였고, 모세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서 구리 뱀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신앙이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공진화는 단순한 적응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모세가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끌었다면, 예수님은 사랑과 은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라고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에게 회개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특히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살던 아들이 결국 깨닫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기쁨으로 그를 맞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도 사랑하시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에 회개했던 죄인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공진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는 단순히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신앙을 키워 갔듯이, 우리 신앙도 회개를 통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신앙의 공진화를 이뤄 나갈 것인가? 우리 자신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이 약해지고, 세상에 휩쓸려 하느님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시대에 적응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변화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신앙이 단순히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실천할 때, 그것이 곧 신앙의 공진화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공진화는 적자생존을 따르지만, 신앙의 공진화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곧 ‘회개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신앙의 성장입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회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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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의 죽음을 예수님께 알리면서, 자신들은 그런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이 벌을 받지 않으면 죄인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러한 논리로 자신들의 죄를 뉘우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루카 13,5 참조) 더욱 강하게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회개를 참회의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때에만 회개할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회개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연히 분명한 죄를 지을 때까지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과 회개가 무엇을 뜻하는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죄인의 개념은 인간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태어날 때부터 죄에 묶여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회개는 모든 인간이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부르시는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악을 피하고 하느님을 향하여 자기 생활 전체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앞에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5,32)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신들이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절박함을 봅니다. 자신이 거름을 줄 테니 한 해만 더 기다려 보자고 주인에게 부탁하는 포도 재배인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8,13)라고 고백하기를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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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우리 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냥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어 나갈 때, 즉 회개할 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의 특별한 메시지며 오늘 복음의 주제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계시하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항상 모세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며 구원해주시는 분이심을 선언하신다. 야훼라는 이름은 ‘내가 있다!’ 즉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구원하는 하느님이다’고 하시며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분이시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들과 함께 계신 하느님을 따라야 한다. 하느님께 자신을 일치할 때 그분의 구원적 능력이 나타난다.
복음: 루카 13,1-9: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두 대목으로 되어있는데 모두 다 ‘회개’와 연결되어 있다. 첫째 대목은(1-5절) 갈릴래아 사람들이 파스카 축제 때에 희생제물을 봉헌하고 있었을 때 빌라도가 그들 중 일부를 학살한 사실과 실로암에 있던 탑이 갑자기 무너졌을 때 그들 가운데 열여덟 명이 희생당한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께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시는가를 보고 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2-3절). 그들은 모든 불행을 다 정해진 죄에 대한 형벌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현실을 더 깊이 깨닫기를 회피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평온히 유지하는 편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거절하신다.(참조: 요한 9,3) 이러한 생각과 똑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오로지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거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수단이나, 정해진 사회의 구조에 의해서만 설명할 때는 그와 비슷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중적 신앙을 두 번씩이나 거절하시면서 말씀하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3절). 이 ‘멸망한다.’라는 말은 육체적인 죽음보다도 영적인 ‘파멸’, 즉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자 하는 원의를 갖지 않는다면 인간 그 자체로서 이르게 되는 본질적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회개는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 즉 회개는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회개란 우리 자신의 피상적인 신앙을 버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른 사람들은 덮치면서 나를 스쳐 가는 이유가 특별히 있기 때문인가? 만일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택하시고 나를 택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 내게 아직 결정적으로 마음을 결정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그리고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볼 때 나 자신이 더 열심히 투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을 통하여서든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깨달으려는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나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회개는 바로 매일의 현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그리고 두 번째 가르침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마태오(21,18-19)와 마르코(10,12-14)는 예수께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하셨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주어질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루카는 심판과 처벌의 의미보다는 자비와 기다림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주인은 ‘삼 년’을 기다리면서 열매를 기다렸지만, 열매를 얻지 못했을 때도, 포도원 재배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주인의 모습이다. 주인은 이런 아량을 통해 자신의 크나큰 자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인내로 기다려주신다. 그것은 우리가 적절한 시기에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기다려주신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의 표징이면서 또한 심판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분의 인내로운 기다림을 저버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운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처럼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매 순간순간은 항상 마지막 순간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지는 순간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회개하고 그에 맞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 크면 큰 만큼 책임과 위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거나 게을리한다면 우리에게도 같은 불행이 덮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맞은 위험에 놀라서 이집트 노예 생활에 대해 향수를 갖고 끊임없이 불평한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탈출 14,11-12)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쉬운 일도 안이한 일도 아니다. 사순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매일의 사건들과 현실들을 통해 입증되는 마음의 회개로써 ‘자유’를 성취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되돌아감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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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1-9)
1) 불의의 사건과 사고로 사람들이 죽은 일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세 가지 가르침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그 사건과 사고는 ‘하느님의 벌’이 아니다. 그런 일은 인간 세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입니다. 어떤 사고나 재난을 ‘천벌’이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끔 예외적으로 인간 세상에 직접 개입하실 때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무차별하게 천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2)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회개해야 할 죄인’이다.
