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6월 빛고을 광주에서 미국 선교사 한 명이 과로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것은 담요 반 장,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다.
그녀의 시신은 유언을 따라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되었다.
그녀는 어둠의 땅 조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났다.
그녀는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진 조선에 와서 22년을 살았다. 그는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신었다.
그는 한국에서 한국인의 친구가 아닌 한국인으로 살았다.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조선인들도 버린 나병 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봤다. 아프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들을 정성껏 치료했다. 그렇게 한 평생을 조선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가 바로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였던 엘리자베쓰 셰핑((Elisabeth J. Shepping, 1880~1934)이다. 한국 이름은 서서평이다.
그는 1912년에 한일병합 이후 32살 처녀의 몸으로 미국 남장로교회 간호선교사로 조선 땅에 들어왔다.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진 조선 땅을 돌아다니며 병든 자를 치료했다. 이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당시 여성들 500명 가운데 자기 이름을 가진 사람은 10명도 안됐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여성들을 가르쳤다. 과부들이 자립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병환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했고, 나환자를 포함해서 14명을 양자와 양녀로 키웠다. 나병인들의 어머니로 불였다.
일본 총독부가 나환자가 출생을 못하도록 정관수술 정책을 발표하자 나환자를 이끌고 총독부를 찾아가 데모를 했다. 그래서 오늘날 나환자 요양소인 소록도가 세워지는 계기가 됐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최초로 광주시민사회장으로 10일 동안 장례를 치뤘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라고 부르며 오열했다.”고 한다.
서서평 기념사업회 회장 홍정길 목사는 이렇게 그의 삶을 조명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원본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원본을 잃었습니다. 믿음은 늘 구체적인 삶의 용솟음입니다. 믿음의 원본을 되찾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한국교회는 이 자리로 돌아와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치유
(본문:눅10:34,35)
본문의 내용은 널리 알려진 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께 찾아와서 영생얻는 법을 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본문의 내용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강탈당하고 몸마저 상하여 쓰러져 있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으나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를 보고 다가가 그를 치료해 주었다는 줄거리입니다. 이 내용을 토대로 사마리아인의 치유 사역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남(눅10:30)
이 사람이 왜 강도를 만났습니까?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즉 교회를 말합니다. 반면에 여리고는 어떤 곳입니까? 수6장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시에 가장 먼저 파괴된 도성이 여리고입니다.
그것은 이 여리고 성이 여호와 신앙을 방해하는 이교적 분위기가 팽배한 도시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파괴하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이도시는 동서 무역로를 끼고 있는 주요한 상업도시로써 경제적 부요를 누리는 번성하는 도시였습니다. 또한 달의 여신을 숭배했기 때문에 달의 성읍이라고도 불리는 그야말로 세속적인 도시의 대명사였습니다.
이 강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세속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를 만났습니다. 신앙을 저버리고 믿음의 길을 떠나서 세상을 쫓아 살아가는 자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오히려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하는 자이며 언제나 예루살렘에 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람은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내려가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학생은 학교 성적이 올라가야 하고 사업체는 매출이 증가해야 합니다. 교회는 말할것도 없이 성장해야 하고 성도의 신앙 역시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내려가는 것은 영적 침체를 말하고 영적 침체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기도의 열기가 내려가서는 안됩니다. 전도의 온도가 내려가서도 안됩니다. 봉사와 헌신의 열의도 식어서는 곤란합니다. 영혼에 병든 자는 내려가기를 원하고 숨기를 원합니다. 빛을 싫어하고 어두운 것을 좋아합니다.
요1장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을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세상이 깨닫지도 못하고 영접치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내려가기보다 올라가는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듯 비상하는 신앙, 창공을 향해 솟구치는 신앙을 지닐 때 항상 승리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강도는 물건을 강탈하고 사람을 해침(요10:10)
강도란 불법적으로 남의 물건을 약탈하고 신체에 해를 입히는 범법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서의 강도란 세상을 말할 수도 있고 사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성경은 사단을 성도를 속이고 멸망시키려는 존재로 간주합니다. 즉 강도라는 말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도를 실족시키려 우는 사자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아 다닙니다. 그래서 걸리기만 하면 모든 것을 빼앗고 처절한 멸망의 상태로 끌고 갑니다. 어떤 상태로 만드느냐 하면 30절에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주님을 만나지 못한 불신 인생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설령 살았다 한들 죽은 자와 다름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생의 자화상이 바로 '강도를 만나 모두 빼앗기고 거반 죽은 상태'로 방치된 강도만난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범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의 죄과를 입고 태어난 인간은 이와같은 숙명적 운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생을 찾아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어머니와 분리되어 혼자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 본연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 평생 살면서 우리는 왜 그리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나야 합니까? 남몰래 흘려야 하는 눈물을 왜 그리 많습니까? 애쓰고 노력하고 발버둥쳐봐도 그저 세끼 밥 먹기 바쁘고, 병들어 고생고생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닙니까? 이 모든 불행은 우리 모두가 강도를 만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긴 이 사람에게 제사장이 다가옵니다. 여기 제사장이란 종교의 지도자를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를 말합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다고 외칩니다.
여기에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포교하고 외치던 각종 교들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제사장은 '그를 보고 피하여'지나갔다고 했습니다. 말과 실천이 달랐습니다. 평소에는 가장 의로운 척하지만 실제의 상황에서는 피하여 지나가는 위선자일 뿐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신음하면서 시달렸습니다. 고통과 좌절속에서 희망을 가졌습니다.
제사장의 치유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유유히 그를 배반하고 그 곁을 떠났습니다. 이는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그의 마지막 희망을 레위인에게 걸어 보았습니다. 그를 만나면 건강이 회복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를 만나면 상실한 꿈과 희망을 되찾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아무도 없는 인적이 끊어진 곳에 버려진 이 사람은 레위인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잘 안되었지만 이번만 잘되면 지금까지의 모든 실패는 회복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 역시 '그를 보고 피해'갔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도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저쪽에서 구원의 발자국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3.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사마리아인의 치료가 시작됨(요1:14)
사실 강도 만난 사람은 사마리아인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인생들이 제이, 제삼의 실패한 만남으로 인해 멸망해갈 때 기적적인 구원의 만남을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사람 편에서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선하신 구원의 실행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그가 그렇게 기다리고 의지했던 사람들에게서는 오히려 실망과 좌절과 배신감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의외의 사람에게서 치유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내 의지로, 내 이성으로 주님을 택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먼저 내게로 오셔서 나를 만나주셨습니다. 기독교는 찾아오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러 오셨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았고, 준비하지도 않았는데 만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고 준비하셔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종교는 어떻습니까? 인간이 찾아 나서야 합니다. 불교의 진리는 더듬어 찾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수행을 해서 터득해야 합니다. 산중 깊숙히 숨어 있는 사찰로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매우 중요한 교리가 성육신입니다.
요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매우 중요한 교리가 성육신입니다. 요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찾아 오셨다'는 내용이 바로 성육신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공생애 내내 죄인들을 찾으셨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울한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좌절하고 낙망한 인생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것을 가지고 그 상처를 싸매 주시고 안전한 거처로 옮겨서 완전히 회복되도록 치유해 주셨습니다. 강도만난 자에게 있어 진정한 치유를 그가 사마리아인을 만남으로 가능했습니다.
결론
강도를 만나서 상처입은 영혼이 모든 기다리는 것들에 의해서는 버림받고 배반당하지만 결국 예기치 아니한 사마리아 사람에 의해 완전히 치유받았습니다. 성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으로 인해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자입니다. 주님의 치유는 완벽하고 온전하여 우리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완전하게 회복시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