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watch?v=Ai94UyJX5gE
* 함께 감상해 주세요오!
처음 봤을 때처럼
01. 너에게 주고 싶은 세 가지
병아리 같아.
세상이 온통 노란색 옷을 입은 것 같다.
겨우내 흐릿했던 잔상들을 거두고 불을 켜두려는 것처럼.
그토록 바라던 스무 살.
네 잎의 노란 별꽃이 흔들리는 3월.
도톰한 이불이 포근하게 몸을 감싼다.
아, 일어나기 싫다.
나는 한참을 꾸물거렸다.
그런데 머리맡에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누구지?
나는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다.
[김나라~ - 010-XXXX-XXXX]
어? 낯익은 번호인데.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집이야? 010-XXXX-XXXX]
[보고싶어. 010-XXXX-XXXX]
[지금 와. 010-XXXX-XXXX]
연달아 온 메시지를 보니 누군지 알 수 있는 말투였다.
나는 쿵쾅거리는 마음을 안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나 잠깐 요 앞에 갔다 올게!”
진짜인가? 안 믿겨. 장난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노란색이 물든 바닥 위를 헐레벌떡 지나쳤다.
얼마쯤 뛰었을까.
고등학교 때 자주 가던 놀이터가 보였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순간,
“안녕, 오랜만이다~”
몇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나는 바보처럼 뻐끔거렸다.
“잘 지냈어?”
무어라 인사라도 건네야 하는데, 좀처럼 목소리가 쉽게 나오질 않았다.
꼭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보고 싶더라, 김나라.”
일기장에 적힌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표정을 하고서.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몇 년 전, 희성이를 처음 봤을 때처럼.
***
그렇잖아도 찝찝한 온도에 나조차 동요되어 점점 짜증이 솟구치고 있다.
9월. 여름의 일부이자 끝물, 더위가 막바지에 이르는 달이다. 덧붙여 내가 가장 증오하는 달이기도 하고.
“좋아?”
나는 가자미눈을 하고 희성이를 흘겨보았다.
“뭐.”
“좋냐고.”
그러거나 말거나 희성이는 휴대폰만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얄미워. 나는 희성이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한창 분위기 타고 있어.”
“바람둥이.”
“매력이 이런데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지~”
“우웩.”
속이 급히 거북해진 나는 토하는 시늉을 했다.
“남자 못 만나 본 거 나한테 풀지 마~”
“아니거든!”
“질투하냐?”
“미쳤나 봐.”
“김나라 질투하네~”
나는 뿔이 난 용처럼 콧김을 내뿜었다.
솔직하게 말을 할 수도 없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가슴께가 쓰렸다.
이유인즉슨 얼마 전에 희성이에게 생긴 여자친구 때문이었다.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철렁했는데, 막상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쓴웃음이 지어졌다.
희성이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안 해 안 해.”
“해도 상관없는데.”
“너까지 이러면 어떡하냐? 아 이놈의 인기 때문에 피곤해서 살 수가 없다 내가.”
“미쳤나 봐 진짜.”
자뻑 대마왕. 능글맞기는.
나는 혀를 내둘렀다.
한편으로는 속상하긴 했지만, 좋게 생각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원래 희성이랑 말 한마디도 못 했던 사이었으니까.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면 이만큼 친해질 줄도 몰랐는데. 참 신기하지.
“야 빨랑빨랑 좀 와. 거북이가 기어가냐?”
“네가 빠른 거거든.”
나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자 저만치 앞질러 가던 희성이가 순순히 보폭을 맞춰주었다.
어느덧 사방은 어스름해져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곳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걷다 보니 더욱 어두워졌고, 가로등 밑으로 우리의 그림자가 보였다.
새삼 다정한 그림자를 보니 문득 희성이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희성이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고등학교에서의 첫날이라 모두가 각자의 설렘을 안고 있었다.
새 친구들은 어떨까? 이제부터 공부를 많이 해야 할 텐데.
아이들은 입학식이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교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나 역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어디서 사는지, 어떤 중학교 출신인지 의례 그렇듯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언뜻 보니 싸움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입학 첫날부터 쌈박질이라니. 일동 모두가 소음의 출처로 몰려들었다.
삽시간에 주변은 소란스러워졌다.
‘너보다 약한 애 괴롭히는 게 재밌지.’
아이들 틈으로 꽤 키가 큰 남자애가 보였다.
흰 피부에 가늘게 찢어진 눈, 오똑한 콧날 아래로 대비대는 보조개를 지닌.
뭐야? 화내는 상황 아니야? 왜 웃으면서 화를 내? 저게 썩소라는 건가.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여자아이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를 주목했다.
‘어? 존X 재밌지?’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는 격양된 어조로 외쳤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명찰을 확인했다. 나와 같은 푸른색 명찰에는 김희성이라는 이름 석 자가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와 대치 중이었던 아이는 이 지역에서 악명이 높기로 소문이 난 남자애였다.
‘김희성 너 뭔데 이러냐? 얘가 네 애인이라도 되냐?’
‘어~ 우리 사귀는데. 오늘 얘랑 백일일 걸?’
싸움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애가 영우라는 장애우 학생을 괴롭혀서 벌어진 일인 듯했다.
영우는 휠체어에서 떨어진 채로 바닥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점차 사건 파악이 완료되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를 비난했다.
‘진짜 못됐다. 쟤 중학교 다닐 때도 저러더니.’
‘영우 불쌍해.’
‘아 씨.’