(3)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갑자기 닥치는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심판의 날과 시간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2-33)
2)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마르 11,12-14)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하신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위선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3) 그런데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어서, 열매를 맺는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저주를 하는 것은, 나무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 자체를 하나의 가르침으로 생각하면, 하느님의 부르심이 내리는 ‘때’는 인간이 정하는 일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곧바로 이승을 떠나야 합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또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조금만 연기해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4) 8절의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라는 말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설명에 연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3-15ㄱ)
‘모든 사람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날과 시간이 곧 닥칠 듯, 닥칠 듯, 하면서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알려 주시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어떻든 회개를 미루다가는, 그날 후회만 하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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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다시 그리로 … 회개>
루카 13,1-5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6-9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늘 다시 그리로 … 회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늘 다시 그리로 … 회개
우상에게서 하느님에게로
재물에게서 사람에게로
사람에게서 온누리에로
늘 다시 그리로 … 회개
헛나에게서 참나에게로
겉너에게서 속너에게로
우리에게서 모두에게로
늘 다시 그리로 … 회개
의심에서 믿음에로
포기에서 희망에로
소유에서 사랑에로
늘 다시 그리로 … 회개
움켜쥠에서 베풂에로
억누름에서 섬김에로
팽개침에서 돌봄에로
늘 다시 그리로 … 회개
홀로에서 함께함에로
가름에서 이음으로
죽임에서 살림에로
늘 다시 그리로 …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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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지영현 시몬 신부님]
<기다림>
저의 첫 번째 주임신부님은 몇 년 전 선종하신 황인국 마태오 몬시뇰이십니다. 몬시뇰님은 저의 사제 생활과 본당 사목의 롤모델이십니다. 사목 생활 중에 어려움이 닥치면 '몬시뇰께선 이런 때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면 답을 찾곤 했습니다. 몬시뇰께선 말씀이 많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식사 시간 중에 본당 사목과 관련하여 말씀드리면 몬시뇰께선 늘 듣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가끔씩 조언해 주셨는데 이는 칭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다 들으시고도 아무 말씀도 않으시면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럴 때면 다시 검토하여 잘못된 부분을 깨닫고 수정하여 보고드렸습니다. 이처럼 몬시뇰께선 잘한 것은 칭찬하시고 잘못한 일에는 침묵하시며 제가 깨닫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셨습니다.
또 제가 존경하는 다른 한 분은 고등학교 시절 주임신 부님이셨고 신학교에선 영적 지도자셨던 김창훈 바오로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의 영성적 모토는 '네 꼴대로 살아라.'입니다. 젊은 사제가 아버지뻘 되시는 신부님과 지내며, 지금 와서 생각하지만, 잘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신부님은 '네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시며, 야단치시기보다 제가 잘못을 깨닫고 올바로 사제 생활을 하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신부님께 죄송하고 또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이렇게 기다려 주신 신부님들께 돌봄을 받으며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몇 년 동안 하나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주인은 자르고자 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포도 재배인은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그때)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강론을 준비하면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바로 저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그렇게 정성을 쏟으신 어른들이 계셨음 을 또 깨닫습니다. 그 포도 재배인들이 계셔서 오늘의 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포도 재배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포도 재배인의 말을 믿고 또 한 번 기다려 주신 주인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잘못에도 야단치시기보다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에 오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잘못에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실 그분의 마음을 어찌 다헤아릴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우리를 늘 기다려 주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이 사순 시기를 뜻깊게 지내면 좋겠습니다. (서울주보 제25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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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한때 이런 유머가 돈 적이 있었습니다. 똑똑한 아들은 나라의 아들이고, 돈 잘 벌어오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이고, 그저 그런 아들은 내 아들이라는 부모님들의 한숨 섞인 자조적인 농담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이든지 간에 모든 자식에게는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 먹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다 포기하고, 자녀들에게 올인합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다 똑똑하고 잘 난 자식만 되는 것도 아니고, 잘 자란다고 하더라도 가끔은 속을 썩입니다. 그중에는 부모에게 커다란 아픔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실수건 순간적인 흥분이든 의도적이든 악의적이던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비난을 해도, 또 부모마저도 그 자식의 범죄를 이해하기 힘들어도, 부모는 자식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다른 나쁜 친구들의 꾐에 빠져서 그런 것이라고, 결코 우리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그 부모를 통해 세상에 사람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세상에서는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살려둬서는 안 되고, 그가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어느 부모도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죽여달라.’라고 비난받는 아들을 실제로 죽여 없애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그래 너는 죄인이니 나가 죽어라. 또는 나는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으니 가서 호적 파가거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2-24)
