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래도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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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 ・ 2022. 10. 1.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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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위빳사나 명상을 배웠을 때, 나는 아무래도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몸은 자꾸 구부러졌고 허리랑 무릎은 여기저기 아팠다. 그래서 배의 부품, 꺼짐 같은 건 알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집중을 잘해서 신기한 현상들을 보고했다. 나는 그런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명상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알았다. 이상하게 ‘이것은 진실’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 후 미얀마에 가서 짧게나마 출가생활도 경험하고 15년째 명상을 이어오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가 없었고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 밤낮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때 인터넷으로 찾아보다 처음으로 불교에 대해 알게 됐다. 나는 그 전까진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녔기에, 어린 마음에 불상에 절하고 그러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서는 라즈니쉬, 마하리쉬, 무묘앙 에오 같은 ‘명상서적’을 접하면서 불교의 깨달음도 그 비슷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접하게 된 부처님 말씀은 이랬다. “누군가 독화살을 맞아 고통스럽다면, '누가 이 독화살을 쏘았는가?', '이 독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가 중요한가, 아니면 단지 독화살을 뽑아내고 상처를 치료해야 하겠는가?” 당시 나는 도무지 세상의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고,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불확실한 것들에 매달리는 대신, 지금 이 순간 ‘고통’이라는 진실을 직면하라고 말하고 계셨다. 이때는 이 말씀이 ‘니까야’(초기불교 경전)에 나온다는 건 알지 못했다. [독화살 비유는 <맛지마 니까야> ‘말룽꺄 작은 경’(M63)에 나온다.]
그 후 사유를 놓아버리고 단순하게 몸의 감각에 주의를 두며 수능을 준비했다. 명상을 따로 배운 건 아닌데도 그렇게 하게 됐다. 혼자서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를 공부하는데 불교 교리로 ‘12연기’가 소개되어 있었다. 뜻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그러면서 불교를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대학교를 선택하면서 먼저 ‘불교 동아리’가 있는지 검색해봤다. ‘불교 동아리’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입학하자마자 동아리방을 찾아갔다. 당시 동아리에는 지도법사 스님이 따로 없었다. 우리끼리 예불을 보고 부석사로 수련회를 가고 연등을 준비해 행렬에 참여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인터넷으로 ‘불교철학입문’ 강의를 찾아서 들었다. 조성택 교수님의 강의였다. 그 강의에서 다른 종교의 명상은 ‘한 대상에만 집중하는’(사마타) 명상이고, 불교의 명상은 현재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여러 대상’을 관찰해 ‘무상·고·무아’를 깨닫는(위빳사나) 명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위빳사나 명상’을 배울 수 있는 선원을 소개해주었다. 과천에 있는 ‘OOO선원’이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OOO선원’은 당시 얼마 되지 않는 ‘테라와다불교’ 선원이었다. 당시는 스님을 뵙지 못하고, 재가 법사님께 간단하게 위빳사나 수행법을 배웠다.
이후 2년 정도 지나서인가,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면서 ‘7개월 과정’으로 스님께 기초교리와 위빳사나 명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러면서 윤리 교과서에서 ‘12연기’를 읽으며 느꼈던 ‘불교 교리’에 대한 갈증이 풀렸다. 불교에서는 불확실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단지 지금 이 순간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직접 관찰’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걸 알게 됐다. 몸의 감각이 그렇듯, 생각이나 감정도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관찰할 대상이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그렇게 불교에 ‘확신’을 가지게 되고, 얼마 후 신기하게도 스님 한 분이 불교동아리를 지도해주겠다고 연락해주셨다. 미얀마 쉐우민 선원 등에서 오랫동안 위빳사나 수행을 한 ‘혜연 스님’이셨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법 인연’이 모여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는 ‘마하시 방법’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었으나 ‘배의 부품, 꺼짐’은 보지 못하고 여기저기 일어나는 통증만을 관찰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1시간은 버티려고 하다 보니, 지나치게 힘을 주어 집중하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혜연 스님께 ‘쉐우민 방법’으로 지도를 받으면서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는 걸 배웠다.
혜연 스님께서는 고엔카 10일 코스, 미얀마 단기출가에 대해서도 알려주셨고, 순룬 사야도나 떼인구 사야도 같은 미얀마의 아라한 스님들 이야기도 해주셨다. 스님의 소개 덕분에 고엔카 10일 코스에 몇 번 참가하다 보니, 집을 떠나 더 오랫동안 수행에만 전념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대학교 4학년 때쯤에는 미얀마로 출가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러나 먼저 부처님 말씀인 ‘니까야’(초기불교 경전)를 모두 읽고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대학교 도서관에 신청해 4부 니까야를 모두 빌려 읽었다. 마침 초기불전연구원에서 4부 니까야가 모두 번역된 때였다.
