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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71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 6:66-71 /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떠나갔다. 67) 그러자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도 내 곁을 떠나려 하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69)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70)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였으나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다.' 71) 이것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이면서 후에 예수를 배반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었다.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하셨고,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제자 중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66-68) 예수님께서 참 제자와 거짓 제자를 구별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오병이어 이적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망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는 단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 이상으로 다시는 예수님과 상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만나 즉 오병이어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열매만을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의 떡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요일 2:19). 이에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69-71)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가 훌륭한 대답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 가 버리겠습니까? 당신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의 고백과 함께 열두 제자를 대표한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수전절에 자신을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진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36).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17:19).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별하여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로 인하여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속죄의 희생양이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 중에 하나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스승을 두고 거래하는 자였습니다.
적용: 기독교의 역사는 많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헌신 된 적은 사람에 의하여서 이루어졌습니다. 당신의 자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참조 행 5:19-20)
바디 바이블 저자인 이창우 박사의 ‘예수님은 우리의 어깨동무’라는 표현이 너무나 황홀했다고 추천사의 글에 쓰여 있습니다. 우리의 어깨로 우리의 짐을 지는 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짐을 지고 가시고, 우리는 그 어깨에 기대는 인생이 될 때, 그렇게 구속된 어깨가 될 때, 우리는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설 교 >
너희도 가려느냐?
김정호 목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푸쉬킨의 시가 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사람의 계획이나 뜻대로 되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 뜻대로 되면 좋은 일도 있겠지만 세상은 엉망이 되고 파멸이 오게 됩니다. 나만 잘 되고 남은 다 망하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싯귀처럼 기쁨과 웃음으로 세상을 살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수많은 무리들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서 구름떼처럼 예수님을 따랐으나 예수님께서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주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해 주는 의미가 많습니다. 이런 저런 일, 이런 저런 사건, 이런 저런 책임, 이런 저런 사람들로 인하여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람이 병들고 실패하고 가난해지면 주위에 그렇게도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납니다. 그래서 서운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럴 수가……. 그 사람까지도 나를 떠났다고 성토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왜 주님을 사람들이 쉽게 떠나는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 받고 떠나는 사람이 아닌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군중심리 때문에 떠납니다
본문 66절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군중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기를 거부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결단했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요한이 당시의 상황을 이처럼 자세히 묘사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태도를 가리켜 ‘부화뇌동’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교회 가니까, 기도하니까, 봉사하니까, 열심히 하니까 나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다 물결처럼, 갈대처럼 쉽게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교회에 다녔으나까 전통과 습관에 따라 교회에 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구 때문에……. 생각과 결단 없이 다니면 어려운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우리는 주체성 없이 군중들이 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이 오면 나도 오고 남이 떠나면 나도 떠나는 군중심리의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도해야 하고 큐티 해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사람들을 돌보아야하고 사람들의 수많은 요구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바쁘고 분주해집니다. 그리고 많이 노력해도 우리는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마치지 못한 숙제, 다 하지 못한 말들, 이루지 못한 꿈들, 다 나누지 못한 마음과 고백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 가득합니다. 언제나 그것을 다 마칠 수 있을까요? 아마 이 땅에서 그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진정 우리가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한 가지 일만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부르며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한 가지 일도 주님 밖에서 할 때는 바쁘고 쫓기며 100가지 일도 주님 안에서는 안식과 평온함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해야 합니다. 아무리 번잡한 일 가운데 있어도 주를 부르는 그 순간에 그의 영혼은 천국입니다. 주를 부르고 그분을 붙잡는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일입니다. 그분을 부르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그분을 부르고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하며 모든 것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평안한 식사자리에서 마음의 전쟁을 겪는 이도 있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영혼의 초월적인 행복을 맛보는 이도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주를 향하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중심이 주를 향하는 자는 오직 행복하고 또 행복하며 세상이 아무리 바쁘고 쫓기며 두려움의 소문이 있어도 그는 항상 천국의 복락을 누립니다. 이 땅에서 해야 할 오직 한 가지 일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를 향하는 것이며 그것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천국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군중심리는 쉽게 예수님을 떠납니다. 남다른 주관과 확고한 신앙으로 오직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고 함께 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사리사욕 때문에 떠납니다
본문 67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그릇된 동기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위, 신분, 권력, 이익, 출세, 영향력을 목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라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삶의 도움을 위하여 진정한 믿음과 신앙도 없이 적당히 교회에 출입함으로 교인의 명분만 유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질상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교회를 이용합니다. 자신의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자신의 유익에 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어떠한 일이라고 하지만 손해가 된다면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겔 선지자의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마음은 이익을 좇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심각한 비극적 멸망을 초래하게 될 것을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겔33:30-33). 가룟 유다도 사리사욕을 채울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세상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이미 못 박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면이 많습니다. 남이 아니라 나에게 그런 면이 많습니다.
인터넷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좋은 아내는 천사같이 되려고 합니다. 나쁜 아내는 자신이 천사인줄로 믿습니다. 좋은 아내는 조그만 선물을 받고 기뻐합니다. 나쁜 아내는 사 줘도 잘못 샀다고 구박합니다. 좋은 아내는 집안이나 밖에서나 똑같이, 나쁜 아내는 밖에서는 천사지만 둘만 있으면 악악거립니다. 좋은 아내는 남편이 방귀를 뀌어도 생색 안 하지만, 나쁜 아내는 자신이 방귀를 뀌어서 남편이 창문을 열려고 하면 못 열게 소리칩니다. 좋은 아내는 남편이 아픈 것 같으면 더 잘해 줍니다. 나쁜 아내는 혼자나 아프지 조용하라고 소리칩니다. 좋은 아내는 남편이 실직해도 격려하고 재취업할 때까지 같이 도와주지만, 나쁜 아내는 멀쩡한 직장까지 실직하게 합니다. 좋은 아내는 남편이 청소 깨끗이 못해 놔도 몰래 마무리하지만, 나쁜 아내는 청소를 잘해 놔도 트집을 잡으려고 뒤지고 다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말씀에 남편에게 사랑할 구석이 있어서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존경할 만한 이유가 있어 존경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면서 그냥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소와 사자가 사랑을 했습니다. 둘은 서로를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소는 정성으로 풀을 뜯어 사자에게 주었습니다. 사자는 풀이 싫었지만 참고 견디며 먹었습니다. 사자도 소를 위해 싱싱한 생고기를 매일 대접했습니다. 소 역시 괴로웠지만 참고 견디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둘은 결국 헤어졌습니다. 헤어지면서 둘은 똑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이 이야기의 교훈은 자기중심의 최선은 최악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닌 상대를 채우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는 것도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주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또한 살펴야만 합니다. 내 입장에서의 사랑방식으로 ‘나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내 사랑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를 보고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도록 합니다.
내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은 욕심이 채워지던 채워지지 않던 반드시 떠납니다. 떠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은 결과에 관계없이 반드시 떠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은혜를 생각하면서 사리사욕을 버리고 주님께 헌신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외형주의 때문에 떠납니다
본문 68-69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잘못된 동기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 모양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초자연적인 능력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말씀이나 예수님 자체 보다는 떡이나 치료나 사건적인 현상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한 것은 우리를 믿게 하려 함입니다. 이적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을 보기를 바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마술사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외형은 얼마 못가서 잔혹하게 무너지고 버림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너무 본질이 아닌 외형에 치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이 영적 본질을 외면한 채 외식과 외형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냉철하게 점검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회칠한 무덤이 되지 않도록 내용을 깨끗하고 새롭게 단장해야 합니다.
