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산(坡平山)
요약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에 있는 산.
해발 496m이다. 파평산은 임진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파주시의 대표적인 산 가운데 하나이다. 동봉과 서봉이 마주하고 있으며, 서봉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하다. 동봉은 개방되어 있으며, 동봉의 남쪽은 바위절벽으로 되어 있다. 파평은 언덕과 평지로 이루어진 지형이라는 뜻으로 파주라는 이름이 파평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파주는 파평 윤씨의 고향이다. 파평산 정상에서 뻗어 나온 서북능선 내령 끝머리에 있는 용연이라는 연못에서 파평 윤씨의 시조인 윤신달이 태어났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용연에는 용인이 살고 있어 연못가가 불결해지면 뇌성이 진동하고 폭풍우가 친다고 전한다. 주변 관광지로는 파산서원과 파주 스피드파크 등이 있다.
파산서원(坡山書院)
문화재 지정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호
건립시기 : 1568년(선조 1)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로리
요약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에 있는 조선전기 성수침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1568년(선조 1) 백인걸(白仁傑)·이이(李珥) 등의 관료와 파주 일대 유생의 발의에 의하여 적성현감 성수침(成守琛, 1493년~ 1564년)을 제향하고, 유생의 장수처(藏修處)로 삼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중종·명종 때 도학과 청절(淸節)로서 이름이 높아 당시 기호사림의 대표적인 존재로 추앙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서원은 선조 초에 기호사림이 중심이 된 서인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수침의 아들 성혼(成渾, 1535~1598)이 동인(東人)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1650년(효종 1)에 비로소 파주 유생 백홍우(白弘祐) 등의 청액소(請額疏)를 계기로 사액을 받게 되었다.
1628년(인조 6) 성혼을 추가 제향하고, 1705년(숙종 31) 백인걸의 위패를 인근 자산서원(紫山書院)으로부터 옮겨와 추가 배향하였으며, 1785년(정조 9) 성수침의 동생 성수종(成守琮)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퇴락하여 현재는 사묘(祠廟)만 남아 있으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묘에는 성수침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성수종·백인걸·성혼을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성혼(成渾)
출생 : 1535(중종 30)
사망 : 1598(선조 31)
요약 : 해동십팔현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과 이이의 주기론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가 되었다. 20세에 한 살 아래의 이이와 도의의 벗이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을 만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에 임명되어 개성유수 이정형과 함께 일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유성룡·이정암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고 낙향했다.
목차
시무책
이기론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가 되었다(→ 성리학).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
아버지는 조광조의 문인인 수침(守琛)이다. 10세 때, 기묘사화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를 따라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다. 1551년(명종 6)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梁)의 딸과 결혼했다. 같은 해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는 응하지 않았고, 백인걸의 문하에 들어가 〈상서 尙書〉 등을 배웠다. 20세에 한 살 아래의 이이와 도의의 벗이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을 만났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내섬시첨정, 1583년 이조참판,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정철(鄭澈)에게 구원해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1591년 〈율곡집〉을 평정(評定)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에 임명되어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유성룡·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이에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듬해 파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시무책
성혼은 생애의 대부분을 병으로 고생하여 실무를 보지 못했으나 여러 차례 봉사를 올려 국가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1579년에 올린 〈기묘봉사〉에서는 마음을 비우고 선을 따르는 것이 어진 임금의 도리라고 역설했으며, 1581년에 올린 〈신사봉사〉에서는 고금의 치세와 난세의 원인을 진술하여 賢才 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역법·공법에서의 민폐 시정을 위해 혁폐도감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혁폐도감의 주요임무로 과중한 세금을 거두어들여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법을 버리고 민리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는 것을 들었다. 1590년에는 〈경인봉사〉를 올려 백성을 보호하고 탐관오리를 다스리는 방법을 밝혔다. 1592년 〈편의시무 便宜時務〉 9조를 올렸으며, 1594년에도 〈편의시무〉 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인정'의 기초를 닦고자 했던 그의 건의는 거의 채택되지 못했다.
이기론
이기일발설'로 체계화된 그의 성리학은 1572년 이이와 9차례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면서 사칠이기설을 논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성혼은 일찍이 이황을 사숙하면서 그의 '이기호발설'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주자가 〈중용〉의 서(序)에서 말한 "인심은 형기의 사(私)에서 발하고, 도심은 성명의 정(正)에서 발한다"라는 귀절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을 틀렸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라고 이이에게 물었다. 이이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비판하고 '기발'만을 인정하면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천리와 인욕 등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마음[心]의 본질이 가변적임을 들어 '기발이승일도설'을 전개했다. 이에 대하여 성혼은 이황의 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이의 견해를 절충하여 독자적인 이기설을 제시했다.
그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새롭게 해석하여 이와 기는 시간적으로 선후가 없으며, 동시에 공존하는 까닭에 같이 발한다는 이기일발설을 제시했다. 이기이원론에 대한 이이의 비판에 대해서는 존재론적으로는 이기가 혼륜하므로 분개할 수 없다고 보아 이이의 견해를 지지했으나, 현상적으로 발할 때는 주리와 주기로 분개된다고 보아 이황의 설에 따랐다. 이러한 이기론에 입각하여 사단과 칠정 역시 모두 이기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으나 발할 때는 주기와 주리로 분개한다고 보았으며, 사단칠정을 인심도심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 사단칠정은 성(性)에서 발하고 인심도심은 심(心)에서 발하므로 의미가 다르다고 보아 이황과 이이를 종합했다. 이로써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주기·절충의 3파로 나뉘어져 중국의 성리학을 뛰어넘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문인으로는 조헌(趙憲)·한교·황신·오윤겸(吳允謙)·강항 등이 있다. 죽은 뒤인 1602년(선조 35)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관직을 빼았겼으나, 1633년(인조 11) 복관사제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여산 죽림서원, 창녕 물계서원, 해주 소현서원, 함흥 운전서원, 파주 파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우계집〉·〈주문지결 朱門旨訣〉·〈위학지방도 爲學之方圖〉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이다.
파평 용연(坡平 龍淵)
위치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385-1
문화재 지정 : 파주시 향토유적 제10호(2002.12.21 지정)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이 태어난 곳으로 파평 윤씨의 발상지이며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다. 태고부터 지하수가 솟아나는 천연의 연못으로서 '윤씨 연못' 으로도 불리는 이 곳에는 전설이 있는데 신라 진성왕 7년(893년) 음력 8월 15일 운무가 자욱한 용연에 옥함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근처에 사는 윤온 할머니가 거두어 열어보니 옥동자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오색찬란한 깃털에 쌓여 있었으며 양 어깨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점이 있고 좌, 우 양 겨드랑이에는 81개의 비늘이 있으며 발바닥에는 북두칠성 형상인 7개의 흑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연못에는 여름철 희귀 식물인 노란 '개연꽃'이 자생하고 있으며 인근에 윤씨 관련 유적지가 많은데 파평산 정상에는 시조 윤신달이 말을 훈련하던 치마대가 있고 파평 윤씨 출신의 해동명장인 윤관 장군이 휴양과 시문을 즐기던 웅담리 상서대와 광탄면 분수리 윤관 장군 묘가 있다.
파주시 [ 파평산 & 파산서원 & 파평용연 ]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