미얀마로 떠나기 전에 혜연 스님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1년은 있겠다’고 결심하라고 했다. 그 말씀 때문인지 나는 1년 3개월 동안 비구계를 받아 미얀마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혜연 스님께서 수행하신 ‘쉐우민 선원’으로 갔는데, 쉐우민은 사념처(몸·느낌·마음·법) 중에서도 ‘마음 관찰’과 ‘법 관찰’을 강조하는 곳이다. 쉐우민 우 꼬살라 사야도(큰스님)의 제자인 ‘우 떼자니야 사야도’께서 지도하고 계신다. 미얀마에 가기 전에도 떼자니야 사야도의 책을 읽었지만, 책으로만 봐서는 도저히 ‘심념처(마음 관찰)’ 수행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얀마로 가서 직접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그때까지 매일 꾸준히 아침, 저녁으로 1시간씩 명상을 한다고는 했지만 생각만큼 수행이 향상하지 않았다(저녁엔 피곤하면 1시간을 채우지도 못했다). ‘하루 종일 수행만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미얀마로 가서 정말로 모든 역할과 책임을 내려놓고 수행만 하루 종일 할 수 있으니 행복했다. 어느 날은 잠을 자며 ‘사회에서 해야 했던 여러 일들’에 대한 꿈을 꿨는데, 깨어나고 보니 정말로 아무것도 ‘해야 할 일’이 없었다. 가벼웠다. 하루 종일 수행만 하니 확실히 ‘마음챙김(사띠)’이 좋아졌다. 몇 달 지나지 않아 ‘하루 종일 마음챙김이 이어진다’는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법에 대한 이해가 생기자, 나에게 이러한 환경과 기회를 제공해준 모든 이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일어났다.
두 번의 우안거를 마치고 1년 3개월 만에 다시 재가자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5년간 다시 바쁘게 살았다. 미얀마에서 ‘수행센터에만’ 머물며 키웠던 수행력이 바쁜 재가생활에서도 이어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미얀마에서는 편안하고 고요했는데 막상 돌아와 살아 보니, 여전히 부족한 나의 모습을 보며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했다. 미얀마에서처럼 강하게 계율을 지키려고 하니 일하면서 부딪히는 부분도 많았다. 미얀마에서 행복했는데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출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걸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전부터 알았던 사람들과 잘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이 번뇌로 괴로울 때조차도, 그 마음을 그대로 관찰하는 마음이 같이 있었다. 분명히 괴로운데 그 관찰하는 마음쪽은 또 평온했다. 이상했다. ‘수행하는 그 마음’은 바쁘게 생활하며 꾸준히 좌선을 못 할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 미얀마에서 지냈던 시간이 헛되지는 않은 것이다. 마음은 서서히 정상 궤도를 찾았고, 마음 깊숙이 깔려 있던 우울감에서도 벗어났다. 부처님의 법을 알게 된 인연의 감사함을 생각하니, 조금이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기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5년간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간에 좀 여유가 생겼다. 마침 코로나가 터지고 개인사정이 겹치며 외출이 어려워진 탓이기도 했다. 그동안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불교 도서를 ‘점자도서’로 만드는 봉사를 하고 싶었는데, 직장을 다닐 때는 시간과 에너지가 없어 실천하지 못했다. 내가 그동안 도움받았던 ‘니까야’와 ‘테라와다불교 도서’들을 누구든지 접하고 도움받았으면 했다. 1987년부터 초기불교 경전을 알리고 있는 ‘고요한소리’ 도서부터 시작하였다. 나 역시 대학교 불교동아리 활동을 하며 ‘고요한소리’ 도서를 보며 공부했기 때문이다. ‘고요한소리’에서도 취지에 공감해 원고 파일을 제공해주시고 점자도서 제작비용도 지원해주었다.
혼자서 많은 일을 하기 어려워 봉사자를 모집했다. 같이 일을 하다 보니, 각자 니까야 한 권 값(25,000원)을 모아서 도서관에 니까야를 매달 한 세트씩 기증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3명이서라도 소박하게 해나갈 생각이었는데, 이러한 취지를 알리니 호응해주는 분들이 모여 ‘테라와다불교 니까야 보급회’를 만들게 됐다. 그런데 활동을 해나가다 보니 생각보다 ‘니까야’를 구비하지 못한 승원이나 스님들도 많았다. 그래서 지금은 도서관뿐 아니라 승원에도 니까야를 보시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남아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는 보시가 세 가지 있다고 한다. ‘승가에 하는 보시’, ‘부처님 법을 나누는 보시’, ‘열반을 서원하는 보시’다.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되는 보시를 하고 있으니 복된 삶이다.
내가 그동안 누린 복을 다른 이들도 함께 누리길 바란다. 특히 한 시대, 같은 공간에 살면서 경제적 빈곤, 신체적 장애 등으로 부처님 법을 접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미얀마에서 내가 받은 법명은 ‘담마삐야’다. ‘법(담마)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스스로 이름에 값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 나는 아무래도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작성자 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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