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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묵상글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 기도할 수 있는데 걱정은 왜?.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5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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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7.12 05:54
- 기도할 수 있는데 걱정은 왜?
“조심하여라.”
“걱정하지 마라.”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주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하시며 그러나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주민 아이들과 부모들과 지금 캠프를 하는 저는
걱정은 몇 살부터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 중에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생까지 있기 때문이며
오늘 오후에는 바닷가 물놀이도 할 예정이어서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기에 온다고 할 때 아이들은 다른 프로그램은 뒷전에 있고,
물놀이에만 관심이 있는데 저는 며칠 전서부터 걱정하고 있었고
그래서 떠나는 날도 수도원 형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진정 몇 살부터 걱정할까요?
그리고 왜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고 어른은 걱정할까요?
제 생각에 아이들은 선을 기대하고 어른들은 악을 걱정하며,
아이들은 현재를 살고 어른들은 미래를 앞당겨 살고,
아이들은 걱정을 어른들에게 맡기고 어른들은 자기가 걱정을 안고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대로 어른처럼 조심하고
아이처럼 걱정하지 않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물놀이를 예로 들면 물놀이할 때 악이 발생하지 않도록 곧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준비는 철저히 하되 어린이처럼 걱정은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조심(操心)이란 한자어로 마음을 잡는다는 뜻이고
방심 곧 흩어져 있는 마음을 잡는다는 뜻입니다.
죄의 악이든 자연적인 악이든 우리는 악에 대해서는
교만으로 인해 방심하지 말고 늘 조심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악을 피할 수 없고
그래서 선만 있기를 기대하지 않고 악도 각오해야 하며
많은 경우 최악을 각오하며 마음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인간으로서 해야 할 영역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걱정은 하지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을 각오는 하되 걱정은 하지 않는 것이고
걱정은 하지 말고 기도는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걱정하다가 즉시 신앙인으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걱정거리만 보고 있다가 즉시 시선을 하늘로 옮는 것이며,
걱정을 즉시 기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나는 자꾸 걱정하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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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의 여정
“두려워하지 마라”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시편69,33)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가난한 영혼들이 찾을 바 하느님이요 하느님을 찾아 만날 때 마음도 새롭게 살아 납니다. 어제는 제 사제서품 36주년(1989.7.11.)이 되는 날이었고, 오늘은 바오로 수사 선종 5주기(2020.7.12.)가 되는 날입니다.
돌아가시기 2주전 영명축일날, “나는 팔팔하다!”며 건강을 과시하던 88세 비오로 수사님이었습니다. 사제서품후 주변에서 참 많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책상위 사제서품식때 사진에서 젊고 건강해 보이던 어머니와 세 형님들도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입니다.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세상을 떠나 사라져 갑니다.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계실까 생각해 봅니다.
어제는 문득 흡사 매일 쓰는 강론이 유언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하루하루 날마다 유서遺書를 쓰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태양이 떠오르며 하루가 열리듯 강론 태양이 떠올라야 비로소 하루가 열리는 느낌입니다. 저에겐 특히 그러합니다. 강론을 쓰고 미사를 봉헌하면 하루가 반은 지난 듯 합니다.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교황의 두 언급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희망은 기쁨의 원천이다.”
(Hope is source of joy no matter our age)
‘행복하여라,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집회14,2)말씀을 주제로 한 제5차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문중 교황님 말씀입니다.
“생태적 위기는 관상적 시선을 요구한다.”
(Ecological crisis requires contemplative gaze)
휴가에 앞서 미사중 강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영문을 병기하니 더 실감있게 와닿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 기후위기, AI시대로 세상이 피폐해질수록 관상적 시각, 관상적 삶은 더욱 절실해 집니다. 세상 무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라지고 새 교황 레오14세가 매끄럽게 바톤을 텃치하여 임무를 잘 수행하고 계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무수히 죽어 사라지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하늘을 푸르고 강물은 흐르고 사람들을 살아 움직입니다. 흡사 바람처럼, 구름처럼 흔적없이, 자취없이 죽어 사라지는 사람들이요 서서히 기억속에서도 잊혀져 갑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는 끝납니다. 그동안 참 많은 분들이 인생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늘 창세기는 야곱이 긴 축복후(49장) 편안한 죽음이 소개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요셉이 유언후 죽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준비된 자연스런 죽음입니다. 사실 우리 많은 옛 어른들도 이렇게 유언을 남기고 편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보복이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형들을 안심시키는 요셉의 신앙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이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아, 요셉의 선종의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을 늘 경외하고 두려워하여 철석같이 믿었기에 세상에 대한, 심지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옛 어른들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크게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삶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대부분 모두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살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합니다.
두려움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합니다. 남의 죽음이지 나의 죽음은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합니다. 이래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생생한 교훈이 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삶은 우연한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성화의 여정입니다.
