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72
3월24일[사순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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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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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마리아수도회 기민영 미카엘(산곡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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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길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뇌리 속에 강력히 각인된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이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런 자부심을 지닌다는 것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선택받지 못한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이민족들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 동물 중에서도 개로 취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순혈주의, 율법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평소 입고 다니던 복장부터 남달랐습니다. 화려하고 요란스러웠으며 치렁치렁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옷 여기저기 성구갑이라고 성경 말씀을 넣은 작은 상자를 달고 다녔는데, 그것을 마치 큰 자랑거리, 훈장처럼 여겼습니다. 성구갑은 내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에 정통한 사람인지 알아? 라고 외치는 표시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갑작스레 공식 석상에 섰던 한 장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었습니다. 그냥 편안한 복장으로 출연해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그가 입고 나온 군복 전면이 가관이었습니다. 그간 받은 훈장이란 훈장은 다 달고 나왔습니다. 그 무게가 상당한 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꼴불견이었습니다. 그 옛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꼭 그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자부심 가득한 유다인들을 절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위선, 그들의 이중 플레이 앞에 참지 않으십니다. 거침없이 당신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을 가감 없이 쏟아놓으십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이 말씀 끝에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은 순식간에 들고 일어났습니다. 동물도 아닌데, 예수님을 슬슬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낭떠러지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합세해서 그분을 벼랑 아래로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일종의 살인미수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살상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실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용기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비참하고 야만적인 시국 앞에서, 거대한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창궐하는 이 순간, 또 다른 예언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고,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처절한 기 싸움이 하루빨리 종식되는, 그래서 화해와 일치, 기쁨과 평화의 날이 빨리 다가오길 큰 목소리로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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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2p5oPJtv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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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날 때는 언제나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이다>
사람이 진실 앞에서 보이는 가장 솔직한 반응은 ‘분노’일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칼날처럼 예리해서,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감춰진 상처나 수치를 찌릅니다.
루카 복음 4장 24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의 종교심과 신앙 안에 감춰진 교만을 정확히 찔러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큰 죄가 되었길래, 사람들은 예수님을 끌어내어 벼랑으로 밀쳐 죽이려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단지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과부가 아닌, 사렙타에 있는 이방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났고, 엘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가 아닌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신앙적 특권의식을 건드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왜 나는 그 말에 화가 났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안의 죄를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인적 모욕처럼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죄와 직결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속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곧,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이 오히려 더 격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잘못이 드러날 것 같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화를 내고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허물을 가리려 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주인공 신애의 깊은 상실과 용서, 그리고 분노의 여정을 그립니다. 아들이 유괴되어 사망한 깊은 슬픔 속에서 신애는 지역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신앙을 통해 위로를 찾으려 합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로 그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며 평온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저는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신애는 큰 충격을 받고, 분노와 혼란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용서하려 했던 사람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에,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분노와 상처가 드러납니다. 이는 그녀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하느님과 세상에 자기 분노의 탓을 돌리며 화를 내고 죄를 이어갑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부터 분노는 자기 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다른 일을 하시지 않고 그저 진리를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십니다. 비난받는 표적이 되면서 사람들이 자기 죄를 볼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를 보고 자기를 고칠 것인지, 그냥 화만 낼 것인지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에서 돌아설 사람들은 분노가 날 때 자기 죄를 보는 이들입니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에 나온 엔도 슈사쿠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그는 192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을 접했지만,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소수 종교였기에 종종 내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의 삶과 기독교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일본은 그에게 매우 세속적이고 불교와 신도 중심의 문화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엔도는 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며, 그곳에서 신앙에 대한 회의와 무신론적인 사상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무신론적인 사상을 깊이 탐구하며, 기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신의 침묵이 고통을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왜 신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통스러운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중반,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 심각한 폐결핵에 걸리게 되어, 일본 도쿄의 와세다 대학 병원(Waseda University Hospital)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폐결핵은 당시에도 치명적인 질병으로, 입원한 시기인 1956년부터 약 1년간 그는 병상에서 고통을 겪으며 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병원에서의 시간이 엔도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입원 후, 엔도는 신에 대한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자신의 고통을 느끼며, "왜 신은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도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서 그는 신의 침묵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죄를 직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고통 속에서 점차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 고통 속에서 점차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신은 나와 함께 고통받고 계셨다”라는 깨달음은 그에게 깊은 