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73
3월25일[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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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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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gd0tfd_s5g
[서울대교구 최진호 세례자 요한(청소년국 선택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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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은 하느님께 기쁘게 순명할 때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군가로부터 총애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냥 사랑이 아니라 ‘총애’(寵愛)! 총애받는다는 것은 적당히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각별히 사랑받는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총애로 인해 삶이 바뀝니다. 총애받게 되면 우울한 색조였던 나날이 순식간에 화사한 색조로 변화됩니다. 총애는 한 존재를 고무시키고 참 사랑에 눈뜨게 만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은혜롭게도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총애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녀의 소박함과 순수함, 그녀의 작음과 겸손함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런 덕행을 바탕으로 한 즉각적인 응답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마리아는 순명의 모델입니다. 그녀는 하느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는 가운데 자신의 미래를 그분 손에 온전히 내맡깁니다. 천사 가브리엘과 주고받던 대화의 결론은 ‘예!’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는 언제나 순명을 요구하십니다. 성조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 조차도 번제물로 바칠 정도로 순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순명으로 인한 것이었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 역시 순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기쁘게 순명할 때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하고 겸손 가득한 마리아의 순명에 대한 하느님의 상급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거처하시는 새로운 도읍 예루살렘 성전이 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끊임없이 살아계시는 계약의 궤로 재탄생합니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로운 초대,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하느님의 초대였지만, 기꺼이 응답한 마리아로 인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 32-33)
가브리엘 천사의 말은 지극히 간단한 선언같지만,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지닌 포스가 엄청납니다. 마치 작열하는 태양이나 산더미처럼 높은 파도같이 장엄합니다.
마리아의 적극적인 동의와 협조로 인해 이제부터는 또 다른 형태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왕국이 건설될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어, 그 시간을 끝없이 연장시키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건설될 왕국은 종래의 지상 왕국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영원한 왕국, 불멸의 왕국이며, 그 왕국의 장엄한 광채 앞에 지상의 왕권은 빛을 바랠 것입니다. 새롭게 왕좌에 좌정하실 왕은 만왕의 왕이 되실 것이며,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지니실 통치권은 한계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위대하고 장엄한 인류 구원 사업의 첫 출발점은 바로 마리아의 ‘Fiat’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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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DDSK5wGc6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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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은 어떤 연령대일까?>
오늘은 성모 영보 대축일입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나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님을 신성시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신부님의 어머니도 신자들이 공경합니다. 하물며 하느님을 낳으신 분을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어떤 인물을 낳은 어머니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공경하게 될까요? 자녀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유치원 교사가 해 준 이야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학급에 친구들 신발까지 정리해주며, 선생님 마음 아프니까 떠들지 말자고 친구들을 다독이는 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담해 본 결과 그 아이 어머니는 아기가 태중에 있을 때 신구약 성경을 두 번 통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날 때부터 부모님을 생각하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믿을 수 없었던 하나의 장면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본 것인데, 한 어머니가 아이들 몇 명과 함께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는 모습입니다. 아이가 대여섯 명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누나가 막내 아기를 안고 있었고 엄마는 거의 만삭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울지도 않고 어린아이들이 엄마처럼 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 태중에 아기가 있을 때부터 저렇게 성체조배를 하니 아이들에게도 그 영향이 가는구나!’였습니다. 저도 만약 결혼했다면, 아기 엄마에게 억지로라도 ‘하.사.시.’를 읽게 하고 매일 ‘성체조배’를 태교로 시켰을 것 같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산만한 아기들이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것이 부모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는 부모의 모든 것을 받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셨을까요?