제가 늘 즐겨 예를 드는 일일일생, 내 삶의 여정을 하루로, 또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지 확인 점검한다면, 하루하루 선물같은 날에 감사하며 환상이나 탐욕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것이며 복된 선종도 가능하리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두려워하지 마라'는 내용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주님이자 스승을 삶의 모범으로 삼을 때, 모든 것은 주님 앞에서 투명히 드러남을 깨달을 때, 두려움 역시 사라집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안다고 증언하면 주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할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증언하면 주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증언할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의 명강론이 구구절절 심금을 울립니다.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어도 결코 하느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 허락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입니다. 세상 그 누구, 그 무엇도 영혼은 다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육신도 영혼도 멸망시킬수 있는 분,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 그 무엇도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내 육신은 물론 영혼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죽음은 영혼의 죽음이며 이를 두려워한다면 하느님을 경외하며 믿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우리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 가능한 순교의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영혼을 소홀히 방치하여 자초하는 심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돌봐야 할 것은 육신의 건강보다 영혼의 건강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사랑하고 신뢰할 때 날로 튼튼해지는 영혼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을 견고히 하고 영혼을 튼튼히 하여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거룩하신 그 이름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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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이 말씀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은 그분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요,
믿음은 그분에 대한 의탁의 시작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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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에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석사, 박사보다 더 높은 학위는 밥사 랍니다. 내가 먼저 따뜻한 밥 한 끼를 사는 마음이 석사, 박사보다 더 높다고 합니다. 밥사보다 더 높은 것은 감사라고 하네요. 항상 감사하고 사는 마음은 박사, 밥사보다 더 높다고 합니다. 감사보다 더 높은 것은 봉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를 보다 더 훌륭한 스승은 웃자라고 합니다. 웃으세요. 웃음이 최고의 스승입니다. 하지만 웃자 보다 더 좋은 스승은 함께 먹자!! 함께 살자!! 라고 합니다. 좋은 말은 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고 웃으니까 행복해진다고 하는 것처럼요. 오늘은 많이 웃는 날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입니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오릅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1970~80년대,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삶이 고단했던 시절, 그 프로그램은 저녁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웃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남철, 남성남 선생님과 같은 희극인들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 가난과 피로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삶의 활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분들의 재치는 철학자 못지않은 통찰이 있었고, 그들의 몸짓은 수사학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한마디 말로, 혹은 어이없는 실수 하나로 사람들에게 “그래, 아직 살 만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알았습니다. 웃음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교리와 신학 그리고 조직과 법으로 배워갈 수 있지만 결국 우리의 신앙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겁니다. 이웃을 보고 미소 지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진리는 높고, 깊은 곳에 있지 않다. 하느님 나라의 진리는 철부지 아이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신앙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처럼, 신앙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천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돈을 받고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는 예수님을 율법 학자와 대사제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요셉은 유혹받았지만 이겨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내셨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갇혔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셉은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였습니다. 가족들을 이집트 땅으로 데려와 편히 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께 이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평화를 빌어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신앙이란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그 사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버렸든 형제들을 용서했던 것처럼,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육신을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자녀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자신을 팔았던 형제들에게 복수하는 대신, 그들의 자녀까지 책임지겠다는 요셉의 말은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요셉의 말은 단지 관대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악을 선으로 바꾸는 삶’의 실천이었습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 우리가 때로는 참새보다 작고, 연약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 하느님의 섬세한 사랑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오늘도 부르십니다. 웃고, 감사하고, 봉사하며, 함께 먹고 살아가자고 말입니다. 오늘은 많이 웃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으니까 행복해지고, 감사하니까 삶이 빛나며, 함께 먹고 살자고 하니까 공동체가 됩니다. 오늘 하루, “밥사, 감사, 봉사, 웃자, 함께 살자”는 이 다섯 마디가 우리의 믿음 안에서 살아 숨쉬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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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변모의 이야기!
하느님의 숨
2025.07.12. 09:10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7월 11일 금요일 - 스물여덟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요나와 하느님의 괴이한 자비(Jonah and God's Scandalous Mercy)
우리 의식의 차원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CAC의 리빙 스쿨(Living School)의: 적극적인 참여 관상의 핵심이라는 과목에서 리처드 로어 신부는 요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해서 그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이야기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에게 있어 자기 변모를 위한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는지에 대해 나누어 줍니다:
1980년대 후반에 뉴멕시코로 이주해 온 후 저는 바로 남성들의 통과의례 의식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째서 고대 문화들에서는 남성들의 입문을 위해 이런 의식이 꼭 필요했는지에 관한 글들을 할 수 있는 한 모조리 읽었습니다. 남성들 내면에는 내려가기를 원하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고대의 어떤 문화도 남자들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남성은 그저 올라가기만을 원합니다; 남성은 최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남성성 안에 있는 경쟁적 본질이며, 이 본질이 우리 문화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말입니다.
무언가가 이런 의식의 차원을 깨뜨려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야기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그런 역할을 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 요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만큼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나의 이야기 안에는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소명으로부터 도망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물고기로 하여금 그를 삼켜 버리게 하여 그가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에 그를 뱉어내게 하십니다. 얼마나 완벽합니까! 이것이 바로 입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의해 삼켜져야 합니다. 토마스 머튼을 포함하여 많은 이가 사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야수의 배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은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곳이고, 우리가 조정할 수 없는 곳이며, 좋아하지도 않는 곳입니다. 우리의 통제력이 결핍되어 있다든가 우리가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든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거기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이 세대는 악하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하신 말씀에 상당한 중요성을 둡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 통해 우리에게 아주 단순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죽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
남성 입문 예식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올라갈 수 있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을 현대 심리학 용어로 말하자면, 에고나 분리된 자아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분리하고자 하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분리하고자 하는 생각은 우월하고자 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단 우리의 국적이나 문화, 종교, 혹은 정체성에 따라 우리 스스로를 규정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런 것들 하나하나를 방어해야만 합니다. 이 얼마나 큰 에너지 낭비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남을 비난하고 탓하기만 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최고"이고 다른 모든 사람은 열등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원론적 사고 방식입니다. 우리의 에고가 죽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누가 "승리"할 것인지를 안다고 자만하는 어리석음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쩌면 패배하는 것 같이 느껴질지 모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볼 때는 더더욱 그렇겠지요?! 사실 요나의 표징은 항복과 내려놓음, 포기의 상징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 표징을 받아들이는 것이 깨달음의 여정에 있는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표징은 우리가 참된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참된 여정을 해나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CAC의 매일 묵상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강의를 통해 엄청난 도움을 받았습니다. CAC는 제 신앙이 해체되고 재건되는 이 시기에 제게 생명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금 제게 있어 가장 큰 도전은 제 기도 생활입니다; 가부장적인 하느님을 뒤로 하고 떠나온 지금 저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저는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태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쳐야 할 이 과정을 신뢰하고, 영적인 삶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며 기도와 명상을 계속한다면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Hilary L.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and Michael Petrow, “The Sign of Jonah,” CAC’s Living School: Essentials of Engaged Contemplation,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February 202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ong Marshes, untitled (detail), 2017,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물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당황하여 발버둥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물 위로 끌어올려 주시는 하느님 자비의 부드러운 햇볕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우리 마음이 완고해진 것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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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참으로 사랑하고 참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하느님의 숨
2025.07.12. 06:0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두려움은 신들과 권력자들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갖게 되는 어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두려움을 근거로 한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선물 가운데 하나가 "주님에 대한 경외(두려워함)"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부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이 아니라, 무언가 소중한 것이 망가질까봐 갖게 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 이것을 "경외"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의 궁극적인 신비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당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두려움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받기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이 두려움 받기를 좋아하거나 사랑받기를 두려워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16).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지요?! 우리 인간의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은 모두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자체를 정화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gwig Wittgenstei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심층에 있는 것은 사실 겉에 있다!"
