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장달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행장 갈암 이현일
선형(先兄) 장사랑(將仕郞)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존재(存齋) 선생 행장
본관(本貫)은 월성(月城)인데 중간에 재령(載寧)으로 옮겼다.
증조는 은보(殷輔)인데 창신교위(彰信校尉)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을 지냈고, 비(妣)는 의인(宜人) 김씨(金氏)와 의인 이씨(李氏)이다.
조는 함(涵)인데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의령현감 진주진관병마절제도위(行宜寧縣監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냈고, 비는 숙인(淑人) 이씨이다.
부는 시성(時成)인데 승의랑(承議郞)이고, 비는 단인(端人) 황씨(黃氏)이다.
공의 휘(諱)는 휘일(徽逸)이고, 자는 익문(翼文)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다. 시조는 알평(謁平)이니, 신라 시조의 좌명 공신(佐命功臣)이다. 고려 때 휘 우칭(禹偁)이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지금의 본관이 된 것이다. 공으로부터 6세(世) 이상은 함안(咸安) 모곡리(茅谷里)에 살았는데, 5세조 관찰사 휘 맹현(孟賢)이 청렴한 덕과 큰 명망으로 광묘(光廟)의 지우(知遇)를 받아 경사(京師)에 집을 하사받았다. 고조 현령(縣令) 휘 애(璦)가 숙부 중현(仲賢)이 영해(寧海)의 수령으로 나갈 때 따라갔다가 그 읍(邑)의 대성(大姓)인 진성 백씨(眞城白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그곳에 살았다. 처음에 통훈공(通訓公)이 아들 넷을 두었다. 장자는 시청(時淸)인데 성균관 진사이고, 차자는 시형(時亨)인데 일찍 죽었고, 다음은 시명(時名)인데 선교랑(宣敎郞)으로 명묘(明廟)의 재관(齋官)을 지냈고, 다음은 시성(時成)인데 승의랑(承議郞)이다. 선교공이 두 번 장가들어 아들 일곱을 두었는데, 공이 둘째로 계부(季父) 승의공(承議公)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본생모(本生母) 장씨(張氏)는 영가(永嘉)의 명유(名儒)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선생의 따님인데 계실(繼室)로 우리 가군(家君) 선교공에게 시집왔다.
만력(萬曆) 47년(1619, 광해군11) 10월 경오일에 안동부(安東府) 서쪽 금계리(金溪里)에 있는 집에서 공을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일반 아이들과 달랐다. 두어 살 때 어머니를 따라 금계(金溪)에 문안을 갔는데 아직 말을 잘 못하는 때였다. 하루는 밖에서 대문 안으로 들어와 단정히 공수(拱手)하고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것이 마치 빈객을 맞이하여 인도하는 모습이었다. 경당공이 얼른 나가 보니 손님이 대문 밖에 있었다. 5, 6세 때 오경(五經)의 중요한 말을 능히 암송하였고 가정의 가르침을 공경히 받들어 지칠 줄 모르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서, 백씨(伯氏)가 일찍이 갑자기 병에 걸려 위독하자 모친이 근심하면 그도 근심하였고, 좋은 음식을 혹 조금 나누어 먹으라고 하면 곧 사양하며 먹지 않고 말하기를, “남겨 두었다 백씨에게 반찬으로 주십시오.” 하였다. 일찍이 조부 통훈공이 쑥뜸을 뜨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몸을 태우는데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9세 때에는 능히 작문을 하였다. 일찍이 〈묘호설(猫虎說)〉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 “고양이는 범과 같으나 뜻이 범만 못하다. 범의 뜻은 크고 고양이의 뜻은 작으니 이 때문에 범만 못한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여지도(輿地圖)에 대해 지은 시에, “황하의 중류에 버티고 선다.〔黃河當中流〕”라는 시구가 있었는데, 대간(大諫) 최현(崔晛)이 한 번 보고는 경륜(經綸)의 뜻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또 하늘에 대해 읊은 시에, “허공은 둥글어 갈라진 곳이 없고, 땅은 천공의 사이에 있다.〔空中圓無坼 地在天空間〕”라고 하였으니, 말을 구사하는 솜씨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신미년(1631, 인조9) 여름에 천연두에 걸려 위중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13세였다. 모친이 업고 나가 변을 누게 하였는데 곧 방향을 바꾸었다. 모친이 이상하게 여겨 까닭을 물으니, 곧 눈을 뜨고 살펴보고는 말하기를, “선비(先妣)의 사우(祠宇)가 여기에 있어 평소에 변을 볼 때 반드시 삼가서 피하였습니다.” 하였다.