하느님은 요셉 성인에게 천사를 보내시어 마리아와 혼인하고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거나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힘이 없으십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주저했다면, 헤로데에게 아기를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자연의 법칙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인간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어가는 과정을 ‘모범’으로 보여주셔야 하는 분이셨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하느님이셨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 성인이 성모 마리아를 신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끔찍한 일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처음부터 튼튼했거나 지혜가 충만한 것이 아니라 강해지고 충만해진 것입니다. 여기서 튼튼해진다거나, 충만해진다는 동사는 ‘미완료형’입니다. 미완료형은 지금도 반복해서 진행중인 상태라 완성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완성된 상태로 잉태되거나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과정’을 겪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이고 특별히 성모 마리아의 역할은 더 절대적입니다. 만약 성모 마리아가 죄에 조금이라도 물들었다면, 예수님도 죄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는 자녀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에서 죄에 물들지 않아야만 하는 성모님의 모델은 ‘파라오의 딸’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전형입니다. 당시 파라오라는 사탄과 같은 존재에 의해 모두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의 딸이지만, 파라오의 영향을 받지 않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은 파라오의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일강에 떠내려온 모세를 키웁니다. 그 공주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은 파라오의 영향 아래 있었기에 모세를 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도 그러한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이런 면에서 당신 자신도 죄에 물들면 안 되는 분이셨고,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미리 마련하셨듯이 성모님도 미리 마련되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1베드 1,20)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육체를 지니셔야 했다면,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그 육체를 주셔야 하는 성모 마리아도 미리 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마련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첫 피조물인 ‘지혜’를 성모 마리아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받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때 성령은 누구에게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아기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어떻게 오실까요? 성모 마리아의 인사를 통해 오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아기’처럼 우리가 하는 것에 따라 은총을 주시며 순종하십니다. 다만 우리 안에 죄가 있다면 그 죄 때문에 쉽게 돌아가실 수도 있는 약한 상태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계실지 궁금해합니다. 저는 분명 성모님께 그러하셨듯이 ‘아기 예수님’으로 계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성모님은 구원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른으로 우리 안에 사실 수는 없습니다. 어른은 나에게 영향을 받지 않지만, 예수님은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안에 사실 수 없습니다.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다만 살아계신다면 신적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이것을 깨닫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성모님을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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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세례명이 ‘가브리엘’입니다. 제가 정하지 않았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태어난 생일에 맞추어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9월에 태어난 큰 형은 미카엘, 12월에 태어난 작은 형은 사도 요한, 10월에 태어난 동생은 프란체스카로 정했습니다. 저는 5월에 태어났으니 마티아로 정했을 법 한데, 가브리엘로 정하였습니다. 부모님께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저는 ‘가브리엘’ 세례명이 좋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나자렛에 사는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전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시작되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으니, 저는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의 수호천사인 가브리엘 천사가 늘 함께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위대한 마리아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바다의 별, 우리의 어머니, 천상의 모후, 정의의 어머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의 바다.’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 시메온으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가야 했습니다. 어린 아들을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보았고,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기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 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위대한 마리아’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고통 중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는 겸손을 알게 하고, 겸손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합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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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마리아와 나눈 대화에서 다음 세 가지를 말합니다. ‘기뻐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성령께서 내려오실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든 인간의 내면 깊은 곳까지 닿아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세 가지를 받아들여 믿음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라 부르며,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몹시 놀랐지만, 먼저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곧이어 천사는 마리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천사의 말을 들어 보니 그 일이 주는 무게감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하였고,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매일미사』의 묵상 글을 써 달라는 전화를 받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능력도 없는 나를 왜 섭외하려고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로 성서 전공자들이 필진을 맡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두려움이 몰려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차피 하느님께서 하실 겁니다. 그러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대답이 나왔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는 지금까지도 묵상 글을 준비하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끊임없이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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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사람이 되시는 위대한 사실을 오늘 복음은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들어 올려진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나온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새로운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35절)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물 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아들이신 말씀을 잉태하시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낳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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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26-38)