구약의 열왕기상 19장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의 수준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바로 선지자 엘리야와 그 후계자 엘리사 이야기입니다. 엘리야가 찾아갔을 때 엘리사는 열두 겨리의 수소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로 볼 때 엘리사는 보통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엘리야는 걱정부터 앞섰을 것입니다. “버려야할 게 너무 많아서 쉽지 않겠군.” 엘리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선지자가 되려면 친구와 가족과 돈벌이가 되는 사업까지 다 버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하나님과 사업을 동시에 좇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는 두 마리의 소를 잡고 쟁기를 전부 모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잡은 소로 바비큐 파티를 열었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이 주신 쟁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옛 쟁기들을 모두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는 뒤를 돌아볼 여지를 아예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분을 인생의 유일한 우선사항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을 누구와도 나누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절대적인 사랑과 온전한 헌신뿐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주식보다 그분께 더 많이 투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회사보다 그분께 더 많은 시간과 재능을 쏟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운동경기나 드라마 시청보다도 예배를 더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전부를 요구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포기하지 못하는 그 한 가지가 그분의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만 빼고 나머지를 전부 그분께 드리다 해도 그 한 가지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뒤에 있는 뭔가를 돌아보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 한 가지를 포기할 때 마침내 오랫동안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만족이 찾아옵니다. 외형주의를 버리고 주님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날 성도 중에는 군중심리와 사리사욕과 외형주의로 주님을 따르다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영생의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훈구 목사
서 론
2000년 전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외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자들도 있습니다.
지금 현재도 교회에 출석하였다가 떠나는 자들이 꽤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어려움과 환란과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예수님을 떠나는 이유와 끝까지 떠나지 않고 순교도 불사하는 이유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따르던 자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이유
요6:66-67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는냐”
1)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육적이기 때문입니다.
요6:14-15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 초림당시 사람들의 메시야 사상은 정치와 경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정말 메시야시라면 속국인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하루 속히 독립시켜 주시고 경제적으로 기적을 행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의 빵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영적인 메시야로 오셨기 때문에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고 구원시켜 주시는 문제가 먼저이며 정치와 빵문제는 부수적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물질적인 복과 건강의 복만 받기 원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교회를 떠날 수 있는 자요 예수님을 배반할 자입니다.
2)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6:35-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6:48-5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6:60-64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리요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인데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는데 세상 상식이나 과학의 잣대를 가지고 비판한다든지 이해를 못하여 불신하는 경우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3)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인도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6: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교회 안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출석하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 스스로 세상의 이권이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도하시지 않은 교인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아셨고, 많은 무리들이 빵과 각 가지 기적 때문에 따르다가 떠날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많은 교인들이 세상 풍조에 빠져 믿음을 팔아먹고 배교자가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눅18:8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2.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지 않은 이유
1)영생의 말씀이 예수님께만 있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6:67-69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도 영생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시편 기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하게 여겼고 좋게 여겼습니다.
시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시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119: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좋아하여야 교회를 더나지 않으며 배교자가 되지 않습니다.
2)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행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완성하려고 하는 한 예수님을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3)성령을 충만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하면 열정이 열심과 믿음이 언제 식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한 신자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아 세상과 타협하고 어떤 이권과 어려움과 환란 앞에서 믿음을 빼앗기고 예수님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모든 유혹과 핍박을 담대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직접적인 콜링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에 두려워하며 예수님 곁을 떠났었고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을 하였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에는 순교의 제물들이 되었습니다.
행2:1-4에 보면 11제자들이 승천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평신도 109명과 함께 10일간 성령 충만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오순절 아침에 이들 모두는 성령 충만함과 은사를 받았습니다.
행5:40-42에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원들게 잡혀 채찍에 맞고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능욕을 받는 것을 합당한 것으로 여기면서 기쁨으로 공회를 떠났고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행7:55-60에 보면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행12:1-2에 보면 야고보 사도는 헤롯 왕의 단 칼에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행20:22-25에 보면 에베소 교회에서 이별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22)
*오직 성령님께서 각 성에서 결박과 환란이 너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헤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1:8-13에 보면, 바울이 가이사랴 빌립의 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유대에서 내려온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이 말씀하시되 이 띠 임자를 유대인들이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말을 듣고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결 론
예수님을 끝까지 믿어야 최고 큰 복인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일지라도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어떤 환란과 고통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부인하지 않게 됩니다.
마10:32-33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두가 말씀을 믿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최응희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짧지만 실제는 6장 전체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6장 전체가 어떤 말씀인가를 먼저 요약해 보겠습니다. 먼저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로 오 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때 주님께서 생명의 떡을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육신의 떡 때문에 나를 찾지만,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나를 먹는 사람이 생명을 먹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요? 주님의 말씀이 정말 어려웠을까요? 실제로 그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다른 마음, 다른 생각, 다른 기준으로 듣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분, 또는 떡을 먹여주시는 분, 자신들의 요구를 채워주시는 분, 등으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의 문제, 자신들의 요구, 자신들의 소원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있었으므로 정말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에는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길, 편한 길, 자신들의 길을 찾아 떠나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너는 어떠한가? 너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너의 시선은 어떠한가? 예수님이 내 생활의 도구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내 삶의 푯대인가? 예수님이 내 요구를 채워주시는 분인가? 아니면 내가 예수님이 뜻을 따르는 사람인가? 만약 우리가 이 질문 앞에서 단순히 예수님을 내 생활의 도구나 내 요구를 채워주시는 분으로만 여긴다면, 언젠가 우리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선택은 그 속에 있는 가치관에 의해 조정 받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중심으로 세상을 사느냐. 어떤 마음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보통 때에는 잘 구별되지 않지만, 특별한 사건이나 문제 앞에 서게 될 때, 바로 그 속마음이 나타나고, 그 속마음에 의해서 조정되는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가치관이요, 바로 그 가치관에 의해서 어떤 행동을 선택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같은 땅, 같은 사람, 같은 장소를 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보고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열 지파 사람들은 그 땅을 결코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두 지파의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만 그 약속의 땅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똑 같은 기간, 똑 같은 장소, 똑 같은 사람들을 보고 왔는데 왜 그들의 견해는 서로 달랐을까요? 무엇이 그들의 보고를 서로 다르게 했을까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내 종 갈렙은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민수기14:24
He has a different spirit and has followed me fully,...