이 사람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깊은 곳에 있는 것은 다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것 아닐까요?! 사실 속과 겉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속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면 늘 우리는 드러나는 우리의 겉 모습을 살피기보다는 우리의 내면을 더 깊이 바라보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존 맥스웰(John Maxwell)의 유명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겉을 아는 자는 순간을 얻고, 속을 아는 자는 시간을 얻는다." 이게 무슨 말인지 우리는 다 압니다. 겉을 꾸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당장의 반응, 즉각적인 성과, 사람들의 시선에 좌지우지 되며 살아가기에 그만큼 쉽게 흔들리고 쉽게 잊혀지지만, 본질을 이해하고 그 깊이를 좇아 사는 사람은 비록 시간이 흐를지라도 결국 더 긴 시간 동안 중심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외부를 바라보는 사람은 꿈을 꾸지만,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사람은 깨어난다."
이 말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이비 종교는 '효과와 효력의 사이비 종교'입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가 신경을 쓰는 부분이 외면에 더 많이 치우쳐 있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내면으로 향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수양이겠지요?!
그러니까 무언가로 겉을 꾸미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그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그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데도 우리는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는 우리가 참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또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누가 그랬지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간다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자유로워지는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남의 시선에 더 큰 신경을 쓰고 살았다면 이제는 참으로 '나'의 내면을 살피며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찾아내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는 과거로 흘려 보내고 지금의 소중함을 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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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몇 달 전에 정말 오랜만에 버스 탈 일이 있었습니다. 빈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고 있는데, 학창 시절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는 버스 손잡이를 잡지 않고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버스 손잡이를 놨는데, 갑자기 버스가 방지턱을 넘어가면서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곧바로 버스 손잡이를 잡아서 중심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버스가 흔들릴 때, 옆에 서 있는 분을 잡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그분과 함께 넘어졌을 것입니다. 고정되어 있는 버스 손잡이만이 넘어지지 않고 제대로 중심을 잡게 해줍니다.
주님이 바로 우리의 영적 손잡이입니다. 주님께서는 절대 중심을 잃지 않는 분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엉뚱한 것을 잡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잡으려 하고, 이를 통해서만 자기 삶이 안전하다고 착각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너무 쉽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는 중심을 잡을 수 없습니다. 계속 흔들리면서 큰 흔들림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됩니다.
주님을 꽉 움켜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뢰를 통해서 세상의 온갖 두려움을 이겨내는 커다란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는 것은 세상 안에서 편하고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며,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로부터 ‘베엘제불’이라는 모욕을 당하셨고, 또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도 이렇게 불명예와 모욕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사람은 육신만을 해칠 수 있지만, 하느님은 육신과 영혼을 모두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더 집중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꽉 잡고 주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잠깐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지향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 영원한 행복을 위해 철저하게 주님을 잡고,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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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행복을 두 손안에 꽉 잡고 있을 때는 그 행복이 작아 보이지만, 그것을 풀어준 후에는 비로소 그 행복이 얼마나 크고 귀중했는지 알 수 있다(막심 고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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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마태 10,24)
스승처럼 된다
참으로 제자는 본성상 스승보다 높지 않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자녀 되는 권한으로 스승처럼 된 이는 결코 자신의 본성을 뛰어 넘을 수 없으며, 스승처럼 되는 것이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스승은 한 사람뿐이고, 당신이 그 스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스승이란 자들은 자신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로 가르치므로 참된 스승보다는 일상적인 틀에 박힌 스승의 모습과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어져 있는 선과 조회를 이룬다면, 사람은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엑카르트가 이러한 신적 합일의 풍성한 열매를 이야기하기 위해 언급한 성서 말씀은 아래와 같다.
내가 오늘의 나인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총이 헛되지 않았기 입나는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
갈라티아서에 나오는 바울로의 말씀도 엑카르트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나는 살아 있지만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 2,20). 이제 우리는 버릴 줄 알고 그대로 둘 줄 아는 자로 살아간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사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내향적인 삶이 아니라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이다. 그것은 아버지와 동일한 터에서 싹트는 삶이다. 쉬르만은 우리의 신화를 말하는 이러한 전통이 죄와 율법과 은총에 치중하는 서구의 신학에는 누락되어 있으며, 엑카르트 이전에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히폴리투스, 오리게네스 등의 동방 신학자에 의해 오랫동안 개진되었다고 말하는데, 그의 말은 과연 옳다. 동방 신학자들의 전통 역시 엑카르트가 다루는 주제, 곧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탄생을 말한다.(423)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궁극적 실재로서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진다
무책임한 종교 혼합주의는 흔히 종교를 삶이나 체험으로서가 아니라 머릿속 이론으로 생각하는 사이비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쉽다. 역사적 종교들의 상대성과 제악성을 강조하다 보면, 세계 고등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가장 순수하고도 높은 진리들을 종합하여 더 완전한 세계 종교를 만들면 인류 복지에 이바지 할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종교 다원론은 결코 종교 혼합주의로 나아가려는 것이 아니다.
종교란 그 안에 생명을 지닌 씨앗 같은 것이지 생명이 없는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이 아니다. 종교는 살아 있는 나무와 같은 것이지 거대 컴퓨터 같은 기계가 아니다. 종교 혼합주의자들은 종교를 살아 숨쉬는 생명 현상으로 이해하지 않고 생명이 없는 모자이크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존 힉의 ‘신 중심적 모델'이 제시했던 ‘신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는 은유적 명제는 자신을 절대화하거나 다른 종교를 우상 종교로 배척하려는 개별 종교의 독단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성적으로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종교 다원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나아가 개별 종교의 고유성을 담보할 수 있으려면 또 다른 은유적 모델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무지개 모델'로 이름 붙일 수 있다.(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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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두려움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박윤식 [big-llight] 250711. 20:37 ㅣNo.183392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운 사명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할게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파견하시는 그분께서는
누가 뭐래도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 두실만큼 우리를 소중히 여기신다.