1)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일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아홉 달 뒤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메시아 강생은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첫 인사말이 “기뻐하여라.”입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누리고 있는 ‘은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마리아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하고, ‘메시아 강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 마태오복음을 보면, 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 1,22-23)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는 말에는,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마리아하고만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하고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쪽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까이 하느님께 다가가신 분이고,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 사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라는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마리아를 선택하셨음을 알려 주는 말이기도 하고, 마리아 쪽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을, 즉 마리아의 신앙생활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주시는데, 사람들이 받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고 온 삶으로 잘 받는 사람이 그 은총을 제대로 받아서 누릴 수 있습니다.>
3) ‘메시아 강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각 개인의 입장에서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나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부활하셨습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받아 주셔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셔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4)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절망하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에 있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절)라는 천사의 말은, 원래는 동정녀의 성령 잉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과 구원받기를 바라는 희망 속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5)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저런 나쁜 놈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가족이든지, 친구든지, 누구든지 간에...... 정말로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죄인이라도,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그를 회개시켜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스스로 포기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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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과 함께 걷다>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님과 함께 걷다>
나를 향한
헤아릴 수 없는
님의 걸음걸음들
님을 향한
헤아릴 수 없는
나의 걸음걸음들
마침내 닿아서
가슴 벅찬 만남
나를 부르는
헤아릴 수 없는
님의 걸음걸음들
님을 따르는
헤아릴 수 없는
나의 걸음걸음들
오롯이 포개져
기쁨 가득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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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
이사야는 유다 왕국의 아하즈 왕에게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이사야 예언서 7장 11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하즈 왕은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이사야 예언서 7장 13절)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거절하였지만 예언자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왕도 당시의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표징의 내용도 ‘젊은 여인이 임마누엘’ 이름을 가진 아이를 임신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하즈는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당장 위험의 고비에서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아시리아라는 제국에게 도움을 청합니다.1) 그런데 그 응답에 이사야는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의 말씀을 그에게 전합니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야 예언서 7장 13절-14절)
이사야가 아하즈 왕실에 전했던 ‘젊은 여인이 아기를 가져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는 예언의 말씀이 조용한 나자렛 마을에 사는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 전해집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가 자유이지요. 하느님의 크신 뜻이 마리아의 자발적인 “예‘라는 대답에서 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가브리엘을 통한 하느님의 뜻이 시골처녀 마리아에게 전해지지만 그녀에게는 벅차기만 합니다.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복음 1장 34절)라고 천사에게 질문지요.
천사는 마리에게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복음 1장 35절-37절)
마리아는 유다 가문의 선왕 아하즈처럼 하느님의 뜻을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라고 대답합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그리스도는 구약의 ‘제물과 제사’를 ‘당신 자신을 단 한 번의 제사’로 바꾸시려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히브리서 10장 9절) 그래서 죄인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사로 모두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직의 권력을 가진 임금도 받아들이지 못한 하느님의 뜻을 나자렛의 한 여인의 순명으로 이 세상에 구원이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는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인 ‘영보’(領報)라는 말과 함께 예전에는 ‘성모영보’ 대축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용어가 성모님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이 뜻인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로 바뀌었습니다.
구약의 하와가 하느님의 뜻에 불순명으로(창세 3,6)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이 왔지만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에 순명의 한 마디 말씀(루카 복음 1장 38절)2)으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었고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리서 10장 7절)라는 서간의 말씀대로 성모님께서는 순명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1910-1997)이 ‘자신은 하느님 손에 들려 있는 몽당연필’이라고 비유한 표현이 떠오릅니다.
그냥 연필도 아니고 다 쓰고 나서 작아진 연필인 것이지요, 또 수녀님이 ‘인생은 낯선 여관집에서의 하루’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겠지요.
우리는 매일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려 합니다.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이기에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 식사 후에 설거지를 합니다. 저녁에도 또 먹을 것인데 하면서 그릇 씻는 것을 미루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릇이 비워져야 소중한 음식과 맑은 물을 담을 수 있듯이 우리자신을 온전히 비워야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욕심도 우리의 세속적인 것을 비울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신 수난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신 성모님을 사랑하며 우리도 그 표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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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하즈(기원전 736-716년경)는 유다왕국의 12대 왕으로 열여섯 해 동안 유다왕국을 다스린다. 그는 바알 우상숭배 빠져 신상을 만들고, 예루살렘의 힌놈 골짜기에서 향을 피우기도 한다. 그의 치세동안 에돔과 필리스티아인들이 유다 남부의 성읍들이 공격당하기도 한다. 또한 북부 이스라엘 왕 페카와 아람 임금 르친의 이 유다왕국으로 쳐들어 와서 위협을 받기도 한다.