영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분노와 상처가 사실 신을 떠나기 위한 방어기제였음을 깨닫고, 그분의 침묵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를 드러내기 위한 신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엔도는 회심 후, 자신의 작품『침묵(Silence)』에서 그가 겪은 내적 갈등과 신앙의 회복을 풀어냅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 했던 선교사들의 고난을 다룬 작품으로, "침묵"이라는 주제 속에 신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는 회심 후, "내가 신을 믿지 않으려 할 때, 그 신을 향한 분노가 더 크게 느껴졌고, 그 분노가 결국 내 죄를 드러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을 거부하려 했던 자신을, 오히려 신의 뜻을 찾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분노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회개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었고, 엔도는 그 이후로도 그의 작품을 통해 신앙의 의미를 탐구하며,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처음엔 분노가 일었지만, 그 말이 나를 위한 진리였음을 깨달았을 때, 삶은 변한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그러하십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이 불편하더라도, 분노를 넘어 성찰로 나아갈 때, 우리는 구원의 길에 서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그 칼날은 우리를 베기 위한 것이 아니라, 썩은 것을 도려내어 새 생명을 위한 수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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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생명의 탄생은 38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나타난 생명은 죽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생명이 단성생식, 다시 말하면 자기복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환경이 변화면서 단성생식으로는 적응할 수 없었던 생명은 유성 생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성 생식을 하면서 생명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성 생식을 통해서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고, 다양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성 생식은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진 부모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수많은 다양한 생명 형태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유성 생식에서는 같은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쌍둥이도 서로 다른 생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식물종이라도 유성 생식을 통해 다양한 꽃의 색깔과 형태가 나타납니다. 이는 단순한 생명체의 다양성을 넘어, 각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더 강력한 생태계를 만들고, 각 생명체가 자신만의 독특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처럼 생명의 다양성은 우연의 산물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는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조화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와 고향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말, 라합, 룻, 바세바와 같은 이방인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배경과 문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제외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가 구원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에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권위와 힘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나무를 손질하던 목수의 아들”로 여겼고, 그로 인해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스스로 제한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편견은 그들이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편견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도 요르단강보다 좋은 강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편견을 버리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었던 나아만은 요르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갔고, 그의 나병은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지 않았고 자신들의 판단을 먼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기보다는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그 색안경의 색깔대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편견과 시기심은 우리가 서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기회를 통해 서로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모두가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이방인 여인들의 이야기는 환영과 포용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희생, 순명, 사랑, 헌신, 봉사’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목적이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길’은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길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지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 나가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이 보여 주시는 구원의 계획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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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당신께서 카파르나움에서 하셨던 일을 고향에서도 해 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예언자 시대의 일을 이야기하시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나서 당장 그분을 고을 밖 벼랑으로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분노하게 하였을까요?
제1독서에서 나아만은 요르단강에서 몸을 씻으면 나병이 나을 것이라는 엘리사 예언자의 말대로 하여 병이 나았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예수님을 믿고 카파르나움으로 찾아갔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병이 나았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도 이 엄청난 소식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눈앞에서 표징을 보여 줄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 시대의 일을 본보기로 말씀하셨는데,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믿음이 이방인들보다도 못하다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분노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만과 비교하신 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가혹하고 냉정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아파서 피하고 싶은 이야기겠지만, 그 안에는 그들의 회개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힘들겠지만,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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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나자렛을 방문하신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은 큰 신앙을 보여주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견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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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한 시민이고, 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4-30)
1)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일’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은,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만 받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인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면, 유대교로 개종해야 하고, 이스라엘로 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시자, 유대인들은 “너희는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들만 구원받는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 유대교의 법입니다.(마르 14,64)
2)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지만, 유대인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들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아들은 것은 제대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라는 말씀으로 그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3)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인류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시메온 예언자의 찬미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따라서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마태 28,19),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애쓰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4.16-19)
이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한 가족입니다.