일찍이 금계에 가서 경당 선생께 몸을 닦고 행실을 가다듬는 요체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에 대한 설을 듣고 돌아왔는데, 장 선생이 또 편지를 보내 《대학(大學)》의 격물 치지(格物致知)와 성의 정심(誠意正心)하는 방법과 《맹자(孟子)》의 수심 양성(收心養性)하는 뜻을 일러 주니, 곧 흔연히 학문을 좋아할 줄을 알았다. 날마다 역도(易圖)와 성리(性理)에 관한 책들을 가져다 방 안에 들어 앉아 묵묵히 연구하니 혹 비웃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성현이 인(仁)에 대해 말한 부분을 뽑아 모아 한 책으로 만들고 《구인략(求仁略)》이라고 이름하였다. 조부 통훈공이 그 말을 듣고 기특하게 여겨 《역(易)》을 읽은 소감을 연구(聯句)로 지어 보라고 하니 즉시 답하기를, “복희씨(伏羲氏)의 횡도는 장난삼아 그린 것 같지만, 그 이치 면밀히 생각하면 도리어 무궁하네. 원래 팔괘가 뿌리가 되어 각각 여덟 가지를 치니, 천하의 만사가 이 속에 있도다.〔伏羲橫圖如戲畫 細思其理却無窮 原八爲根各八支 天下萬事在此中〕” 하였다. 통훈공이 크게 칭찬하고 이에 맹자오륜설(孟子五倫說)을 써서 주었다.
이때부터 개연히 도(道)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 경당 선생의 문하에 가서 학업을 마치려고 하였는데, 경당공이 곧이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 공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이에 비로소 분발하여 독실히 외고 익히며 책 속에서 성현이 남기신 뜻을 구하려고 하였다. 서적을 두루 널리 보면서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였고, 이어 지나치게 독서를 하다가 몇 년간 비창(痞脹)을 앓았다. 이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모두 물리치고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성리대전(性理大全)》, 《역학계몽(易學啓蒙)》,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등의 책만을 가져다 깊이 잠심하고 묵묵히 그 뜻을 연구하여, 도리(道理)의 근원과 학문의 단계에 대해 이미 요령을 잡고 이해하였다.
늘 일찍 의지할 곳을 잃어 그 학문을 모두 전수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또 먼 외지의 후생으로 태어나 대인군자(大人君子)의 전형(典刑)과 의범(儀範)을 직접 보고서 본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관례(冠禮)를 한 뒤에는 당시 선달(先達)의 문하에 두루 나아갔으니, 호양(湖陽) 권공(權公), 매원(梅園) 김공(金公), 학사(鶴沙) 김공에게 일찍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가르침을 청하여 각각 그들의 장점을 취하여 스승으로 삼았다. 호양에 대해서는 경(經)에 주(註)를 다는 데 각고의 노력을 한 점을 들었고, 매원에 대해서는 풍부한 학식과 온아한 인품을 들었고, 학사에 대해서는 청수(淸修)하고 간정(簡靜)한 인품을 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보존하여 성품을 기를 줄을 알고, 천하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되 정추(精粗)와 내외(內外)를 둘로 여기지 않은 것은 경당의 문하에서 발단되었고, 스스로 미루어 넓힌 것이 많았다.
집안이 원래 대대로 영해의 인량리(仁良里)에 살다가 경진년(1640, 인조18)에 선교공이 읍령(泣嶺)의 서쪽으로 옮겨 은거하였는데, 옛집과의 거리가 70리나 되었다. 공이 이미 계부의 후사가 되었기 때문에 의리상 따라갈 수 없어 사는 집의 당(堂)에 ‘망운(望雲)’이라는 현판을 달아서 양공(梁公)이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간 뜻을 담았다. 서원(西原)의 정공 칙(鄭公侙)이 글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이로부터 혹 한 달에 한 번 가기도 하고 한 달에 두 번 가기도 하여 풍우(風雨)와 한서(寒暑)를 피하지 않았고, 갈 때마다 며칠씩 머물렀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비록 자잘한 일이라도 모두 직접 하여 그 마음을 다하였고, 부모를 모시는 여가에는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경사(經史)를 강론하여 한밤중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돌아가서는 양부(養父)를 모셨는데, 조석으로 좌우에서 시중드는 일을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계사년(1653, 효종4)에 고 참판 최공 혜길(崔公惠吉)이 영해의 수령으로 나왔다가 그의 행의(行義)를 조정에 올리자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예를 갖추어 초빙하라 명하려 하였는데, 그때 방해하는 자가 있어 결국 초빙하지 못하여 의례상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에 선교공이 또 영양현(英陽縣) 북쪽 수비산(首比山) 속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영해에서 가는 길이 더욱 깊고 험하였다. 공이 홀로 양부를 모시느라 본생부모(本生父母)의 은혜를 돌아보지 못하는 것을 큰 슬픔으로 여기고 이따금 가솔을 거느리고 찾아뵈었다.
신축년(1661, 현종2)에 비로소 부(府)의 서쪽 저곡(楮谷)에 거처를 정하여 양쪽을 문안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근처의 바위 사이에 집을 짓고 대와 나무를 많이 심고는 명서(冥棲)라고 이름하고 그곳에서 독서하였다. 또 골짜기 입구 하류에 경치 좋은 곳을 구하여 그 냇물을 옥천(玉川)이라고 이름짓고 그 못을 뇌택(雷澤)이라고 이름지어 때때로 거닐었다. 당시에 벗들을 모아 강학하고 저술하여 학업을 크게 이루려고 했고, 또 한두 사우(士友)가 멀리서 찾아왔으며, 더러는 편지를 통해 질문하여 배우기를 청하는 자도 많았다.