그들 속에 들어있는 그 마음-- 그것이 그들의 가치관입니다. 그 가치관이 중요한 사건들 앞에 나타나서 어느 방향을 선택하게 하는 방향키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느냐,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느냐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말씀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느냐, 육신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느냐가 그 사람의 태도를 만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채 그 가치관을 따라서 행동합니다. 돈을 가치의 최우선에 놓는 사람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합니다. 건강을 가치의 최우선에 놓는 사람은 건강을 위한 일이라면 못 먹을 것이 없습니다. 권력을 가치의 최우선에 놓는 사람은 권세를 잡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을 해하는 일도 서슴없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돈도 포기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서 주님의 일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건강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주님의 일에 몰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어떤 권세도 허무한 것임을 깨닫고 오히려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면류관을 더 귀중히 여깁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바울사도와 모세에게서 그런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3:7-8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브리서11:24-25
믿음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5:33
네 가치관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뜻을 이루는데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나머지 네가 염려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영학과 교실에서 교수가 항아리 하나를 책상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주먹만한 돌맹이들을 그 항아리에 채워넣었습니다. 꽉 채웠을 때,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다 찼습니까?’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네’ 그러자 교수는 손톱만한 작은 돌들을 다시 그 항아리에 넣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꽉 찼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이제 이 항아리가 꽉 찼습니까?’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네’ 그러자 이번에는 모래를 그 항아리에 넣기 시작하였습니다. 항아리를 흔들어가며 모래를 넣었습니다. 꽉 차자 또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꽉 찼습니까?’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네’ 그러자 교수는 이번에는 주전자의 물을 그 항아리에 붓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물까지 꽉 차 올랐습니다. 그리고 나서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바쁜 스케줄이 가득 있어도 정말 노력하면 언제나 그 사이에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수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실험이 주는 의미는 <만약 당신이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을 거기에 넣지 못할 것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큰 돌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을 큰 돌로 여기느냐가 여러분의 가치관일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이 가장 고귀한 가치임을 알고 자신의 삶의 가장 큰 권위와 푯대를 그 믿음에 둔 사람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전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하지 않습니까.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전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샀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돌인지를 발견하고 거기에 All In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가족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가족에게 시간이나 돈을 쓰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내를 위해 시간과 돈을 쓰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를 망설이거나 시간 쓰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의 도구라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믿음일까요? 정말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틈만 나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일임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을 드리는 일에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6장 전체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아주 열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저 편으로 건너가시면 기어이 거기까지 배를 타고 좇아오는 무리들이었습니다(6:24).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요구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 여기고 그 요구를 해결하고자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6:15).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진리의 말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만이 생명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는 물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생명의 떡이 아니라, 육신의 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그러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 물질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영적인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고, 들었어도 그 길을 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보다도 자신들의 생각이 우선이었고, 세상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고, 편하고 넓은 길을 따라 가버렸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들은 어떤 선택을 하려느냐는 물음입니다. 다행히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로서 그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이 세상사람 날 몰라줘도, 이 세상사람 날 몰라줘도
이 세상사람 날 몰라줘도, 뒤돌아서지 않겠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
이 복음성가가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문제 앞에 설 때마다, 또는 어떤 일을 처리할 때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너도 세상을 따라 그렇게 가려느냐?’ 그 때 우리 모두는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주님,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지금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거듭난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대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생의 말씀
요한복음 6:66-69 / 성흥모 목사
수천 년의 선박의 역사를 볼 때에 바다에 빠진 보물선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니 미국 해역에만 100,000여 척의 배가 난파되어 있으며, 전 세계 해역에는 청동기를 싣고 지중해를 건너던 로마의 배에서부터 제2차 대전에 군수물자를 운송하기 위하여 대서양을 건너던 리버티 호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척의 배가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들 난파선이 싣고 있던 보물의 규모는 수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탐사 장비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이 깊은 바다 속에 들어가서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들어가서 작업할 수 있기에 앞으로 50년 내지 100년 안에 모든 바다의 보물들을 찾아낼 것이라고 합니다. 국제법에서는 1910년 브뤼셀 협약에 의하여 "바다 밑에 빠져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발견한 자가 공정하게 취득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무슨 보화를 가지고 있습니까? 보화라고 하니까 꼭 금이나 은 같은 보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그 가치를 인정하는 그런 세상의 지식이나, 영적인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보배로운 진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가장 부요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가장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보람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해주는 그런 것, 자기만의 것, 영원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보면 영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리에서 떠나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고, 자기의 사욕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교만합니다. 세상의 허상들이 많습니다. 신기루와 같은 것을 좇아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한탕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 정계가 시끄러운 것입니다. 정권 말기에 이르면 왜 그렇게도 시끄러운지, 한국인의 고질병입니다.
세상에 보물선이 진도 앞 바다에 묻혀있다고 하여 그것을 발굴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회사에 투자하였다가 망하고, 사장이라는 자는 3년 동안에 1000억대의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다가 구속되었으니, 지금 이 사건이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이용호 게이트라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검찰총장이 바꾸고, 특별검사가 임명된 것입니다.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전남 진도군 죽도 앞 바다에서 금은 보석을 싣고 가던 배가 침몰하여 보물선이 바다 속에 묻혀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국가정보원이 뛰어 들고, 해군의 도움을 받아내려고 했고,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개입되고, 대통령의 처조카라는 자가 뛰어 다녔고, 지금 온 나라는 이 보물선 사업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거문도 앞 바다를 비롯하여 남해 바다에는 수십 척의 보물선이 묻혀 있다고 믿고, 발굴 사업 신청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는 값진 진주의 비유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의 밭에 가서 일하던 중에 그 밭에는 보화가 묻혀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돈이나 금은 보화를 보관하는데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무슨 은행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경찰제도가 확립된 것도 아니었기에 보호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둑이 들거나 강도나 쳐들어오면 그냥 다 내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다른 부족이 쳐들어오면 가진 모든 보화를 빼앗아가기 때문에 자기만 알게 땅 속 깊이 항아리를 묻어두고 그 속에 금이나 은, 그리고 돈을 담아 보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 가족이 몰살당하는 경우에는 보화는 수세기를 걸쳐 땅에 묻히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보화를 담은 항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당시에 이렇게 발견한 보화는 발견한 사람이 절반을 가지고 그 땅 주인이 절반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 밭을 사들이면 그 보화는 다 자기의 것이 됩니다. 보화가 가득한 항아리, 그 놀라운 기쁨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밭에 감추인 보화는 온전히 자기의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보화를 차지하신 분들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라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보화가 있는 줄로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에 모여든 것은 이곳에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보화와 기쁨과 은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화가 묻혀 있는 밭을 사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치우고 버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주님으로 인하여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고상하고, 보람과 의미와 능력을 주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어떤 책을 읽다가 새롭게 우리의 생활에 유익하고 힘을 주는 어떤 이야기나 어떤 사실을 알게 되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힘찬 하루를 살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연히 좋은 책을 소개받아 읽거나, 신문을 읽던 중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아주 소중한 생각이라도 얼마나 힘이 되고, 능력을 주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팔아버릴 수 있고, 다 포기할 수 있는 그런 힘입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에게 전부를 투자하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나 세상에서 진귀한 진주를 발견했다는 것은 물질 이상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으며, 예수님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만 하면 이제 먹고사는 것은 문제없이 다 해결해 주실 것으로 보았습니다. 다음 날 예수님을 찾아 벳세다 들녘으로 나갔지만,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를 물위로 건너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찾아내어 물었습니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은 이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떡을 먹고 배부른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대화가 진행되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님은 이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역시 다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니고데모라는 분은 교법사요, 당대에 유명한 선생님이었는데, 예수님이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물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진리를 알고 깨닫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신다고 하니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예수께 가면 떡을 얻어먹고 한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라, 기적을보고, 희한한 능력이나 구경하는 재미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아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말고, 그 말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현실에만 매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마신다는 말은 일치가 되는 연합을 의미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의 원문은 먹는다-"트로본"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에서 무엇을 먹는다고 할 때 "에씨오"라는 말을 사용하여 밥을 먹는다, 반찬을 먹는다고 하는데 여기 "트로본"이라는 "먹는다"는 말은 "기쁨으로 섭취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먹는다는 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 믿고 영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깊이가 있고, 상징성을 가지고 있어 깊이 묵상하면서 해석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마신 듯이 예수님과 하나되어야 하고, 연합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내가 없어지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살을 먹으라, 피를 마시라고 하셨지만, 그 깊은 의미를 계속하여 해석하시면서 적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6:6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지말고, 영으로 해석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주신 유익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6:56절 말씀인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주님과 일치를 말하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 살면서 우리의 주소도 예수님의 집으로 옮겨졌고, 우리는 사는 모든 삶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성이 떨어져 나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 안에서 사시는 것처럼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 또한 영생하는 것입니다.
60절 말씀에 보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6절에 보면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듣고 주님을 떠나간 사람들이 있으며, 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남을 것입니까? 떨어져 나갈 것입니까?