그리고 우리 부족분을 시도 때도 없이 어디서나 늘 당신 힘으로 다 채워 주신다.
따라서 비록 죄인일지라도 거짓 평화에 안주하지 않고
하느님 정의를 외치는 게 일차 우리 모두의 마음가짐이리라.
아버지는 자식이 아무리 짜증내고 불평해도 마음속을 뚫어 보신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단지 일개 어린이일 따름이다.
그래서 다들 두려워만 한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적 빈곤을 염려한다.
돈 없는 미래가 될까 봐 시간만 나면 전전긍긍이다.
이런 사실과 달리 하느님 자녀가 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어 어떤 위험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피난처를 얻었다고 믿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정말 그렇게 사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지?
사실 예수님은 미래에 염려하고 바장이는 이런 우리를 두고 전혀 두려워하지 말라신다.
하찮은 참새도 당신 허락으로 땅에 떨어진단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워만 한다. 막연한 두려움에 열정을 빼앗긴다.
대부분은 몰라도 되는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탓일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단다.
그만큼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거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일 게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에.
그러하지만 실상은 다소 두렵단다.
위협받는 생명에 목숨 빼기는 일이 자주 이어진다.
예전보다 지금은 만나는 게 더 무서운 세상이란다.
왜 이렇게까지 안타까운 지경이 되었을까? 생명의 존엄성은 무시된다.
이렇듯 주어진 생명일지라도 실상은 우리 게 아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을 좌우하시는 하느님만이 우리 영혼을 어루만진다.
그래서 내 모든 걸 아시는 주님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
과장되고 왜곡된 내가 아닌 비천하고 죄스러운 그대로의 만남이, 주님께는 더 아름다울 게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하늘나라가 완성될 때에 믿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게다.
그렇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닌,
장차 이루어질 약속에 대한 희망을 향해가는 그 여정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닥칠 시련을 예고하신다.
그러기에 막강한 국가 권력을 쥔 통치자들은 물론,
얼굴조차 모르는 이웃의 박해가 따를지라도 미리미리 그것에 걱정일랑 하지를 말라신다.
사실 주님은 잘나고 죄 없다는 나를 사랑하시는 게 아닌, 죄인임을 고백하는 나를 더 사랑하시리라.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만나면 두려움은 자연 저 멀리로 사라질 수밖에.
사실 하느님을 증언하면 때로는 미움을 받을 수도.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할게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을 증언하라신다.
그리하면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숨겨져 있던 구원을 직접 보게 될 터이니까.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그러기에 고통스럽고 당혹한 상황에 직면하여 당황하게 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늘 되새기자.
물론 절망의 한계를 절감하는 그 순간도,
그분의 도구로 선택된 우리는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다짐하자.
따라서 어떠한 어려움이 우리를 닥칠지라도,
두려움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고 다시 또 다짐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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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도피신앙보다는 회피신앙
강만연 [fisherpeter] 250711. 19:48 ㅣNo.18339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한 부분에 대해 집중해 묵상한 게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회피와 도피 이 두 가지 요소는 마치 저울에서 어느 쪽으로 기우냐는 것에 따라 같은 현상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장애물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그럴 때 보면 보통 그런 장애물을 잘 넘어 장애를 극복하면 좋다고 해서 가급적이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 줍니다. 분명 이것도 좋은 건 맞지만 꼭 어떤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 장애물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얼굴과 생김새가 다르듯이 그 사람의 역량 또한 다르기 때문에 그 장애물과 마주하여 정면 돌파하면 좋겠지만 그런 과정에서 경우에 따라 그걸 극복한 사람과 은연중에 자신과 비교돼 오히려 자존감만 상실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보다는 때로 회피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회피하면서 나중에 또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됐을 때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돼 여러모로 그간 자신의 역량이 더 성장될 수도 있고 그런 상황에서는 어쩌면 전에는 회피했지만 지금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다시 정면 돌파하면 장애물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결과만을 비교하면 극복의 시기가 선후관계이지만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때로는 그 상황을 잠시 벗어나 상황이 호기가 됐을 때 다시 마주하다 보면 현실적인 장애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그런 회피의 모습이 마치 소극적이고 비겁한 행동처럼 여기지 않는 사고를 견지하는 것도 신앙생활을 현명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도 이런 원론적인 사례를 일반 평신도분에게서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 배운 하나의 지혜라고 말씀해 주신 분도 계셨기 때문에 일정 부분 공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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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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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달은 달이다 -
서하 [nansimba] 2025-07-12 ㅣNo.183395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태 10,25)
비교와 자기상실의 시대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문득 멈춰섭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더 나은 사람이 되려 애쓰며 살아가는지요.
더 유능하게, 더 인정받게, 더 많이 사랑받기 위해…
그러나 그 애씀 뒤에는
비교와 판단, 조급함,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슬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조용히 건넵니다.
“스승처럼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높아질 필요도, 앞서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고 머무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존재의 깊이로 초대하는 말씀
예수님은 행위보다 존재를 보십니다.
“무엇을 할까”보다, “어떤 존재로 살아갈까”를 묻습니다.
스승처럼 '되는 것' ―
이것은 단순히 역할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양식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완성입니다.
충분하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말씀은 존재의 완전성을 선포합니다.
더 많이 이뤄야 한다는 조급함도,
더 인정받아야 한다는 불안도 내려놓게 합니다.
나는 지금 이대로
그리스도와 일치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일함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고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확신입니다.
고난을 통한 일치의 신비
하지만 왜 제자도 스승처럼 고난을 겪어야 할까요?
그것은 단순한 운명의 반복이 아닙니다.
사랑의 본질이 자기 비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듯,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타자를 위한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세상의 기준과 맞지 않기에,
저항과 거절,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된 존재가 됩니다.
