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이 결코 만들지 않은 히치콕 시리즈'
지난 4일(현지시간) 넷플릭스에 공개된 '리플리 더 시리즈'(Ripley)는 미국의 추리소설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 '재능있는 리플리 씨'(The Talented Mr Ripley, 1955)와 이를 스크린에 옮긴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동명 작품(1999)을 8편의 시리즈물로 각색했다. 영국 BBC는 영리하게도 흑백으로 제작한 이 작품을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과 연결해 앞의 리뷰를 적었는데 참으로 절묘하다. 짜릿한 전율은 아니지만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연출과 촬영, 편집, 특히 사건보다 심리 묘사로 긴장감을 높이는 연출이 돋보인다.
원작부터 이미 큰 성공을 거뒀다. 발표 이듬해 미국미스터리작가협회가 선정하는 에드가 앨런 포 상의 후보로 지명됐고, 그 뒤 여러 상들에 노미네이트되거나 수상하는 등의 성적을 거뒀다. 평단의 호평도 잇따랐다.
프랑스 거장 르네 클레망이 스크린에 옮긴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1960)로 웬만한 팬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둥 줄거리다. 클레망의 영화는 원작을 상당히 매만진 반면, 밍겔라 감독의 '재능있는 리플리 씨'는 맷 데이먼과 주드 로, 귀네스 펠트로, 케이트 블란쳇 등 화려한 출연진으로 화제가 됐는데 원작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Ripley | Official Trailer | Netflix (youtube.com)
앤드루 스콧이 부자 친구의 신원과 인생을 송두리째 훔치는 죄악 가득한 반영웅이며 '리플리 증후군'이란 유사과학 용어를 낳게 한 톰 리플리를 실감나게 묘사하는데 압권이다. 원작 소설이나 두 전작을 모두 본 이라도 같은 얘기를 이렇게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든 연출자의 재능에 놀랄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의 각본을 썼고 시리즈 '더 나이트 오브'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스티븐 자일리언이 극본과 연출을 맡았다. '스며든다'는 표현이 유행하는데 이 절묘한 극본은 관객을 계속 스며들게 한다.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아카데미상(오스카) 촬영상을 수상한 로버트 엘스윗이 촬영한 화면은 소름끼치는 줄거리를 아름답게 스크린에 옮긴다.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의 아트라니(Atrani) 마을 풍광과 수많은 계단들, 추악한 범죄자와 위대한 화가의 경계를 왔다갔다 한 카라바초의 작품이 걸린 나폴리의 성당 등 눈여겨 볼 대목들이 줄줄이 나온다.
첫 장면부터 계단 장면인데 이내 미국 뉴욕으로 돌아간다. 푼돈이나 뜯어내던 야비한 사기꾼 리플리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인 리처드(디키, 자니 플린)의 아버지 선박부호 허버트 그린리프(케네스 로너건)의 호출을 받는다. 역시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히치콕의 영화 '열차 안의 이방인'도 야바위꾼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굉장히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로너건이란 배우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7) 각본을 쓰고 연출한 감독이 그란 사실을 알고 꽤나 놀라워다.
디키는 순진할 정도로 리플리에게 품을 내주는, 최상의 먹잇감이었다. 나폴리로 여행하는 과정에 여행자 수표에 서명하는 모습을 보여줘 눈썰미 좋은 리플리는 충분히 위조해 먹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는다. 디키가 낀 비싼 반지, 늘 지니는 고급 만년필 등은 리플리로 하여금 디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을 강력한 동인이 된다. 거울을 보며 디키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리플리의 모습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다.
이 과정에 특히 리플리의 살인과 범죄를 암시하는 장치가 르네상스 거장 카라바초와 그의 그림이다. 이 시리즈를 다른 두 영화와 차별짓는 요소이기도 하다. 카라바초는 살인과 패악을 일삼은 천재 화가다. 마지막 8편 첫 장면에 카라바초가 라이벌 일당들에게 맞아죽은 시신으로 등장하며 그의 명화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 골리앗과 다윗 모두 카라바초의 얼굴로 그려진 사실을 알리는 박물관 가이드의 안내도 남의 신원을 빼앗고 그의 인생을 대신 사는 리플리와 겹쳐진다.