1.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예수님은 무겁게 입을 열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말씀 안에서는 여러 가지 교훈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빨리 떠나라는 요청입니다.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은 가고, 가치를 깨닫고 꼭 있어야 하는 사람만 남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 옛날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말씀대로 똑같이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와서 물질적인 어떤 축복과 혜택을 누려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에게서 얻을 것이 없기에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앞에서 자리 싸움이나 하고 인기를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님으로 인하여 환난과 고통에 이르고 싶지 않아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이적이나 바라고 있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제 다시 옛사람의 옛 생활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해의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와 같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바라보고 살아야 하지, 하나님을 알기 이전의 옛사람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2. 결심하고 따르라.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시는 말씀에는 결단하고 제대로 따라다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시139:7-10을 보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주님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고, 주님만 따라가고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조금 고통스럽다고 주님과 거리를 두지 말고, 전천후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잘 사는 때에도 잘 살게 되었으니 더 잘 믿고 섬겨야 하고, 어려운 일을 만났으면 더욱 주님을 의지하면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가면 최후의 종착역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그것이 가장 예수님을 잘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인기를 얻고 명예가 올라가고,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3.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베드로는 주님을 떠나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갈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주님 외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생의 말씀이시기에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모른다고 하시고 나를 떠나가라고 하시면 어쩔 것인가를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 나온 사람 중에 주님이 마다하거나 거절하신 분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주의 이름을 불렀던 강도라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68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귀한 것, 가장 값진 것, 가장 소중한 것이 있는데, 왜 시시하게 무가치한 것을 매달려 살 것입니까? 영생의 말씀 그것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세상이 부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인하여 얻은 것이 영생인데,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악한 마귀와 짝을 이루어 주님을 배반한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시기에 떠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성별하신 분이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런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데, 우리가 주님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베드로는 믿고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그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사랑이란 믿음으로만 알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알고 믿는다는 사람보다 믿고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찰스 피니(1792년 출생)박사는 미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신앙인이요, 세계적인 부흥사였습니다. 그는 대학교수로서 31년 간 신학을 가르쳤고, 그 대학 구내의 교회에서 역시 31년 간 목회를 하였고, 아주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교회로 나온 사람이 50만 명이라고 합니다. 법과대학을 나오고, 성악도 잘하고 바이올린과 첼로를 잘 연주하고 28세에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변호사로서 탄탄한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릴 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려느냐?" "훌륭한 변호사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돈도 벌어 잘 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은퇴하여 여생을 편하게 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그는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죽으면 곧장 지옥에 떨어져 깊이 가라앉아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지옥을 향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지켜보는 한 사람의 목격자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장면을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도망하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불타는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피니는 생각하였습니다. 자기를 주님에게로 추천할 수 있도록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 주님에게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오늘 당장 나를 받아들이겠느냐?" 그 때 피니는 대답하였습니다. "네 이제 당장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는 숲 속을 찾아 들어가서 "나를 온전히 바치리라"고 다짐하면서 하루종일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았습니다. 그에게 밀려오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과 사랑이 너무나 커서 "죽을 지경이니 그만 주시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그는 산에서 내려와서 모든 법률 서적을 덮어버리고 사람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변호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온 한 교인이 재판이 아침에 열리는 것을 상기시켜주면서 "변호할 준비를 다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의를 탄원해달라고 하시는 소송의뢰를 받았으므로 이제 당신의 소송건을 더 이상 맡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교인이 다시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송 의뢰를 맡았으며, 그분의 탄원을 사람들에게 호소하기로 결심하였으니 다른 변호사를 구하라는 것입니다."라고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집사님은 고소한 사람과 가서 그 자리에서 화해하고 소송을 취하하고 기도하면서 깊은 신앙으로 해결하였습니다. 피니가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결단을 말할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소송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손해를 보아도 좋았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주님을 변호하면서 주의 탄원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헌신하는 한 젊은이를 보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나중에 목사가 되어 집회를 할 때 한 젊은이가 피니를 죽이겠다고 총을 들고 강단 앞으로 나오다가 그가 외치는 말이 "나는 지옥으로 간다"고 외치면서 쓰러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피니와 같은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만 따라갈 것인가, 주님을 떠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생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과 동행하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길이요, 우리의 의미가 되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살던 모든 것을 버리시고 오직 주님만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으로 살아갑시다
손상률 목사
디베랴 바다 근처에서 보리떡과 물고기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인 오병이어의 이적 사건이 있은후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이적에 매료되어 그를 임금으로 모시자고 추켜 세웠습니다(요6:15).
이에 예수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이 광야 40년동안 매일 아침 하늘의 양식 만나를 먹은 것을 기억나게 하면서 이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신8:3).
사람이 육신의 욕구를 충족케하는 물질로 살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윤택케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Ⅰ. 축복으로 주신 말씀
옛날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사모하였습니다.
시편 19:10에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9:11에는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고 하였습니다.
계시록 1:3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한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였습니다(요17:17).
개혁교회 성도들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하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2) 계시된 말씀입니다.
계시(revelation)라는 말은 「열어서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한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시는 방법을 뜻합니다.
그 계시의 방법중에는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방법을 이용하는 일반계시가 있고, 한편 특정한 대상에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나타내시는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속한 것으로써 이는 성령이 주도하여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6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 1:10-11에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 일곱교회에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3) 말씀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일반적으로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소리나 문자로 통하여 나타나는 언어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말씀을 인격체로 나타내는 데가 더러 있어서 이를 말과 글로 표현되는 일반적인 말씀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놓고 고별설교를 하면서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행20:32).
사도 요한은 말씀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요한복음 1:14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Ⅱ. 말씀의 특징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히4:12).
(1) 눈을 열어 줍니다.
다윗은 시편 19편을 노래하면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고 하였습니다(시19:7-8).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는 사람은 신령한 눈이 밝아져서 모든 것을 올바로 인식하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엡1:18-19).
(2)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 아침 예루살렘에 사는 글로바라는 청년이 그의 친구와 함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을 하였는데 이 청년들은 자기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길을 가고 있는 분이 예수님인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평소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이며 수차례 예수님을 만났고 또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다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났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함께 떡을 먹을 때 눈이 열려져 예수님인 줄 알아보고는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시더냐"고 하였습니다(눅24:3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배우고 연구할 때 예수님을 올바로 인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요5:39).
(3)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디모데후서 3:15에는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신 것은 사람이 이 말씀을 바로 배우고 그 가르치는 도리를 따라서 살아갈 때 구원에 이를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의 손으로 여러 권의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0:31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Ⅲ. 말씀의 특권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살아갑니다.
온갖 자연의 은택을 값없이 누리면서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은혜,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되는 은혜만은 아무에게나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특수한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내역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요20:31).
(1) 말씀을 받은 것이 특권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게 되는 특권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도 성경 말씀을 받은 것은 비길데 없이 큰 은혜입니다.
옛날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다음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이것은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9:5-6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며 자자손손 누리게 될 축복의 언약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1-2에서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이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비결을 알려 주었습니다.
신비로운 하나님의 도리는 인간의 지식만으로 풀어낼 수 없는 비밀입니다. (엡1:9).
이 사실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2:6-7에 "… 이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비밀한 계시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2:10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였습니다(마13:11-12).
(3) 특권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축복이 담겨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 선포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특권과 거기 따르는 책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신명기 7:6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7:9-11에는 "그런즉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동시에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이 곧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곁에 있는 사람
최종천 목사
우리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내게 주어진 상황 혹은 내가 처해있는 여건, 그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살펴보면 내 눈앞에 드러난 현상으로 주어진 상황과 여건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여 의미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인식, 혹은 의식, 깨달음 등으로 표현되는 2차적인 해석에 따라 결정됩니다. 주님 곁에 늘 있으면서도 주님에 대해서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그 주님 앞에 나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느냐에 따라서 내가 삶의 환란과 고통과 아픔 또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여건들이 열려질 때 내 삶의 결정과 행동을 다르게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것을 보여줍니다. 내가 마음에 원하는 것과 다른 상황이 전개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곁에 진실이 남아있을 수 있는 사람이 무엇인가 상황을 능가하는 믿음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시험을 거치신 후에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위한 준비를 하십니다.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천국의 구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산상수훈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곧 이어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예수님의 실제적인 행전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기적과 기적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셨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주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을 먹이는 역사를 이루시기도 하셨습니다. 자연을 정복하시기도 하고 물위를 걸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에 열광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였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환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들이 환호했던 모든 함성이 영구히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 기대가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어떤 일말의 기대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 앞에 있는 <요한복음 6장 22절>을 통해서 자신을 설명합니다. 자신을 설명하시되 <48절>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십니다.