무신년(1668, 현종9) 겨울에 양모(養母)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인량리 옛집으로 돌아와 상(喪)에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 공경을 다하자 고을 사람들이 다투어 칭송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병으로 쇠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인량리는 읍에 가깝기 때문에 번거롭고 소란스러워 병을 치료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기유년(1669) 여름에 드디어 궤연(几筵)을 모시고 들것에 실려 저곡으로 돌아왔다. 그해 가을에 병이 조금 나아지자 곧 고을 사람들과 종족의 자제들을 모아 자상하게 가르치면서 밤새도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형제와 친척들이 병에 걸려 쇠약한 몸이니 사절하여 돌려보내라고 하면, 대답하기를 “저들이 와서 배우는데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하였다.
경술년(1670, 현종11) 겨울에 상기(喪期)가 끝나고 본생부모가 마침 수비산에서 저곡으로 오시자 매우 기쁘게 맞이하여 모셨다. 조석으로 봉양하면서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고, 고금의 일들을 나열하여 이야기하며 기쁨을 다하게 해 드렸다. 승의공이 홀로 되자 무료할까 염려하여 힘을 다해 빈객을 초대하여 종일토록 기쁘게 해 드렸는데, 그분의 뜻을 맞추는 일이면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집안이 본래 빈한하여 처자는 주린 기색을 면치 못하였으나, 부모를 공양하는 것과 빈객을 받드는 데에는 빈한하다고 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신해년(1671)에 마침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가득하자 공이 몹시 걱정하고 불쌍히 여겨 마치 자기의 근심인 양하여 집안의 재물을 덜어 내서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하였고, 또 기근이 든 나머지 반드시 약탈하는 변고가 있으리라고 염려하였으니, 그 먼 앞날을 염려하고 생각하여 경영(經營)하고 구획(區劃)한 것은 실로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늘이 우리의 도(道)를 돌보아 주지 않아 미처 뜻을 펴 보지 못하고 임자년(1672, 현종13) 1월 28일에 저곡의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아, 현일(玄逸)은 차마 말을 하겠는가. 향년은 54세이다.
공은 전취(前娶) 박씨(朴氏)와 후취(後娶) 김씨(金氏)에게 모두 자녀가 없어 모제(母弟) 현일의 둘째 아들 의(檥)가 후사가 되어 직접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받아서 가계(家系)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손자가 둘이고 손녀가 하나인데, 모두 어리다.
처음에 경당 선생이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전한 계문심학(溪門心學)의 지결(旨訣)을 얻었으나 그분이 돌아가신 뒤로 은미(隱微)한 말이 마침내 끊겨 세상에서 이른 바 학(學)이라는 것이 괴이하고 황당한 데 빠지지 않으면 의장(儀章)이나 도수(度數) 따위의 말단만 추구하고 다시는 이치를 궁구하여 실천하고 내면으로 들어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게 되었으니, 이른바 존심(存心)의 지결이 거의 민멸(泯滅)되어 전하는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공이 동자(童子)로서 다행히 경당의 문하에서 배워 비록 요지(要旨)를 질정하여 전해 내려오는 깊은 뜻을 듣지는 못했으나, 총명하고 숙성하였기 때문에 상고하고 근거할 바를 알아서 마침내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만년에 다시 마음에 계합(契合)된 바가 있어 ‘심(心)이 보존되지 않으면 양성(養性)과 궁리(窮理)의 근본이 될 수 없다.’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가 살고 있는 집을 ‘존재(存齋)’로 이름짓고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그곳에서 지내며 스스로 성찰하여 그 명칭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는 터전으로 삼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심은 붙잡아서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경(敬)이 보존하는 법이다. 그러나 ‘경으로써〔以敬〕’라고 하지 않고 ‘경을 하여 곧게 한다〔敬以直之〕’라고 하였으니, 성현이 열어 보여 준 뜻이 긴요하고 절실하다고 하겠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학자가 항상 본원(本原)을 찾는 공부를 하면 마음을 잡고 보존하는 것이 더욱 견고해지고 이치를 살피는 것이 더욱 정밀해져서 근본이 자연 성대하여 그 활용이 무궁하다. 여기에 잘못이 있으면 이른바 학(學)이라는 것이 모두 거짓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이르기를, “학문은 넓지 않아서는 안 된다. 혹 일에 따라서 궁리하여 뭇 이치가 모두 회통(會通)되도록 하지 않고서 곧바로 요약(要約)하려고 하면 그 폐단이 반드시 비루한 데 이르게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육경(六經)과 여러 사서(史書)와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완미하여 그 폭을 극진히 넓혔다. 사서(四書)에 대해 더욱 정밀하고 익숙히 하였으니,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은 경문(經文)과 장구(章句) 외에 혹문(或問)이나 소주(小註)까지도 모두 이해하고 관통하였다. 《시경(詩經)》에 대해서는 반복해서 읊고 음미하여 완연히 고인(古人)의 은미한 뜻을 언어와 문자의 이면에서 터득하여 첩자(疊字)와 산성(散聲)이 성률(聲律)에 맞는다는 것을 알았고, 《주역(周易)》에 대해서는 괘(卦)가 생겨 나온 차례가 선천학(先天學)이 되고 호변(互變)하고 교역(交易)하는 것이 후천학(後天學)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하도(河圖) 중앙의 숫자인 오(五)에서 실로 전인(前人)이 밝혀내지 못한 깊은 뜻을 밝혀냈다.