교회는 아버지의 사랑에 빗대어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죄인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은 또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2)라고 하시자, 카인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14절)라고 애원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15절)
하느님께서는 이 카인과 아벨의 기사를 통해 ‘비록 내가 사람을 통해 사람을 세상에 내지만,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의 것도, 그 부모의 것도 아니고 내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대 교회에서 신자들이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8)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왜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가? 왜 미루시는가?’는 등의 논란이 커지자 사도 성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의 종말을)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주님께서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주시면서 생명을 거두지 않으시고 참으시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상은 사형이 흉악한 범죄가 다시 저질러지지 않도록 하는 예방효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형제도로 인해 많은 사형수가 죽었어도 흉악범죄는 없어지지 않고 더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유엔은 1988년과 2002년에 두 차례 사형제도와 범죄억제 효과의 연관성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히려 사형제도가 폐지되고 생명존중 문화가 정착된 곳일수록 범죄율이 낮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국제인권옹호연맹 한국지부의 조사결과 우리나라 법관 3명 중 1명이 오판의 경험이 있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판정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나서는 무죄로 밝혀진다고 해도 이미 죽은 다음이라 되돌릴 수 없게 됩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사형이 집행되는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사형이 언제 집행되는가 살펴본 결과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 사형을 선고받고, 그 죗값으로 바로 사형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사형수를 교도소에 가둬두다가 정부에서 사회의 국면전환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 그 사형수를 데려다가 죽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짓고 죽어야 한다고 사형을 언도했으면 그 죄를 물어 그때 바로 죽이던가 해야 하는데, 세상은 그를 다른 이유로 죽인 것입니다.
그럼 그렇다고 해서 회개하지 않는 흉악범죄자를 그냥 사회에서 살아 돌아다니도록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감형없는 무기징역형’ 즉 ‘종신형’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1997년까지 920명을 사형에 처했고, 김영상 정부에서 1997년 12월 30일 23명을 사형시킨 후 16년이 넘도록 더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서 사형 집행 중단 10주년인 2007년부터는 국제사회에서 실질적인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이고’, ‘그 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자는 것입니다. 비록 교도소의 영어의 몸으로 일생을 보내더라도, 평생 바른 삶으로 기워 갚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이 사회를 사는 동료 우리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2024년 10월 10일 세계 사형 폐지의 날에 사형 제도 폐지 종교, 인권, 시민 단체 연석회의에서는, 제22회 세계 사형 폐지의 날의 주제를 “사형은 누구도 보호하지 않는다.”로 잡고, 조속한 사형 제도 폐지를 요청한 바 있습니다.
“이는 사형이 범죄 예방과 피해자 보호에 아무런 실질적 역할을 하지 못하며,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침해하는 제도라는 점을 명확히 선언한다... 국가가 국민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면서도 형벌로 살인하는 것은 모순이다.”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은 일찍이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입니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올해 2025년 희년을 시작하면서,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세상 만민이 삶의 존엄성을 되찾고 희망의 길을 다시 나서게 할 수 있는 세 가지 제안’ 중 두 번째 제안에서 사형폐지를 제안하십니다.
“특히 여기서 저는 생명의 문화를 증진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모든 나라에서 사형 제도를 폐지할 것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형벌 제도는 생명의 불가침성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용서와 재활에 대한 모든 인간적 희망을 없애 버립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넘어 생명의 빛을 향해 생명의 문화를 다시 꽃피운다는 의미에서, 생명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느님이시기에 누구도 사람의 존엄한 생명권을 침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폭력과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이때 생명존중 문화를 정착시키기로 합시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루카 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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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정 안드레아 신부님]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1~9)”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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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보고 만지고 느끼는 이 세상 물질차원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의 차원으로 고차원의 하느님존재를 어찌 쉽게들 이해하려합니까. 세상의 사건 모두를 그저 삼차원 시각으로만 보면서 떠들고들 삽니다..