존재의 해방
“충분하다”는 말은
우리를 얽매던 수많은 사슬을 끊어냅니다.
더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더 잘나야 한다는 피로에서
더 인정받아야 한다는 불안에서
우리 존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스승처럼 된다는 것
스승처럼 된다는 것은
존재 방식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소유 중심에서 나눔 중심으로
지배 중심에서 섬김 중심으로
자기 중심에서 타자 중심으로
이것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지는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 안에서
이 변화를 시작하게 합니다.
존재 자체가 기도가 되는 삶
“제자가 스승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말씀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 평화의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불안 속에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도이며,
찬양이고, 선교가 됩니다.
주님,
더 많이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저를 해방시켜 주소서.
당신 안에서
저의 참된 정체성을 깨닫고
그 존재 안에 머물며
당신 제자로서,
당신과 같은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믿게 하소서.
비교와 경쟁의 피로에서 벗어나
평화로 살아가게 하시고,
저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 전하는 복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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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우리는 소중한 존재이기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라는 존재는 육신의 죽음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영혼을 통해 하느님과 영원히 살아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영혼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고
다만 하느님께서 다루시는 영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없어지는 것보다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하느님이시기에
또한 우리의 육신도 보호해 주기를 원하시며
더 나아가 사람들이 빼앗은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보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관점에서는
그래서 우리의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점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멸망시키실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육신과 영혼의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우리를 귀하게 보시는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우리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상황을 말하지만
우리 삶의 다른 상황에서도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그 출발점은 생명의 위협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욱이 요즘은 사회적인 고립도
육신의 죽음만큼 심각하기도 합니다.
이 상황에서도
우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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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2.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0,24-33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마음 속에 이런 두려움을 갖게 되지요.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 막내 동생 요셉은 형제들이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모든 잘못을 말끔하게 용서했는데, 그의 마음엔 형들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 같은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데, 형들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로부터 보복을 받을까봐 두려워했던 겁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아버지께서 형들을 용서해주라고 하셨다’는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를 ‘종’이라 칭하며 요셉 앞에서 비굴하게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들을 용서한 동생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그 이유조차 불분명한 두려움에 빠져 잔뜩 주눅들어 있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요셉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의 답변에서 그가 지닌 깊고 단단한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느님 뿐임을 잘 알고 있었지요. 아무리 자신에게 못된 짓을 한 형들이라도, 하느님께서 그들이 꾸민 악을 선으로 바꾸셨기에, 자신은 그런 선하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 속에서 살고 있기에, 그런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복수를 꿈꾸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다짐하는 겁니다. 심판은 전능하신 하느님이 하실 일이지 부족하고 죄많은 자신이 할 일이 아니니까요. 요셉은 그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시어 약속하신 땅으로 데리고 가시겠다 하신 약속을 굳게 믿으며 희망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그런 요셉을 닮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세속의 권력자들을 두려워하며 그들 눈치를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우리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셨지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귀하게 여기시기에 그러지 않으시는 분, 그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가장 귀한 것을 주실 수 있는 사랑 넘치시는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혹여나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을까하는 염려로 말과 행동을 삼가는 참된 두려움인 ‘경외심’을 지니고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해서, 하느님을 믿고 그분 뜻을 철저히 따른다고 해서, 우리에게서 고통이나 시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디트리히 본 회퍼) 그러니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않아야만, 내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이루어져야만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유아기적 사랑에만 계속 머물러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로하여금 죄악과 싸워 이길 면역력을 키우게 하시기 위해, 때로는 우리를 유혹과 시련이 가득한 광야로 내보내시는 것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방식임을 받아들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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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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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282
7월12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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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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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하태성 요셉(상도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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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각자를 눈여겨 보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
제 어린 시절, 참새 구이집이 여기저기 있었습니다. 저도 선친 따라 포장마차 갔다가 몇 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맛이 고소하고 담백했습니다. 가는 뼈를 통째로 씹기 때문에 바삭바삭했습니다. 과거 임금의 보양식으로 수라상까지 오를 정도로 맛과 영양가를 겸비한 음식으로 전해집니다.
유다인들도 참새고기를 먹었답니다. 부자와 상류층들은 주로 소나 양, 염소 고기를 즐겨 먹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가끔 기름진 고기 맛을 봐야 했었는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지라, 차선책으로 참새구이를 즐겨 먹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참새잡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도 생겨났고, 시장에 가면 살아있는 참새가 매매되곤 했습니다.
시장에서 사온 참새는 깃털을 뽑고, 내장을 빼낸 다음, 나무 꼬챙이에 꿰어서 불판 위에 얹어 돌려가며 구웠습니다. 가성비가 높다 보니 참새는 당시 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식재료로 손꼽혔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관세법 관련 고대 비문에서는 식품으로 활용되는 모든 조류들 가운데 참새가 가장 저렴했다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참새의 저렴함에 대해 언급하고 계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 10, 29)
예수님께서는 세상 하찮은 존재의 대명사로 참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고 귀히 여기신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으뜸이요, 참새보다 몇 천 만 배 더 소중한 인간 존재를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소중히 여기시겠냐는 것입니다.
마무리 말씀 또한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특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천만 탈모인들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30)
물론 예수님 말씀의 진의가 이미 사하라 사막처럼 폐허가 되어 버린 이마를 무성한 수풀처럼 복원시켜주시겠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각별히 여기시며 눈여겨보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와 일대 백이 아니라, 일대 일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황공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친히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며, 나와 매 순간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 속에 사시겠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이 세상엔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방이 적군으로 둘러 쌓여 있고 아군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도 버려야겠습니다.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나를 기억하고 계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 둘도 없이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으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더이상 흔들리지도 말며, 안심하고 기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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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짙은 어둠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김창옥 강사가 오랜 강의로 지쳐 우울증이 걸려있을 때였습니다. 소통과 치유 등을 주제로 강의했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부질없이 느껴졌습니다. 길을 찾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노(老) 수사신부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신부님은 침묵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침묵을 어디서 배우냐고 묻자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마콩이라는 수도원에 들어가 잠시 피정을 하라는 권고였습니다.