그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보다 아시리아로 사신을 보내어 티글랏 필에세르 3세에게 도움을 받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유다를 위태롭게 만든다..(열왕기 하권 18장 10절-17절) 아하즈는 아시리아 눈치 보기에 바빠서 성전의 제단도 아시리아의 다마스쿠스의 것을 본 따서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고 원래 있던 청동제단은 북쪽으로 옮긴다. 그래서 열왕기 저자는 그에 대해서 ‘하느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이스라엘 임금들의 길을 따라 걸었따.’라고 기록하고 있다(열왕기 하권 16장 2절)
2)
성모님께서 천사의 말을 듣고 “말씀하신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게노이토 모이 카타 토 레마 수 γένοιτό μοι κατὰ τὸ ῥῆμά σου)’라는 말씀을 불가타 번역본에서 '당신의 말씀대로(피앗 미히 세꾼둠베르붐 뚜움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라고 번역했다. 교회는 성모님의 대답말씀 중에 ‘이루어 지소서’(피앗 fiat')으로 줄여 성모님의 하느님께 절대 순명하신 믿음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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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테이블 끝에 있는 소금 통을 건네줄 수 있니?”라고 말하자, 아들은 곧바로 “그럼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그냥 자기 식사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왜 소금 통을 주지 않니?”라고 다시 말했습니다.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소금 통을 건네줄 수 있는지 물어서 저는 줄 수 있다고 대답했죠. 소금 통을 달라고는 하지 않으셨잖아요.”
‘소금 통을 건네줄 수 있니?’라는 질문이 그냥 질문 자체로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서는 소금을 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말 그대로만 받아들여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 안에는 “사랑하라”는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실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입으로는 계속해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행동은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데만 급급하다면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듣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되지요. 그때 얼마나 놀라고 두려우셨을까요? 우선 하느님의 천사를 직접 보는 사람은 곧바로 죽는다는 당시의 생각도 떠올려졌을 테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기를 갖게 된다는 것도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게 됨을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모두 죽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로 큰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4)의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곧바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자기를 힘들게 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일에 함께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굳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더는 입으로만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또 남의 사랑만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커지면서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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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하느님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화한 사건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구원 사업의 시작일입니다.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이 육화하신 이 신비는 구원의 시작, 즉 파스카 신비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시작하셨지만, 그 안에 인간의 순명과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 구원 사업의 구성요소는 바로 순명과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순명과 믿음을 주님의 공생활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죽음 앞에서도 순명과 믿음을 하느님께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으로 가는 길의 열쇠이며 하늘나라의 열쇠입니다.
오늘은 이런 인간의 순명과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으며 늘 시험받는 것이 바로 순명과 믿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순명과 믿음이 흔들리거나 사라졌을 때 우리는 길을 잃은 양이 될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은 사람의 협력을 통해 구원하고자 하시며, 마리아라는 젊은 여성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동정녀 마리아 자신에게도 큰 은총이었습니다. 인류의 대표로써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이 내린 구원의 문을 인간에게 열었습니다. 믿음에 기초해 아버지 뜻에 오롯이 순종한 결과인 것입니다.
순명과 믿음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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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산다는 것은....
죽음 앞에 가 본 사람들이 대부분 후회하는 것은
’나로 살지 못했다. ‘라는 것이다.
도대체 나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 그저 욕망에 사로잡혀서 하고 싶은 것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 나로 사는 것인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동물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인가? 모두가 부러울 만큼 화려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마지막에 후회하는 것이 바로 ’나로 살지 못했다.‘ 이다.
어쩌면 삶이 다할 때까지 늘 자신에게 질문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로 살고 있는가? 사랑하고, 가슴 뛰고, 스스로 주도적 삶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는가? 말이다.
