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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20031001072921339001
1923년 창간한 타임은 1927년부터 ‘올해의 인물’을 선정해 왔는데 그동안 여성은 11번만 올해의 인물로 표지를 장식했다. 타임은 남성(82명) 위주의 선발 방식에 대해 반성하는 차원에서 올해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기해 여성만 따로 뽑았다. 타임은 매년 12월 말에 그해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뽑아 표지 사진으로 발표한다.
타임은 새로 선정 작업을 하면서 1920년부터 2019년까지 각 해를 대표하는 여성 100명을 선정했다. 기존에 선정된 11명 외에 나머지 89명을 추가했다. 이렇게 100명이 담긴 표지를 새로 제작해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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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좋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만 표지가 된 건 아니고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선정된 것 같긔
* 뭐하던 사람들인지 궁금하잖아요.. 찾아봤긔
* 설명이 필요없는 유명한 사람은 이름만 넣었긔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 서프러지스트

에미 뇌터
아말리 에미 뇌터는 독일 출신의 수학자이다.
아인슈타인은 그녀를 "현재 살아있는 가장 유능한 수학자들의 평가로는,
여성의 고등 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주목할 만한 창조적인 수학 천재"
라고 묘사하였다.

샹 징위
중국 공산당의 초기 여성 회원 중 한 명으로
중국 여성 운동의 선구자

베시 스미스
미국의 블루스 가수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서 블루스 보컬로
엄청난 활약을 하였으며 '블루스의 여왕'으로 불림
1920년대 모든 흑인 음악인들중 가장 많은 앨범이 팔린 여성
'건물을 흔들' 정도의 압도적인 성량과 가창력으로
관객을 압도했으며 현대 미국 대중음악 역사상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가수들에게 영향을 미침

코코 샤넬
패션 디자이너

마가렛 생어
간호사로 일하면서 다산과 빈곤이 산모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사상을 가져,
산아제한 운동을 벌였던 사회운동가이자 산아제한 운동의 창시자.
1916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최초의 산아제한진료소를 열었으며,
1921년 산아제한연맹을 세워 1928년까지 회장을 맡았다.
192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1차 세계인구회의를 개최했다.
산아제한에 대한 글을 집필함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으며,
대중들 앞에서 당시 불법이었던 피임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컴스톡 법으로 인해 피임에 관한 연설을 하거나
성적인 글을 배포하는 것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생어는
이 활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경찰에 체포되었다.
피임 투쟁을 벌임으로써 19세기부터 불법이었던 피임을 합법으로 인정받게 하였다.
그 뒤, 미국의 생물학자 그레고리 핀커스에게 피임약 개발을 권유하고
연구 자금을 지원하는 등 피임약 개발에 앞장서 경구피임약이 개발되는 데 일조했고,
1952년부터 1959년까지 국제가족계획연맹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생식권(Reproductive Right) 운동의 확산과 산모의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우생학을 지지했다는 점에서는 비판받는다.
그녀는 환경적으로 얻어진 특성이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우생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하여,
산아제한운동에서 생식자를 경제적 여건, 살고 있는 환경 등에 따라
출산 '적격'자와 '부적격'자로 나누어 부적격자의 출산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이미 셈플 맥퍼슨
캐나다계 미국인 오순절 복음전도자
일명 ‘시스터 에이미’로 알려진 그녀는 엄청난 카리스마로
당시 할리우드 배우보다 더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녀는 구세군에서 일했던 어머니를 통해 종교를 접하고 심취했다.
배우가 되고 싶었고 재능도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전도사와 결혼해 중국으로 선교 활동을 가게 된다.
하지만 남편은 말라리아로 곧 사망하고, 아이와 미국으로 돌아온다.
얼마 되지 않아 재혼도 하고 둘째를 낳지만, 곧 무병에 시달린다.
이때부터 평범한 가정주부의 인생 대신, ‘시스터 에이미’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고
전국을 돌며 전도 여행을 다닌다.
어머니는 그녀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데, 헌금을 지폐로만 받았던 어머니의 모금 덕에
그녀는 고급 옷을 입고 최고급 객실을 이용하며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에이미는 앤젤러스 템플에서 주마다 공연 형태를 갖춘 설교를 했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상 여 목사가 교회에서 무대, 의상, 조명, 오케스트라를 갖추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공연을 한다는 것은 불경하게 여겨졌다.
이런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그녀의 박진감 넘치는 설교,
교회 가스펠에 끌려 신도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찰리 채플린이 무대 연출에 조언을 해주는 등 할리우드 스타들을 비롯한
수많은 신도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그녀 역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스타가 된다.
또한 에이미는 매년 직접 방송국을 세워 라디오 매체를 적극 활용해
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함께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획하기도 했다.
요즘 대형 교회들이 모방하는 교회의 기업형 운영 방식은 그녀가 창시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신도가 증가하고 교회가 성장할수록 그녀는 많은 협박과 유혹을 동시에 받게 된다.
이런 와중 그녀가 행했던 일 중에서 그 과정이 미심쩍은 부분들이 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인종차별주의 KKK단에서 보낸 돈을 이용해 교세를 확장하기도 하고,
이를 반대하는 어머니와 등지게 된다.
또 자신의 라디오 방송국 엔지니어와 설교할 때 등장하던 남자 배우에게
동시에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설교 후 수영을 하던 그녀가 돌연 종적을 감춘
미스터리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녀를 찾으러 바다에 들어갔던 신도가
시체로 떠오르는 등 사건은 점점 더 복잡해지며 한 달이 흐른다.
사라진 그녀가 갑자기 애리조나에서 발견되는데, 그녀는 납치를 당했다고 주장한다.
멕시코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가 겨우 빠져나와 열세 시간 동안 사막을 걸어 탈출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당시 코르셋까지 갖춰 입은 차림으로 하이힐을 신고 나타났는데,
하이힐로 사막을 횡단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거니와,
신발에서도 사막을 걸어온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이라 말한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그녀가 임신중절수술을 하러 갔다고 하기도 하고,
같은 날 사라진 라디오 방송국 엔지니어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도 하며,
성형수술을 받았을 거라고도 했지만, 어쨌든 이것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녀를 위증죄로 기소했던 검사조차 뇌물을 받고
(이것마저도 사실 여부를 단정할 순 없지만) 기소를 취하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그녀의 평판은 안 좋아졌지만, 어쨌든 실종 사건 덕에
할리우드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그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헌금을 모으게 되었고 교세는 엄청나게 확장되어 현재는 전 세계에 지부를 두고 있다.
그녀는 결국 약물 과다 섭취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는데,
혹시 모를 부활에 대비해 실제로 라디오 방송을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무덤 안에 설비를 구축했다고 한다.
그녀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볼지, 아니면 진정한 하나님의 메신저로 볼지는
우리들에게 달린 일이다.
현재까지도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가며 엇갈리고 있다.
(이 인물을 소재로 한 뮤지컬 '스캔달러스' 작품 설명 중
https://www.themusical.co.kr/Magazine/Detail?enc_num=k9rK9XDKh3WeO%2F9ytxas5w%3D%3D)