세상 고통 실수 잘못 모든 걸 하느님과 직결해 생각하며 떠들고 있죠. 올바른 세상 지배인은 사람들을 교육 믿음 수난으로 성숙시키려 하죠. 옳게 자라며 하늘 향해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도 영생 향해 옳게 살려고 주님 가르침 하늘 뜻 믿음으로 삽시다. 신앙인들은 이 세상사는 모습을 영생방향으로 살려는 위인들이랍니다. 드높은 차원의 신앙인들은 하늘 영생을 준비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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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한윤식 보니파시오 신부님]
<무화과나무 한 그루와 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 말씀 속에 등장하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가 ‘나’와 결코 무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주인이신 포도밭이라는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나’를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고 그저 땅만 차지하고 있어 당장이라도 잘려나갈 처지에 놓인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이 무화과나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지니고 있을 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 그리스도인다움을 드러내지 못하는 ‘나’, 그래서 믿지 않는 세 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나’일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예수님 보시기에도 사랑인지 되묻지 않고, 내 방식대로 하는 나만의 사랑에 갇힌 ‘나’일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많은 봉사와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실상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믿고 희망하는 것을 똑같이 믿고 희망하며 살아가는 ‘나’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넘어져 있는 ‘나’일 수 있습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가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는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비유 속 포도 재배인이 포도밭 주인에게 청한 ‘올해’를 소중히 여겼으면 합니다.
이 ‘올해’라는 시간이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나’의 회개를 위하여 하느님이 인내로이 허락하신 마지막 시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원을 결정하는 소중한 순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올해’라는 시간을 의식하며, 포도 재배인이 주인에게 아뢴 그 말씀을, 하느님께 바치는 ‘나’의 약속과 다짐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는 하느님, 그리스도인인 ‘나’는 이 하느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한 그루 무화과나무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2025년 희년에 맞이하는 사순 시기, 더 많은 사랑의열매를 맺기 위하여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는 ‘나’의 노력이 계속되는 은총의 시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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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3년 1월 16일 자로 발령받은 저는 갑곶성지를 떠나 지금의 성김대건성당으로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외출을 나갔다가 성당에 들어오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성당으로 들어오는 도로를 못 찾아서 헤맬 때가 많았고, 걸어서 물건을 사러 근처 가게에 갔다가 성당 방향이 아닌 정반대로 간 적도 있었습니다. 건물이나 길이 다 비슷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길눈이 어둡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길치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길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길이 헷갈리지도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이 다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현재 위치를 잘 몰라도 주위의 풍경, 개략적인 지형도를 알고 있기에 손쉽게 성당을 찾아가게 됩니다.
주님께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그 길이 낯설기 때문입니다. 길을 알기 위해서는 주변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위를 보고 많이 알아가야 주님께 가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와 묵상을 게을리하지 않고, 무엇보다 사랑하며 살아가야 주님께 가는 길을 훤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알지 못한다고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불평불만만을 반복하면서, 주님께 가는 길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가는 길은 낯설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그 길을 가려는 우리의 사랑 담긴 노력으로 훤하게 알 수 있게 되면서, 그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시던 시대에는 인간의 죽음을 삶의 결과로 보고 있었습니다(지금도 비슷합니다). 만약 불행하게 죽으면 그들이 지은 죄 때문이고, 편안하게 죽으면 선행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성전에서 학살 것을, 또 실로암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을 죄의 결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죄의 결과로 죽은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원인과 책임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지금 이 순간 회개가 필요함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죽음을 통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회개하면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그 길에 들어서게 되고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기다림이 영원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미뤄서는 안 되고, 지금 당장 들어서야 합니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해서 영원한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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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복음에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들은 죄를 지어서 저런 벌을 받는 거야. 저런 끔찍한 사고는 죄 때문이야. 나환자도, 귀머거리도, 농인도, 절름발이도, 모두 죄 때문이야. 하느님은 그런 분이야.’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죄가 커서 저렇게 된 줄 아느냐?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들에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길이 있는데, 그것에 하느님은 이렇고, 저들은 저렇고 할 필요도, 또 그렇게 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평가하고,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기도하고 하느님께 더 예뻐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 그것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삼자대면이 아니라 나와 하느님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이 어떻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이 기도를 얼마나 했는지, 남이 봉사를 얼마나 했는지, 남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고, 회개하라고, 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하느님만 보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자꾸 다른 사람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내고,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회개하는 삶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들어있습니다.
