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킷브레이크 / 김지희
숫자들이 숨 쉴 틈 없이 밀고 밀리며 다툰다. 눈 깜짝할 새 화살코를 아래로 내리꽂고 온통 파랑이 점령을 한다. 퍽, 전광판이 멎었다. 휴장을 알리는 다급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개장 삼십 분 만에 휴전상태다.
서킷브레이크는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급락하는 경우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매매를 정지하는 제도이다. 개장 5분 후부터 끝나기 40분 전까지 발동할 수 있다. 당일 한 번 발효한 후에는 요건이 충족되어도 다시 발동할 수 없다. 전일에 비해 주가가 십 퍼센트 이상 하락한 상태가 일 분 이상 지속되면 거래를 이십 분간 중단시킨다.
남편은 브레이크를 장착하지 않은 불도저였다. 어떤 일이든 재는 일없이 저질러 놓고 보았다. 의논 한마디 없이 사업을 하겠다며 직장을 그만 둔 남편은 시작도 전에 퇴직금과 쥐꼬리만큼 저축해 놓았던 자금을 여기저기 떼였다. 계획이 버그러지자 일상은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자신감마저 잃고 손을 놓게 되었다.
"달밤에 삿갓 쓰고 나오더라."라는 속담은 가뜩이나 미운 사람이 더 미운 짓만 함을 이른다. 남편은 거의 매일 오밤중에 나가 온몸이 술에 절어 새벽에 귀가를 했다. 아침이면 술기운 때문에 일어나지 못해 짜증을 달고 살았다. 다른 사람들에겐 한없이 후하게 굴다가도 식구들에겐 일없이 버벅거리기가 예사였다. 어느 땐, 아이가 늦은 밤에 고열로 끙끙 앓아 응급실을 가야 했는데도 짜증부터 먼저 냈다. 남편이 중심을 잡지 못하자 가족이라는 배가 가라앉기 직전이었다. 건전지가 닳아 째각 소리만 내며 멈춘 시곗바늘처럼 삶은 두 해 넘게 매양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하루가 멀게 안 보면 큰일 날 것처럼 어울려 다니던 남편 친구들도 사업실패 소식에 차츰 연락을 끊었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친동기간들조차도 소원해졌다. 평소에 남편은 가족보다는 친구들과 주위사람을 우선으로 챙겼다. 하지만 정작 힘들고 부대낄 때는 손에 꼽을 수 있는 옛 직장동료 몇몇과 가족만 남았다. 말은 안 했지만 그도 내심 서운함을 감출 수 없는 것 같았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오빠 만세를 부르던 동생들조차 연락이 없자 남편은 이빨 빠진 호랑이마냥 풀기가 죽었다. 잔병치레 한 번 없던 그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머리의 반쪽이 부어올라 며칠씩 병원을 오갈 땐 가슴이 조였다. 그런 남편이 측은했다. 그도 그랬으리라. 아침 일찍 눈이 까만 아이들을 두고 출근을 서두르는 아내가 편치만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말끝마다 가시를 세우고 밀어내기만 했었는데 그즈음에는 순한 양처럼 수그러졌다.
쉼표 없이 내리막을 삐그덕거리며 달리다 급제동된 브레이크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문밖 출입 없이 코 빠져 있으니 세상에 다시없는 아들로 알았던 시부모도 저절로 기가 꺾였다. 며느리는 군말 없이 아들의 시중을 들어야 하고 시댁의 대소사에는 직장에 월차를 내서라도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당신들이었다. 하지만 며느리가 가장이 되고 보니 조심스러어하는 품이 역력했다. 제철 푸성귀며 밑반찬도 갖추갖추 챙겨 보내주곤 했다.
남편이 미워서 그의 처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아예 뭐라 해도 귀를 닫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도리도마뱀처럼 목주름을 쫙 펴고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하게 위협을 했다. 애당초 대화의 물꼬를 막아버렸던 것이다. 그러고는 적반하장 약시약시한데 내 말대로 따라주지 않는다며 남편을 원망하기 바빴다.
어느 날, 아이가 몇 학년인지도 모를 정도로 무심했던 아빠가 눈을 맞추고 장난도 받아주며 같이 놀아 주었다. 집안일이라면 밉살머리궂게 미루적미루적대기만 했던 남편이 그제야 애탄가탄이었다. 내가 직장에 나가고 나면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도 도맡아 했다. 까르르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남편과의 사이에 움푹하게 파여 있던 마음의 골이 점차 채워져 갔다. 이년 남짓 멈춰 선 호흡을 가다듬는 음악의 간주와 같은 시간이었다.
연극이나 희곡에는 스토리를 단절시키는 막이 있다. 그것은 주인공의 운명이 위기이거나 절정, 반전될 때 그 역할을 한다. 무대와 관객을 일시 차단하여 사건을 진전시키기도 하고 주인공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기도 한다. 잠시 쉬는 동안에 배우는 감정을 다듬고 새로운 호흡으로 이어질 장을 준비한다. 가족을 건사하느라 들숨날숨 버겁던 그 배우도 막 사이에서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었으리라.
남편은 가족이라는 극의 가장 역을 맡은 주인공이었다. 아이들의 아빠이면서 홀로 된 노모의 아들 역할까지 일단 다역에 부대꼈을까. 해겁던 단출내기가 둘이 되고 두 량이 더하여 넷이 된 가족동반열차의 기관사, 조급한 마음에 조절장치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렸을 것이다. 다행히 의도치 않게 걸린 브레이크는 탈선 직전 막다른 피랑 끝에서 가까스로 멈추게 해주었다.
연속하여 작물을 기른 땅은 힘이 떨어져 열매가 튼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확량도 아주 적어지게 된다. 때문에 경작지도 일정기간 휴지기로 지력을 회복하는 해거리를 한다. 겨울이면 곰, 박쥐, 고슴도치, 개구리 등은 활동을 중단하고 월동을 한다. 동면은 단순한 잠이 아니다. 잠시 활동을 멈추고 최소한의 에너지로 새로운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남편도 새 삶을 위한 준비를 했다. 매일같이 산을 오르내리며 무엇보다도 여름에 살쪄가는 산처럼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고 전에 없이 끕끕수에도 처연하게 대처했다.
물속이 훤히 보이는 갠소름한 시냇물에 잔물결만 찰박거려도 가슴 조이면서 어느새 불혹을 넘겼다. 이제 지천명도 지나가려 한다. 흰머리 듬성해지고서야 남편은 말했다. 지금부터 인생 2막의 시작이라고.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서킷브레이크 해제다. 다시 홍군, 청군의 숫자병정들이 화살코를 맞대고 열병식을 시작한다. 전광판이 일순 활기를 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