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문화권에는 기휘(忌諱) 또는 피휘(避諱)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휘(諱)는 이름이라는 뜻이고 기와 피를 합치면‘기피가 됩니다.
요컨대 이름을 밝히는 걸 꺼리는 전통이 바로 기휘 또는 피휘인 겁니다.
여전히 부모님 등 웃어른 성함을 이야기할 때 ‘김 ○자, ○자’처럼 말해야 예의바르다는 말을 듣는 건 바로 이 전통 때문입니다.
예전 사람들이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호를 지어 부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 전통에 따라 임금이나 성현(聖賢) 이름은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경죄에 속했습니다.
중국 당나라 태종 이름이 이세민(李世民)이라 불교에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세(世)를 빼고 관음보살이 됐고, 성현 중 성현이라 할 수 있는 공자 선생 이름이 공구(孔丘)라서 TK 지역에 있는 광역시 이름은 대구(大丘)에서 대구(大邱)로 바뀌었습니다.
조선시대 임금의 업적 가운데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을 모아 편찬한 국조보감(國朝寶鑑). 기휘 전통 때문에 세종대왕의 휘(諱)와 자(字)를 붉게 가렸습니다.
그런데 만약 일상적으로 쓰는 한자를 임금이 이름으로 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의사소통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조가 산(算)을 이름으로 썼다면 계산, 암산, 주산(珠算) 같은 말을 전부 쓸 수 없게 됩니다.
이름을 두 글자로 쓰면 이 부담이 더욱 커지겠죠?
그래서 사람들이 쓸 일이 별로 없는 한자를 골라 이름을 한 글자로 지었던 겁니다.
여기서 시작해 왕조 시절에는 이름을 한 글자로 짓는다는 것 자체가 왕족만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 양천 허씨의 시조 양선문
허씨가 외자 이름을 쓰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후삼국 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견훤과 한강 유역 패권을 두고 타투고 있던 왕건은 군량미가 떨어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현재 서울 강서구, 양천구 일대 호족이던 허선문(837~?)이 군량미는 물론 말과 군사까지 내주면서 왕건이 승리하도록 도왔습니다.
나중에 고려가 들어면서 왕건은 허선문의 공을 치하해 그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 칭호와 함께 그가 본거지로 삼고 있던 공암(孔岩)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내렸습니다. 허선문은 공암 허씨(현재 양천 허씨) 시조가 됐습니다. 왕건은 그러면서 이 가문에 대를 걸러 외자 이름을 쓸 수 있는 특권을 줬습니다. 할아버지가 외자 이름을 쓰면 아버지는 건너 뛰고 손자가 다시 외자 이름을 쓸 수 있는 방식이었죠.
당시는 아직 호족 세력이 힘이 남아 있던 상태. 양천 허씨 가문은 “우리는 가야 김수로왕 때부터 왕족이었다”며 대대로 외자 이름을 쓰기로 결정합니다. 양천 허씨 가문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건 가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수로왕과 그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을 뿌리로 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문이 외자 이름을 쓰는 건 가문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수단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