5) 26절의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는 말씀은, 사렙타의 과부만 엘리야 예언자를 맞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또 27절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는 말씀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엘리사 예언자에게 가서 치유의 은총을 간청했다는 뜻입니다.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특별히 더 편애하시는 분도 아니고, 누구를 차별대우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라고 권고합니다.(야고 4,8)
이 말은, 하느님께서 멀리 떨어져 계시다가 가까이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고, 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항상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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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움켜쥐지 않으렵니다>
루카 4,24ㄴ-30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도착하시어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움켜쥐지 않으렵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ㄴ)
믿음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믿음이
나만의 믿음이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믿음이라면
나는 더욱 굳게 믿겠나이다
희망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희망이
나만의 희망이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희망이라면
나는 더욱 밝게 희망하겠나이다
사랑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사랑이
나만의 사랑이 아니요
벗님들에게도 사랑이라면
나는 더욱 뜨겁게 사랑하겠나이다
기쁨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기쁨이
나만의 기쁨이 아니요
벗님들에게도 기쁨이라면
나는 더욱 마음껏 기뻐하겠나이다
자유는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자유가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자유라면
나는 더욱 드높이 자유롭겠나이다
정의는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정의가
나만의 정의가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정의라면
나는 더욱 깨끗이 정의롭겠나이다
진실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진실이
나만의 진실이 아니라
벗님들에게 진실이라면
나는 더욱 맑게 진실하겠나이다
평화는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평화가
나만의 평화가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평화라면
나는 더욱 널리 평화롭겠나이다
길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길이
나만의 길이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길이라면
나는 더욱 힘차게 길을 걷겠나이다
삶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삶이
나만의 삶이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삶이라면
나는 더욱 오롯이 살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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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난 강론입니다. 라파엘 신부님은 현재 의식이 돌아왔지만 아직도 병원에서 치료중이십니다.)
<첫발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그야말로 정면 돌파를 하신 것입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그런 확신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룩하신 위대한 업적의 증인들은 고향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예언자도 예수님께서도 미움과 배척을 받으셨으나 그분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참 사랑은 이랫다 저랫다 하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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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같은 학교에서 십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공부하고 생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젊음의 열정을 함께 불태웠고 서로의 꿈을 응원해 주던 친구들입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생활합니다.
화려한 대도시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친구도 있고, 한적하고 조용하지만 인심 좋고 가족 같은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친구도 있고, 기관에서 좀 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들과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마다 삶의 자리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들의 삶이 부러울까요? 그냥 너무 행복해서 투정하는 소리 같이 들립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내가 그들보다 못난 것이 무엇일까?’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듭니다. 내 자리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늘어납니다. 나를 이곳에 보낸 사람이 원망스럽습니다.
누군가와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평과 불만, 원망과 짜증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라는 악의 씨앗이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잡습니다. 그 악의 씨앗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주위 사람들의 고마움을 가려 버립니다. 내가 받아 누리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을 잊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나자렛 사람들 마음에도 악마의 씨앗이 자리를 잡고 싹을 틔웁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삶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늘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제 그들은 악마에게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뿐 아니라 자신들까지도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아 버립니다. 어둠이 그들을 뒤덮어 버립니다.
악은 어둠처럼 조용히 찾아옵니다. 그 세력은 빠르게 마음을 잠식해 갑니다. 어둠을 없애는 방법은 빛을 밝히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그리스도의 삶과 가치를 고민하고 묵상할 때 우리는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악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 주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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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년 2~3차례 이상의 피정을 신학생 때부터 했으니, 이제까지 참 많은 피정에 참여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피정이 이를테면 고상한 피정이었습니다. 신학생 대상의 피정, 신부 대상의 피정은 수준이 높았습니다. 피정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나 있는 분들이었고, 그 내용도 어른에게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부끄럽게도 이 피정 지도자들의 강의에 크게 와닿은 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나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이 아닐까? 하느님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등등…. 피정 갈 때마다 늘 이런 고민이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커다란 울림을 얻었던 피정도 많았습니다.
가장 큰 도움이 된 피정은 한 달 동안 이루어진 이냐시오 영신수련이었고, 도 다른 피정은 찬양 속에서 이루어진 특히 자기 체험 안에서 주님을 느끼게 해주는 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피정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의 위신, 자존심, 체면, 권위, 품위 따위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때 피정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피정 지도자가 온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낮추지 않으면 피정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주님께서 강조하신 겸손 속에서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잔뜩 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가 거북하고 불쾌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의 반응이 인상적입니다. 보통 누군가가 화를 내면, 그 화를 삭이기 위해 그 사람 편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 자기를 낮추지 않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과연 주님께서 함께하실까요? 그냥 우리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실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 가득한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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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저는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이 그곳이니 부평을 제 고향이라고 이야기해야겠지요. 그러나 지금 그곳에 가면 반겨줄 사람도, 알아볼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고향이라 해도 따스함이나 설렘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인데 부평이 진짜 제 고향일까요?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부르지 않고 추억과 기억이 있는 곳, 아득한 기억 속 즐거움이 있는 곳을 고향이라고 부른다면 제 고향은 여러 곳입니다. 우선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이 제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이지만 기억의 토막들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그다음은 부평5동 성당입니다. 지금은 부개동성당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곳 역시 저의 학창 시절과 신학생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도와준 곳이기에, 그리고 많은 친구들이 기억에 남아있는 곳이기에 저의 고향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신 고향은 바로 이런 곳이었습니다. 즉 고향은 따스한 추억과 즐거움이 남아있는 곳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태어난 곳이 고향인가요? 아니면 좋은 추억과 기억이 있고 그 안에 즐거움이 있었던 곳인가요?