예(禮)에 대해서는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실로 비로소 존신(尊信)하였는데, 특히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심혈을 기울였다. 궁벽한 시골의 말단 풍속이라서 전해 오는 과정에서 비루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건의하고 가르쳐서 변화시킨 것이 많았다. 심의(深衣)와 복건(幅巾)의 제도와 상복(喪服)과 유거(柳車)의 법식에 대해서도 모두 깊이 상고하고 정밀히 살펴서 실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가례》는 사마 온공(司馬溫公)의 《서의(書儀)》를 준용(遵用)하였으나 절목(節目)은 소략한 곳이 참으로 많다. 이는 주자(朱子)가 이미 말하였다.” 하고, 이에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를 반복해서 연구하여 그 제도와 절문(節文)을 모두 밝혀 문인들로 하여금 근거하여 지킬 바가 있게 하였다. 가까이는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의절(儀節)에서부터 멀리는 조빙(朝聘)과 회동(會同)의 예(禮)에 이르기까지 모두 번거롭다고 여기지 않고 이해하고, 주소(註疏)의 차이점까지도 널리 다 알아냈다.
《서경(書經)》에 대해서는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심학(心學)의 요령(要領)과 정사(政事)의 체통(體統)을 이해하였고, 아래로 율력(律曆)과 도수(度數)의 자세한 내용과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제작한 묘법(妙法)까지도 모두 그 미세한 것까지 극진히 궁구하여 그 제도를 곡진히 알아냈다. 홍범(洪範)의 글에 대해서는 더욱 느낀 바가 있어, 성왕(聖王)의 수신(修身)하고 경세(經世)하는 법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역경(易經)》은 네 성인의 손을 거치고 또 정자(程子)와 주자의 전(傳)과 본의(本義)가 있어서 그 뜻을 발휘하고 보완하여 더 이상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홍범구주(洪範九疇)는 채씨(蔡氏 채침(蔡忱))의 집전(集傳)에서는 의리(義理)만을 해석하였고,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내편(內篇)〉에서는 수(數)를 부연(敷衍)하고 서법(筮法)을 밝혔을 뿐이니, 이 어찌 부사(父師 기자(箕子))가 당시에 남긴 뜻이겠는가. 더구나 부사가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조선(朝鮮)에서 행하여 우리 동방의 만세의 법을 세웠으니, 우리가 능히 발휘하고 부연하여 크게 전승한다면 어찌 세상에 드문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에 논저(論著)를 수집하여 그 차례를 정하려고 하였다. 편목(篇目)은 모두 남아 있는데, 불행히 중간에 병에 걸려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손때가 아직도 새로우니, 오호라, 애석하도다.
공은 천성이 호방하고 기상이 넓게 트여 젊은 나이에 일찍이 북쪽 오랑캐를 쳐서 국가의 수치를 설욕할 뜻을 지니고서 산천(山川)의 형세와 오랑캐의 상황을 연구하여 알았고, 병법과 군율의 요체 또한 모두 그 요지를 상고하여 곧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만년에는 내외(內外)의 경중(輕重)을 더욱 잘 알아서 안으로 깊이 감추고 암천(巖泉)의 수죽(水竹) 사이에서 흔연히 자득(自得)하여 마치 세상사에 뜻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혹 시국을 근심하고 일을 논할 때에는 강개(慷慨)하고 격앙(激昻)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송연(竦然)히 놀라 탄식하게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세상에 쓰인다면 재주와 지혜는 남보다 나을 것이 없지만 남을 해치고 질투하는 마음이 적을 것이니, 이 마음을 미루어 사람을 대한다면 혹 이루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한쪽 변두리에 살기 때문에 사우(師友)들과 함께 지내며 서로 절차탁마하지 못함을 항상 근심하였다. 일찍이 고을의 자제를 모아 글을 가르치면서 응대를 신중히 하여, 자기의 뜻에 맞지 않다고 하여 싫어하지 않고, 조금 잘한다고 가상히 여겨 작은 허물을 간과하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데 충서(忠恕)를 극진히 하였으니, 그 근원을 미루어 보면 모두 정성으로 부모를 섬기는 데 근본한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한결같이 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정성을 미루어 양부(養父)를 섬기고, 낳아 주신 부모의 은혜에 곡진히 보답하는 것은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인데, 일찍이 그의 효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형(堂兄)인 처사공(處士公)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효성은 옛날 민자건(閔子騫)과 같다.” 하였다. 일찍이 봄에 본생친(本生親)에게 살아 있는 물고기를 보내 드리고 싶어서 사람을 시켜 물가에 가 보게 하였는데, 마침 물이 불어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홀연히 물새가 한 자나 되는 물고기를 길가에 물어다 놓았다. 사람들은 공의 효성에 감동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뜻을 잘 맞추어 드려야 하고 자기의 뜻대로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부모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참으로 한 가지가 아니지만 때로 일에 따라 논간(論諫)하여 열 번을 반복하더라도 뜻을 어기지 않았고, 구차하게 어버이의 명을 따르는 것을 효라고 여기지 않았다.