종이 부탁하지요. 한 해만 더 두고 보자고 말입니다. 그 한 해가 오늘이라면, 오늘 하루만 더 두고 보자고 수호천사가 하느님께 보고했다면, 설마. 내가 하루만 살겠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전 세계의 수십만 명이 오늘을 못 넘기고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내가 그 안에 들지 않았을 뿐이지요.
이제 무화과나무에 거름과 물을 주듯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삐뚤어진 생각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바로 잡아보고, 미움이 있다면 용서하려 노력하고, 시기가 있다면 만족의 은총을 청하고, 높은 곳보다 낮은 것을 바라보는 연습해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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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맞춘 집?
어느 날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한 후 돌아오는 차 안 라디오에서 이런 광고가 들렸습니다.
집에 맞춘 삶이 아닌
삶에 맞춘 집입니다.
삶에 맞춘 집이 뭘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느낌으로는 알 수 있었습니다.
더욱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라는 느낌…. 무엇인가에 맞추려 노력하지 않고 내게 알맞은 편안함 같은 그런 집….
가끔 우리는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무언가에 맞추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또 다른 폭력일 것입니다. 나를 살펴주고, 나에게 맞는 것을 선물하세요. 그렇게 숨 쉬며 살아가도록 보살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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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우리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날마다 비추는 은총의 빛을 받으며 자라는 나무입니다. 어머니이신 대지에 발을 굳게 딛고 서서 아버지이신 하늘의 빛을 받으며 은총의 물과 바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의 나무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기에 우리는 주님의 열매를 맺도록 되어있습니다. 나무인 우리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은총의 빛을 받지 못하면 금방 시들어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연약한 우리이기에 때로는 악의 유혹 때문에 병들고 잘 자라지 못합니다. 은총의 빛은 풍부하지만 연약한 나무이기에 땅의 유혹으로 병이 듭니다. 연약한 줄기가 상처를 입고, 색 바랜 잎이 되어 시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맺은 열매가 익기도 전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인내로써 기다려주십니다. 맺기로 되어있는 열매를 우리가 맺을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당신의 빛을 멈추지 않으시고, 상처 입은 당신 나무들이 치유되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며 비추어 주십니다.
우리가 튼튼한 나무이기에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총의 빛으로 비추시기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약 25년 전 언젠가 필리핀에서 임상사목교육을 받으면서 작성하였던 '성실한 사람 여기 잠들다'라고 나의 비문이 생각납니다. 되돌아보면 ‘성실성’의 열매가 아직도 그다지 무르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니 당신은 아직도 매달린 채 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무언의 말씀을 저에게 하시는 듯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나무 아우구스티노야, 내가 부여한 수도자의 삶과 사제직에 더욱 성실하게 임하여 나의 열매를 맺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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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하는 욕들 중에 가장 심하고 무서운 욕은 무엇일까요? 동물에 빗대어 하는 욕도 있고, 부모까지 싸잡아서 비난하는 욕도 있으며, 성적/폭력적으로 수위가 높은 험한 말들을 사용하는 욕까지 정말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심하고 무서운 욕은 아마도 “저런 천벌을 받을 놈!”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욕들은 기껏해야 인간적인 차원에서 험담하고 위협하는 정도지만, ‘천벌 받아 죽을 놈’은 인간이 자기 힘과 능력으로 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대신 무서운 징벌을 내려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니, 그리고 그 처벌은 이 세상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까지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니 무서운 겁니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나 그런 욕을 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하는 행동이 너무나 사악하고 수많은 이들에게 큰 피해와 상처를 입히는, 그러면서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거나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탓을 돌리고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누가 봐도 정말 ‘나쁜 놈’에게 하느님께서 꼭 벌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욕을 하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행실대로 갚아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상선벌악’이라는 하느님의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게 맞는지 의심스러워지는 상황들을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경우를 볼 수 있지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했던, 누가봐도 의롭고 올바른 일을 하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핍박하는 빌라도 총독에 의해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 소식을 접한 유다인들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정말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시는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자기들 나름대로 그렇게 된 이유를 찾아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였습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그 전에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고, 그 죄가 원인이 되어 죽음이라는 벌을 받게 되었는데 어쩌다보니 그 시간이 제물을 바치는 때와 겹쳤을 뿐이라는 해석이었지요. 