더듬어보세요.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신 고향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따스함과 위로와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곳에서 지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적인 고향…. 하늘나라와 하느님 계신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늘 따스함과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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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심보다….안심보다….
등심보다
안심보다
진심입니다.
한우를 소개하는 광고입니다.광고를 제작하는 분들의 번쩍이는 아이디어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맞습니다. 무엇보다 진심입니다.
진심이 없을 때 그 마음은 가벼운 무게로 누군가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허공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사랑, 위로, 격려, 칭찬 그리고 배려….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릇 같은 것이 바로 ’진심‘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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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루카. 4,27)
열왕기 하권(5,1-15)에 나오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예언자인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르단 강에 가서 몸을 씻어 그의 나병 낫게 되자 나아만은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은 주님께 가까이 있었고, 시리아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인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시리아 나병환자 나아만만 깨끗해진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의 좋은 점은 잘 보지만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의 좋은 점은 잘 보지 못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살면서 경험한 그 사람의 부분만을 판단하고 마음에 쌓아두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 강할수록 열린 마음에 오시는 성령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거부하게 됩니다. 함께 사는 가족이나 공동체 형제자매의 좋은 점을 발견하는 것은 현존하시는 주님의 영을 알아차리기 위한 첫 발걸음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알아차리려면,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과거 경험에 따른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벗고,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 그리고 환경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시리아 나병환자 나아만은 마음을 열고 지금 그대로의 예언자의 말씀을 듣고 믿었었기에 나병이 치유가 되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입견 때문에 눈과 귀가 있어도 곁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존하시는 주님의 영을 알아차리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일을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있는 형제자매 안에서 현존하시는 주님의 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됩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되찾는 시간입니다. 마음을 열고 우리의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간입니다. 내적인 나병과 같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끗이 씻어내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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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복음 4장 24절-30절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복음 4장 24절)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복음 4장 29절)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으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복음 4장 30절)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사무엘 역사서 상권 15장 23절)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를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주님! 오늘 제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저에게서 결코 당신을 배척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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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복음 4장 30절)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따라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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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힘>
-천형天刑은 천복天福으로-
역시 믿음의 선택, 믿음의 훈련, 믿음의 습관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정성을 다한 공동전례기도 수행을 통해 믿음을 훈련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정주와 순명서원 역시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 역시 보고 배웁니다. 주님께서 감동, 감탄하신 것도 믿음이었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어제와 그제 양일간 다양한 연령층의 네 부부가 면담성사를 봤고 따로 물었습니다.
“남편의 삶을 100점 만점에 몇 점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내의 삶을 100점 만점에 몇 점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지하게 그러나 미소지으며, 똑같은 질문을 남편과 아내되는 분에게도 했습니다. 네 분의 자매가 남편 점수를 90점을 줬고, 네분 형제는 아내에게 90점, 95점, 99점, 100점을 줬고, 즉시 함께 불러 점수를 공개하니 얼마나 기뻐하는지 신뢰와 사랑이 가득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보면서 믿음과 사랑을 배웠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성장 역시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성장임을 깨달으니 서로 감사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는 ‘말씀의 성모영보 수녀회’ 창립자인 선종완 사제의 <선종완, 깊은 숲, 영란처럼 향기롭게>란 평전을 틈틈이 보면서 믿음을 배웠습니다. 제자였던 박찬용 신부의 선종완 스승 사제에 대한 회고담을 인용합니다.