하도 절박했기에 그는 생전 처음으로 2주의 휴가를 내서 프랑스 시골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는 어차피 말이 안 통하니 침묵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짧지만 진실 되게 자신과 대화해 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말을 걸기가 두려웠습니다. 며칠이 지나 그 날도 과수원에 앉아 있는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너 여기까지 잘 왔다!” 별 말이 아니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그 위로를 그렇게 갈망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강사가 자신이 믿지도 않는 종교가 운영하는 외국 피정 집에 귀중한 2주간의 휴가를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절실하면 얻게 됩니다.
대부분 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길을 찾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황을 끝내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길을 제시해주면 시큰둥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혹은 자기 방식으로 끝내고 싶은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지만 또한 끊임없이 그 만남을 두려워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누군가와의 만남은 내 자신과의 헤어짐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하느님이 있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대통령의 옷까지 벗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먼저 대통령의 옷을 벗지 못하면 하느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대통령의 옷을 벗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를 벗어야 그분을 입을 수 있습니다. 먼저 내가 생각을 멈춰야 그분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성경이나 영성가들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과의 만남은 늘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분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둠에서만 구별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어둠임을 인정할 때 그 빛이 보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어둠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어둠속에서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둠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자신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 스스로 빛을 찾아내겠다고 돌아다녔다면 자신의 우울증을 끊어버렸던 저 목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방황할 때,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싶을 때, 나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합니다. 어둠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하게 홀로 멈추어서면 됩니다.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어둠입니다.
세상 것에서 빛을 찾지 않는 것이고 내 스스로도 빛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앉아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는 주님을 만나지 못할까요? 계속 빛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짙고 어두운 구름 속에서 십계명을 내려주셨습니다.(신명 5,22 참조) 하느님께서 성막의 지성소에서 모세를 만나 이야기 하실 때도 지성소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짙은 어둠의 공간이었습니다.
각자의 지성소가 있고 그 어둠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기다리기만 하면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이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두워지지 않으면 그분은 빛으로 오실 수 없습니다.
배부를 때보다 배가 고플 때 그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골똘히 생각할 때보다 생각의 끈을 놓았을 때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기쁠 때보다 어둠으로 짓눌릴 때 그분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고 하십니다. 분명 그분은 어두운 곳에서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밝아집니다
말씀으로 등불을 삼고 싶다면 어둠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둠속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고 그 사람을 주님은 예언자로 만드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끊으면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어둠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분과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어둠 속에 있어야 말씀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머무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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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에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석사, 박사보다 더 높은 학위는 밥사 랍니다. 내가 먼저 따뜻한 밥 한 끼를 사는 마음이 석사, 박사보다 더 높다고 합니다. 밥사보다 더 높은 것은 감사라고 하네요. 항상 감사하고 사는 마음은 박사, 밥사보다 더 높다고 합니다. 감사보다 더 높은 것은 봉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를 보다 더 훌륭한 스승은 웃자라고 합니다. 웃으세요. 웃음이 최고의 스승입니다. 하지만 웃자 보다 더 좋은 스승은 함께 먹자!! 함께 살자!! 라고 합니다. 좋은 말은 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고 웃으니까 행복해진다고 하는 것처럼요. 오늘은 많이 웃는 날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입니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오릅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1970~80년대,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삶이 고단했던 시절, 그 프로그램은 저녁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웃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남철, 남성남 선생님과 같은 희극인들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 가난과 피로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삶의 활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분들의 재치는 철학자 못지않은 통찰이 있었고, 그들의 몸짓은 수사학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한마디 말로, 혹은 어이없는 실수 하나로 사람들에게 “그래, 아직 살 만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알았습니다. 웃음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교리와 신학 그리고 조직과 법으로 배워갈 수 있지만 결국 우리의 신앙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겁니다. 이웃을 보고 미소 지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진리는 높고, 깊은 곳에 있지 않다. 하느님 나라의 진리는 철부지 아이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신앙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처럼, 신앙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천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돈을 받고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는 예수님을 율법 학자와 대사제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요셉은 유혹받았지만 이겨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내셨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갇혔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셉은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였습니다. 가족들을 이집트 땅으로 데려와 편히 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께 이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평화를 빌어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신앙이란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그 사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버렸든 형제들을 용서했던 것처럼,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육신을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자녀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자신을 팔았던 형제들에게 복수하는 대신, 그들의 자녀까지 책임지겠다는 요셉의 말은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요셉의 말은 단지 관대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악을 선으로 바꾸는 삶’의 실천이었습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 우리가 때로는 참새보다 작고, 연약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 하느님의 섬세한 사랑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오늘도 부르십니다. 웃고, 감사하고, 봉사하며, 함께 먹고 살아가자고 말입니다. 오늘은 많이 웃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으니까 행복해지고, 감사하니까 삶이 빛나며, 함께 먹고 살자고 하니까 공동체가 됩니다. 오늘 하루, “밥사, 감사, 봉사, 웃자, 함께 살자”는 이 다섯 마디가 우리의 믿음 안에서 살아 숨쉬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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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움의 종이 되고, 더 나아가 그 두려움을 일으키는 대상의 종이 되지 않도록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씩 들어 보이십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입니다. 제자와 종이 스승과 주인보다 높지 않다는 말씀은, 어려움을 먼저 겪으신 예수님께 제자들의 눈이 향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하여 어려움은 오히려 예수님과 더욱 굳게 일치하게 하고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사도 5,41 참조)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26) 하신 말씀입니다. 이 문장에서 ‘드러나다’와 ‘알려지다’에는 수동태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비밀로 감추어졌던 복음을 제자들이 명확하고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지만 그 선포의 참된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제자들은 홀로 버려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일하시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장벽도 전능하신 그분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두려움이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없애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닌, 사람 전체를 다스리고 지배하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도록 권고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참새와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로 하느님의 무한한 배려와 보살핌을 제시하십니다. 하느님을 단순히 절대자로 묘사하시지 않고 친밀함과 애정을 나타내는 “너희 아버지”로 표현하시며 “허락 없이는”(10,29)이라는 말씀으로 세상 모든 것이 그분의 주권과 보호 아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낙심하여 두려움에 갇히게 되는 순간마다, 예수님의 논리가 우리 생각의 중심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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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24-33: 육신만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25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에 우리가 그분과 같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제자들은 자신을 스승이나 주님보다 더 높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하시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다.