틀에 박히지 않고 온전한 그저 한 사람의 나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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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천사가 다시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루카. 1.30-32)
오늘은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나타나 예수님을 잉태한다는 소식을 전해 준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9개월 후에 우리는 예수 성탄 대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님을 기리고 조금이나마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오늘은 돌아가신 지 26년째 되는 어머니를 잠시 묵상합니다.
어머니는 6형제 중 막내인 나를 임신하셨을 때 아들 다섯을 이미 낳으셨고, 6,25 한국 전쟁을 겪으시며 세 살 된 둘째 아들을 잃으신 상실감을 안고 사셨습니다.
자식을 잃은 고통과 충격적인 한국 전쟁을 겪다가 1953년 7월 17일 휴전을 하면서 온 나라가 폐허가 된 사회적 심리적으로 힘든 가난한 시기에 남은 4명의 어린 형들을 키우면서 1959년 초에 나까지 임신하셨으니 어머니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어머니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셔야 했습니다.
그러한 불완전한 가정과 사회 환경 속에서도 어머니는 5명의 아들을 ‘큰 인물’로 키우고자 하는 염원을 안고 사셨습니다. 그 염원은 어머니가 아들 모두를 유아 세례 받게 하고, 결혼한 장남을 또다시 잃는 고통 중에도 남은 아들 네 명을 키우게 한 원천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녀에게 바라는 염원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머니들의 염원을 통해 가브리엘 천사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하느님은 어머니들을 통해 우리가 ‘큰 인물’이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라 불리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인이 ‘큰 인물’이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신 삶을 우리가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가 걷는 만큼 우리도 ‘큰 사람’이 됩니다.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크고 작은 공동체 그리고 국가와 인류를 위해 사는 만큼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당신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태몽을 나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면, 분명 가브리엘 천사가 전하신 메시지를 마음에 간직하며 사셨으리라 믿습니다.
어머니의 염원이 가브리엘 천사의 새로운 메시지처럼 마음에 울립니다. ‘신앙인으로서 너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따르는 큰 인물이 되어야 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 님의 고백을 조용히 새겨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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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복음 1장 28절)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함입니다.(루카 복음 1장 29절)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루카 복음 1장 34절)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라는 응답입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마리아의 깨달음은 세 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나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장 8절)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리서 10장 9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분의 희망 안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입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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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복음 1장 28절)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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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선물 인생을 삽시다>
-정주, 경청, 순종-
어제 처음 파스카의 선물같은 봄꽃 제비꽃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예전 써놨던 애송시가 생각나 나눕니다.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이하여 마리아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 축시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정주의 꽃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고 반갑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새삼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선물인생이 되면 참 좋겠는데 본의 아니게 짐이 되는 인생도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현실은 선물인생에서 점차 짐으로 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선물인생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선물인생이 되고자 부단한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물인생으로 살 수 있을까요?
성모님의 삶이 그 모범입니다. 성모님처럼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이 얼마나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참으로 눈밝으시고 겸손하신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리아 성모님을 방문하십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에 들어서자 마자 한 인사말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요즘 이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에 가장 많이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실제 실명을 넣어 써드리고 꼭 읽어보도록 합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고무적인 말씀인지요! 이 말씀에 몹시 놀란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합니다. 마리아 성모님께서 얼마나 깊은 내적 관상의 삶을 살고 있는지 하느님께서도 반하신 마리아입니다. 이어지는 천사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느님의 심중을 그대로 반영하는 가브리엘 천사의 격찬입니다. 우리는 정말 고귀한 품위의 참사람 하나 바로 마리아를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 주신 참 좋은 선물, 참 좋은 분, 마리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마리아 성모님처럼 살 수 있을지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정주의 삶입니다.