백형(伯兄)을 섬김에 있어 사랑과 공경이 모두 극진하여 안색을 붉힌 적이 없었고, 여러 아우를 대함에 있어 은혜로운 뜻이 곡진하였으나 권면하고 가르치는 데는 더욱 엄격하였다. 친족과 인척(姻戚)을 대함에 있어서는 은혜와 사랑이 두루 지극하여 그들 중에 궁핍한 자를 도와주기도 하고 따라오지 못하는 자를 권면하기도 하였다. 또 한 가지라도 잘한 것이 있으면 얼굴 가득 기쁨이 드러나 칭찬하기를 마지않았고,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정색을 하고 제재하여 조금도 사정을 봐주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정성스러운 마음이 평소에 드러나서 사람들이 모두 감화되어 따랐다. 고을 사람이나 벗을 대할 때 각각 그 도리를 다하였고, 고을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말은 낭랑하고 표정은 온화하며 종일토록 여유로워 남들과 심히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일을 만나 담당할 때에는 뜻은 전일하고 기운은 용맹하여 작은 혐의 따위로 일을 피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침묵은 참으로 좋은 것이나 속으로 반성하여 이치를 따르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정(情)을 속이고 뜻을 감추는 잘못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적다.” 하였다.
가슴속이 통연(洞然)하여 한계를 두지 않아서, 무릇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것이 모두 충성스럽고 간곡한 마음에서 나와 안과 밖, 겉과 속의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결국 포악한 자가 진심을 드러내고 시기하고 혐오하는 자가 원망을 누그러뜨렸으며, 소문을 들은 자는 흠모하고 직접 본 자는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으니, 천성이 성현에 가깝고 자품이 후(厚)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에 미칠 수 있었겠는가.
문장(文章)을 지을 때는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고 혼후(渾厚)하고 원만하여 스스로 한 체(體)를 이루었다. 후생(後生) 시절에 향교에 가서 과거문(科擧文)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공력을 들이지 않고도 정식(程式)에 맞으니, 당시에 동년배들이 모두 자기들은 공에 미치지 못한다고들 하였다. 일찍이 한두 번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속학(俗學)이 사람의 심술(心術)을 해친다는 것을 깊이 알고는 마침내 과거 공부에 대한 뜻을 버리고 한결같이 도(道)를 구하는 것으로 뜻을 삼았다. 저서들이 모두 완성되지 못하였는데, 홍범연의(洪範衍義)나 일원소장도발휘(一元消長圖發揮)와 기타 남긴 글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오호라, 공은 아름다운 자질로 일찍이 도(道)를 지니신 분을 직접 보고 위기지학의 진결(眞訣)을 들은 데다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는 정성을 더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만약 문헌(文獻)이 있는 곳에서 주선(周旋)하여 사우(師友)들과 절차탁마해서 그 매진하여 그칠 줄 모르는 뜻을 채워 배운 바를 존중하고 아는 바를 행할 수 있었다면 계문(溪門)에 전수된 심학(心學)을 밝혀내고 후진(後進)을 이끌어서 후세에 끼친 영향이 참으로 여기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장수하고 현달하여 세상에 그 뜻을 행하였다면 충성과 인애(仁愛)가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살피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넓은 식견과 공정한 마음은 일을 해내고 공을 이루기에 충분했을 것이니, 도를 배워서 사람을 사랑한 효과가 당시에 나타나는 것이 또 장차 어떠했겠는가.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 큰일을 할 수 있는 뜻을 만에 하나도 펴지 못했으니, 어찌 통곡하며 눈물 흘릴 일이 아니겠는가.