(요한 15,15 참조) 복음에 나오는 “어두운 곳, 밝은 곳, 귓속말, 지붕 위”(27절)라는 말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둠이고 밤이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높은 곳에서 선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28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28절)이다. 이 멸망은 묵시록에서 “두 번째 죽음”(20,6)이라고 하며 이 죽음은 지옥에서 겪게 될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새는 창조물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것이다. 그러나 그 참새조차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미물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알고 계시겠는가?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섭리로 돌보신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참새의 생명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보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절)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도 아무 소용없다. 고백의 뿌리는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은 믿음의 열매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한, 뿌리는 가지나 잎을 만들어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사도 바오로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하였다. 마음의 믿음이 없다면 입으로 고백할 수 없으며, 마음의 믿음도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하여 입으로 늘 고백의 씨앗을 뿌리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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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처럼>
마태오 10,24-33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님처럼>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마태 10,25)
님께서
하시듯
내가
하니
나는
비로소
님의 사람입니다
님께서
믿으시듯
내가
믿으니
나는
비로소
님의 사람입니다
님께서
바라시듯
내가
바라니
나는
비로소
님의 사람입니다
님께서
사랑하시듯
내가
사랑하니
나는
비로소
님의 사람입니다
님께서
살리시듯
내가
살리니
나는
비로소
님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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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박해자들은 수많은 참새들보다 더 하찮은 존재들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24-33)
1) 이 말씀은, “박해를 받더라도 굴하지 말고, 흔들림 없이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1-2) 신앙인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박해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꾸준히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2)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예수님처럼 고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당신보다 더 심한 고난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라는(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는 일이 생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뒤따라간다는 말은, 박해와 고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그 길 끝에 있는 부활에 참여하는 것도 뜻합니다. 예수님 뒤를 끝까지 따라가면 예수님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3)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라는 말씀은, “복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감추지 말고 알려라.”라는 명령으로 읽을 수도 있고, “너희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몫이 없다.”라는 경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영혼에 대해서 아무 권한이 없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해자들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라는 말씀은, “영혼의 멸망을 두려워하여라.”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만을 섬겨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는 박해자들이 지옥에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인간들이 하는 일을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신앙인들의 신앙생활도, 박해자들의 죄도 전부 다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박해자들보다 더 귀하다.”로 읽을 수도 있고, “박해자들은 참새들보다 더 하찮은 존재들이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4) 32절-33절의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인간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시다가 앙갚음하신다는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박해를 받더라도 굴하지 말고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박해받는 신앙인들을 당신이 계속 지켜 주시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일’은,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뜻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 사도입니다.(마태 26,69-75) 베드로 사도는 박해자들이 두려워서 얼떨결에 그랬다가 금방 회개했는데, 그런 일이 생길 것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더욱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강조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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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재현 요셉 신부님]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닥쳐올 온갖 위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잡혀가고 채찍질 당하고 고발당하여 죽게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위험을 말씀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 차례나 말씀하십니다.
26절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28절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31절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가.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한 일을 당할 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천둥이나 번개 , 거센 바람, 파도, 지진, 화산 폭발. 대자연의 위대함 앞에 사람은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 모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첫째 편지 3,14 “사람들이 여러분을 협박하더라도 무서워하거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2,17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시오.”
사도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시편의 노래를 들읍시다. "답답할 제 주님을 내 불렀더니 내 소리 들으시고 구하여 주셨도다. 주 함께 계시거늘 무서울 것 있을소냐 인간이 나에게 무엇을 할까보냐 주께서 함께 계서 나를 도와 주시니 원수들의 망신을 나는 보리라.(시 118,5)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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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말씀은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에 이어집니다. 제자와 스승, 종과 주인의 간단한 비유는 예수님과 사도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높고 낮음의 비유는 사도들이 활동하면서 예수님을 드러내고 그분께서 하신 것을 그대로 따르게 합니다. 이것은 제자의 자세로,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앞서갈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비유는 사도들이 겪을 박해에도 적용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업적을 지속하는 것처럼 그분의 수난에도 동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님보다 더 큰 고통이나 고난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주어지는 오늘 말씀은 사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이들이고, 그 길은 기쁨과 영광만이 아닌 고통과 수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몸소 사도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의 위로는 이제 사도들을 넘어 넓은 의미의 제자들,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되풀이되는 “누구든지”는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이 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사명이자 선교의 기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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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강의를 끝마치고 나면 스스로 강의에 대한 평가를 합니다. 내용은 어떠하였는지, 강의에 참여한 이들의 반응은 좋았는지 반성하는데, 그 평가는 언제나 박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가 채우지 못한 것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셨다고 믿으며 주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또한 사소한 내용을 말하더라도 대단하게 받아들여 주는 신자분들이 있기에 감사합니다. 이러한 반성 가운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얼마나 진심으로 강의를 준비하였는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삶의 이야기로 다가갔는지, 그리고 최선을 다하였는지 되돌아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한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정의를 부르짖으며 옳은 일에 나서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행하려는 노력들이 부끄럽고 어색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할지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그분처럼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겨 드리고 의지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고 외치는 것이 오지랖이 넓은 것 같고 어색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외면하고 숨고 피하며 살아갑니다.
주님께 맡기는 삶은 우리의 두려움을, 어색함과 창피함을, 그리고 나약함과 죄스러움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 봉헌으로 더 많이 채워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사랑과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바람과 희망만 있다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세상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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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달 전에 정말 오랜만에 버스 탈 일이 있었습니다. 빈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고 있는데, 학창 시절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는 버스 손잡이를 잡지 않고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버스 손잡이를 놨는데, 갑자기 버스가 방지턱을 넘어가면서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곧바로 버스 손잡이를 잡아서 중심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버스가 흔들릴 때, 옆에 서 있는 분을 잡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그분과 함께 넘어졌을 것입니다. 고정되어 있는 버스 손잡이만이 넘어지지 않고 제대로 중심을 잡게 해줍니다.
