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60]영화 <오딧세이>
지난 금요일, 오랜만에 정말 영화다운 영화를 보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딧세이>. 트로이전쟁의 영웅 오딧세이의 ‘귀향여정 10년’을 2시간 52분 동안 펼친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또 영화가 끝나면서, 쿵쿵쿵 울려대는, <오딧세이> 영화의 핵심을 압축한 모티브의 합창구호('한 얼굴' A face→'한 함대' A fleet→'한 전쟁' A war→'한 인간' A man→'한 생각' A thought→'한 지략' A trick>의 여운이 오래 가듯, 놀란 감독은 그 이름처럼 세계를 충분히 ‘놀라게’한 것같다. 서양영화로 치면 <벤허> 이후 가장 많이 크게 감동을 받은 대작이다.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또는 호머)가 썼다는 대서사시 <오디세이아>가 <일리아스>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만 알았지, 감히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세계적인 고전을 구입해 맹렬히 읽고 있다. 고대 그리스어 완역본이라는 『명화와 함께 읽는 오디세이아』(현대지성 클래식 65, 2025년 4월 1쇄, 루벤스 외 그림, 박문재 옮김, 667쪽, 27000원)는 모두 1만2천행(line)의, 그야말로 여타 서사시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서사시였다(일리아스는 1만5천여행으로 서사시의 으뜸이란다). 이런 영웅과 전쟁의 서사(敍事)라니, 그저 혀를 내둘 수밖에 없다. 번역하는 이나 100여점의 그림을 그린 여러 화가들이 머리에 쥐가 나도 여러 번 났겠다. 게다가 300개가 넘는 정밀한 각주와 해설까지. 그리스 신화를 모르면 이해조차 어려운, 신과 인간의 세계가 범벅이 돼 있는 이 고전 중의 고전은, 우리에게 무엇을 안겨주는가. 일단 고대 그리스의 지리와 신화 그리고 문화적 맥락을 대충 이해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니 페넬로페, 텔레마코스, 키클롭스, 세이렌, 칼립소 등 낯설기만 하던 이름도 익숙해졌다.
책을 읽으며 며칠 끙끙대는 남편이 안쓰러웠던지, 아내가 툭 던져준 책이 ‘비룡소 주니어 클래식’으로 펴낸 『오디세이아』(1쇄 2026년 7월 25일, 원작 호메로스, 안나 밀버른 씀, 도닝크 그림, 양혜진 옮김, 243쪽, 17500원)였다. 놀란 감독이 기똥차게 각색한 것처럼, 방대한 서사시를 모두 소설처럼 풀어썼는데 너무 잘 썼다. 어린이-청소년용이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차라리 이 책을 단숨에 읽으니 그제서야 머리가 좀 개운해졌다. 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이 ‘아아 이런 이야기들이었구나’ 개념이 잡혔다.
위험하고 신비로운 온갖 사건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이 가득한 ‘인류 최초의 모험 판타지’는, 신화 속에서 길을 묻고 현실 속에서 길을 찾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제우스의 법칙’을 아시는가? 자기 집을 찾아온 나그네라면 누구든 먼저 맞아들이고, 먹이고, 씻기고, 잠자리를 제공한 뒤에야 그가 누구인지를 묻는다는 인간사회 질서의 불문율이 그리스어로 ‘크세니아’라고 하는 제우스의 법칙이다. 또한 신을 존중하고, 한 맹세는 어떻게든 지키며, 부모 가족과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며, 어떤 경우에도 신의 질서를 '오만한 마음'으로 침범하지 않는 등, 이 질서들이 지켜져야 신과 인간의 세계에 분란이 생기지 않고 평화가 오고 유지된다는 교훈을 주는 것같다.
엊그제 유명짜한 문사(文士)가 이 영화를 본다니까 대뜸 “자네는 그런 부왕부왕한 영화를 머드게 볼라고 허는가? 숫제 가상(假想)의 세계 아니여”라고 해 빠앙 터졌다. 십 수년만에 들어보는 전라도 사투리 ‘부왕부왕’은 실제로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나 사건을 뻥튀기처럼 크게 부풀리거나 과장하여 떠벌린다는 뜻. ‘사람이 부왕부왕허먼 못쓰는 벱여’ ‘너는 왜 입만 열면 부왕부왕허냐’ ‘그런 부왕부왕헌 말에 홀리면 안돼’ 등으로 쓰인다. 아무튼, 영화는 시종일관 부왕부왕했지만(사람을 쥐새끼 잡듯이 끌꺽꿀꺽 먹는 식인거인이 어디 있을 것인가?), 너무 흥미진진해, 평소 영화만 보면 조는 나에게 한번도 졸 틈을 주지 않았다. 우리의 팍팍한 삶에 저런 기발하고 신박한 판타지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벌써 2, 3천 년 전의 인간들이 저런 엄청난 서사시를 썼듯, 우리도 문명인답게 AI로 세상을 경천동지하게 만들 작정인 것같다. 그런데, AI는 판타지가 아닌 게 문제. 문학이고 뭐고 곧 사라질 듯해, 앞으로 전개될 세상이 궁금하고, 조금, 아니 많이 걱정이 된다.
아무튼, 모처럼 영화다운 영화를 감상한 아내와 나는 몇 달 후가 될 지 모르지만(예약이 안되므로), 우리나라에 한 곳밖에 없다는 '용산 아이맥스'에서 한번 더 거장의 거작을 보면서 그 감흥을 즐기기로 했다. 이번에는 영화와 책 두 권 강추. 하하.
덧붙임: 우리나라의 어마어마한 서사시로 『청』(고은 지음, 도서출판 그냥 2023년 발행, 1189쪽, 5만원)이 있다. <오디세이아>에 못지 않은, 효녀 심청이의 일대기를 읊었다. 흥미를 느끼시면 졸문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통문 20]시인 고은高銀의 서사시 <청>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