<51절>에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찬식 때마다 애독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선언하신 것은 예수님은 세상의 기적과 능력과 이사를 행하기 위해서 분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백성들에게 생명의 양식,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셔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혼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역사하고 각종 여러 가지 그들이 예상치 못했던 일을 행하셨을 때 이들에게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는데 그 메시야는 로마의 군정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주고 경제적인 궁핍으로부터 그들을 부유케 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병을 고쳐줄 뿐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해결해줄 수 있는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능력을 행사하실 때 이들은 그와 같은 메시야가 오셨다고 마음에 확신하고 예수님은 그 일을 이루어주실 분으로 마음에 새기고 이미 그림을 그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혀 딴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백성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길에는 그들의 겉옷을 펴서 예수님이 밟고 가실 수 있도록 하면서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왕 다윗의 자손 예수여 그들의 왕이 되어서 우리들의 모든 핍절과 어려움과 고통을 해방시켜주시고 우리들에게 모든 안위와 모든 복락을 주실 것을 예수님께 환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서 고초를 당하는 것을 볼 때 이들은 곧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폭언을 행하는 폭력자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이 그려놓은 그림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고 예수님은 전혀 다른 그림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그럼으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환호하다가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하여 폭도로 바뀌게 되었던 겁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떡이요 영원한 생명의 근원되심을 말씀하셨을 때 백성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미한 가운데 수군거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오히려 그들의 기대를 채워줄 것 같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다 떠났다고 했는데 그것은 넓은 의미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제자들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래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간 자리에 예수님은 남아있는 그의 열두 명의 제자들을 놓고 마음에 슬픔을 가지고 쓰라림 속에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기적의 떡을 먹고 능력의 역사를 목격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내가 주려고 했던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시려고 했던 근본적인 언약의 성취, 영원한 생명, 가장 큰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갔는데 그렇다면 너희도 갈 것이냐” 그 때 제자들의 수장격인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로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그러나 너희중의 하나는 마귀라”라고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가룟유다를 지칭하신 거죠.
오늘 이와 같은 과정 속에 예수님 곁에 끝까지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 좀 더 생각해 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먼저 <66절>의 말씀입니다. 기대가 어긋남으로 판단의 혼돈으로 주님 곁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오늘 <6장 66절>을 보면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전에 수많은 기적의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들, 기적의 떡 그리고 기적의 능력, 눈앞에서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 것, 예수님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 병을 고치는 것, 수많은 것을 본 이적에 환호하던 사람들, 그들은 그들이 바라던 정치적인 해방, 경제적인 부유, 그리고 그들이 원했던 모든 인간의 생로병사로부터의 자유함을 이루어주기 원했던 예수님에 대하여 기대를 했지만 그 기대가 실망으로 변할 때 그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생명의 떡인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원하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따르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혼미해졌습니다.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닌데 왜 내가 원하던 것을 주님은 주시지 않고 엉뚱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가, 그들은 실망하여 떠난 것입니다.
왜 그들은 주님 곁에 모였을까요? 그들이 원하는 인간적인 판단과 기준때문이고 그리고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보통 어떤 인상을 가지고 사람을 대합니다. 이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이 사람 내게 맞아. 괜찮아. 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죠.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한 기대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실상과는 달라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실제나 진실과는 다릅니다. 내가 생각하는 어떤 틀이에요. 그것을 그려 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좋아해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이 내가 원하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럼 거기서 실망하는 겁니다. 내가 그림을 그려 넣고 내가 액자를 만들어 넣고 그 틀에 맞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는 거예요. 사랑이 증오로 바뀌게 되고 미움으로 바뀌게 되는 거죠.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게 된다고 표현하게 되는 거죠. 이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채색해놓고 예수님이 그 채색된 옷에 맞지 않을 때 예수님의 곁을 떠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의 그릇된 기대, 그들의 모든 초자연의 절정을 보고 기대했던, 우리 인간적인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기 원했던 예수님의 표상, 그것이 그들에게 비틀어졌던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와 생명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는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상실하게 하고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만을 가능케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죠. 주님을 이해한다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해라는 것은 쉽게 될 수가 없죠.
제가 결혼식 때마다 말씀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결혼식 때 보면 정말 신랑신부가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얼마나 좋아서 결혼까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두 사람을 보면 정말 얼굴이 달라요. 한 사람은 여자고 한 사람은 남자더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다르게 생겼을 수가 없어요. 여기도 수많은 사람이 앉아있지만 여기 있는 사람의 얼굴이 모두가 달라요. 그런데 이 얼굴보다 더 복잡 미묘한 마음이 같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내 마음과 같아서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그렇다면 얼굴도 다른데, 마음이 그렇게 다른데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맞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내가 맞다고 고집하는 것이고 내가 맞다고 억지로 우길 뿐입니다. 그러다가 그 생각이 없어지면 우리는 실망이에요. 뭐라고 얘기하는 줄 압니까? 내 생각과 다르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달라. 더 나쁜 말로 하면 실망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 실망은 누가 한 것입니까? 자신이 그려놓고 자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상대가 나를 실망시켰다고 얘기하는 것이죠. 사랑이라는 것은 이해받을 대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해줄 수 있는 대상을 선정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면서 이해해줘 라고 말하는 것은 그 순간 그 사랑이 쨍그랑하고 깨지는 것과 같다고 늘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에 있어서 이해라는 것은 단 한 가지 방향일 뿐입니다. 오직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겁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옆의 사람 한 번 보고 얘기하세요.
“사랑하기로 결심하겠습니다.”
사랑하기로 결심하지 않으면 결코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원함, 내 기대, 내 유익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슨 기쁨을 줄 수 있을까, 내가 무슨 유익을 줄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그에게 세워줄 수 있을까를 생각할 때 그 관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지금 마음에 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시간가면 언제든지 실망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기대하면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약간의 시간차이지만 다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그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내 마음에 결심이고, 내가 어떻게 그를 세워줄 수 있을까 내 마음에 결심이고, 내가 어떻게 그를 기뻐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하는 내 결심이 있어야만 우리는 그 관계를 유지해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나를 기쁘게 해주어야만 한다면 그 주님은 나에게 영원히 주님이 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주님이 나를 기쁘게 못해주셔도 주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아도 나는 기쁨을 달라고 했는데 주님은 나에게 슬픔을 주셨어도 그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처음에는 내게 기쁨대신에 슬픔주신 것이 야속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내가 기쁨을 달라고 했는데 슬픔을 주셔도 내 마음에 그 슬픔을 주신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어 질 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 한 걸음 나아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행복해질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획득할 때에 행복해질 수 있다면 우리 삶에 행복해질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아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수 있을 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길어질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누리고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할 때 그 행복의 시간은 좀 더 길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에게 더 실망해서 가거나 사람에게 실망해서 간다면 주님 곁에도 사람 곁에도 결코 오래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왜 환호하여 주님 곁에 그렇게 함께 하기 원하다가 주님 곁을 떠나간 것인가요? 기대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죠. 주님과의 관계도 인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떠나거나 비난한 사람 모두 주님께 그렇게 큰 기대를 했어요. 내 마음의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리라고 기대했단 말이에요. 내 마음이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어요. 오직 내 뜻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단 말이죠. 엉뚱하게 머릿속에서 그려 넣고 그 그림에 맞지 않으니 호산나 다윗의 자손 왕이여 하고 외치던 환호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핏발선 눈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그들의 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요구를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영생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깨닫고 누리지 못하니 그들은 혼미하여 결국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는 “너희도 가려느냐” 라고 비감히 묻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67절>의 말씀입니다. 떠나는 인생에 대한 연민과 예수님의 필연적 고독으로 인한 가슴의 쓰라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게 있어요. 예수님은 너무 너무 가슴 아파서 그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많이 구름떼처럼 왔지만 그들이 다 떠나가 버렸는데 너희도 나를 떠나가 버리려느냐? 그것은 예수님 마음이 너무나 쓰라려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온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마음이 쓰라린 것은 그들이 떠나서 예수님이 슬퍼서가 아니라 떠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보니 그 인간들에 대한 연민과 불쌍히 여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가슴이 쓰린 거예요.
