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김초성
산줄기 아래에 동쪽으로 신선이 숨어 있다는 마을, 선은리仙隱理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집들을 아늑히 감싸 안고 있는 이 마을 어귀 작은 길 사이에 마주 보고 사는 두 집이 있었다.
이른 봄, 아침이면 언제나 텃논에서 삽질로 살다시피 하던 보리밭 활량 집의 아저씨네와 길 건너에 사는 변호사집 할머니네다. 우리 마을의 고요와 정적을 깨뜨리는 이 두 사람은 동네의 유명 인물로 손꼽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흘 들어 한 번씩은 큰 소리로 싸움을 해댔다. 선량한 동네 사람들은 그 사나운 변호사네나 보리밭 활량네에 가서 항의 한번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보았다.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웃어넘기는 정도였다. 그러한 불만 쯤은 그들의 자자손손에게 그 별명을 대물림해서 불러주면 그만이었다.
건넛집 변호사 할머니는 정말로 말을 똑똑하게 잘했다. 사채놀이를 업으로 삼으며 홀로 사는 그녀는 싸울 때마다 지는 법이 없어서 동네 사람들이 변호사라고 그리 불러왔던 터였다. 변호사집은 흙담을 단장할 때마다 조금씩 길 쪽으로 둘러치고, 보리밭활량네 집에서는 텃논을 사방으로 야금야금 깎아 논을 넓히고 해서 마을의 통행로는 해가 갈수록 점점 좁아지곤 했다. 나이가 느긋한 노인들은 안동네로 들어가는 좁아진 길을 지나며 그 집을 살구나무집이라 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보리밭 활량네라 불렀다.
내력인즉슨 보리밭활량네 증조할아버지는 오랜 옛날 동네 선비들과 활쏘기 대회를 할 때면, 활을 과녁에 잘 맞추지 못하고 유독 혼자서만 보리밭 한가운데에 활을 쏘아 대었다 한다. 그러한 연유로 증손자 대에까지 와서도 보리밭활량네 집이라고 별호가 붙여진 것이다. 대부분 뜻도 이유도 모른 채 동네 사람들은 그리 불러왔고 대대손손 별칭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백 년이 훨씬 넘은 수령을 지녔다고 하는 장골 같은 그집 살구나무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선은리 봄을 밝혀주던 큰 나무가 팔 벌려 분홍꽃을 피울 때면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우는 듯하였다. 그저 좋았고 세상이 환하게 밝았다.
사실 우리 집에도 자랑할 만한 살구나무가 두 그루나 있었다. 우람하진 못해도 꽃은 말할 것도 없고 열매도 잘 열어 입을 즐겁게 해주는 봄철 한때의 간식거리가 되어 주었다. 실하게 익은 큰 것들은 하필이면 꼭 우물가 웅덩이에 떨어지곤 했다. 그 살구를 용을 쓰며 꺼내느라 발이 늪에 빠져서 애를 태웠던 생생한 기억을 어찌 잊을까.
살구 자두 복숭아 밤 대추 감은 예부터 조상들이 즐겨 먹어온 대표적인 과일이다. 소박한 살구치고는 초여름 훌륭하게 제 몫을 한다. 신석기 초기의 유적에서 탄화된 살구씨가 발견되어 역사의 관록을 자랑하는 열매다. 15세기 이후 향약집성방, 17세기 이후 동의보감에도 효능과 먹는 방법을 설명해 놓았으니 살구는 오랜 세월 함께한 알뜰한 과일임은 분명하다.
여느 과일보다 필수 비타민, 미네랄 성분이 우수해 영양학적으로 새롭게 선호하며 항산화, 항염 효과와 여러 약효 면에서 귀히 쓰인다. 살구 씨앗을 행인杏仁이라하여 한방에서는 급만성 진해 천식에 으뜸으로 쓰인다. 윤장작용이 좋은 행인오일은 변비에도 효과가 있다. 쓰임이 좋은 만큼 헹인에는 독성을 일으키는 아미그달린이라는 청산배당체 성분이 있어 각별히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지금은 다양한 기능성화장품이 쏟아져 나왔지만 행인은 피부미용에 좋아 예전 여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예부터 큰 살구나무가 있는 집에는 반드시 미인이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대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집 네 자매 중에 막내만 빼놓고 딸 셋의 미모는 온 고을에서 입에 오르내릴 만큼 미인들이었으니까. 신통하다.
동선행림童仙杏林이란 유명한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의 탁월한 명의 중 화타와 장중경과 더불어 오나라 동봉童奉을‘건안삼심建安三心’이라 불리었다. 명의도 명의지만 동봉은 찾아오는 가난한 환자들에게 치료비 대신에 어린 살구나무 묘목을 주어 심도록 했다. 숲을 이룬 살구나무에서 얻은 살구와 바꾼 곡식으로 민초들을 구제했던 선행을 칭송하는 살구나무에 얽힌 미담이다. 오늘날 행림의원이란 명패를 달고 의술을 펼치는 한의원들은 아마도 그런 훌륭한 인품과 미덕을 따르고자 하는 뜻이 있으리라 믿어본다.
맛이 달고 새큼한 살구는 매실을 닮았다 해서 첨매甛梅 라고도 한다. 꽃에 향기가 약한 것이 좀 아쉽긴 하다. 한국산은 유기산이 많아서 신맛이 좀 난다. 기후 관계인지는 몰라도 지중해 튀루키에, 중앙아시아 동쪽이나 캘리포니아에서 수입한 말린 살구는 쫄깃하니 달고 향도 맛도 그만이다. 여행길에 지니기가 좋아서 더 매력적이다. 나에게는 매일 먹고 싶은 과일 중의 하나인 무지개 일곱 빛깔 중의 제일 고운 주황색 살구, 이제 막 시중에 나오기 시작한 살구, 내가 오길 고대할 터이니 어서 서둘러 가봐야겠다.
중앙아시아 북부 중국 지역이 원산지인 살구는 기원 수백 년 전부터 민초들과 이웃했던 과일이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원정 때 그리스, 로마로 유입되어 유라시아로 돌고 돌아 대륙 전역에 재배되거나 자생하게 되었을 것이라 하니.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과일은 다양하다. 역사가 깊은 살구는 작지만 이롭고 알차다. 사랑받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스피노자에게는 결례가 될지 모르나‘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한 그루의 살구나무를 심을지어다’라고 고집하고 싶다. 벚나무 가로수만 심을 게 아니라 곳곳에 살구나무를 두루 심을 일이다. 일석다조一石多鳥, 이 얼마나 고마운 나무인가.
동네 이야기꾼들의 화제에 빠짐없이 오르내리던 그분들도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내가 다녔던 여학교에 수옥당이란 이름의 강당은 변호사할머니가 희사한 거액으로 지은 것이다. 싸납배기 할머니의 가슴 속에 일찍이 숨겨놓은 독지가의 꿈이 있었으니 상상치 못한 일에 반갑고 놀라운 마음이었다. 변호사 할머니의 당당함 뒤에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계획이 있었음을 어찌 알았으랴. 지금은 아름다운 전설로 남아있어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동네를 환히 밝혀주던 살구나무는 여전히 우람한 채 꽃을 피우고 있을까. 하늘을 채우고 있을까. 싸움 구경 나왔던 낯익은 동네 어른들과 또래의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 쪼무래기들, 정겹고 그리운 얼굴들이다. 제각기 선량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살았던 살구나무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첫댓글 선은리에 환한 꽃등을 단 듯한
살구나무가 상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