나름대로는 합리적 추론이라고 생각했을 지 모르나 그런 식의 해석은 피해자들을 물리적으로 한 번, 그리고 신앙적으로 또 한 번 죽이는 잔인한 처사였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당한 것도 억울하고 괴로운데 죄인취급까지 받아야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왜곡된 ‘하느님상’과 ‘심판관’을 바로잡고자 하십니다.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이나, 실로암 탑 붕괴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보다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슬픈 일을 당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단죄하시고 처벌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남들을 향하던 비판과 단죄의 시선을 자기 자신을 향한 성찰의 시선으로 바꾸십니다. 또한 ‘너희도 멸망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통해 그들이 각자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아버지는 선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즉시 재난이나 불행으로 그를 징벌하지 않으시지요. 오히려 인내로 기다려주시고 자비로 품어주시며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심으로써 죄인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당신께 돌아오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니 그분 자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이들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는게 아니라, 그들이 그 고통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함께 해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 사고, 재난이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그것을 해결할 수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웃이 슬픔과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며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면 그 뿐입니다. 그들이 그런 일을 겪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그들을 몰아부침으로써 그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에게는 그런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나도 언젠가는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될 지 모른다는 불안과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넷플릭스 드라마 <지옥>)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설픈 심판과 단죄일랑 그만두고 자기 성찰과 회개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드시는 예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포도 재배인은 그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서 열매를 수확하시어 아버지께 건네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말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 정작 삶으로는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우리, 지금은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다며 주님을 따르는 일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는 우리,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충만한 은총과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도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우리를 가리키지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왜 애써서 일군 귀한 포도밭에, 길가에도 흔하게 널린 무화과나무를 심으셨을까요? 그건 우리가 ‘자격’으로 따지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누리기에 한없이 부족한 존재임을,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우리가 열매 맺을 때까지 ‘삼 년’을, 즉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시며 기다려주셨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 탓이니, 복음 속 비유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당장 우리를 잘라내어 포도밭 밖으로 내던져 버리신다고 해도 억울해하거나 불만을 가질 수는 없을 겁니다. 그저 그분의 처분대로 따를 수 밖에요.
그런데 황송하게도 우리 구세주께서 그런 우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고 하십니다. 그것도 우리가 알아서 잘 하도록 팔짱끼고 가만히 기다리시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름이란 우리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신 그분의 몸과 피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받아모심으로써 당신 뜻을 따를 힘을 얻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또 다른 거름은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느님 말씀과 계명입니다. 그 거름을 통해 우리가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하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마지막 거름은 성령입니다. 아버지의 거룩한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우리 각자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구원의 길을 충실히 걸음으로써 하느님 나라까지 무사히 다다르게 하시려는 겁니다. 그러니 참된 회개를 통해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은총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받을 또 한 번의 기회를 열어주신 주님 사랑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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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오늘 ‘사순 특강’(목포 삼호성당 사순특강)은 다른 특별한 것을 보기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회개”의 뜻을 오늘 <말씀전례>를 통해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러 고을을 들러 가르치실 때의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4.)