‘왜 너희들은 너희가 원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을 주려고 했는데 너희가 원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려고 했는데 너희는 왜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너희가 생각하는 작은 것 하나만을 집착하여 그것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 더 큰 것을 놓치고 떠나느냐?’
그들의 심령을 볼 때 그들의 척박하고 황폐한 심령을 볼 때 예수님은 너무너무 가슴이 쓰라렸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연민 이것은 주님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인간 때문에 슬퍼하는 쓰라린 주님의 가슴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무엇입니까?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해해야 할 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슴에 쓰라림만을 안고 살아갈 때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내가 택해 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가슴아파하며 쓰라려하시는 것입니다. 왜 너희에게 더 큰 것을 주려고 더 큰 기쁨을 주려고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나는 너희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했는데 너희는 왜 그 말씀 때문에 나를 떠나느냐? 너희가 정녕 원하는 것은 그 작은 인생에 작은 선물뿐이더냐? 슬픔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 상처 때문에 이 세상 모두를 상처 난 가슴으로 바라보고 후벼내는 인생의 아픔들을 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마음의 치유와 기쁨과 은혜인데 우리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가슴에 상처 난 것 그 하나만을 한탄하여 더 큰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끼치고 있는 거죠. 주님은 가슴아파하며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인생들의 가녀린 삶과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이루어질 일을 알고 가슴 아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인생을 가슴아파하시는 겁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떠날까? 너희들도 정말 깨닫지 못해서 너희도 너희 곁을 떠날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많은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가슴아파하면서도 감히 내가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겠다고 뛰어드는 사람이 없었어요. 내가 대신 예수님을 위하여 채찍한 번 맞아보겠다고 예수님을 감싸는 사람들도 없었어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꾸역꾸역 울어가며 눈물로 눈물로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여인들의 행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질시 받고 정말 예수님 없으면 아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여인들의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눈물로 눈물로 주님의 십자가를 따랐던 유일한 행렬이었습니다. 그래요. 우리의 삶 가운데 정말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들이 기뻐도 슬퍼도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주님의 더 큰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뿐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말씀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 없으면 이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기대와 그들의 결단의 선택을 기다리는 주님의 슬픔 속에서도 가지는 기대의 심정을 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을 때 너희도 그렇게 갈수밖에 없는 인간이야 라고 생각하고 물은 것이 아니라, 정말 너희도 그렇게 가야하니, 너희는 정말 내 곁에 있을 수 없니, 너희도 저 사람들과 똑같으니 너희는 내 곁에서 더 많은 것을 보지 않았니, 너희가 본 것은 기적뿐이 아니라 그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너희는 볼 수 있지 않았니? 이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안타까이 묻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기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볼 때 화려한 능력을 보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준 선물을 보았느냐, 아니면 그 선물을 주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보았느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우리에게 묻는 주님을 잊지 맙시다. 오늘도 그 주님의 은혜와 기대를 생각하십시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도 이 순간 다른 사람처럼 생각하려느냐, 너도 이 순간 네가 생각했던 생각의 한계 속에서 더 이상 헤어 나오지 못하느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슬픔의 음성을 그 기대의 음성을 우리의 선택을 초조히 기다리는 그 주님의 음성을 우리는 마음에 깨닫고 오늘 베드로처럼 우리 마음에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셔야 됩니다.
세 번째,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을 알고 주님이 실제 주님 되심을 알았기에 주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주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시몬베드로가 대답합니다.
<68절, 69절>을 보니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우리 삶의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으로 결정됩니다. 인간의 인기나 기호나 선호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 인간의 마음은 바뀌잖아요. 그렇게 좋았는데 그렇게 싫어져요.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싫어져요. 등지면 세상에서 가장 먼 사람이 돼서 헤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린 여기서 또 한 가지 힌트 받을 수 있잖아요.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렇게 싫어졌다면 또 그렇게 좋아질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생각한다면 우리는 좀 더 지혜롭게 생각해봐야 해요. 우리는 가끔가다 우리 인생의 재산 전부를 던져버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 살다보면 어떤 사람과 10년이나 20년, 30년 살아오셨어요. 참 기쁘고 행복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싫어졌어요. 그러면 20년 30년 이 모든 기간들이 내가 이제까지 헛살았다 내가 잘못 봤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을 망치가지고 딱 깨트려버려요.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다만 부분이에요. 내가 좋았던 부분은 좋았던 부분으로 남겨두고 내가 싫었던 부분은 싫었던 부분으로 남겨두면 됩니다. 그러면 또 다음에 어떤 생각이 들면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자산으로 유지하면 돼요. 여러분 우리 집에 어떤 부실한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에 더러운 것이 있거나 썩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부분만 수리하고 보수해서 그 집 사용하면 돼요. 그런 부분이 있을 때마다 이전의 모든 것 다 부인하고 다 깨트려버리고 그 집 통째로 다 부셔버리면 우리 인생의 자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좀 지혜로운 삶의 자산관리를 할 필요가 있어요. 아름다운 사람, 기뻤던 사람들, 싫어지는 그 부분은 싫어지는 부분이에요. 누구를 만날 때 이 분은 이게 좋고 이게 싫고 그러면 그대로 인정하고 만나는 겁니다. 한 가지 싫어지면 이전의 모든 것 부인하는 거예요. 우리가 유구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세상의 모든 것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기호, 인기, 선호, 모든 것은 수시로 바뀌어져요. 우리가 복음에 대한 선명한 깨달음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는 우리에게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언제는 우리에게 실망스러운 주님으로 다가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실망스러운 주님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임을 알 수 있어요.
오늘 제자들은 갈 때가 없었어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이에요.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는 갈 수 없습니다. 주님 곁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 갈 때가 없어요. 이 순간 고백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적이 아니라 기적이 품고 있는 주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인간을 구원하시는 생명의 떡이 되심을 영원한 생명 되심을 깨달았던 거예요. 베드로자신이 아니라 생명의 은혜로 가능했던 거죠.
가끔가다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을 실감하게 됩니다. 평상시에는 밥 먹고 살아요. 그런데 밥 먹고 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밥을 먹어도 살 수가 없을 때가 있어요. 밥만 가지고는 도저히 못산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어요. 밥만 먹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요. 살아가는 게 죽는 것보다 얼마나 힘든가 라고 생각할 때 있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순간을 넘기고 건너갈 수가 없어요. 그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진리를 깨닫고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 때 우리는 그 말씀으로 사는 진리를 체득하면서 이제는 그 어떤 순간에도 그 말씀되시는 예수그리스도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워요. 나는 살 수 없어요. 괴로워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한줄기 빛이 되어 우리에게 비출 때 그 말씀의 줄기를 붙들고 일어나 꾸덕꾸덕한 삶의 평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피부로 체감하게 되죠.
오늘 이들은 영생의 생명의 말씀을 발견한 겁니다. <6장 35절>을 보니 생명의 떡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한 번 그 생수를 맛본 사람은 다른 물을 마실 수 없어요. 분명히 옳은 것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으러 왔던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영원한 생수를 마시게 됩니다. 영원한 생수, 생명의 떡, 그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을 소유하고 나니 이 사람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왔어요.
물동이를 버려두고-삶의 목표가 바뀌었어요.