나자렛 고을에서 평생 정주의 삶을 사셨던 마리아 성모님, 그대로 우리 정주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를 닮았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정주의 삶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며 늘 새롭게 시작하는 정주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이 늘 새로운 정주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나자렛 시골 마을에서 마리아 성모님은 분명 이렇게 사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정주의 삶에 충실하면 언젠가 그 때가 옵니다. 겸손하시고 눈밝으신 주님은 때가 되자 당신 천사를 통해 마리아를 방문하시어 격찬의 인사말을 쏟아 놓으십니다. 마리아 성모님뿐 아니라 한결같은 정주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둘째, 경청의 삶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입니다. 침묵의 사랑, 침묵의 지혜입니다. 정주의 삶과 함께 가는 침묵의 삶입니다. 말없는 침묵이 아니라 주위에 활짝 열려 있는 깨어 있는 사랑의 침묵은 관상적 삶의 기초가 됩니다. 베네딕도 규칙에 맨먼저 나오는 말씀도 “들어라, 아들아!”이며 구약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것도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귀를 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집중하여 듣는 경청입니다. 새삼 경청도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천사와의 문답을 통해 마리아가 얼마나 주님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경청의 사람인지 단박 들어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도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말씀입니다만 마리아의 응답은 참 신중합니다. 얼마나 깊은 경청의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묻자 천사는 거침없이 하느님의 속내를 다 털어놓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마리아를 신뢰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셋째, 순종의 삶입니다.
믿음의 정주, 믿음의 경청, 믿음의 순종입니다. 정주의 훈련, 경청의 훈련, 순종의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즉각적인 순종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온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된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일방적으로. 강제적으로 구원역사를 펼치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응답을,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에 하느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고 고마워하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성모님을 한결같이 끝까지 아드님과 함께 하시면서 순종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시종여일 충실하셨습니다. 모전자전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을 그대로 닮은 제2독서 히브리서에서 아드님 예수님의 거듭된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의 공통적 삶의 의미는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 이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니에서 감동적 기도와 마지막 임종어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리고 요한복음의 십자가상에서 고백의 임종어입니다.
“다 이루었다!”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의 응답이 있었기에 비로소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다음 말씀이 실현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되어 또 하나의 임마누엘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이 우리 모두 정주의 삶, 경청의 삶, 순종의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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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인성과 신성의 교환 대축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사야의 예언, 곧 동정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 하느님, 메시아 하느님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진다는 얘기이고 구조입니다.
그러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오늘 히브리서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고,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어도
우리 인간의 동의 없이는 절대로 이루실 수 없는데
예수님도 마리아도 그 뜻에 동의하셨고 우리도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전례의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독서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천사의 알림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고 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간의 동의 없이는 하느님도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머리를 갸우뚱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럴 뜻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뜻을 존중하시어 당신 뜻을 꺾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뜻을 스스로 꺾고 당신 뜻을 스스로 따르도록 당신도 당신의 뜻을 능력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우리의 사랑의 응답을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응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아무리 오시려고 해도 오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마리아께서 주님 뜻에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리아에게 수태되신 것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마리아를 수태하신 것입니다.
두 분의 응답은 능동적인 수동태이고 위대한 수동태입니다. 사랑의 응답이었기에 이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이 있었기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성탄도 그렇고 마리아의 수태도 신성과 인성의 교환이고, 그래서 오늘 전례의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동정 마리아의 모태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구세주의 신비를 찬양하고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신성을 잉태함으로써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 신성의 참여에 초대받는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까지 하는 우리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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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1)
<선택되어진 도구!>
오늘 복음(루카1,26-28)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입니다. 오늘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신 분,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이 세상 안으로 파견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낳으실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게 하셔서, 그를 예수님을 낳을 도구로 선택하십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와 성령으로 말미암은 완전히 초자연적인 잉태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1,30-32)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5ㄱ.36-37)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Fiat voluntas tua!'
나자렛 처녀 마리아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이제 아홉 달 후에는 마리아의 태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도구로 선택되어진 존재라는 신분(신원)을 잊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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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루카 1, 31)
말씀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의 말씀이
내일의 탄생이
됩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멈출 수 없는
말씀의
생명력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말씀을 따라
말씀이
잉태됩니다.
잉태와
탄생으로
당신의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의 길이
우리 가운데
펼쳐집니다.
말씀을
깊이
체험합니다.
우리 삶의
근간이 되고
중심이 되는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임만이
하느님의 탄생을
이루는 신비가
됩니다.
말씀이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말씀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말씀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탄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탄생하시려는
하느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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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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