소라야 타르지 왕비
191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내전에 휘말리기 전까지 60년은 아프간 여성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이 시기 아프간을 이끈 아프가니스탄의 군주들이
근대화와 개혁을 추구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1919년 독립 후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아마눌라 칸은
이듬해 여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고,
조혼을 없애고 일부다처제를 제한하는 가족법을 만들었다.
아마눌라 국왕은 “종교는 여성의 손과 발, 얼굴을 가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부족의 관습이 개인의 자유 의지를 강제해서는 안된다”며 부르카를 반대했다.
그의 부인 소라야 왕비는 아프간의 첫 여권 운동가로 불리는 인물이다.
(보수층의) 반대에 직면하여, 왕과 왕비 부부는 일부다처제와 부르카를 반대하였고,
여성의 권리와 교육을 믿었던 왕비는 소녀들을위한 전국 최초의 학교를 열었으며,
1927 년 Ershad-I-Niswan 또는“여성을 위한 지침” 이라는 국가 최초의 여성 잡지를 창간
"독립은 우리 모두에게 속한다”고 말하면서 타르지는
여성들이 국가 건설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촉구함
1970 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두 번째 개혁의 물결에
50년 전 타르지의 아이디어가 반영되어
여성의 교육과 정치활동 참여가 활발해지고 결혼 연령이 높아짐

애나 메이 웡
루시 리우, 아콰피나 이전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던 최초의 중국계 미국인 배우로
사악한 요녀와 같이 전형적이었던 아시아인 역할의 고정관념을 깨려 했던 배우

버지니아 울프
2019년까지 있는데...할 수 있을까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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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거 내용 너무 좋다 ㅠㅠ 이런 글 올려줘서 고마워!!
너무 멋진 분들
이렇게 여성 위인들이 많은데!! 유익한 게시물이다 증말!!
우와 좋다 이런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