현일은 형제 중에서 셋째이고 나이도 많이 차이나지 않으며, 또 일찍이 형제 중에서 자기를 잘 알아주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어, 때로 실없고 어리석은 의론으로 속내까지 모두 드러내 말하여도 매번 기쁘게 들어주고 화를 내지 않았다. 임자년(1672, 현종13) 세수(歲首)에 현일이 간소한 술상을 양친께 올리고 형제들이 함께 지내며 종일토록 기쁘게 이야기하였는데, 마지막에 공이 한마디 경계해 주기를 “너는 재주는 있으나 이렇게 할 것인지 저렇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결정력이 부족하니, 이것이 단점이다. 너는 노력하기 바란다.” 하기에 현일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공경히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날이 1월 8일이니, 공이 돌아가시기 겨우 20일 전이다. 오호라, 이것이 영결하는 말이었던가. 붓을 잡으니 눈물이 떨어진다. 애통하고 애통하도다. 사자(嗣子) 의(檥)가 3월 26일 임신에 부(府)의 서쪽에 있는 인아리(仁雅里) 진향(震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려고 하기에, 삼가 세계(世系)와 행적을 편차하여 당세에 입언(立言)할 만한 군자에게 명(銘)을 청하니, 삼가 살펴주고 가감해 주기 바란다.
임자년(1672) 3월 2일 당제(堂弟) 현일은 삼가 쓴다.
[주]양공(梁公)이 …… 뜻 : 양공은 적인걸(狄仁傑)이 양국공(梁國公)에 추봉(追封)되었기 때문에 적인걸을 양공이라고 부른다. 적인걸이 병주도독부 법조(幷州都督府法曹)가 되었는데 그때 부친이 하양(河陽)의 별업(別業)으로 있었다. 적인걸이 병주로 부임하여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다가 백운(白雲)이 떠가는 것을 보고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부친이 계신 곳이 저 구름 밑이다.” 하고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다가 구름이 옮겨가자 이에 자리를 떴다. 그 후로 이 일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고사로 쓰이고 있다. 《舊唐書 卷88 狄仁傑列傳》
先兄將仕郞慶基殿參奉存齋先生行狀
本貫月城。中移載寧。
曾祖殷輔。彰信校尉忠武衛副司直。妣宜人金氏。宜人李氏。
祖涵。通訓大夫行宜寧縣監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妣淑人李氏。
父時成。承議郞。妣端人黃氏。
公諱徽逸。字翼文。姓李氏。其先曰謁平。爲新羅始祖佐命功臣。高麗時有諱禹偁。封載寧君。故爲今貫。自公六世而上。居咸安茅谷里。五世祖觀察使諱孟賢。以淸德顯望。被遇光廟。遂賜第於京師。高祖縣令諱璦。從叔父仲賢出宰寧海。仍受室于邑中大姓眞城白氏。子孫因家焉。初通訓公有四子。長時淸成均進士。次時亨早卒。次時明宣敎郞。明廟齋官。次時成承議郞。宣敎公凡再娶。有子七人。公其第二也。出爲季父承議公後。本生母張氏。永嘉名儒敬堂先生之女。以繼室歸于我家君宣敎公。以萬曆四十七年十月庚午。生公于安東府西金溪里第。幼而穎悟異於凡兒。纔數歲。隨母氏歸寧金溪。尙未能言。一日從外入門。端拱俯仰周旋。若延賓肅客之狀。敬堂公亟出視之。則有客在門矣。五六歲時。能誦五經要語。恪受閨訓。娓娓忘倦。孝友出於天性。伯氏嘗猝病危苦。母氏憂。亦憂。得美味。或分少啖之。則輒遜避不食曰。留與伯饌。嘗見王父通訓公灼艾。驚呼涕泣曰。爇身安得不痛。