여기서, “회개”가 강조됩니다. 사실, ‘회개’란 먼저 “죄”를 지었음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갈릴래야 사람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고, 왜 그것을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대체 ‘회개’란 무엇을 말하며, ‘죄’란 무엇을 말할까요? 오늘 <제1독서>는 이를 밝혀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제1독서>의 맥락 안에서 ‘죄의 본질’과 ‘회개의 본질’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먼저, ‘죄’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 무엇이 죄인가? <성경>에서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지의 죄’이고 <또 하나>는 ‘망각의 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무지의 죄’를 깨우쳐줍니다. 곧 ‘하느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사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성조들과의 약속을 맺으신 하느님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후손들과는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고 그들은 하느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으로 도피해서 양을 치고 있을 때, 호렙 산에서 나타나신 하느님께서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한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탈출 3,4)
(얼마나 놀랬을까? 불안하고 두려운 살 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모세인 줄을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피하여 도망해 온 이곳에서, 일종의 수배자 신세인 자신을 아는 이가 있다니! 더구나,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니, 참으로 황당하고 기절초풍할 일이 아닌가? 이 귀양지가 무슨 거룩한 곳이라니, 말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그러니 그분은 아직 성조들의 하느님이실 뿐, 그 후손들과는 직접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 3,15)
여기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우선 세 가지를 밝혀줍니다. <첫째>는 하느님은 없는 허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재 하신 분’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이방인들의 신처럼 이름의 한계 안에 갇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라는 것이요, <셋째>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하느님으로 ‘늘 계시는 분’임과 동시에 ‘장차 보게 될 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실재로 파라오에게 행한 열 재앙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고, 또한 홍해를 건네는 탈출을 통해 당신께서 구원자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시고 체험시켜주십니다. 나아가, 손을 잡아 붙들어 주시고 계약을 맺으시고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그들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무지의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이미 체험하고 알게 된 그분을 끊임없이 망각하고 배신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이들 중에서는 칼렙과 여호수아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고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 역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졌으며, 마침내는 이방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떠나갔으며, ‘망각의 죄’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는 <제1독서>의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통해 알아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 신비는 다름 아닌, ‘주 하느님께서 저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저희와 함께 계시며, 저희에게 호의와 자비를 보이시며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신비를 간직하게 된 모세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맡겼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라는 바위에서 영적 양식과 음료를 마시고 그리스도인이 된 ‘코린토인들’에게. 조상들이 모세와 함께 바다를 건너는 세례를 입고 구원자이신 주 하느님을 알게 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또 다시 광야에서 하느님을 망각하고 죄를 지어 죽어 널브러졌던 사실을 본보기로 주었음을 환기시키며, 종말에 다다르기까지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4.)
이는 우리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죄가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곧 그것은 하느님께서 ‘구원자 주님’이심을 모르는 ‘무지의 죄’와 그것을 알고도 무시하고 배척했고 거부한 ‘망각한 죄’임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래아에서 맨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실 때 동시에,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회개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회개’란 ‘믿는 일’입니다. 곧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는 일인가? 그것은 우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신 주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왜, 이 선포가 ‘복음’(기쁜 소식)이 되는가? 그것은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이나 세상이 다스리는 나라, 곧 죄와 속박으로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에덴에서 벌어진 축복(원복)의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와 압제로부터의 ‘해방의 기쁜 소식’임과 동시에 그 ‘축복의 기쁜 소식’입니다.
여기서, “가까이 왔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손아귀 안에 있다. 손에 들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손에 들려 예수님과 함께 왔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혁명적인 전환을 촉구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아와 메시아가 가져올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메시아 대망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선구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고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선언은 그 나라를 들고 온 예수님 당신 자신이 ‘메시아’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로 당신을 구원자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이 ‘복음(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곧 ‘예수님이 구원자 주 하느님이요, 동시에 당신 손에 들려 함께 가져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기쁜 소식(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윤리적인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거나 망각하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복음”이 이루어졌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복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결국, “회개”란 무지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반성, 또는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그 다스림으로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6-8절)는 ‘시급히 회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회개한 자에 합당한 행동과 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과수원 주인이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내라고 하자, 과수원 재배인은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희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자비를 입고 있다는 표시요, 또한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우리의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고 돌보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망각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사랑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그 사랑을 베풀며 증거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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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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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만남, 광야, 회개-
요즘 다시 묻게되는 질문입니다. 정확히 33년전 1992년1월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 미사때 한 강론 제목,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물음입니다. 많은 이들이 길을, 진리를, 희망을, 빛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너무나들 과격하고 극단적 분열에 대립의 골이 너무 깊습니다. 국내외 세계적 현상입니다만, 강대국 사이에 있는 우리 한국은 더 합니다.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에 이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를 자주 되뇌이곤 합니다. 좌우의 극단적 대립이 해방 80년을 맞이하는데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역사입니다. 이런 악순환의 질곡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반복되는 힘들고 어둔 상황중에도 가톨릭교회의 사순시기가 큰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이 참 희망이자 참 길이요 참 빛임을 확인하고 더욱 기도와 회개의 삶에 박차를 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깨어 화해와 평화, 일치를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풍전등화, 절체절명의 나라 상황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의 모세가 깨우쳐 주는 가르침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희망이자 빛이신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만납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새 힘을 받고 살고자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만남중에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에서 모세는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소명을 받으며 하느님의 이름을 계시받습니다. 모세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시자 깨어 있던 모세는 “예 여기 있습니다.” 화답합니다. 그대로 미사중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실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네가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신발을 벗어라.”