주님이 바로 우리의 영적 손잡이입니다. 주님께서는 절대 중심을 잃지 않는 분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엉뚱한 것을 잡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잡으려 하고, 이를 통해서만 자기 삶이 안전하다고 착각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너무 쉽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는 중심을 잡을 수 없습니다. 계속 흔들리면서 큰 흔들림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됩니다.
주님을 꽉 움켜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뢰를 통해서 세상의 온갖 두려움을 이겨내는 커다란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는 것은 세상 안에서 편하고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며,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로부터 ‘베엘제불’이라는 모욕을 당하셨고, 또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도 이렇게 불명예와 모욕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사람은 육신만을 해칠 수 있지만, 하느님은 육신과 영혼을 모두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더 집중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꽉 잡고 주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잠깐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지향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 영원한 행복을 위해 철저하게 주님을 잡고,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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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의 여정>
- “두려워하지 마라” -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시편 69,33)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가난한 영혼들이 찾을 바 하느님이요 하느님을 찾아 만날 때 마음도 새롭게 살아 납니다. 어제는 제 사제서품 36주년(1989.7.11.)이 되는 날이었고, 오늘은 바오로 수사 선종 5주기(2020.7.12.)가 되는 날입니다.
돌아가시기 2주 전 영명축일 날, “나는 팔팔하다!”며 건강을 과시하던 88세 비오로 수사님이었습니다.
사제서품 후 주변에서 참 많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책상위 사제서품식 때 사진에서 젊고 건강해 보이던 어머니와 세 형님들도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세상을 떠나 사라져 갑니다.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계실까 생각해 봅니다.
어제는 문득 흡사 매일 쓰는 강론이 유언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하루하루 날마다 유서遺書를 쓰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태양이 떠오르며 하루가 열리듯 강론 태양이 떠올라야 비로소 하루가 열리는 느낌입니다. 저에겐 특히 그러합니다. 강론을 쓰고 미사를 봉헌하면 하루가 반은 지난 듯 합니다.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교황의 두 언급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희망은 기쁨의 원천이다.”
(Hope is source of joy no matter our age)
‘행복하여라,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집회 14,2)말씀을 주제로 한 제5차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문중 교황님 말씀입니다.
“생태적 위기는 관상적 시선을 요구한다.”
(Ecological crisis requires contemplative gaze)
휴가에 앞서 미사중 강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영문을 병기하니 더 실감있게 와닿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 기후위기, AI시대로 세상이 피폐해질수록 관상적 시각, 관상적 삶은 더욱 절실해 집니다. 세상 무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라지고 새 교황 레오14세가 매끄럽게 바톤을 텃치하여 임무를 잘 수행하고 계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무수히 죽어 사라지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하늘을 푸르고 강물은 흐르고 사람들을 살아 움직입니다. 흡사 바람처럼, 구름처럼 흔적없이, 자취없이 죽어 사라지는 사람들이요 서서히 기억속에서도 잊혀져 갑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는 끝납니다. 그동안 참 많은 분들이 인생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늘 창세기는 야곱이 긴 축복 후(49장) 편안한 죽음이 소개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요셉이 유언 후 죽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준비된 자연스런 죽음입니다. 사실 우리 많은 옛 어른들도 이렇게 유언을 남기고 편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보복이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형들을 안심시키는 요셉의 신앙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이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아, 요셉의 선종의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을 늘 경외하고 두려워하여 철석같이 믿었기에 세상에 대한, 심지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옛 어른들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크게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삶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대부분 모두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살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합니다.
두려움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합니다. 남의 죽음이지 나의 죽음은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합니다. 이래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생생한 교훈이 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삶은 우연한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성화의 여정입니다.
제가 늘 즐겨 예를 드는 일일일생, 내 삶의 여정을 하루로, 또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지 확인 점검한다면, 하루하루 선물같은 날에 감사하며 환상이나 탐욕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것이며 복된 선종도 가능하리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두려워하지 마라'는 내용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주님이자 스승을 삶의 모범으로 삼을 때, 모든 것은 주님 앞에서 투명히 드러남을 깨달을 때, 두려움 역시 사라집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안다고 증언하면 주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할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증언하면 주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증언할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의 명강론이 구구절절 심금을 울립니다.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어도 결코 하느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 허락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입니다. 세상 그 누구, 그 무엇도 영혼은 다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육신도 영혼도 멸망시킬수 있는 분,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 그 무엇도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내 육신은 물론 영혼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죽음은 영혼의 죽음이며 이를 두려워한다면 하느님을 경외하며 믿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우리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 가능한 순교의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영혼을 소홀히 방치하여 자초하는 심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돌봐야 할 것은 육신의 건강보다 영혼의 건강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사랑하고 신뢰할 때 날로 튼튼해지는 영혼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을 견고히 하고 영혼을 튼튼히 하여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거룩하신 그 이름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 105,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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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
<악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여정!>
오늘 복음(마태10,24-33)은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가장 큰 기쁨은 마지막 때에 내가 믿고 있는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 반대는 가장 큰 아픔이지요.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은 기뻐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동생 요셉을 팔아넘긴 형들이 이집트에서 요셉을 만납니다.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20)
믿는 이들의 여정은 '악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믿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기쁘게 주님께 나아가는 여정이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기쁨을 또한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너에게 나누어 주는 여정입니다.
함께 이 여정에 기쁘게 참여합시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으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래서 마지막 날에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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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8)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흔들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우리 삶에서
두려움의 자리를
하느님께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의
가장
작은 것까지
아십니다.
진정한
두려움의 대상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두려움은
세상의 두려움을
이기는
참된 자유의
시작입니다.
두려움을
넘은 자만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참된 자유는
하느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두는
참된
자유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우리들은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를
압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두려움을
다스리는 힘은
사랑과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수록
우리는 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할까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묶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우리를
하느님께
붙들게 하는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내린 영혼은
두려움을 너머
자유를 함께합니다.
육신의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고
오늘도
하느님 안에서
흔들림 없이
걷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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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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