九歲能屬文。嘗作貓虎說。有曰。貓如虎。志不如虎。虎志大。貓志小。以故不如虎。又嘗題輿地圖。有黃河當中流之句。崔大諫晛一見嗟賞。以爲有經綸之志。又賦碧落詩曰。空中圓無坼。地在天空間。出語驚人。類如此。辛未夏。嬰痘方劇。年甫十三歲。母氏携負出。與之便坐。輒易向。母氏怪問之。卽開目省視曰。先妣祠宇在此。常時便旋必謹避云。嘗至金溪。從敬堂先生。得聞修身飭行之要。無極太極之說。旣歸。張先生又貽書告以大學格致誠正之方。孟子收心養性之旨。便忻然知所慕悅。日取易圖性理諸書。閉戶默對。人或非笑而不之輟。抄取聖賢諸言仁處。裒爲一帙。謂之求仁略。王父通訓公聞而異之。命賦讀易聯句。卽對曰。伏羲橫圖如戲畫。細思其理却無窮。原八爲根各八支。天下萬事在此中。通訓公大加歎賞。遂書孟子五倫說以畀之。自是慨然有求道之志。將欲往從敬堂門下。以卒其業。敬堂公尋下世。公時年僅十五。乃始發憤。篤專於誦習。欲求聖賢遺意於方冊。泛覽博觀。至忘寢食。尋以讀書過苦。病痞數年。乃悉屛去諸子百家書。獨取近思錄,心經,性理大全,易學啓蒙,朱子書節要,退溪先生文集等書。從容潛玩默究其旨。其於道理原頭。學問階級。固已領略曉會矣。每以蚤失依歸。不得盡傳其學爲恨。又嘗喟晩生遐裔。不得親見大人君子典刑儀範而有所師法焉。自旣冠。徧詣當世諸先達之門。若湖陽權公若梅園金公若鶴沙金公。皆嘗摳衣請益。各取其所長而師焉。於湖陽稱其傳經刻苦。於梅園稱其博洽溫雅。於鶴沙稱其淸修簡靜。然知存心以養性。窮天下事物之理。而不以精粗內外爲二致者。則發端於敬堂之門。而所自推廣者爲多。家世本居寧海之仁良里。歲在庚辰。宣敎公避地于泣嶺之西。去舊居七十里而遠。公旣出爲季父後。義不得隨往。乃扁其所居之堂曰望雲。以寓梁公太行之意。西原鄭公侙爲文以記其事。自是或月一至焉。或月再至。不避風雨寒暑。至輒留連數日。溫凊定省之外。雖雜細事務。無不躬親以盡其心。承事之暇。輒率諸弟。講論經史。或至夜分。旣又歸侍所天。所以朝夕左右者。無不曲盡。癸巳。故參判崔公惠吉出守寧海。上其行義於朝。孝宗大王將欲禮招而命之。會有尼之者。遂不果。例授慶基殿參奉。辭不赴。是歲。宣敎公又移于英陽縣北首比山中。去寧路益深險。公以獨專所後。不得復顧本生之恩爲大戚。間或挈家從之。歲辛丑。始卜居于府西楮谷。以便兩地省問。因結廬巖間。廣栽竹木。號以冥棲。讀書其間。又於谷口下流。得一佳處。名其流曰玉川名其潭曰雷澤。有時徜徉。方欲修文會友。講學論著。以大其業。亦有一二士友自遠來歸。或憑書疏質疑請益者。亦多有之。戊申冬。丁內艱。復歸于仁良舊第。喪致哀祭致敬。鄕人交口稱之。公久抱羸疾。至是增劇。以仁良近邑煩擾。不合於治病。己酉夏。遂奉几筵。舁還楮墅。其秋病稍間。輒取鄕人族子。敎告諄諄。終夕不倦。兄弟親戚。或以疾病羸悴。請姑謝遣。則答曰。彼來相從。何忍拒之。庚戌冬服闋。本生父母適自首比臨楮谷迎侍。甚喜朝夕奉養。左右無違志。羅列古今。以極其歡。承議公旣鰥居。恐其無聊不樂。極力招致賓客。夙夜娛侍。所以順適其意者。無所不用其至。家本淸寒。妻子不免飢色。至於供養之具賓客之奉。則未嘗以是而少懈。辛亥歲。適大侵。餓莩盈路。公痛悶傷惻。如己隱憂。將欲出捐家財。以濟顚連。且念饑饉之餘。必至挻變。其所長慮却顧。經營區畫者。實非常情所及。不幸天喪。未及有爲。以壬子正月二十八日。疾終于楮谷之廬舍。嗚呼。玄逸尙忍言哉。享年五十有四。公前娶朴氏。後娶金氏。俱無子女。以母弟玄逸之第二子檥爲後。親受詩禮之訓。庶幾有以成立者。孫男二人。女一人皆幼。初敬堂先生得厓,鶴所傳溪門心學之訣。自其云歿。微言遂絶。世之所謂學。不入於驚怪怳惚之域。則競於儀章度數之末。不復知窮理。以踐實近裏而爲己。所謂存心之訣。或幾乎泯滅而無傳矣。公以童子。幸及摳衣於敬堂之門。雖未及叩發要旨。得聞所傳之奧。賴其聰睿夙成。知所考據。卒能尋思玩繹。晩復有契於心。以爲心不存則無以爲養性窮理之本。故號其所居之室曰存齋。蚤夜其間。以自循省。以爲顧名思義之地。嘗曰。心不可把捉而存。唯敬是存之之法。然不曰以敬。而曰敬以直之。則聖賢開示之旨。可謂要切矣。又曰。學者常加工於本原之地。則操存益固察理愈精。根本自然盛大而其出無窮。於此有失。則所謂學者皆僞也。又嘗曰。學不可以不博。或不能隨事窮格以究衆理之會。而徑趨於約。則其弊必至於陋。始大玩於六經諸史百家之言。