그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모두를 쏘아봤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니,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희성이는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어쩔래~ 나랑 싸울래, 아님 꺼질래?’
‘XX하네.’
저걸 선택지라고 준 건가. 저러다 진짜 치고박으면 어떡해.
나는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 애는 바닥에 가래침을 거칠게 뱉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뭘 봐 씨X!’
아이들은 지지 않고 야유했다.
여기서 더 싸워봤자 이득이 될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 애는 아이들을 밀치고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희성이는 곧장 영우를 휠체어로 앉혔다.
‘안 아프냐?’
‘난 괜찮아.’
‘멋진데~ 맷집 인정.’
‘……고마워.’
‘됐다~ 야, 근데 우리 사귀는 거 아냐. 알지? 난 여자 좋아해.’
그 일 이후론 학급 내에서 영우를 괴롭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희성이는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히어로 같은 존재가 되었다.
물론 여자아이들 대다수의 짝사랑 상대가 되기도 했고….
나 역시 첫인상이 강렬했던 희성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희성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퍽 오래되지 않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자니 벌써 집 근처에 다다랐다.
짧은 침묵을 깨고 희성이가 아사 직전인 얼굴로 말했다.
“김나라~ 나 배고파.”
“석식 안 먹었어?”
“한창 클 나이잖아~ 아 겁나 배고파. 야, 편의점 고?”
“고!”
우리는 편의점에 들어가 주섬주섬 먹거리를 쓸어 담았다.
꼬르륵. 밥 대신 간식이 먹고 싶었던 나는 제일 좋아하는 커피와 오징어 모양 과자를 집어 들었다.
희성이는 컵라면과 삼각김밥, 소시지와 도시락을 고르더니 더 먹을만한 것이 있는지 어슬렁댔다.
그 모습이 흡사 사냥감을 찾는 한 마리의 사냥개 같아서 입이 떡 벌어졌다.
“너 그거 다 먹을 수 있어?”
“이거 다 내 꺼 아닌데.”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럼 누구 건데?”
“여친 꺼~”
따끔. 누군가 바늘로 마음을 콕콕 쑤시는 것 같다.
“사랑꾼 납셨어, 아주.”
“김나라 질투 발동 걸린다, 또.”
“아니거든! 칭찬해 줘도 난리야!”
“넌 먹을 거 그게 다야?”
“끝인데. 왜?”
“와, 김나라 이제 내숭도 부리네.”
평온하던 내 이마에 힘줄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협박했다.
“아니거든. 죽을래?”
“우리 컨트리 많이 컸다~ 협박도 하고.”
“컨트리라 부르지 말랬다!”
우리는 으르렁거리면서 식품들을 올려놓았다.
“만 이천오백 원입니다.”
“아 잠시만요.”
나는 희성이의 차례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희성이가 내가 들고 있던 과자와 커피를 휙 낚아챘다.
“얘 것도 같이해 주세요.”
“어? 난 괜찮은데.”
“좋은 거 다 알아.”
“같이 해 드릴까요?”
사장님은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나까지 사줄 필요는 없는데.
당황스러워진 나는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내 힘으론 어림도 없었다.
희성이는 한쪽 눈을 느끼하게 찡긋해 보였다.
“넵. 다 같이요.”
나는 멋쩍은 듯이 말했다.
“고마워.”
“반하지 마라~”
“뭐래. 으, 왕자병.”
“미쳤냐? 잘해주는데 왕자병이라니.”
“어~ 잘 먹을게~”
“하여간에 우리 컨트리- 뭘 받아봤어야 알지.”
희성이는 언제 집어 왔는지 모를 초코 빵도 건넸다.
점심 메뉴가 영 석연치 않을 때 매점에서 종종 사 먹던 빵이었다.
나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엥.”
“영광인 줄 알아.”
“여자친구한테 다 주지.”
나는 일부러 짓궂게 구시렁댔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고맙기도 하고 낯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콩닥콩닥거렸다.
“하여튼 다들 복 받았어 아주.”
“참나.”
“어쭈, 말이 많다~”
“넵. 닥치고 잘 먹겠습니다.”
빵 먹을 때마다 살찐다고 밥 먹으라고 잔소리만 하더니, 기억하고 있었네.
나는 빵을 아껴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워낙 주변 사람을 잘 챙기는 희성이라 별다른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벌써 이만큼이나 가까워진 것을 생각하니 설레고,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편의점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사 온 것들을 청소기처럼 하나씩 해치우기 시작했다.
잘 먹는 희성이 모습을 보니 입가에 흐뭇한 엄마 미소가 그려졌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희성이 여자친구는 정말 좋겠다, 하는.
$[-.-]
안녕하세요! 낱말입니다.
이 소설은 2000년대 초에 유명했던
럽실소 <문제아> 라는 글을 리메이크하여 (좀 많이 변형했지만요!)
누구나 품고 있는 첫사랑의 기억을 한 번쯤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쓴 작품입니다.
서술이 일기장 형식으로 진행되며
작중 희성이 대사나 매력은 회차를 거듭할 수록 드러날 예정입니다.
재미있게 감상해 주시길 바라요~.*
- 창작 공간 : 아무튼 최종 (https://cafe.daum.net/2022.02.27)
첫댓글 즐감합니다
안녕하세요 산이형님 :-)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희성과 김나라의 고교시절 아름다운 청춘이야기의 출발선이 삼큼하게 느껴집니다^^~
안녕하세요 t산머루님 :-) 상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