리플리가 디키를 무심한 표정으로 바다 위 배에서 때려 살해하는 장면은 한 순간도 눈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숨막혔다. 아름다웠다. 마지와 또다른 디키의 친구 프레디 마일스(엘리엇 섬너)는 처음부터 리플리가 디키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원작, 전작 두 편에서는 프레디가 방탕한 미국인이었는데 이 시리즈에서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미소를 짓는 영국인으로 묘사된다. 하이스미스는 원래 작품들에 동성애 얘기를 넣는 것을 좋아했다. 이 시리즈에서도 프레디는 리플리에게 동성애자 아니냐고 의심을 날리며, 리플리는 여러 차례 "나는 아가씨들이 좋아"라고 말하게 된다. 어쨌든 리플리는 나폴리에서 디키를 살해하고 엘리베이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계단을 통해 시신을 옮기는데 이것이 첫 장면이다.
그리고 어떻게 리플리는 경찰 수사망을 빠져나갈까, 이것이 우리의 궁금증이 될 수 밖에 없다. 리플리는 로마와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와 베네치아에서 계속 경찰과 마지, 그리고 미국에서 날아온 허버트 그린리프마저 따돌리며 완전 범죄에 성공한 듯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마지가 어렵게 쓴 책이며 오래 전 리플리가 제목을 바로잡아준 여행 사진책 '나의 아트라니' 앞의 몇 쪽을 넘겨본 형사는 엄청난 실수를 깨달으며 울상이 된다.
리플리가 행세한 디키를 진짜라고 믿는 로마의 베테랑 형사는 베네치아까지 찾아와 리플리를 만나는데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리플리는 그 형사를 만날까 그냥 도주할까 망설이다카라바초의 그림을 구경할 때 박물관 직원이 "중요한 것은 빛"이라고 조언한 것을 떠올리며 방안을 어둡게 하고 자신의 얼굴 반대쪽에 갓등을 켜놓는다. 이 장치에 그 형사는 완전 속는다. 영화를 보며 경찰을 비롯한 이탈리아 사람들 참 멍청하구나,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유전자 검사도 없었던 시절이라 그런 것이니 너무 욕하지 말길.
마지막 8편에 히치콕 감독처럼 깜짝 카메오가 등장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시리즈의 엔딩 크레딧은 아주 특이하다. 제작진과 출연진 자막으로 안내가 나가는 내내 생활 소음이 들려오는데 절대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8편 엔딩 크레딧에 존 말코비치 이름이 턱하니 뜬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시리즈' 가운데 다른 작품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Ripley's Game'에 주인공으로 열연했는데 8편에 얼굴을 비친다.
'재능있는 리플리 씨'는 리플리가 디키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공부해 호감을 사는 것으로 재즈가 소개되며 데이먼이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밸런타인'을 부르는 등 많은 재즈 넘버들이 흘러나온다. 반면 이번 시리즈는 1960년대 이탈리아 칸초네 향연이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미나의 'Il cielo in una stanza'와 마이클 뷰블레의 'Quando Quando Quando'가 인상적이다. 뷰블레의 노래인지는 확실치 않긴 하다.
Mina - Il cielo in una stanza (1960) (youtube.com)
Michael Buble - Quando Quando Quando --- Steff. B --- HD - 10Youtube.com.mp4
각 에피소드 러닝타임 42분씩, 엔딩 크레딧 5분 안팎이라 다른 시리즈보다 시간을 덜 뺏긴다.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갖고 있는 이들로선 이번 시리즈를 통해 흑백이어서 되레 영롱한 이탈리아 관광을 안방에서 즐기는 호사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