以致其博。而於四書。尤致精熟。若大學中庸。則經文章句之外。旁及或問小註。亦皆領略通貫。於詩反復諷詠。宛然得古人微意於言語文字之外。而知疊字散聲之協乎聲律。於易知生出次第之爲先天學。互變交易之爲後天學。而於河圖中五之數。實有發前人未發之蘊。於禮實始尊信文公家禮而尤謹喪祭。窮鄕末俗。未免傳習之陋。其所稟白敎戒更變者多。以至深衣幅巾之制。喪服柳車之式。亦皆考究精審以致於用。嘗曰。家禮遵用書儀。而節目固多疏略。朱子已言之矣。於是乃取儀禮士喪禮。反復硏究。盡其制度節文。使門人小子有所持循據守。近之鄕射飮酒之儀。遠之朝聘會同之禮。莫不耐煩理會。博盡註疏同異。於書旣皆有會於二帝三王心學之要政事之體。而下至律曆度數之詳。璣衡制作之妙。亦皆究極其微。曲盡其制。尤有感於洪範之書。以爲聖王修身經世之法。盡在於是。嘗曰。易經四聖而又有程朱傳義。發揮羽翼。無復餘蘊。至於範疇。蔡氏集傳。只釋義理。皇極內篇。但衍數明筮而已。此豈父師當日之遺意乎。況父師八條之敎。行於朝鮮。立我東方萬世之極。若使吾人有能發揮敷衍。以大其傳。則豈非曠世之奇事耶。於是乃欲蒐集論著。定其次第篇目俱存。不幸中罹疾苦。未及成說。手澤尙新。嗚呼惜哉。公資性豪邁。氣調開爽。早歲蓋嘗有笞兵朔野。爲國家修怨雪恥之志。究知山川形勢夷狄情狀。以至兵謀師律之要。亦皆考其要歸。措之可用。迨其晩節。益知內外輕重之分。深自斂藏。翛然自得於巖泉水竹之間。似若無意於當世。然或至憂時論事。慷慨激昂。使聽者竦然驚歎。嘗曰。吾用於世。材智無以踰人。然但少忮害媢疾之心。推此以待人。庶幾有濟乎。常患僻處偏邦。不得周旋師友之間。以資麗澤之益。嘗聚邑中子弟。課其句讀。而謹其唯諾。不以不如意。有所厭倦。嘉其小善而略其細過。其所以待人者。甚恕以忠。而推其所自。皆本之事親以誠故。自幼及長。一此不懈。至於推誠所天。曲全生恩。處人所難。而曾無間言。堂兄處士公嘗語人曰。此郞誠孝。古之閔子騫也。嘗於春月。欲得生魚。致饋本生親。使人候之水濱。値水方漲。空手而廻。忽有水鳥含致尺鱗於路左。人以爲誠孝所感。嘗曰。事親者當巧變。不可伸己而直遂。其所以承迎將順者。固非一端。然或時隨事論諫。十反無違。不苟以從親之令爲孝。事伯兄愛敬俱至。未嘗失色。遇諸弟。曲有恩意。然所以奬勵敎誨之者尤切。其待族姻。恩愛周至。或賙其窮乏。或勉其不及。聞有一善。喜動顏色。贊不容口。或有過失。必正色裁之。不少假借。然誠心素著。人皆化服。其接鄕隣待故舊。各盡其道。與鄕人處。言語鏗然。氣貌和易。終日油然。無以甚異於人。然及其遇事擔當。志專氣勇。不以少嫌有所避就。嘗曰。沈默固好。自非內省循理。其不墮於詭情匿志者鮮矣。胸懷洞然。不置畦畛。凡所以待人接物者。皆出於忠誠懇惻。非有內外表襮之異。故其終至使暴悍輸誠。猜嫌弭怨。聞之者欽慕。見之者悅服。若非資之近而得之厚者。何以及此。爲文章。不事雕飾。而渾浩圓融。自成一體。後生時嘗遊鄕校。爲擧子文。不費功力而中其程式。當時輩流皆自以爲不及。嘗一再赴試。深知俗學之壞人心術。遂絶意科擧之業。一以求道爲志。所著書俱未及成說。若洪範衍義,一元消長圖發揮。至他遺文若干卷藏于家。嗚呼。以公資質之美。蓋嘗親見有道。得聞近裏眞訣。而加之以勤學好問之誠。又如是。使其卒能周旋文獻之邦。得有師友切磋之益。以充其邁往不輟之志。而尊其所聞。行其所知。則其所以發明溪門心學之傳而接引後進。以幸來世者。固將不止於此。使之老壽通達。以行其志於世。則忠誠仁愛。足以尊主庇民。通識公心。足以幹事成務。其學道愛人之效。見於當時者。又將如何哉。不幸早世。使有爲之志。萬不一施。豈不可爲痛哭流涕耶。玄逸於兄弟行。第居三。年歲不至甚遠。又嘗辱許爲同氣中知己者。有時狂言戇論。到盡底裏。每蒙忻然聽納。不以爲忤。壬子歲首。玄逸以小酌進二親之前。兄弟俱在。竟日懽讌。最後公有一言相警曰。爾有才性。但少決定。恁地不恁地。此所短也。爾其勉之。玄逸起拜曰。敬聞命矣。實正月八日也。去公易簀纔二十日。嗚呼。此豈其訣語耶。援筆涕零。痛哉痛哉。嗣子檥將以三月二十六日壬申。謀窀穸之奉於府西仁雅里震向之原。謹次其世系行蹟。以請銘於當世立言之君子。伏惟幸垂察而筆削焉。謹狀。壬子三月二日。堂弟玄逸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