동네로 가서-마음이 바뀌었어요. 동네사람들 다 두려워서 피해 다니던 여자가, 그리고 사람을 피해 다니던 여자가 그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는 능력이 바뀌었어요. 능력의 변화, 목표의 변화, 마음의 변화, 능력의 변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받고 모든 것이 동시에 바뀌었습니다. 베드로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고 부침이 심했던 사람이지만 주님의 깨달음의 말씀을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허물을 딛고 마침내 주님 앞에 쓰임 받는 은혜의 백성이 되었던 겁니다. 말씀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께 붙잡힌 자는 결국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 앞에 남아있게 됩니다.
살다보면 이런 때 있죠. 사랑의 모든 기쁨은 사라지고 단지 사랑의 의무만 남을 때가 있어요. 사랑의 모든 기쁨은 사라지고 사막처럼 무미건조한 가운데 사랑의 의무만 내게 남아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의 의무를 지키기 위하여 애쓰는 묵묵한 행군이 있을 때 그 사랑의 기쁨은 자격을 갖추었다고 우리를 향하여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그 사랑의 의무조차 포기하게 되면 사랑의 기쁨은 우리에게는 다시 찾아오지 못합니다. 그러할 수 있는 사람은 비록 오르막과 내리막은 있지만 그는 사랑의 진정함과 영원함과 진실된 기쁨을 깨닫고 잠시라도 느껴본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자산을 포기하지 맙시다. 좋았던 시절을 포기하지 말고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다면 좋았던 때를 생각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우리는 주님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상황은 수시로 변해요. 하지만 그 말씀을 깨달으면 우리는 그 상황을 이길 힘이 생깁니다.
여러분, 이제까지 이런 기도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번 한번만 기도들어주시면 내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 죽어지내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들어주시면 내가 주를 위해 내 삶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그래서 차마 한 번 만이라고 얘기 못하고 “하나님, 이번에도 들어주시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들어주셔도 우리가 또 달라질 것 우리 스스로도 알아요.
아이들이 이제 부모님께 꾸중 들을 때가 있잖아요. “너 왜 이렇게 잘못했니?” 이렇게 심하게 꾸중들을 때 아이들이 “예, 부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잘 하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부모가 그 말을 믿어요, 안 믿어요?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하죠. 두 가지 다죠.
믿어요. 왜 믿어요? 순간의 진실을 믿는 거예요. 그 순간의 진실. 그 아이는 그 순간에 진실한 거예요. 정말 잘하고 싶어요. 변화하고 싶어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부모는 그 순간의 진실을 기뻐하여 믿어주는 겁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이번만 해결해주시면 정말 주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 순간은 진실이에요. 그 사람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능력이 안 되니까 또 다른 같은 경우를 반복하는 겁니다.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다 아세요. 그러나 그 순간의 진실을 순간의 애틋함을 주님은 인정해주셔서 ‘그래, 네 마음이 그렇구나! 나는 네 마음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 인간가운데 살아가면서 주님의 이와 같은 너그러움을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 그 순간의 진실을 인정해서 그 사람을 평가해주고 긍휼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고 또 기뻐해주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해요. 그래서 안 되면 능력이 안 되었구나 생각하고 가엾어 여기며 또 그를 세워주고 기회를 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들이 해야 될 일이죠. 그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주님 곁에 있는 사람으로서 주님 앞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곁에 남아있다는 것은 주님의 원하심에 남아있는 것이고 주님의 은혜를 이루는 것이고 주님의 뜻을 성취해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주님 곁에 남아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원하심을 실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그 뜻을 실행하며 사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성취해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내 뜻대로 그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대로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기도를 잘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의 결과가 이겁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의 최종결정이 이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면 주님을 대하듯이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삶은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그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대로 내가 그 말을 들어주는 겁니다. 그 뜻대로 내가 그 마음을 헤아려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방식을, 그리고 도와주어도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도와주어야 하니까 우리는 늘 그것이 우리들에게 어려움입니다. 내 뜻을 이루면 늘 괴로워요. 그러나 그의 뜻을 이루고 주의 뜻을 이루면 우리는 훨씬 더 기뻐집니다.
<시편 73편 28절>을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네게 복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내게 주어서 그게 복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복이에요.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은 축복의 백성인줄로 믿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말씀드리고 마치고자 합니다. 이전에 많이 들었던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래요. 고향동네에 가면 큰 나무 있잖아요. 여러 번 드린 말씀입니다. 어떤 나무가 큰 나무가 될까? 방법이 없어요. 그냥 무능히 그 자리에 오래 있는 겁니다. 무능하게 그 자리에 오래 있는 거예요. 능력이 빛나고 반짝거린다고 해서 큰 나무가 될 수가 없어요. 그저 무기력하게 그 자리에 오래오래 있는 겁니다. 수십 년이고 수백 년이고 그 나무가 큰 나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무능하게 라는 것이 상당히 어렵잖아요. 사람이 무능하게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이말 듣고 저말 듣고 이런 바람 저런 바람 그런데 흔들리지 않고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무능하다는 말 자체가 모든 능력을 능가하는 힘이에요. 모든 것을 능가하는 그의 일관된 의지와 하나님 앞에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마음 정했으면 끝까지 가는 이와 같은 의지입니다. 보통 힘든 것이 아니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한 것이 있고 주님 곁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수시로 상황 따라 또 내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여건 따라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마음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가지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큰 나무치고 성한나무 없어요.
여러분 몇 백 년 된 나무 벼락 맞아서 한 쪽 떨어져나가고 또 이리저리 벌레 먹어서 다 썩어져있고 그래도 그 나무가 수백 년 가면 거목이 되는 겁니다. 혼자 서있지도 못해요. 오래된 나무들 보면 옆에다 지지대 받쳐서 그 나무를 받쳐줘요. 그래서 그 나무가 고령 수목이 되고 거목이 되어 있는 모습을 봐요.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완전하기 때문에 큰 나무가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어려움이 없어서 큰 나무가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온전해서 큰 나무가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려움이 있어도 풍상을 겪어도 벼락을 맞아서 파손되어도 벌레 먹어서 여기저기 구멍 난 곳이 있어도 그래도 그 가운데 생명을 유지하고 그 자리에 꿋꿋이 있을 때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의 거목이 되어서 주의 나라를 이루시는 영광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명식 목사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군중들이 애들 말로 예수님에게 뿅간사건이 있었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들녘에 모여든 굶주린, 허기진 5000명의 군중들에게 먹고 남을 만큼의 기적을 보이신 것입니다. 넉넉지 않았던 세대에 들판의 예수님께 찾아갔더니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그 사실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습니다(요 6:15). 정치적인 압박과 설움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허덕이는 절박함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기적으로 배부르게 할 수 있다는것…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희망을 묵살하시고 산으로 가버리셨습니다(요한복음 6:15).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이제 먹을 것이 해결될텐데, 저분이 임금만 되면 걱정거리가 없어지는데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임금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제자들중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집권하신다면 하는 기대속에 한자리를 탐내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5-37절에 보면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절). 한마디로 뭡니까? "주님이 집권하시면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게 해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은 "분히 여겼습니다"(막 10:40).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는데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를 등지고 산으로들어 가셨으니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계속 쫓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2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하시면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함이 아니요(요 6:38)"라고 점점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하셨습니다. 육신의 배만 부르면 되는데 정치적인 압박에서 해방만 되면 되는데 예수님은 자꾸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요 6:41). '아니 이 사람 요셉의 아들 예수지? 그 부모를 우리가 다 아는데 뭐,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어?(요 6:42)'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치적인 구원에 대한 언급은 없이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실 것을 암시하시며 복음이신 자신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계속 하시자 예수님 곁을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돌아갔습니다(turned back, NIV성경)". 자기들의 고향,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다 물러갔습니다. 67절 말씀에 특별히 12제자에게 물으셨다는 내용을 보면 다가고 12제자만 남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봅니다. 몰려 들었던 사람들이 떠나간 뒤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다갔구나. 너희들도 역시 가려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함께 따랐던 사람들이 떠나 갔습니다. 한 두명 간 것이 아니라 다 가고 자기들만 남았습니다. 인간은 다수에게 휩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서 '예수님, 예수님'하고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보려고 하고 예수님 곁에 가까이 앉으려고 했던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명분으로 예수님 이 집권만 하시면 이제 한 자리라도 해보려고 으시대던 제자들,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에 "이제 너희도 가려느냐?"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2000여년 전에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서는 안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젊은 목사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들도 언젠가 나를 등지려느냐? 너희들은 나를 등진 적이 없느냐? 이제 너희도 가려느냐?"
