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曠野)에 와서
유치환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펀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은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시집 『생명의 서』, 1947)
[어휘풀이]
-흥안령 : 싱안링산맥(興安嶺山脈). 중국 내몽고 자치구(內蒙古自治區) 동부 헤이룽장성(黑龍 江省) 북부 산맥을 통틀어 이르는 말
-광막 : 텅 비고 넓음
-이레 : 일곱 날
-암수 : 어두운 수심
-망나니 : 언동이 몹시 막된 사람을 비난조로 이르는 말
-회오 :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음
-호읍 : 목놓아 소리 내어 욺
-철벽 : 쇠로 된 것처럼 견고한 벽
[작품해설]
이 시는 1940년 봄, 유치환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로 탈출해서 생활 할 때의 경험을 노래한 작품으로 「일월」의 후편(後篇)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적 공간인 ‘광야’는 그가 탈출했던 북만주를 의미한다. 이 시는 ‘미개적 유풍’을 따르며 ‘성신’과 ‘비바람’과 더불어 사는 자연적 삶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떠났던 그 곳이 사실은 암울한 땅임을 깨닫고 절망하는 모습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자학’, ‘패망’, ‘회오’와 같은 관념어가 많이 쓰인 까닭에 구체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조국에 대한 그의 남다른 사랑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모든 시인에게 있어 조국에 대한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요, 벗어날 수 없는 형극(荊棘)의 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조금도 슬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의지의 시인’답게 당당한 목소리로 의로운 길을 걷는 선비로서의 의연함을 보여 주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전17행의 자유시 구성의 이 시는 의미상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9행으로 화자가 만주에서 겪는 고달픈 생활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그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탈출한 곳은 ‘흥안령 가까운 북변’이다. 그 곳까지 가면서 그는 ‘죽어도 뉘우치지 ㅇ않’겠다고 몇 번씩이나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일제와 끝까지 맞서지 못하고 탈출을 감행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얼마쯤의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곳에 도착하고 보니 ‘이레째 암수의 비 내리’는 ‘광막한 벌판의 끝’일 뿐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그 곳에서 하는 일 없이 ‘화툿장을 뒤치고 / 담배를 눌러’ 끄는 무의미한 생활을 계속한다. 화자는 그런 자신의 행동을 ‘망나니’와 같은 것으로 규정하며 진지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다시 나를 과실함’이라는 구절을 통해 조국을 탈출했던 자신의 행동이 결국 잘못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하기도 한다.
둘째 단락은 10~17행으로 자신의 생활에 대해 자책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조국을 떠나온 그는 자신의 과거 행동과 현실 생활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자학의 길’을 걷는다. 그러므로 그는 속 시원히 울어버림으로써 ‘회오의 앓음’을 씻어낼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그 어디에도 ‘호읍할 곳’이 없음을 깨닫고는 ‘내 열 번 패망의 인생을 버려도 좋’을 것이라며 극단적인 자학의 모습을 보인다. 견딜 수 없는 답답함에 화자는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지만, ‘탈주할 사념의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불의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광명의 땅이라 믿고 찾아왔던 그곳이 결국은 ‘암담한 진창에 갇힌’ 암흑의 땅임을 깨닫게 된 화자는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도 해 보지만, 그 곳은 ‘정거장도 이백 리 밖’에 있는 ‘절망의 광야’일 뿐이다.
[작가소개]
유치환(柳致環)
청마(靑馬)
1908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
1937년 문예 동인지 『생리』 발행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1947년 제1회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
1957년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
1967년 사망
시집 :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蜻蛉日記)』(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유치환 시초』(1953), 『동방의 느티』(1959),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청마시선』(1974),
『깃발』(1975), 『유치환-한국현대시문학대계 15』(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