“박학한 지식도 지혜도 모두 성화시키신 은사님, 시험답안지에 쓰라는 답을 못쓰고 엉터리 설교 답안을 써내면, ‘허허, 요즈음 신학생들은 교수한테 정답 대신 설교를 한단 말이야.’ 하시면서도 좋은 점수를 주신 까닭에 사제가 지식으로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살기를 더 원하신 까닭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름에 선풍기 하나 없이 대야에 냉수를 떠놓고 발을 담그고 성서연구를 계속하시던 그분의 모습이, 또 언제나 변함없이 무릎을 꿇고 연구나 강의전 기도를 바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제자들 역시 학식과 더불어 보고 배운 스승의 믿음과 사랑이었음을 봅니다. 우리는 공동체 형제들로부터도 믿음과 사랑을 보고 배우지만 오늘 말씀에서도 복음의 예수님, 2열왕기 독서중 엘리사, 나아만으로부터 믿음을 배웁니다. 반면 편견과 질투에 눈이 먼 예수님 고향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믿음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질투 역시 믿음 부재를 반영합니다. 믿음이 부족할 때 숱한 오해와 착각이 따릅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하는 믿음의 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에 눈이 먼 고향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좌절감을 엿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어 믿음의 모범으로서 이방인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를, 또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예로 들면서 독자들의 믿음에 신선한 자극을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난 고향인들은 예수님을 고을밖으로 내몰고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유히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시니 우리는 여기서도 예수님의 믿음을 보고 배웁니다. 두려움을 몰아내어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믿음의 힘, 믿음의 빛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 역시 겸손하고 지혜로운 믿음임을 봅니다. 우리를 참으로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두려움을 몰아내는 믿음입니다.
제1독서 열왕기 하권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예언자 역시, 시리아의 장수 나아만의 방문에도 추호도 위축되거나 주눅된 모습없이 참 의연하고 당당하니 이 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엘리사는 품위를 지킴과 동시에 나아만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심부름꾼을 시켜 처방을 전달합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 나아만은 화를 내어 돌아가려 하자 현명한 부하들의 충언에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니 쾌유의 기적입니다. 이에 감격한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앞에 서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믿음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나아만을 낫게 한 것은 요르단강물이 아니라 나아만의 믿음이었습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부족한 믿음을 더해 주십사 기도할 것이며 평소 믿음의 훈련에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여기서 생각하는바 나아만의 나병입니다. 천형이라 칭하는 나병이 믿음으로 치유되었으니 천형天刑은 천복天福으로 변했고 그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믿음입니다. 나병이 없었다면 나아만의 믿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을 믿음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는다면 탄력좋은 믿음에 전화위복이 은혜가 뒤따를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중 디테일에 강해야 함도 배웁니다. 나아만의 치유에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보잘 것 없이 작은 소녀가 제공한 정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이를 받아들인 나아만 아내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기 책임을 충실히 다함도 믿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의 인물들이 다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 옛 현자들의 지혜도 이와 일치합니다.
“높은 지위에 매달리며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말라. 그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일도 빛나고 사람도 빛난다.”<다산>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행했을 뿐, 그밖의 일은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이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동몽훈>
부지런히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지족知足의 삶을 사는 이들을 통해 빛나는 믿음입니다. 눈만 열리면 우리 가까이에서도 이런 믿음의 모범을 보고 배웁니다. 정말 보고 배워야 할 것은 신망애信望愛,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요, 이런 삶의 모범이 될 때, 이보다 이웃에게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이렇게 형제들의 신망애 삶을 보고 배우라고 공동체 생활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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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ㄴ)
<현재를 살자!>
오늘 복음(루카 4,24ㄴ-30)은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예수님의 구원활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희년 선포'(루카 4,18-19)를 나자렛에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간 예수로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던 것과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던 것을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에 구원의 손길이 내리지 않고, 이방인 지역에 구원의 손길이 내려진 것을 언급하십니다. 회당에 있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은 믿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구원', '지금 믿는 사람들, 지금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구원'이라는 것을 다시금 깊이 깨닫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었기에 구원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것은 구원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열려져 있고, 특히 진실되게 믿고, 오늘 깨어 있는 이들, 오늘 회개하는 이들, 오늘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이 있다는 선포였습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4,27)
내가 성직자라는 것이, 내가 수도자라는 것이, 내가 세례받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 하느님 구원의 절대적 보증 수표가 아닙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에서 진실되게 믿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31)
현재를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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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 27)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옳으셨습니다.
최선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하느님의 뜻입니다.
깨지지 않는
우리의 뜻을
깨끗이
씻겨주시는
분 또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고집을
비워야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기에
우리는 더욱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세운
믿음과
하느님께서
세우신 믿음은
다릅니다.
기대감은
믿음이
아닙니다.
기대감으로
기진맥진해지는
우리의 부실한
내면입니다.
욕심 하나하나에
갇혀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우리의 욕심만
앞설 뿐입니다.
사랑이 치유이고
사랑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이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기에
무릎을 꿇습니다.
믿음과 치유
사이에서
제자리걸음만
하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구원과 치유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역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고
아직도 깨닫지
못한 은총과
치유가 있었습니다.
욕심을 비워내야
가득해지고
깨끗하여지는
구원입니다.
구원을 가로막는
선입견과 편견의
가장 아픈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순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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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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