신앙 생활하다 보면 예수님의 매력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만한 가치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동안 가졌던 마음들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허송세월 하고 낭비한 것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물질 때문에 예수님도 등지고 세상을 등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 나와서 듣는 말이 이해가 안됩니다. 도대체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말도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을 등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극복하기 어려운 환란 때문에, 고난과 시련 때문에 예수님을 등지고 싶어 합니다. 어떤 때는 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어떤 때는 목사님이 이해가 안되서 미워져서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에 대한 매력을 잃고 돌아서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돌아선 사람들에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오늘 예배의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아테네를 향해서 가던 어떤 사람이 갈 길이 얼만큼 남아있는지 궁금하여 마침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에게 "아테네까지 가려고 하는데 얼마나 걸리나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농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눈만 말똥 말똥 뜨고 쳐다보기만 합니다. 질문을 한 사람은 대답도 하지 않는 농부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냥 걸었습니다. 한참아테네를 향해 걸어가는데 "여보슈, 한시간 걸릴 것 같소" 라고 외치는 농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화가 났습니다. "아니, 아까 물을 땐 가만히 있더니 가는 사람 불러 세워 말하는 이유가 뭐요?" 그러자 그때서야 농부가 "내가 당신의 걸음걸이를 보지 않고 얼마나 걸리겠다고 어떻게 말하겠소?, 당신의 발걸음을 보니 1시간 걸리겠다는 말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태도나 삶의 발걸음이 그 시간을 확정짓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도 예수님 에게서 성급히 돌아 서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그의 가르침이 온전치 못하다고 생각되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성경을 보면 성경말씀대로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그의 요구가 참으로 괴로운 것일 수도, 그리고 그의 뜻하심이 전혀 불합리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돌아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가서 기도할 것입니까? 누구에게 여러분의 형편을 알릴 것입니까? 우리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예수님을 제외하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에게 환멸을 느끼지 않고 우리의 소원을 조건 없이 아뢸 수 있겠습니까? 어떤 명분으로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려는 노력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주일성수,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배생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앙생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소리를 듣는 것, 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한심한 자신을 보고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결심 하고 못 지키고, 끊었다가 또하고 그러나 도우시는 주님께 구하고 포기 하거나 돌아서지 마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완벽한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홍수로 심판을 하실 때 노아의 식구들은 남겨 두셨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술에 취해 아들에게 망신을 당한사람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인 교활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교만 했었고, 다윗은 자기도취(자기자랑)에 빠졌었고 솔로몬은 여자 관계가 문란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뜻을 여자로 인해 따르지 못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이기주의자 였으며(막10:35-37), 베드로는 급하고 일관성이 없었고, 사도 바울은 참을성이 없었습니다. 바울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매순간 악을 따르려는 자기 속의 또 다른 사람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괴로워했고(롬 7:21-24),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며 악을 따르려는 자신을 죽이며 살았습니다(고전 15:31). 우리가 신앙생활 바르게 하는 것,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 내 속에 악을 따르려는 나를 죽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주민 2000세대 전원을 상대로 종교 조사를 실시한 학자가 있습니다. 이 마을은 전통적인 장로교 동네입니다. 60%가 다음과 같은 비슷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전에는 교회에 나갔었으나 현재는 예수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 된다"
예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 위와 같은 벨파스트의 종교 조사 분석은 예수와 끊어져 있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부류 속에 종합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쉽게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쉽게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예수와 끊어지고 맙니다.
둘째로, 전통적인 교회와 교회 조직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라는 조직이 싫고 개인적으로 잘 믿는 것 같이 생각하나 전통적인 교회에서 이 탈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예수와는 끊어지게 됩니다.
셋째로, 세속적인 요구, 혹은 주변 일의 압력에 굴복한 사람들입니다.
물질적인 욕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타협하고 마는 사람은 결국 예수와는 끊어지고 맙니다.
넷째로, 기독교 가정이나 기독교 학교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라나면서 기독교에 만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후에 예수와 끊어지게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크리스챤의 신앙생활은 매순간순간 온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그럴 듯한 핑계로 주님께 등을 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로마에서 남쪽으로 항구를 향해 가다 보면 쿼바디스라는 이름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사도 베드로에 관한 전설을 따라 그를 기념해서 세운 것 입니다. 네로의 박해가 극에 달하였을 때, 베드로는 성도들의 강권에 의해 로마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피신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를 향해 다가 오는 신비한 형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거의 가까이 임하였을 때, 그는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ae)" 그때 예수님은 "내종 베드로가 교회를 버리고 도망쳤으니, 내가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를 지려하노라"고 대답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눈물로 회개 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 길이 주님을 위한 길이라고 도망갔지만 그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쉽게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그래 주님은 이렇게 원하실지도 몰라'라는 생각으로 주님께 등을 돌 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 떠나가고 12제자들만 남은 자리에서 주님은 물으십니다. 또한 오늘 예배의 시간에 오신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에 12제자들 가운데 언제나 성질이 급했던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사람들은 육체적인 허기짐을 해결 하기 위해, 정치적인 억눌림을 해결 하기 위해 모여 들었다가 갔지만 우리는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왔습니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니다(God's holy one)".
예수님은 특별하신 분, 세상 것들과는 같지 않으신 분, 초월성을 가지신 분,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린 벌써 그것을 믿고 알았습니다. 지금 믿고 있는 중이 아닙니다.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완료입니다. 그러므로 난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나 분위기에 따라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영원히 변치않을 확신입니다. 그런데 왜가겠습니까?"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모인 우리 모두가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 보험 들으신 분들이 아마 많으실 것입니다. 보험이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안심이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생명보험은 정확히 말하면 죽은 다음에 유가족들이 받는 것입니다. 사실 보험에 드는 사람이 더 염려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생명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진짜 생명 보험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the life)…"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그 생명은 변함없고, 틀림없고, 유일하신 생명의 예수님입니다. 그 보험료는 믿음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만을 모셔 들인다면 여러분은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정말 예수님이 생명을 주러 오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당신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내가 당신이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고, 믿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앞에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을 향하십시다. 눈을 열어 불말과 불병거로 지키시는 하나님의 군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왕하 6:14-17). 여러분 눈을 열어 파도 위에 좌정하신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압니다. 친구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12명이 남았습니다. 가면서 그냥 갔겠습니까? 한마디씩 던지며 떠났을 것입니다. 어쩌면 12제자들을 보고 따라왔을 지도 모릅니다. 다 등지고 떠나갔습니다. 주변에서 비방하고, 조롱하고, 고난을 주어도, 고난을 받고 어려워도 "하나님아시지요?"라고 하나님께 아뢰십시다.
성도 여러분! 포기하지마세요. 기도하세요. 등돌리지 마세요. 매달리세요.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면 희망이 있습니다. 자신도, 가정도, 자식도, 남편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면 희망이 있습니다. 일터도, 일거리도,공부도인생도,장래도포기하지마세요. 영어 잘 하고 수학 잘 한다고 해서 이 세상을 잘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영어 못하고 수학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더 잘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더 잘하는 그것을 쓰실 것입니다. 포기하고 돌아선 사람들과는 다르게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 아직도 가정을 귀중히 여기고 교회를 귀중히 여기고 신앙을 귀중히 여겨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려고 애쓰며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아니 오늘 우리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