어디나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땅이고 이런 신발을 벗은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이어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계시받고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양떼를 치던 모세에게 삶의 목표와 방향이 주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구원해 내는 역사에로의 투신이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저하는 모세에게 조상들의 하느님이자 “나는 있는 나다”하고 대답하며 자신을 계시하신 주님은 한마디로 모세의 말문을 막으시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이와 일치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 늘 마음에 담고 사순시기 지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길이자 희망이자 빛이신 주님을 만나 주님의 인도따라 살아갈 때 방황하지 않습니다.
둘째, 광야인생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바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에게 배우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 광야인생 여정입니다. 혼자가 아닌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는 광야여정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 말씀이 광야여정중인 우리에게는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모두 구름과 바다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고,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바로 우리 광야여정의 예형을 보여주는 이집트 탈출후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영적으로 부단히 반복되는 우리의 인생 광야여정입니다. 새모세 예수님의 인도하에 세례와 이 거룩한 성찬례의 은총으로 주님과 함께 광야여정을 무사히 통과하는 우리들입니다. 광야인생여정 통과에 성찬례 미사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광야여정중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일은 둘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중 어떤 이들이 투덜거렸던 것처럼 여러분도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의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섰다하면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서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새삼 광야인생여정중 투덜거리는 불평이 아닌 감사하는 일이, 자만이 아닌 조심스런 깨어 있는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감사와 겸손은 광야인생 여정 통과에 결정적인 덕목입니다.
셋째, 회개를 생활화 해야 합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광야인생여정중 살아갈수록 남는 것은 기도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사순시기야말로 기도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일상화, 생활화,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회개의 일상화를 위해 수도원의 일과표도 공동전례기도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잘 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죄가 없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며 잘 살아보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빌라도에 의해 변을 당한 갈릴래아 사람들과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 거푸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는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회개하라 주어진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잘살고 못살고는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예외없이 하느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회개하라고, 기도하라고, 사랑하라고, 겸손하라고, 찬미하라고, 감사하라고 연장되는, 하루하루 날마다 선물로 주어지는 날들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바로 이런 진리를 보여줍니다. 흡사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포도밭 재배인은 예수님, 무화과나무는 우리같습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자는 주인인 하느님께 애원하는 포도밭재배인은 그대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시오.”
언제 주님이 불러갈지 모르는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삽니다. 예수님과 긴밀한 협력하에, 부단한 기도와 회개를 통해, 겸손의 열매, 사랑의 열매, 감사의 열매, 찬미의 열매를, 즉 구원의 열매를 맺으며 한 번 잘 살아보라고, 유예되는 인생입니다. 사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함께 내 삶의 무화과나무가 잘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잘 가꾸고 돌보는 일보다 중요한 일을 없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광야여정중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참 좋은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잘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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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회개의 열매!>
오늘 복음(루카 13,1-9)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씀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피로 물들게 한 일과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재앙이나 질병을 그 사람의 죄의 결과, 곧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그런 그들을 멀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에게 다가가셨고, 오히려 회개하지 않는 자를 질책하시면서, '회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회개는 '있는 나'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신성)이시며 사람(인성)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과 너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죄에 자주 빠져드는 우리들이기에 회개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얼마 전 베드민턴 전영오픈대회에서 우승한 안세영 선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반복의 고통을 이겨내야 웃을 수 있다." 점수 1점을 따기 위해 79번의 긴 랠리가 필요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이들에게는 오직 하나 회개만 있을 뿐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회개만 있을 뿐입니다. 그 회개 너머에 기쁨이 있고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회개의 여정만 있을 뿐입니다.
자비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한번 더 회개할 기회를 주시면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탕자의 비유(루카15,11-32)에 나오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작은 아들'이 됩시다! 그래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나도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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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3)
포기할 수
없는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오늘 이시간은
회개를 위한
실천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교만입니다.
교만과 착각을
무너뜨리는
회개입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회개입니다.
독단과 편견
아집에서
벗어나는
회개입니다.
회개가 깊어지면
사랑도 깊어집니다.
우리의 회개는
생활의
참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회개로 이끄는
회개의 만남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새로운
삶의 변화는
회개로
시작됩니다.
실천의 열매가
참된 열매입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이
남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회개로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회개는 실천이며
실천은 생활이며
생활은 신앙으로
아름답습니다.
회개의 열매는
생활의 변화
생활의
열매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서로를 살리는
참된 회개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회개는
올바른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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